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성의 유래 삼국시대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姓이 안(安)씨로 세거하는 사람이 있었고, 금석문과 《고려사》 등에 나타나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그 기록들을 보면, 명확한 최초의 안씨들은 800년대 후반 신라 말, 고려 초에 경주부(慶州府)의 안강현(安康縣)에 살았던 안강(安康) 안씨, 900년을 전후한 중원부(中原府)에 살았던 충주(忠州) 안씨, 918년 고려개국을 전후한 황해도 동주(洞州,지금의 서흥)를 본관으로 한 동주(洞州) 안씨 등이 있었다. 순흥안씨는 고려 1100년대 중기에 가서야 기록이 나오고 있고, 광주, 죽산 안씨들은 고려 후기에 가서야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설사 고려 초부터 기록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기록이 한동안 지방 세력으로 머물러 찾지 못하고, 중앙 관계로의 진출은 위의 신라 말, 고려 초 안씨들에 비해 상당히 늦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죽산안씨 동원보(竹山安氏同源譜)』에 따르면, 휘 이경(李瓊) 일명 완(琬)은 중국 농서(隴西) 사람으로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2년 서기 807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7년 정해년에, 그 아우 황(璜)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개성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살고 있었는데, 이 때 광주(廣州) 사람들이 임금을 죽이고 배반하자, 이경(李瓊) 형제가 분발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다 한다. 이에 헌덕왕(憲德王)은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공로로, 형 경(瓊)은 안(安「편안안자」)씨 성을 사성(賜姓)하시어 죽산군(竹山君)에 봉 하시었고, 아우 황(璜)은 그대로 본성(本姓) 이 씨를 갖고 고성군(固城君)에 옮겨 봉 해졌다 고한다. 그 후 안경(安瓊)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지춘(枝春)이고, 차자는 엽춘(葉春)이오, 막내는 화춘(花春)이었다. 서기 864 신라 경문왕(景文王) 4년 갑신년에 외란(外亂)이 있었는데, 이때 형제 세 사람이 모두 나라를 평정한 공로가 있었다. 하여 왕은, 그대 어른들은 이미 사성(賜姓)하였으니, 그대들에게 나라를 편안히 하는 신하라 사명(賜名)을 하겠노라 하시고, 이름을 고쳐, 지춘은 방준(邦俊)이라 하여 죽산군(竹山君)에 봉하고, 엽춘은 방걸(邦傑)이라 하여 광주군(廣州君)에 봉해 졌으며, 화춘은 방협(邦俠)이라 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하여, 이때부터 안씨 성이 시작 되었다. 고 전하고 있다.
을유보(乙酉譜) 1765년 간행 전의록(傳疑錄) 을유보(乙酉譜)에 전하는 기록에, 중국 농서(隴西) 사람 이경(李瓊)의 아들 3형제 중 차남 엽춘(葉春)이 사성을 받아 광주군에 봉하여 안씨라 하였으니, 광주안씨(廣州安氏)는 신보 별편에 이를 시조(始祖) 대장군(大將軍) 방걸(邦傑)로, 2세 문하시중 국신(國信), 3세 문하시랑 여중(礪中), 4세 내사시랑 보평(輔平), 5세 첨의중찬 헌사(憲思), 6세 평장사 무성(武成), 7세 참지의사 경립(慶立), 8세 중서령 석창(石昌), 9세 내사령 필몽(弼夢), 10세 문하시중 홍미(弘美)를 계속하여 기록하였고, 우리 시조(始祖) 상호군공(上護軍公)을 홍미의 아우 항렬에 기록하여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始祖)라 주기(註記)하고, 이것을 순흥안씨가 판각(板刻)한 구보(舊譜)에서 얻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광주안씨는 큰집이고 순흥안씨는 작은 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만일 이들이 말하는 구보에 이러한 기록이 있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우리 순흥안씨는 1546년에 병오보를 창간하였고, 우리 순흥 보다 193년 뒤 1739년에 기미보를 처음 창간한 광주안씨 이였으며, 광주안씨는 또 별편으로 간행한 경인 밀양보 별록 등을 종합하여 1790년에 경술보를 간행하였고, 죽산안씨는 1744년에 초보를 발간하였다. 이렇게 우리 순흥 보다 늦게 수보한 광주안씨 사람들의 말을 믿기 어려운 것은, 어찌 우리 순흥안씨(順興安氏)는 193년이나 먼저 수보(修譜)할 때에 구보(舊譜)나 이러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의 시조(始祖) 호군공 휘 자미(子美) 선조님도 웃 선대(先代)가 계셨음은 틀림이 없으니, 시조 이전의 가첩(家牒)이 전하여 내려온 기록이 전혀 없어 한탄 할 노릇인데, 그 광주안씨(廣州安氏) 사람들의 말은 황당무계한 말로 그 기록 또한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규례(規例)에 불과하다. 이미 광주안씨가 발간한 문자가 간행되어 있으니, 백세에 의심되는 두려움이 있어 홀란을 일으키게 될까 염려되어, 이에 분별하여 전의록을 똑똑히 기록해서 밝히는 바이다. 하였다.
위에서 말한 죽산안씨 동원보나, 전의록에 기록한 내용이 이후 즉 우리 순흥안씨 구족보가 다시 발견될 때 까지는 어떻게 변명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주의 할 일은 우리 안씨가 중국 당나라에서 온 이 씨 성 이라든가, 또 우리나라에서 성을 사성 받은 안 씨라든가, 광주안씨 에서 분파 되었다든가, 하는 말 등 기록한 일 들을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 될 줄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환부역조(換父易祖)로써 우리 조상(祖上)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시조공(始祖公)의 탄생과 국내 시대상황 시조 호군공 휘 자미(子美)선조님의 탄생 연대에 대하여, 회헌실기 일부 문헌에 남송(南宋) 순희(淳熙) 9년, 1182 고려 명종 12 임인년에 탄생하신 기록이 있고, 우리 순흥안씨 후손들은 1170~1180년대에 시조공의 탄생 추정을 (근거는 우리 문중에 전해오는 회헌실기에 큰아들인 2세 추밀원부사 휘 영유(永儒)께서 1201 신종 4년 신유 생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태사공 휘 부(孚)는 1220 경진 생에, 4세 문성공 휘 향(珦)께서는 1243년 계묘 생으로, 5세 문순공 휘 우기(于器) 선조님은 1265년 을축 생으로 기록이 되어 있음으로 추정한다.) 하고 있다. 1188 명종 19년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김보당의 난, 민란과 반란이 거듭되어 국왕이 실권 없는 혼란의 시기이었으며, 1198년 신종 원년에 시조공이 등사(登仕)하시자 만적(최충헌의 사노비)의 난이 일어났으나 바로 실패하여 끝이 났으며, 1201 고려 신종 4 신유년에 아들 추밀공 휘 영유(永儒)님이 탄생하시고, 연이어 아들 형제를 탄생시킨 이후에 시조공은 1205년대 희종 조에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내하시고 졸 하시자, 후에 증손자 문성공 휘 향(珦)의 귀현(貴顯)으로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追封)되시었다.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창관(創貫) 유래 순흥안씨는 11세기 말엽부터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호군공 휘 자미(子美) 선조님이 최초로 흥주(지금의 순흥)에 정착하시어 아들 3형제를 탄생하시니 장남 추밀공 휘 영유(永儒)는 1파이고, 차남 별장공 휘 영린(永麟)은 2파이며 계자 교서공 영화(永和)는 3파로 형성되어 자미(子美)선조님을 시조(始祖)로 자손이 대대로 세거하시면서 호장(戶長)을 세습하고, 향리에서 사대부 가문으로 발전하고 번창 하여, 그 이후 후손들이 흥주인(興州人 • 安珦,⌈1파 후손 4세⌋), 순정군부인안씨(順政郡夫人安氏 • ⌈2파 후손 4세 成哲의 配⌋), 흥녕인(興寧人 • 安軸, ⌈3파 후손 6세⌋)이라고 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아, 한 자손이 흥주안씨, 순정안씨, 흥녕안씨, 등으로 호칭이 되었다고 며, 이에 근거로 고려초에는 순흥을 흥주로 개명하였고, 981년 성종 때에는 순정이라 불렀으며, 1009년대 현종은 안동부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순안현으로 이속시키고, 1171년대 명종은 감무를 두었다. 1275년대 충열왕의 태(胎)를 안치하여 흥녕 현령으로 고치고, 1314년대 충숙왕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흥주사로 승격시켰으며, 1344년대 충목왕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금의 순흥으로 고치고, 부로 승격시키었다. 이렇게 지명 변천으로 보아 순흥에 세거한 후손들이 1348년 이후부터 본관(本貫)을 순흥(順興)으로 개칭 창관(創貫)하여 순흥안씨(順興安氏)가 되였다. 고 한다.
순흥안씨 세계(世系) 신흥 사대부 가문으로 성장 내력 ◇ 추밀공 휘 영유님은 시조 호군공 휘 자미(子美)선조님의 장남으로 1201 고려 신종 4 신유년에 출생하시어 1220 고려 고종 7년 경진년 19살에 3세손 태사공 휘 부(孚)님을 낳으시고, 고종 12년 을유 24살에 등과하시어 추밀원부사를 하시고 1233 고종 20년 계사에 향년 33세로 졸하시니 후에 상호군에 추봉되시었다.
◇ 태사공 휘 부(孚)님은 1243 고종 30 계묘년 23살에 4세손 문성공 휘 향(珦)을 낳으시고, 다음해 1244 고종 31 갑진년 24살에 등과하시어 밀직부사 판도판서하시고 졸하시니 후에 수 태사 문하시중에 추봉되시었다.
◇ 문성공 휘 향(珦)께서는 1260 원종 원년 경신 18살에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시어 도첨의 중찬 수문전태학사하시고 1265 원종 6 을축년 23살에 5세손 문순공 휘 우기(于器)님을 낳으시고, 순흥에서 세거하시다 서울 명륜동으로 본제를 옮기신 후, 높으신 여러 관직을 거쳐, 경기도 개성군에 이거하시어 충열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을 하시고, 1306 충열왕 32 병오년에 향년 64세에 졸하시니, 묘는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대덕산 자좌에 안장하니, 이는 충렬왕이 대덕산을 하사하시였기 때문이다. 후에 순평군에 봉하시고, 문묘에 종사 하였다.
◇ 문순공 휘 우기(于器)님은 1282 충열왕 8년 임오 18살에 등과하시어 누차 국자전주 우승지를 하시고, 경기도 파주군으로 이거 하시어 1290년 충열왕 16 경인년 25살에 6세손 문숙공 휘 목(牧)을 낳으시고, 1329 충숙왕 16 기사년에 졸하시니 향년 65세. 유명 박장하고 순흥군에 봉하시다.
◇ 문숙공 휘 목(牧)님은 파주에서 성장하시어 1309 충선왕 원년 기유 19살에 7세손 문혜공 휘 원숭(元崇)을 낳으시고, 파주에 수 만평의 농장을 개간하시어 농막을 지으시고, 1315 충숙왕 2 을묘년 25살 때에 등과하여 정당문학 진현관 대제학을 하시고 1360 공민왕 9 경자년에 향년 71세에 졸하시니 순흥군에 봉하시었다.
◇ 문혜공 휘 원숭(元崇)님은 1332충숙왕 원년 임신 23살에 8세손 경질공 휘 원(瑗)을 낳으시고, 1340 충혜왕 2 신사년 31살 때에 등과하시어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을 하시고 졸하시니 순성군에 봉하시다.
◇ 경질공 휘 원(瑗)님은 1353 공민왕 2 계사년 21살에 등과하시어 보 한림원을 역임하시며, 파주의 농막에서 1355 공민왕 4 을미년 23살에 9세손 판서공 휘 종약(從約)을 낳으시고 봉익대부 공조전서를 역임하시고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지내시고 1411태종 11 신묘년에 졸하시니 향년 79세라 순성군에 봉하시었다.
◇ 판서공 휘 종약(從約)님은 파주 농막에서 성장하시어, 서울의 주자동으로 이거하시어 1382 우왕 8 임술년 27세에 10세손 참찬공 휘 구(玖)를 낳으시고, 1388 우왕 14 무진년 33세에 등과하시어 정헌대부 이조판서를 역임하시고, 여러 관직을 거쳐 해주목사를 끝으로 역임하시고 1424 세종 6 갑진년에 향년 70세로 졸하시니 이조판서에 추증이 되시었다.
◇ 참찬공 파조 휘 구(玖)님은 시조이하 10세인데 순흥안씨(順興安氏) 직계(直系) 종손(宗孫)으로 시조 (護軍公 諱 子美)님의 9대손자 이시고, 4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6대손자이시며, 경기도 파주의 농막(농장)에 세거하신 판서공(判書公 諱 從約)의 장남으로 1382 우왕 8 임술년에 서울의 주자동 옛 집에서 출생하시어 학문을 익히시니 머리가 총명하시고 영특하시어 일찍이 학업을 이루시고 성장하여 전주이씨와 혼인하시어, 1410 태종 10 경인년 28살에 아들 찬성공 휘 지귀(知歸)를 낳으시었으며, 1417 태종 17 정유년 35살에 진사시험에 장원하시고 경회루 친시문과에도 등과하시어 한림원 시강원필선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통정대부 판 군자감사에 오르시었으며, 관직에 부임하시었을 때, 경기도 광주군 돌마방 율리(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율동)로 분가하시어 큰 안골에 세거하시면서 수 만평의 농장을 개간하시어, 수 십 명의 노비를 거닐고 경작을 하시면서 자녀들을 이곳에서 성장시키시어 분가를 시키시고, 1441 세종 23 신유년에 향년 60세로 졸하시니, 아들 찬성공 휘 지귀(知歸)의 귀현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 받으시고, 장지는 지금의 분당구 율동 영장산 남쪽 간좌 곤향에 안장하여 모시었고, 또 후에 손자 판서공 휘 침(琛)이 귀하게 되어 가정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가증되시었다. 슬하에 자녀는 2남 4녀 하니 장남 찬성공 휘 지귀(知歸)는 대사성이고, 차남 전서공 휘 지석(知碩)은 공조전서이며, 장녀사위는 하양인 목사 허인(許認)이고, 차녀사위는 우계인 직장 이경창(李景昌)이며, 3녀사위는 창녕인 성문치(成文致)이요, 4녀사위는 남양인 남성군에 봉해진 홍석(洪錫)이시다.
◇ 찬성공 휘 지귀(知歸)님은 1432 세종 14 임자년 22살에 등과하시어 예문관 검열을 하시고, 돌마방 율리에서 기거하시며 1437 세종 19 정사년 27살에 아들 참판공 휘 호(瑚)를 낳으시고, 계속 4남 3녀를 득하시었으며, 여러 관직을 지내시고 전주부윤을 역임하시다가 1463 세조 8 계미년에 54세를 일기로 졸하시니 슬하에 아들이 5형제이니 장남 호(瑚)는 참판이시고 차남 선(璿)은 부정이시며, 3남 침(琛)은 판서이오, 4남 종(琮)은 군수이시고, 5남 기(璣)는 전적이시며, 장녀는 상주인 현령 김수억(金守億)에 출가하시고, 차녀는 남원인 부정 양자첨(楊子瞻)에 출가하였으며, 3녀는 전의인 이순형(李順亨)에게 출가하시었다. 아들 3남 휘 침(琛)의 귀현으로 가선대부 행 성균관 대사성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이사에 추증되시었다.
◇ 참판공 휘 호(瑚)님은 부모님 슬하에서 1459 세조 4 기묘년 22살에 상상에 올라 서울을 왕래하시며 기거하시던 진사시절에, 1460년 율리의 집안일을 대리하는 여자노비 모을개가 농장 관리문서를 가지고 남편과 함께 1436년 (그때당시 24년전) 가족 4명을 데리고 영광으로 도망친 노비를(추노) 찾는데 노력을 하시고, 1463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3년 상을 마치시고, 1466 병술년 29살에 등과하시여 역 검상 부학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공조참판을 하시었다. 아들 후사가 없이 1503 연산군 9 계해년에 향년 67세에 졸하시니 동생 판서공 휘 침(琛)의 차남 20살인 조카 좌랑공 처선(處善)을 입적 승계하시었다.
◇ 좌랑공 휘 처선(處善)님은 1472 성종 3 임진년에 생부 판서공 휘 침(琛)의 차남으로 출생하시어 1494 성종 25 갑인년 22살에 아들 현감공 정(珽)을 낳으시고 이듬해 계사년 23살에 등과하시어 문과 좌랑에 오르시었으나, 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 여러 관직이 있었을 것이나 가문이 모두 화를 입어 전하여 온 기록이 없다.
◇ 현감공 휘 정(珽)님은 1519 중종 14 기묘년 25세살에 현량과에 급제하시어 예문관 검열을 역임하며 1522 중종 17 임오년 28살에 장남 광국(光國)을 낳으시고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시다 기묘사화 여파로 은둔하며 아들 4형제를 뒤이어 낳으시었으나 자손들 모두 손자를 낳지 못하고 절손되어 무후하다.
◇ 15세 휘 광국(光國)은 순흥안씨 대종손으로 1522 중종 17 임오년에 현감공 휘 정(珽)의 장남으로 탄생하여 선공감판관(繕工監判官)을 역임하였다. 자녀는 4녀하여 아들을 낳지 못함에 무후하여 순흥안씨 대종가 맥이 끊기었다.
참찬공 직계 분파 세거 유래 참찬공파 파조 10세 휘 구(玖)선조님은 판서공 휘 종약(從約)의 장남으로 서울의 주자동 옛 집에서 1382 우왕 8 임술년에 출생하시어 혼인 하신 뒤 경기도 광주군 돌마방 율리에 분가하여 세거하시고, 35살에 등과하시어 한림원을 첫 벼슬로 여러 높은 관직을 거쳐 1441 세종 23년 6월 26일에 향년 60세로 졸하시었다. 슬하에 자녀는 2남 4녀하니 장남 지귀(知歸)는 대사성이고, 차남 지석(知碩)은 전서이며, 사위는 하양인 목사 허인과, 우계인 직장 이경창, 창녕인 성문치, 남양인 남성군 홍석이다. 장남 지귀(知歸)와 손자 침(琛)의 귀현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시었으며, 가정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가증을 받으시었다.
찬성공 휘 지귀(知歸)는 참찬공 휘 구(玖)의 장남으로 1410 태종 10 경인년에 한양의 주자동 옛 집에서 출생하시어 유년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경기도 광주군 돌마방 율리에 분가하여 이거하신 뒤 영특한 재주가 있어 아버지 휘 구(玖)께서 매우 사랑하시며 우리 집안은 충효와 청렴 정직함을 전해오고 있는데, 우리 가문의 명성을 높일 자가 이 아이일 것이라 하시었다. 장성하여 학문에 경전과 자사를 탐구하시고, 주자의 저서를 탐독하시어, 1432 세종 14 임자년 22세살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성균관에 올라 태상주부에 보직되시고, 예문관검열이 되시었다가 수찬과 교리로 이직하시고, 필선과 보덕에 제수되시니, 당대의 뛰어난 선임이었다. 검상 사인 직학과 경연검토관을 겸직 하시였으니, 상께서 허심탄회하게 경청하시고 정직한 신하의 기풍이 있다, 하시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 겸 경연 춘추관에 제수되시고, 세자이사가 되신 후에, 후진 양성에 힘을 쓰시었다. 전주부윤으로 명을 내시니 명을 받아 부임하시고, 청렴과 청백하신 명망과 고상한 지조가 있어 상하의 칭송을 많이 받고 계시었는데, 1463 세조 8 계미년에 병고로 54세를 일기로 졸하시었다. 아들 판서공 휘 침(琛)의 귀현으로 가선대부 행 성균관 대사성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이사에 추증되시었다.
평안도 안주 순흥안씨 세거 입향 유래 전서공 휘 지석(知碩)은 참찬공 휘 구(玖)의 차남으로 1432 세종 14 임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다음해 계축년에 전시 문과에 급제하시어 가선대부 공조전서를 역임하시었다. 수양대군이 단종임금님을 폐위시키고, 수양대군(세조)이 즉위하여 단종임금의 충신들 신하이었던 사육신을 살신성인하던 때에, 공도 사육신과 동류라 하여 평안도 안주로 귀양 유배되어,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사실이 안주읍지에 기록이 되어있다. 아들 현감(縣監) 위(位)와 손자인 사직(司直) 종선(終善)이 공의 유배지역에서 우거(寓居)하였으며 병란을 격어 선고(전서공 휘 지석)의 묘를 실전하니 한스러운 일이며, 이곳에서 자손들이 대대손손 세거하여 자손이 번성한데, 6•25 한국전쟁으로 남북이 가로막혀 통행이 불가함이 아쉬웁다. 북한에 우리 참찬공 후손들이 왕성하고 있으며, 6•25 전쟁때 참찬공 휘 구(玖)의 차남 전서공 후손이 일부 월남하여 서울 근교에서 우거하며 번성함이 퍽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경기도 광주 돌마방 순흥안씨 세거 유래 부정공 휘 선(璿)은 1441 세종 23 신유년에 찬성공 휘 지귀(知歸) 선조님의 차남으로 출생하시어 참찬공파 파조 휘 구(玖)선조님이 돌마방 율리로 분가하신 이래 부모님 슬하에서 기거하시며, 1462 세조 7 임오년 21살에 등과하시어 상상에 오르고 부정을 역임하시었다. 평안북도로 이거하시어, 아들은 형제를 두시었으니 장남은 부사공 휘 처직(處直)이고, 차남은 감역공 휘 처관(處寬)인데, 형제 모두 아들이 없어 절손이 되어 후사가 무후하다.
판서공 휘 침(琛)선조님은 1445 세종 27 을축년에 찬성공 휘 지귀(知歸)선조님의 3남으로 출생하시어, 율리 부모님 슬하에서 기거하시며, 1462 세조 7 임오년 18살에 중형 휘 선(璿)과 함께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을 하시고, 1466 세조 11 병술년 22살에 백형 휘 호(瑚)와 함께 등과 하시어, 공조판서를 하시고 예문관대제학을 하시며,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동지사를 겸하시고 지 돈녕부사가 되시었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워 언제나 조실부모한 것을 슬퍼하시었으며 형을 아버지처럼 섬기시고, 조카를 자식처럼 보살피시었으며, 의지 할 데 없는 친족을 모두 가숙에 모아 교육하는데 방도가 있었다. 1498 연산군 4 무오년 53살 때에 막내 동생 47살인 전적공 휘 기(璣)가 서울의 주자동 옛 집에서 기거하시다 졸하시니, 6살난 어린조카 처순(處順)을 광주군 돌마방 율리 자택으로 데려와 키우시며 공부를 가르치시고, 성장하도록 하심에 친자식보다 더 극진하시였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총명하시고 영특하시어 재주가 있으므로 가문에 훌륭한 인재를 키우시었다고, 하시었으며. 1515 중종 10 을해년 2월 삭일에 향년 71세로 졸하시었으니, 장지는 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 28번지 영장산 선영에 모시었다. 슬하에 자녀는 4남 2녀를 두시었으니, 장남 처명(處明)은 안성군수이고, 차남 처선(處善)은 병조좌랑이신데, 공(公)의 장형(長兄) 휘 호(瑚)에 입양 입계하시고, 3남 처성(處誠)은 군자 감정이요, 4남 처신(處身)은 빙고별제이시며 당대가 훌륭한 가문이었는데, 가신들의 밀고로 기묘사화 때 안문이 연루되어 뿔뿔이 헤어지고, 대대로 많은 화를 입어 흩어져 기거하였으며, 4대 까지 자손이 번성하였으나, 그 후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여 절손이 되고 후사가 무후하다.
황해도 연백 입향조 군수공 휘 종(琮)은 찬성공 휘 지귀(知歸) 선조님의 4남으로 1447 세종 29 정묘년에 출생하시어 1480 중종 11경자 33살에 진사가 되시고, 1502 연산군 8 임술년 55살에 임실현감이 되시고, 1504 연산군 10 갑자년 57살에 통천군수로 명을 받아 부임하시었다. 1510년대 황해도 연백으로 이거하시여 입향조가 되시고, 슬하에 자녀는 2남 3녀 하였으니, 장남 처중(處中)은 생원이고 참봉이며, 차남 처화(處和)는 진사가 되고 참봉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아니 하니, 1519년 송사련 등 기묘사화 가신무리들에게 무고되어 맹산에 유배되시었다.
전라북도 남원에 입향하신 낙남선조 전적공 휘 기(璣)님은 찬성공 휘 지귀(知歸) 선조님의 5남으로 1451 문종 2 신미년 3월 12일 출생으로 1472 성종 3 임진년 21살에 생원이 되시고, 1495 연산군 원년 을묘년 44살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승훈랑이 되시고, 성균관 전적 겸 남학교수에 오르시었다. 조정에 명을 받아 암(庵)자를 철거하여 성내에서 몰아내니 공경의 지위를 크게 기약하시었는데, 관직에 오르신지 2년 만에 병고로 1498 연산군 4 무오년에 47세를 일기로 서울의 주자동 자택에서 졸하시었다. 그해 9월 전적공 선조님의 부인 조양임씨 할머니는 아들 5형제를 거닐고 남편의 상여를 친가에서 가까운 남원의 흑성산 (지금의 남원시 송동면 백평리)에 운구하시어 장례를 지내 안장하시고, 이어 조양임씨 할머니께서 법도에 따라 가문을 지키시고, 자녀들을 데리고 전북 남원시 송동면 백평리에서 기거하시니 최초 낙남 선조 가문이 되시었다. 후에 할머니 조양임씨는 막내아들 사제공 휘 처순(處順)을 따라 김안방(金岸坊) 지금의 금지면 택내리 내기(안터)로 이거하시었다.
전라남도 곡성 입향조 현감공 휘 처경(處經)은 낙남선조 전적공 휘 기(璣)의 장남이신데, 손자 휘 광업(光業)이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로 이거하시어 자손이 대대번성하시니 곡성 입향조가 되시다. 1521 중종 16 신사 출생으로 지극한 행실과 독실한 학문이 세상에 모범이 되므로 선교랑상의원별좌에 추천되시었으나 나가시지 않으시었다.
평안북도 용천 입향조 생원공 휘 처권(處權)은 낙남선조 전적공 휘 기(璣)님의 차남으로 출생하시어 장성 후 생원을 하고 계시는데, 1519년 기묘사화 때 간신들의 밀고로 안문이 대대로 화를 입자 피신하여, 평안북도 용천으로 은둔하시어 귀향하시지 못하시고, 그곳에서 기거하시는 것이 대대로 후손이 번성하시어 입향조가 되시었는데, 1950. 6. 25. 6•25동란으로 남북이 가로 막혀 소식이 단절되고, 생사가 불분명하다.
전라북도 임실 입향조 진사공 휘 처상(處常)은 낙남선조 전적공 휘 기(璣)님의 3남으로 출생하시어 학문을 닦고 진사벼슬을 하고 계시는데, 기묘사화 때 가문이 화를 입자, 화를 면하기 위하여, 아들을 데리고 임실읍 두만리에서 은둔하여 기거하시는 것이, 자손이 번성하시어 입향조가 되시었다.
전라남도 순천 입향조 직장공 휘 처건(處健)은 낙남선조 전적공 휘 기(璣)님의 4남으로 출생하시어 학문을 닦으시고, 교우가 두터우시어, 음직으로 무공랑사온서직장을 하시는데, 기묘사화 때 가신들의 밀고로 대대로 가문이 화를 입으니, 순천으로 낙향하시어 은둔하시고 기거하시니, 자손이 번성하고, 당금이 풀리자 일부 후손이 남원으로 귀향하여 보절면에서 세거를 이루었다.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입향조 사제공 휘 처순(處順)님은 낙남선조 전적공 휘 기(璣)님의 5남으로 1492 성종 23 임자년에 출생하시어, 자는 순지(順之)이고 호는 사제당(思齊堂)이라, 6살 되시던 해 1498 연산군 4 무오년에 아버지 전적공 휘 기(璣)가 47세를 일기로 졸하시자, 경기도 광주군 돌마방 율리에 기거하신 중 숙부(仲叔父) 판서공 휘 침(琛)선조님이 막내조카 사제공 휘 처순(處順)을 데려다 키우시고 공부를 시키니, 어려서부터 머리가 영특하고 재주가 있어 후에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중 숙부님은 믿었다. 1513 중종 8 계유년 22살에 진사를 하시고 다음해 1514 중종 9 갑술년 23살에 문과 급제 하시어 권지승문원 정자를 하시고, 1515년 을해 24살 되시던 겨울에 부령한씨 홍의 따님과 혼인을 하시고, 1516 병자년 25살 봄에 검열이 되시었고, 가을에 홍문관으로 뽑혀 정자가 되시어, 경연전적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하시었다. 1517 정축년 26살 가을에 저작으로 승진하시었으며, 곧 바로 박사로 전임하시니 경연과 춘추관의 벼슬을 겸직하시었다. 이때 부인 부령한씨는 만삭이었었는데, 어머니 조양임씨가 노화로 시골 남원에서 기거하시고 계시니, 어머니를 봉양하실 목적으로 상께 사직을 청하시고, 곧 바로 가족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김안방(金岸坊) 지금의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내기(안터)마을에 입주하신 것이 입향조가 되시었다. 중종임금님은 공의 사직을 불허하시고, 곧 바로 외직으로 1518 무인년 27살 되시던 봄에 구례현감에 제수하시어 춘추관 기사관직을 그대로 겸직 시키시었다. 택내리에 이거하신 후 부인 부령한씨는 몸을 풀어 아들 죽암공 휘 전(瑑)을 탄생시키시었다. 그 이듬 해 1519 기묘년에 송사련 등 가신들의 밀고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동료 충신 조정암, 김충암 등 제현들이 유배되시고, 사약이 내려지며 금고 되오니, 사제공 선조님은 본직을 사임하시고, 고향 남원 택내리 안터 마을에 돌아오셔서, 경전에서 격어를 발췌하시어 사제편 상하를 만드시었다. 1533 중종 28 계사년 42살에 당금이 차츰 풀리자, 중종임금님이 사제선조님을 다시 불러 성균학관에 제수하시고, 다음해 갑오년 43살 봄에 전적이 되시고, 얼마 후 양현고 주부로 옮기시었다가 마침내 봉상시 판관이 되시니, 품계가 승훈 대부 이었다. 이해 겨울 11월에 병고로 서울의 주자동 옛 집(직장근무 관계로 서울거주)에서 43세의 짧은 일기로 별세하시어, 다음해에 부인 부령한씨는 남편의 시신을 선영하에 모실 것을 집안 어른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남원부(지금의 남원시 송동면 백평리)의 남쪽 흑성산 병좌 임향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에 따른 것이다. 사제선조님의 빙부님 휘 홍(弘)은 벼슬하시지 않았으며, 조부 휘 영(盈)은 장악원주부를 지내시었다. 부인 부령한씨는 품행이 얌전하시고, 남편 사제선조님을 도와 덕을 어김이 없이 지키시어 외조가 훌륭하시었고, 사제선조님 보다 27년 뒤에 졸하시니, 향년 70세이었다. 슬하에 자녀는 1남 1녀하시니, 아들 죽암공 전(瑑)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가법을 잘 지키시었고, 딸은 풍천인 이조판서 노진(盧禛)에게 출가하시었다.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택촌(댁말) 입향조 사과공 휘 선국(선국)선조님이 김안방 댁말로 이주하시어 입향조가 되시었으며, 청계공 휘 영(瑛)선조님을 1565 명종 20년 을축 5월 16일에 출생하시었다. 성장하시면서 학문을 일찍이 터득하시고 머리가 총명하여 효심이 지극하고, 어른들을 공경하니 촌장들의 총애를 받으시었다. 성장하시어 1584 선조 17 갑신년 20살에 고암 양자징의 따님과 혼인하시고, 고암 사위의 신분으로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성리학을 배우시었으며, 1585 선조 18 을유년 21살에 아들 수준(壽俊)을 낳으시었다. 그리고 문예와 서간문 등은 일찍부터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 사우(士友)간에 명성이 높으시었으며, 과거 보기를 단념하시고 학문의 수학을 완성하시는데 힘을 쓰시었다. 당시 아버지 사과공 휘 선국(善國)선조님이 충효의 행실에 명성이 높고, 머리가 총애하시어 1587 선조 20 정해년에 40살의 나이로 선무랑용양위사과(宣務朗龍驤衛司果)에 특채되시어, 부모님이 서울에서 거처하시기에 문안차 상경하려는데, 1592 선조 25 임진년 28살 되시는 해에 왜적이 침범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있어서, 국가 안전을 위하여 선조임금님은 의주로 파천하시었다 하시고, 상경하는 도로가 두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담양으로 달려가시어, 고경명 의병장이 이끄는 담양지역 의병에 서기관으로 전투에 참여하시고, 월파 유팽노와 청계 양대박등과 합세하시어 의병을 창의하여 제봉 고경명을 선봉장으로 추대하시고 금산의 황산벌에서 왜적을 만나 싸우시다가, 작전의 실패로 고경명선봉장을 후퇴시키시려 말씀을 하시였으나 고경명선봉장이 죽어도 여기에서 싸워 수호하여야 하신다고 반대하시기에, 끝까지 고경명선봉장을 감싸 안으며 결국 순절(殉節)하시었고, 고공의 아들 인후도 전사하시니, 그 때가 임진 7월 10일 청계공 나이 겨우 28세이었다. 청계공 휘 영(瑛)님이 전사 하시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사과공 휘 선국(善國)선조님은 장한 일을 하시었다고 말씀을 하시고 맡은 일에 전념하시었다. 청계공의 백부 매담공 휘 창국(昌國)선조님이 의병승을 모아 조카 영(瑛)의 시신을 수습할 때, 공의 칼집에 새겨진 성 안(安)자와 수금랑에 수놓인 “충효”(忠孝)두 글자를 증거로 찾아, 10월에 남원의 풍수암 오좌에 장례하여 안장하니 선영의 아래이다. 선조임금님이 금산의 사실을 보고 받고, 조정에서 장악원 첨정에 추서하시고, 1595 선조 28 을미년에 정려문을 세워 후손들에게 기리도록 하시었으며, 1693 숙종 19 계유년에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시었다. 그 후 각 지방 연고지에 세운 광주 포충사, 금산 종용사, 남원 정충사 등 세 사당에 배향하시였다. 안자묘(安子廟)의 연혁(沿革)과 중건(重建) 내력 문성공 휘 향(珦)선조님의 최초 사당(祠堂)을 개성에서 모시다가 1525년대 종가가 파주로 이주 세거하심에, 파주에 사당을 모시고 봉안하셨을 것이며, 파주에서 세거하신 판서공 휘 종약(從約)선조님이 남산아래 주자동으로 이거하시어, 이때 서울 남산 도동에 사당을 건립하고, 회헌선조 영정과 경질공의 신주를 입묘하여 모시다가 1650년대까지 순흥안씨 종가가 유지하여 건재 하였으나, 15세손 광국(光國) 이후 절손이 되고 가문이 쇠락하여 오래동안 사판을 모시지 못하고 순흥안씨 종가가 무후 되어 있음을 안타까이 생각한 종회의 결정으로 남산아래 도동에 사당을 복원 하였다.. 그 후 순흥안씨 종가 대를 이을 사손집안은 찬성공 휘 지귀(知歸)선조님의 4남 군수공 휘 종(琮)님과, 5남 전적공 휘 기(璣)님의 두집 뿐인데, 두 집안 모두 1519년 기묘사화 여파로, 군수공 후손은 황해도로 피신하고, 전적공 후손은 전라북도 남원으로 은거 낙남하였다. 군수공 휘 종(琮)의 후손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가문의 쇠락으로 어려운 처지에, 황해도 연백군 백천면 송성리 회헌선조 산소근처로 피신하여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이에 영조대왕께서는 문성공 휘 향(珦)의 사우(祠宇)가 사라짐을 안타까워하시며, 1765 을유년 어명에, 종친들의 의견을 모아, 서울 도동의 사당을 모신 자리에, 군수공 종손을 사손으로 세워 사우를 건립하여 사판을 모시고 회헌선조를 받들도록 윤허하시었다. 회헌선조 사손(嗣孫)으로 윤허 받은 당시 군수공 종손 창록(昌祿)은, 서울 도동에 사우를 세우지 아니하고, 종회의 승인을 받아 회헌선조 산소근처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의 진산 남록의 부지 만여 평을 매입하여, 강당 및 부속건물과 부조사우(不祧祠宇)를 중건하여 유림들과 후손들이 기신제를 모셔 왔으나, 군수공 16대 종손 재찬(在燦)씨가 1947년 남하하여 1950년 6•25 동란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자손들은 회헌선조 기신제를 궐제하고 있었으니, 참찬공파 문성공 23대 후손 우헌 승화(承禾)씨의 주선으로 여러 종원들의 의견 합의를 받아, 1957 정유년에 남원의 사제공 세거지에다 부조사우(不祧祠宇)를 복원 건립하여 위패를 정좌봉안하고 회헌선조 기신제 행사를 하여오다 뜻하지 않게 1963 계묘년의 기신제 행사를 마치시고 12월 8일 졸하시었다. 뒤에 향리에 세거한 재종제 승덕씨 들이 기신제를 1976년대까지 봉행하였으나, 당시 순흥안씨 대종회장직을 역임 하시는 균섭씨가 종원들의 의견에 합의하여, 남원의 부조사우를 서울 근교로 옮기자고 하여, 경기도 부곡, 지금의 의왕시 월암동 425번지에 대지를 매입하여 안자묘를 중건하여, 현재 회헌선조 기신제를 모시고 있다.
-순흥안씨 홈페이지에서 퍼온 글- |
첫댓글 파악된 선조들 외에도 많은 선조님들이 벼슬길, 귀향, 처가살이 등 여러가지 이유로 세거지를 떠나 상계를 모르고 살고 있으리라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