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 세력들이 성종 대에 이르러 중앙으로 진출하며 유향소 복립(세조 때에 이시애의 난으로 폐지), 향사례, 향음주례 실시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종대의 사림계 인사들의 향사례·향음주례 실행 건의는 당초 훈구대신들의 반대 내지는 소극적인 태도로 쉽게 채택되지 않았고, 유향소 복립 건의는 여러 차례의 조정 회의 끝에 5년을 소요하여 성종 19년(1488) 5월에서야 비로소 복립 결정을 보았습니다. 훈구계 대신들은 당초 부활된 유향소에서 두 의례를 시행한다면 경재소를 통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지방사회에 대한 기득권이 손상을 입을 것으로 우려하였던 것입니다. 신진의 젊은 인사들이 중앙정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러 동향을 보더라도 이런 경계심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림계의 주장도 집요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경재소가 존속하는 한 유향소제도의 부활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림계가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두 의례의 시행은 실제에서 유향소 부활과는 별개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떻든 다수 훈구대신들이 찬성쪽으로 의견을 바꿈으로써 이 논의는 결말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광조 등 기묘 사림들이 이러한 훈구 세력의 영향에 있는 유향소가 아니라 사마소(진사, 생원등으로 구성된 회의체로 단순한 사족회의체인 유향소보다 우월적 지위)를 통해 향촌 장악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답변 2)
고교 교과서나 수험서 등에서 훈구 세력을 단순 도식화하여 가르치다보니 정도전, 조준 등 조선왕조 개창 때의 훈구 공신과 세조의 집권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을 동일시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태조~세종 대의 훈구 세력은 관학파(집현전)적 전통 즉 성리학적 전통이 강합니다. 이에 비해 세조~중종 대의 이후 공신은 대부분 세조와 비슷하여 한명회, 홍윤성, 유자광 등 패도적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훈구라도 조선 초기의 성리학적 소양이 강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관학파 계열과 세조~중종 대의 공신계열(주로 대토지 소유)의 패도적 부패한 이미지의 훈구는 다르게 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