이슬람의 이해_ 수니파와 시아파
모하메드가 632년6월8일 메디나에서 갑자기 죽었을 때 무슬림 사회는 커다란 지도력의 위기에 봉착했었다. 모하메드는 후계자 지명에 대해 어떤 지침도 남기지않았다. 모하메드가 마지막 예언자였으므로 새로운 지도자는 '예언자'라고 불릴 수 없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알라로부터 새로운 계시가 올 수 없었고, 무슬림은 코란과 하디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모하메드의 장례가 준비되던 때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슬람교가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므로 초기의 무슬림 사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간의 구분이 없었고, 각 지역의 세속 정부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메카에 있는 무슬림과 메디나에 있는 무슬림 간의 싸움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두 그룹 모두 자신들이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메카의 무슬림들은 아랍 부족장 회의 슈라(SHURA)에서 모하베드와 가장 친하고 가장 신뢰 받는 친구인 아브 바크르를 만장 일치로 선택했고, 그는 칼리팟 아술 알라(하나님의 사자의 후계자)라는 이름을 얻었고, 첫 번째 칼리프(632년~634년 재임)가 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지지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메디나의 무슬림들은 모하메드가 자신의 사위인 알리를 후계자로 남겼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모하메드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한 알리는 선거 과정을 통해 선출되었다. 알리와 그의 지지자들은 바크르의 후계자 임명에 반대하였고, 결국 이슬람교의 시아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시아파는 이슬람교가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신의 계시이므로 지도자가 종교적 권위를 가져야 된다라고 느꼈다.
수니파 이슬람은 코란이 최종적인 계시이고 더 이상 이에 첨부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 정통파로 인정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은 이맘이라고 부르는 종교지도자를 믿고, 그가 신의 계시를 더 받아 코란에 덧붙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결과 시아파 이슬람은 더욱 극단주의적이라고 여겨진다. 지도력의 문제는 모든 무슬림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무피, 알라위, 샤피, 하니피리, 이스마렐리스, 등등의 많은 분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모든 무슬림은 동일한 근본적인 가치관을 믿지만 이러한 가치관은 지역과 분파에 따라 많은 다른 관습과 의식에 의해 표현된다.
시아파는 ‘시아트 알리(SHIAT ALI)’의 줄임 말로써 알리를 추종하는 종파 집단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니파는 시아파가 이슬람 종파 내에서 분파를 이루어 떨어져 나감으로써 이슬람의 전통적 관습과 언행을 뜻하는 ‘수나(SUNNA)’를 따른다는 의미로 주류 집단 스스로를 수니파로 부른 데서 유래하였다.
시아파의 후계자인 알리가 추후 4대 칼리프에 선출되는 등 분파간 통합의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으나 그가 죽자 다툼은 다시 불거졌다. 알리의 첫 아들 하산의 갑작스런 죽음은 수니파의 독살로 전해졌으며 둘째 아들 후세인이 최후를 맞이한 카르발라 전투는 시아파에게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슬람 해의 시작은 무하람(1월)이라고 불리고 이는 거룩한 달이라는 뜻이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 달 알리의 아들이자 모하메드의 손자인 후세인과 후세인의 아들 카심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한 애도의 시간으로 지낸다. 무하람 월의 7일부터 10일까지 추모 의식을 치르는데 순례객들은 칼끝으로 자신의 몸을 난자하거나 채찍을 휘두르며 피를 뿌리는 끔찍한 행진을 거행한다. 이는 수니파의 살육으로부터 후계자를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원한의 확인이자 참회의 의식이다. 후세인은 죽음 직전 “명예로운 삶이 굴욕적인 삶보다 낫다”는 말을 남김으로써 훗날 이슬람 순교의 시원이 되었다. 수니파 무슬림 또한 이 의식을 거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칼로 치지는 않는다. 사이파 무슬림은 순교의 구속적인 성격을 더욱 강하게 믿는다.
시아파는 아랍의 이란 지역에 둥지를 튼다. 세계 이슬람교권 내에서 수니파는 약 90%를 차지하며 시아파는 10%에 지나지 않는다. 시아파는 이란에 가장 많이 분포하며 이라크와 오만, 예멘, 레바논, 바레인 등지로 퍼져 나갔다. 결국 이란과 이라크를 제외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이집트 등 아랍권의 다른 대규모 국가들에선 모두 수니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에서도 절대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수니파는 세계적으로도 넓게 퍼져 있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슬람 내에서의 종파간 갈등은 생소한 경우가 많다. 어느 종교나 내부 종파가 있기 마련이다. 이슬람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니파와 시아파로 대별 되는 양 종파 간에는 생각보다 그 골이 깊고 다툼이 크다. 세계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공존하는 이슬람 국가에서는 상호간의 충돌이 빈번한 실정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79년 왕정에 반대하는 시위의 빌미로 시아파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 자행되었으며 파키스탄과 레바논에서도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의 큰 테두리 속에서는 무슬림 형제로서의 높은 동류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범이슬람 내에서의 양 종파간 갈등이 이라크에 적용되었을 때는 더욱 현실성을 지닌다. 이라크에서는 인구의 약 65%가 시아파이며 나머지가 수니파인데 수니파는 또 쿠르드족(약 15%)과 아랍족(약 20%)으로 나뉘어 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 사담 후세인이 권력을 장악한 이래 20여 년간 소수의 아랍 수니파가 쿠르드족은 물론 다수의 시아파를 지배하는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후세인의 철권 통치는 같은 종파인 쿠르드족에 대해서도 잔혹하기 이를데 없어 1989년 독가스를 살포해 단 5분 만에 쿠르드족 마을 5천 여명의 주민을 학살한 반인륜적 사건은 후세인의 대표적 죄몫으로 회부되어 있는 상태이다. 뿐만아니라 걸프전으로 일시 후세인이 실각하자 봉기를 일으킨 시아파에 대해 다시 재기한 후세인이 군대를 몰고 와 대량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약 30만명에 달하는 시아파 무슬림이 살해, 암매장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대표적 사건이 말해 주듯이 이라크에서 후세인 철권 통치 기간에 이루어진 의도적인 타종족 타종파에 대한 탄압과 살인은 종파간 종족간 원한을 깊이 하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후세인 축출과 함께 진행된 이라크 신정부의 구성에 시아파가 대거 진출하게 되는 상황은 수니파로 하여금 잠재적 공포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현재 새로운 이라크의 헌법이 연방주의, 공화주의, 의회주의, 민주주의를 표명하고 있는 이상 이라크의 시아파가 후세인 시절의 독점을 누리기는 어려우며 실제로 시아파가 그런 요구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런 연유로 수니파의 시아파 성지 공격은 내전을 유발할 목적을 띤 수니파 과격 집단의 의도적 행동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단순히 수니파의 정치적 요구 수준을 높이려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지 공격 사태는 수니파 과격 집단이 시아파 수니파 간의 전통적 대립을 적극 활용 혹은 자극하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시아파 중심의 이라크에 대한 수용 여부보다도 현재 이라크의 안정 국면 전체를 파탄 내는 데에 더욱 관심이 있다.
미국에 보복을 가하거나 이라크를 후세인 시절로 되돌려 놓으려는 자들은 무슬림 내부의 종파적 갈등마저 수단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이라크의 평화를 위하여 미래에 대한 진정한 신뢰와 종파간 갈등을 초월하여 모든 이라크 인들이 폭력 확대를 자제하고 과격 집단의 노림수에 휘말리지 않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아델라이데(Adelaide) / 베토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