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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제주국제실험예술제(JIEAF)
‘생태와 만나는 예술의 울림’
제주탐나라공화국( 위치:금악 )
2019년 10월 9일(수)~ 10월 20일(일) 12일간
이명환 < 지구의 4대구성요소_ 물> 탐라공화국 설치
지구생태의 대표적 상징성을 갖는 토양, 공기(대기), 불(태양, 마그마,화산), 물 등은 지구의 4대 구성요소이며 이 중 삼다도 제주도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생태계 지대로 유네스코의 생물권보전지역 지정(2002), 세계자연유산 등재(2007), 세계지질공원 인증(2010)으로 자연과학분야 3개 분야를 동시에 달성한 세계유일의 지역으로 세계적 자연경관의 모든 테마 (섬, 화산, 폭포, 해변, 생태공원, 동굴, 숲)를 갖춰 글로벌의 관심이 집중되어 인간과 자연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곳으로 물의 소중함을 반영한 개념의 설치작업이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며 자연으로부터 다양하게 얻은 혜택과 이익을 다시 자연을 위해 환원하는 국제적 위상 높은 제주시의 천연관광자원을 파괴하는 개발의 억제정책이 펼쳐져야 할 것이다.
2019 제주국제실험예술제는 다가올 미래에 전개될 천혜의 생태환경 파괴행위에 대한 경각심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을 설치하고자 한다.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일대에 3만 평에 펼쳐진 탐라공화국은 남이섬 관광특구를 정착시킨 강우현 대표의 지역특성 스토리텔링이 얹어진 제2의 생태체험형 옥외공간 중 영천삼휴정(정자)연못을 맞대고 있는 용암이 흐르다 식은 화산암인 현무암 절벽에 설치했다.
한라산 주변 활동했던 기생화산에 의해 1,000~1,200도에 이르는 현무암 용암에서 빠져나온 가스 작용으로 슬래그(Slag)모양의 기공이 많아 다공질 구조가 잘 발달 되어 있으며 기공에는 다양한 광물질로 채워져 있다.
이런 현무암으로 이뤄진 지질 지대 위로 큰 비가 내리면 일시에 물이 터져 흘러내리다가 조금 있으면 말라버리는 건천이나 지대가 낮은 삶의 터 마을주변에는 크고 작은 하천들은 생활용수가 되는 지하수를 조성하고 있음을 설치작업을 암암리에 담고 있으며,
미니호수에 비친 설치된 깡통들은 한 마리 대어의 형상을 하고 있어 마치 사람이 오염된 공기를 마시면서 다가올 생명의 위협에 민감하지 못하는 상황과 청정수에서 서식하는 어류들의 생존권을 약탈할 권리가 없는 가해자인 인간들의 눈을 거쳐 정신과 심리적 인식의 변화를 가져보자는 의도이다.
용암이 느리게 흐르는 사이 몇 겹의 층으로 이뤄지면서 하중에 의해 발생 되는 다양한 모양들과 대나무 끝의 구멍으로 통과한 매듭으로 고정된 로프의 끝에 매단 Yellow 컬러 깡통에 내리 게 될 빗물이 가득 채워질 때 더욱 중력이 높아져 설치물은 더욱 견고한 당김 현상이 유지될 것이며 물 존재의 중대성을 표출하며 관람객에게 생태의 중대성에 동요케 하는 미술 장치이다.
한림읍 금악리 자연환경
한라산 서쪽 정상에 올라서서 서쪽방향을 살펴보면 바다에 떠있는 듯한 비양도가 보이며 그 안쪽으로 넓은 들판에 배부른 암소가 누워있는 형태의 큰산이 보이는 데 여기가 바로 금악봉이며 이 금악봉 주변의 넓은 평야가 펼쳐진 마을.
금악봉을 중심으로 정물오름, 누운오름,세미소오름등이 금악봉을 호위하고 좌우에는 들어가고 나아가는 나지막한 동산들이 펼쳐지고 넓은 초원위에 말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자유로이 풀을 뜯는 고수목마로 영주십경의 풍경을 자랑하는 마을오름과 넓은 초원위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떼들이 한데 어우러진 금악리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금악리 마을위치
제주도의 중앙부에 있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360여개의 크고 작은 기생화산이 곳곳에 있다.
한라산은 사방둘레가 완만한 경사로 내려왔으며 평야도 남북양쪽보다 동서양쪽이 더 넓으며 특히 금악리는 한라산 서남쪽 해안과 산록지대 사이에 펼쳐있는 광활한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한라산 서쪽 정상에 올라서서 서쪽 방향을 살펴보면 바다에 떠있는 듯한 비양도가 보이며 그 안쪽으로 넓은 들판에 배부른 암소가 누워있는 형태의 큰 산이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금악봉(琴岳峯)이며 이 금악봉 주변의 넓은 평야는 한라산 서쪽지대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넓고 비옥한 지대에 위치해 있다.
마을주변에는 크고 작은 하천이 있는데 거의가 건천이어서 큰 비가 내리면 일시에 물이 터져 흘러내리다가 조금 있으면 말라버리는 하천이다.
금악봉과 누운오름(와악, 臥岳) 사이에 있는 낮은지대 이곳저곳 웅덩이에서 고인물들이 흘러내려서 금악리와 명월리, 동명리를 거쳐서 乾南川(거남내)을 만들었고 마을 북쪽에 있는 건천은 신내와 가린내(2개로 나누어 한쪽은 고림동, 한쪽은 문수동)라고 부르며 마을 남쪽에 있는 크고 작은 건천을 황모 소리내, 마을 상동에서 흐르는 건천을 오자내, 정물오름 남쪽에서 흐르는 건천을 쇠통내라 부르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에는 어느 마을이든지 마을속에 반드시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샘이 있는데 이 마을은 금악봉을 중앙에 두고 주변에 크고 작은 연못이 많이 있어서 이곳 저곳에서 농경생활이 이루어지고 커다란 마을이 생겨 집단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이에 문화발전의 전통을 이룩하는 터전이 마련되어진 것이다.
한라산 영신(靈神)의 수호봉인 왕이매를 만들고 주변이 아름답고 백성이 살기 편안한 곳에 영생불멸의 대산을 창조하였으니 하나는 백전의 용장처럼 건장한 정물오름이며, 이 오름을 남성의 산이라하며 자애롭고 우아한 모성이 충만한 금악봉을 이루었으니 이오름을 여왕봉이라한다. 여왕봉을 중앙에 모시고 주변의 높고 낮은 산-정물오름, 누운오름, 세민소오름, 문도지오름, 당멀오름(저지악), 느지리오름(망악), 개거리오름―등이 순수하게 금악봉을 호위하고 있으며 금악봉 좌우에는 들어가고(入) 나아가는(出) 나지막한 동산(고개)들의 줄기찬 지맥이 오자내를 청룡으로 하고 흰동산과 신내가 백호가 되어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 이루어지는 형형색색의 애향심이 걸려 있으며 착한사람이 태어나고 학문에 전념하는 인재양성에 힘써왔으므로 문촌(文村)이니 양촌(良村)이니 하여 설촌이 되고 여러사람이 동경하는 시범마을이다.
이 마을의 지형을 평면상으로 살펴보면 동서가 길고 남쪽이 짧으며 동쪽 끝이 뾰족하고 서쪽은 볼록한 삼각추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험준한 바위나 깊은 골짜기도 없다. 다른 지방에 비하여 지형상의 굴곡과 고저에 특이한 변화를 보기 힘든 평범한 지역이다.
금악리 지명유래
금악리 11도(목자지 출입구)
금악리는 예로부터 지방특유의 방언으로 지명이나 길이 생긴모양에 이름을 붙여 불러왔기 때문에 한번 이곳을 지나고 나면 그 지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마을 주변이나 목장입구에 연결하는 곳에는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목(牧), 도(入口) 등의 다른 마을과 다른 점이다.
금악리 11도 열거
1. 제경도 (남군경계도)
2. 소세왓도 (돌오름입구)
3. 돗고분도 (말진물입구)
4. 묵은나무도 (여과지-세모소)
5. 물푸기도 (함케위쪽입구)
6. 색일도 (함케입구)
7. 아기냇도 (딴동산-거세왓입구)
8. 원남송이도 (진곤입구)
9. 괴하늘도 (괴하는물입구)
10. 가린내도 (개인농장북쪽입구)
11. 던남도 (주축단지 하단지 입구)
거말창
거만창이란 지명으로 오랫동안 쓰여온 말이 변화되어 거말창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이곳은 금악리지경 동쪽에 있는 누운오름과 별진밭 사이의 유축농장과 오름에 인접한 깊게 파인 자연굴 형태의 저지대이며 동굴모양이 낮은 구릉지대에 젊은 장정이 들어가면 3,000여명은 능히 수용할 수 있는 지대이다.
옛날에는 많은 죄인들을 수용하던 감옥형태의 땅이며 큰 창고 또는 지붕이 없는 헛간 모양의 건물이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시대 임금의 칙명에 의하여 체포된 죄인을 수용하던 곳이라고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창이 있었다고 하나 이곳이 명나라 당시의 감옥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금악리 동산명칭
1. 일동이못동산
2. 멀왓동산
3. 할케물동산
4. 도끼비 동산
5. 활쏜동산
6. 가라레샘동산
7. 벌더리동산
8. 흰동산
9. 송아지동산
10. 당동산
11. 붉은대동산
12. 당머들동산
13. 하원동산
14. 올바리동산
15. 맹감동산
16. 윤임동산
오름(岳)
1. 금 악 : 검은오름 - 표고 431m, 금악중앙(今岳峰)
2. 정수악 : 정물오름 - 표고 465m, 금악리 동남쪽(남군경계)
3. 와 악 : 누운오름 - 표고 412m, 금악리 동쪽 (주축단지)
4. 문도지악 : 문도지오름 - 표고 265m, 금악리 서쪽(한경면경계)
5. 천미악 : 세미소오름 - 표고 375m, 금악리 이시돌
6. 적 악 : 붉은 오름 - 미상, 금악리 동쪽 (현재 개인소유)
7. 피문악 : 갯거리오름(일부) - 미상 , 금악리 북쪽 (갯거리작은 오름)
8. 란 악 : 알오름(일부) - 미상, 정물오름 서쪽(골왓 뒤)
9. 당 악 : 도너리오름(일부) - 미상 , 금악리 남쪽(남군경계=현 옹포목장일부)
금악리 동굴
1. 괴동산굴
2. 생샘물괴
3. 개역빌레왓굴
4. 윤나물굴(현재매립됨)
5. 먼내굴(굴속에 물이 있음)
금악리 하천(河川)
1. 신 내 - 명월, 옹포, 거남대
2. 가린내 - 명월, 옹포, 거남대
3. 오자내 - 상명, 명월, 월령
4. 황모소리내 - 상명, 명월, 월령
5. 쇠통내 - 상명, 명월, 월령
금악리 동네이름(사람살던곳)
1. 병두가름동네
2. 뒷동네
3. 외처남왓동네
4. 일동이못동네
5. 상머들동네
6. 동카름동네
7. 중카름동네
8. 셋카름동네
9. 웃동네
10. 오소로기동네
11. 별진밭동네
12. 덧남도동네
금악리 1,000여평이상의 큰 밭
1. 덕군이굴왓 2. 연무늬굴왓
3. 조도리굴왓 4. 솔대왓
5. 활쏜동산 6. 돗왓
7. 외처남이왓 8. 붉은대왓
9. 머프레기왓 10. 한길세왓
11. 앞넓은이왓 12. 마구왓
13. 명솔왓 14. 나는물왓
15. 반하왓 16. 머쟁이왓
17. 용단이하완이왓 18. 별진이왓
19. 오선달이왓 20. 양석이왓
21. 오백이집터왓 22. 손나모기왓
23. 괴하늘이왓
금악리 마을사람들
三, 一대와 선열들-항일운동
1907년 이완용(당시국내대신)을 암살하려던 음모로 체포되어 제주에 유배당한바 있었던 박영효 대신이 한림리 박훈장댁에 자주 출입하였는데 박영호 대신으로부터 훈학받은 젊은 청년들과 그에 따르는 마을의 유림들 중에는 홍여하(洪如河) 강시종(姜始宗) 박성선(朴性善) 강시봉(姜始奉) 고봉용(高奉龍)등이 뜻을 함께하여 국치합방을 반대하며 애국정신을 마을 사람들에게 홍보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들 청년들은 1919년 항일독립 구국선언인 구미독립 운동에는 직접 참가하지 못했으나 마을의 중심비인 비석거리(돈지)광장에 三, 一대를 구축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영원히 부식시키기 위하여 三, 一대안에 3:1 비율로 팽나무, 고련목(먹굴나무), 닥나무 등 3각형으로 된 곳에 소나무 한 그루를 중심에 심어서 정성껏 가꾸면서 三, 一대를 축조한 선배님들의 공로를 이곳에 영구히 간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4.3사건 당시 몰지각한 사람들의 역사적인 현장의 나무를 모두 벌채해 버렸으나 원상은 보존되어 있는 현실이니 이곳을 더욱 성역화시켜 애국선배들의 유지를 오래도록 전승하고 이를 거울삼아 원상으로 보존하여 역사적인 三, 一대를 몇천년까지 계승되도록 주민 모두가 정성을 다하고 있다.
금악리는 명사들의 출입이 잦았으며 주민들은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국내에서 정치적 혼란이 있을때마다 불고처자(不顧妻子)하여 헌신적으로 난세의 평정에 앞장섰으며 굳은 기개와 꼿꼿한 성품을 갖도록 영향을 받았다고 느껴진다.
일제 제국주의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사상적으로 보면 민주주의 노선,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으며 그 당시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노선 모두의 공동목표가 일본세력을 몰아내는 것이 애국운동이었다.
1933년 10월에 항일비밀경사와 관계되어 있는 52명이 검거되었는데 한림에서는 강공우(姜貢禹), 김두경(金斗景), 이기선(李基善) 금악리에서는 강두정(姜斗正), 박남규(朴南奎), 김원문(金元文) 등 3명이 검거되어 많은 고문을 당하였다.
한편 마을에는 액국청년들의 인도아래 용진소년단이 결성 되었는데 그당시 활동이 많았던 청소년은 강두정, 박남규, 김원문 외에 박동효(朴東孝), 김영문(金永文), 강태효(姜太孝), 고창옥(高昌玉) 등이었으며 일본경찰이 감시가 심했기에 일본방면으로 탈출하는 일이 많았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부르던 용진 소년단가는 아래와 같다.
용진 소년 단가
동무여 모여라 병두물 돈지로
우리는 금악리의 애국청년이다
농경자의 가슴에 피가 흐르고
무궁화 동산에 새바람 분다
괭이와 망치를 높이 들어서
왜놈의 감옥을 부숴 버리자
3 : 1의 나무
팽나무 : 닥나무
소나무
고련목
금악리 마을약사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인 1550년께 상명리에 진주강씨 일가가 이 마을로 이주하여 동네 북쪽을 차지하고 남쪽에는 남양홍씨가 차지하여 설촌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약 100년만에 탐라양씨와 밀양박씨가 입주하고 또 50여년 후에는 경주김씨도 입주하게 되었다.
설촌 당시에는 "수류촌(水流村)"이라 불리워 오다가 이 마을에 있는 오름의 모습이 거문고를 타는 여자형인 데서 1623년께 금물악(琴勿岳)이라 해서 "수류촌"에서 분리했다. 그 후 琴岳으로 표기해 오다가 지금부터 150여년 전쯤에 今岳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이 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한 기록도 없고 참고할만한 문헌도 없으며 상세히 전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내력을 알기가 어렵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와 제남일보에 연재되었던 "제주의 향사"에 설촌연도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 문화혜택이 없었던 시절에 구전된 이야기라하여 많은 어른들이 양해가 있었으면하고 또한 주변이 여러마을이나 각급 행정기관에서 펴낸 향토의 약사와 마을에 최초로 입주하였다는 설촌시조 강응선(姜應善)씨의 가사록등을 참고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이 마을에서는 여러 성씨가 살았으며 선조로부터 전해오는 전통문화의 변천 과정에서 여러 성씨의 공동생활 실태와 그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마을에는 광할한 토지(목야지)가 있어서 목축의 적지로 중국의 원나라(몽고)에서 설정한 목장(6소장)이 끼어있으며 몽고의 지배하에 100여년동안이나 목축을 계속하다 고려 공민왕 17년(서기 1386년) 원나라가 폐망함으로 인하여 목자(牧子)들이 원나라로 귀국하였는데 일부 귀국하지 못한 목자의 후손들이 수류천(水流川=옛마을 이름)주변 여기 저기에 산재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 목자들이 지역에 산재한 원주민들과 결혼하여 금악리에 입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 중에는 성(姓)을 모르는 자가 많았으며 그들은 마을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근실한 생활을 하는 자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혼혈족들이 빈곤한 생활과 한스러운 고독감, 비열감등을 덜어주고 잘 보호하여 원주민과 다름없는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기 위하여 그들을 교육시키고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호적이 없는 자들을 다른 집안에 양자로 입양시켜 주거나 솔자 - 거느려 사는 사람 -로 입적시켜 주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서기 1594년(조선조 27년)에 이곳 수류천리 피문악(皮文岳=갯거리) 동쪽 소와리물 동편에 집터를 정하여 입주한 어른이 계공랑훈도 강응선(姜應善)이며 이분이 금악리에 처음 입주한 어른이 되는 셈이다.
이 어른이 수류천리내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혼혈족 노비들을 호적에 솔자로 입적시켜 살면서 황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목축에 힘쓰면서 살기 시작한 것이 마을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금악리의 변천사
금악리는 한림읍에서는 최고 산간지대로 해발 230고지에 위치하였으나 명월, 두모, 안덕면 사계리 일대에 논밭을 소유한 분들이 많았고 축산지대로 그나마 생활터전이 마련된 부촌이었다. 그러던 중 일제말기에 강제 공출이 심해서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희망찬 삶의 터전을 일깨우던 중 1946년에는 호열자(지금의 콜레라) 발생으로 이웃마을 간에 왕래가 금지되어 더욱 어려운 생활을 하던중 1948년 4·3사건이 발생하면서 마을이 혼란속에 붕괴되기 시작하여 동년 11월 18, 20일 사이에 해안마을로 소재령이 내려져 마을은 불바다가 되고 삶의 터전을 잃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제각기 친인척을 찾아서 피난했다가 1950년 5월 1차 복귀지인 고림동(현재 명월상동)으로 올라와 3년간이란 세월을 함바집(집단거주 임시주택)을 짖고 거주하다가 1953년 8월에야 옛고향인 본리에 새로운 마을로 재건하면서 리민이 단결하여 주민소득을 높이는데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러던 중 누운오름 일대에 주축단지가 생기게 되었고 동양최대의 텍사스 황야를 방불케하는 국내에서 널리 알려져 관광제주를 빛내는 성-이시돌 농장이 위치하여 축우, 양돈, 면양 등 축산업을 경영하여 본도 중산가 개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주민은 집집마다 소농이었고 어려움은 한이 없었다. 4·3사건으로 5, 6년씩 떠돌이 신세가 되다보니 문화면이나 농사기술, 대인관계 모든면에서 5, 6년 뒤떨어진 상태에서 생활을 하다보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1961. 5. 16 후 재건 국민 운동이 전개되면서 1962년도 복구주택 12동, 63년도에 12동이 건축되었다. 산림녹화 운동이 열기를 띄어 금악봉에 조림을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단합심을 강하게 하였고 그결과 1964년에 조림실적이 전국 3위, 본도 1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젊은 청년들의 삶의 의욕을 충만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8년까지는 대여곡에 의존하여 생활을 하다가 1969년부터 그당시 소득작목인 유채농사로 주민들의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동년 어승생 상수도 준공식을 금악리에서 행하여 부농의 꿈에 한발자국 다가서게 하였다.
1970년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마을안길 포장, 배수로시설 등 이때부터 축산업분야도 양돈, 낙농우, 번식우, 비육우 등으로 부농의 꿈이 시작되었다. 1972년 5월 30일 전지점화식을 갖게되어 집집마다 환희에 등불을 켜게 되었고, 1973년에는 한림 - 이시돌 간 도로가 포장되면서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문화시설을 집집마다 갖추기 시작했고, 1975년부터 국민주택을 짓게 되고 1978년도부터는 농기계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1980년부터는 복합영농으로 축산업과 감귤원 채소농사 등으로 삶이 윤택한 복지 농촌을 이루었으며 1996년도에는 한림읍 승격 40주년을 기념하는 읍민체육대회에서 민속경기우승, 축구우승, 육상 및 기타 종목에서 좋은 성적으로 종합우승이란 보람찬 영광을 안았고 특히 줄다리기 경기에서는 전에 이어 2연패를 기록했다. 이는 금악리민의 한결같은 단합된 굳센 힘이라 할 수 있다.
교육(한문 교육에서 현재까지)
우리 금악리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나 제주도내에서는 어는 지방에 비교하여도 교육열이 높고 옛날부터 한문수학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남녀노소가 교육에 열중했던 결과는 마을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나 지리적 조건과 부수적인 유교사상으로 인하여 신교육(현대교육)의 혜택을 받는데는 다소 뒤진감도 있었다.
과거에는 개개인의 행복을 누리고 자아실현을 위하여 주로 마을내 서당에서 사서오경을 배움과 동시에 그 여파로 가정교육에도 매우 충실하였으며 일반적인 사회교육이 철저하였던 사실로 보아 마을이 성장발전에 놀랄만한 결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1594년경 마을이 형성되던 당시부터 수류촌내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이 서학학당 계량훈도 강응선으로부터 유학과 한문으로 교습을 받았으며, 1621년(조선 광해군 13년)에는 장사훈량도 강경훈(姜經勳)이 서학학당에 취임하여 마을의 유림들을 교학 시킨바 있으며,
1909년(대한제국 융희 3년)에는 한문송숙을 개설하여 28년간 어도리출신 강선온(姜宣溫)이 마을 젊은이들을 교학시킨바 있으며, 1914년(임시정부시대)에는 일본의숙 개량서당이 설치되었으며
1929년(임시정부 11년) 8월에 서당건물을 새로운 교실로 개축(마을공회당 겸용)하였으며 당시 박동효선생의 교육공로가 많았었다.
1931년(일제치하)에는 금악서당이 설치되었고
1937년 간이하교 설치법에 따라 하교가 개설되었으며 학제는 2년이고 실업기술교육을 위주로 교육하였다. 간이학교 과정을 이수한 자는 한림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학이 허가되었으며 당시 한림초등학교에 편입학을 시키는데는 부을순(夫乙順)선생의 숨은 공로가 지대하였다.
1943년에는 간이학교를 공립학교로 승격했으며
1949년 10월 4·3사건으로 마을리민 모두가 해안으로 유개(琉開)됨에 따라 학교가 폐교되었으며
1954년 소개생활을 하던 마을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와서 불타버린 마을을 재건함에 따라 한림초등학교 금악분교장이 개설되었다.
분교장 설치를 위하여 공적, 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은 당시 한림초등학교 김문옥(金文玉) 교장과 북제주군 교육청 박병선(朴柄善) 장학사 등이다.
1957년 4월 1일 분교장을 금악초등학교로 승격 인가를 얻어 3학급 6년제로 실시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교육의 전당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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