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고향 모임에 원하지도 않은 감투를 맡다보니 질펀하게 마셔대는 체육대회 뒷풀이에 핫바지 방귀빠지듯 빠져 나오려고 해도 만만치 않다. 산행 약속이 있다는 내 하소연은 거칠게 내뱉는 선배들의 호통소리에 끽소리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파장분위기가 역력하자 이제 그만 파하자고 바람을 넣으며 어렵사리 빠져 나온다.
도시락도 준비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배낭만 챙기고 나와서인지 등산가는 것인지, 유원지 소풍가는 것인지 스스로 난감해진다. 이틀통안 마신 술 때문에 산악회 버스에 오르자 마자 잠은 쏟아지지만, 주변여건이 편한 수면을 취하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랫만에 우보산악회에서 진행하는 산행일정에 참여하게 되어 다행이고, 거기에다 생각지도 않던 121km의 땅끝기맥 중 21km 한구간을 해버렸으니, 기대하지도 않았던 알찬산행이 되었다. 그리고 작년 7월, 진양기맥 한 구간을 겨우 진행한 상태에서 그동안 제대로 산을 타지도 못하다가 얼떨결에 땅끝기맥 한구간을 횡재한 기분이 든다.
★ 산행개요
- 산행코스 : 닭골재-작은딱골재-바람재-달마산-문바위-떡봉-도솔암-도솔봉-사자봉-땅끝탑
- 산행일행 : 홍어형님과 돌쇠
- 산행거리 : 실제거리 21km(도상거리 18km)
- 산행일시 : 2008년 4/27(일) 05:20~12:20(7시간)
- 소요경비 : 40,000원
★ 기록들
새백녘 완도로 향하는 13번 국도의 큰딱골재에 우리를 실은 버스가 도착한다. 공대장님이 깨우며 달마산에서 미황사로 같이 하산할 것이냐고 묻는다. 아마도 산행거리가 턱없이 짧으니 함께 하기가 곤란하다면 땅끝까지 진행해도 된다는 뜻이 담겨 있는 듯 같다.
다행히 홍어형님도 같이 한다고 하여, 영웅님으로부터 점심으로 준비한 도시락을 얻어 큰딱골재에서 땅끝까지 진행키로 한다.
공대장님으로부터 받은 지도에는 도솔봉까지 산줄기에 대한 정보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도가 없더라도 대충 남서방향으로 진행하면 되고 갈림길이 거의 없기 때문에 땅끝까지 진행하는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공대장님이 땅끝마을에서 점심식사를 할 계획이니 12시경까지만 도착하라고 한다.
<작은딱골재에서 앞서가는 홍어형님>
아직까지 어둠이 가시지 않은 등로를 따라 일행들보다 앞서 홍어형님과 마루금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아침이슬이 등산화에 떨어지긴 하더라도 이내 해가 비추면 젖은 잎사귀가 마르기 때문에 그리 걱정할 바는 아니다.
홀대모의 반더님이 부착하여 확인이 가능한 작은딱골재를 지나자(05:43), 랜턴을 거둔다. 새벽녘 으스스한 것과 달리 잰걸음으로 걷고 있으려니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여 헬기장에서 자켓을 벗는다.
<지형도상 관음봉>
06시가 지나며 바람재에 이른 다음, 10미터 정도 따라가다 숲속으로 들어간다. 길이 잠시 넓어지기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바위길이 나타나며 달마산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관음봉 정상에서 일출사진을 담고자 했지만, 지체되어 해가 중천에 걸리고 만다. 달마산의 정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썬봉은 생각처럼 가까운 거리에 있지는 않았다. 송촌리 갈림길을 지나자 달마산 나들이 온 등산객들을 만나며 사진촬영을 부탁해 본다.
<중천에 걸린 관음봉 일출>
<가야할 달마산 불썬봉>
환갑을 이미 오래 전에 넘긴 어르신이 앞장서서 빠른 속도로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젊은 등산객들이 홍어형님을 경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암릉구간을 오르내리며 짜릿한 릿찌의 맛을 느낄 수 있기도 하고, 상큼한 바람만큼이나 숙취로 찌든 육신이 점점 맑아지는 느낌이다.
6시 45분, 달마산 불썬봉에 도착한다. 잠시 주변을 조망하며 사진을 찍은 후 아늑한 장소를 골라 아침식사를 한다. 영웅님으로 빼앗다시피 얻어 온 도시락이 속을 든든하게 한다. 언제나 별로 도와 준 것 없이 받기만 하였지만, 익명의 후원자처럼 영웅님같은 분이 조용하게 밀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행운과 다름아니다.
<달마산 불썬봉>
07시 12분, 방울토마토로 후식까지 걸치고 도솔봉을 향한다. 박무에 희미하지만, 도솔봉 송신탑이 실루엣되어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하다. 그러나 해발고도 4백미터를 겨우 넘긴 봉우리들이지만, 도솔봉까지는 거칠게 요동친다. 거친 등로만큼이나 호흡도 거칠어지며 한 여름처럼 끊임없이 땀이 흐른다. 도솔봉 1.5km를 남긴 전위봉에서 홍어형님은 식수가 완전히 바닥나고 만다. 내가 가진 300cc의 식수 중 일부를 페트병에 담아 드린다.
<문바위가 있는 대밭삼거리>
<귀래봉에서의 홍어형님>
약수터가 나타나면 좋으련만, 걱정이 된다. 나눠진 지도에는 약수터에 대한 정보마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이 것도 행운이라면 행이랄까? 바로 그 지점에서 한꾸러미의 A4용지를 발견하게 된다. 주워서 펼쳐 보니 달마산에서 땅끝까지 아주 상세하게 지명과 거리가 표기된 지도다. 그리고 도솔봉에 못미쳐 용담샘이 있다는 정보도 그제야 알게된다.
"형님! 이제 물 걱정 안해도 됩니다."
<도솔암>
<도솔암 왼쪽의 요사채>
지형도상 용담샘 인근에는, 그것이 도솔암의 요사채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등로 왼쪽으로 마치 대피소같은 건물이 있다. 혹시나 하여 요사채 앞마당을 지나며 식수의 흔적을 찾으려는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스님이 문을 열어 제낀다.
식수가 다 떨어졌다고 하니, 식수는 도솔암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있다고 하며 우선 목이나 축이라 하면서 커다란 주전자의 식수를 한바가지씩 떠서 준다. 그리고 주방에 푸대에 커다란 참외가 보이는데, 형님과 나의 눈빛이 간절(?)하게 보였는지 참외 2개를 건낸다.
설마했지만 이 참외 두 개가 땅끝까지 진행하는데 더 이상의 식수를 필요없게 만들 줄은 모른다. 거듭 스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며 도솔봉을 향한다. 도솔봉 송신소를 우회하여 돌아서 나오자 차 09시 04분, 2대가 세워져 있는 송신로 입구에 이르게 된다.
<도솔봉 송신소 앞 지도>
송신소 앞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지도를 보며, 손바닥으로 한뼘, 두뼘재면서 우리가 진행한 거리와 앞으로 진행할 거리를 비교해본다. 현재의 속도대로만 간다면 충분하게 12시 안에 도착할 것이란 확신이 선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도 되지만, 도솔봉(사실은 송신소가 진짜 도송봉이고, 송신소가 있어 그 옆에 봉우리에 정상석을 세운 것으로 판단되지만)을 지나야 하므로 우측의 숲길을 따라 올라 도솔봉 정상에 도착한 다음 스님에게 받은 참외 한 개를 안주 삼아 전날 체육대회 하다가 남은 캔맥주 하나를 둘이서 나눠 마신다. 맥주한잔이 갈증을 완전히 가시게 한다. 아마도 한시간 정도는 갈증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도솔봉>
지금까지 요동치던 마루금은 완전히 사라지며 잡목과 가시덤불이 빽빽한 육산이 되어 몸뚱아리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바다이고 선택에 대한 고민이 없는 확실한 마루금이기에 표지기가 따로 없어도 길 찾는데는 어려움은 없다. 순간 멧돼지가 소리를 내며 후다닥 숲속으로 숨는다. 앞장 가던 홍어형님이 무척 많이 놀라워 하신다.
<가슴을 쓸어내린 멧돼지의 흔적>
사자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10시가 넘어서자 빗방울이 한두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산행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우비가 있을리 만무하다. 그저 여벌의 옷을 배낭위에 걸칠 수밖에 없다.
삼각점이 보이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분간이 안된다. 지형도에도 나타나있지 않다.
10시 40분, 헬기장에 이르러 남은 참외 한 개와 방울토마토를 홍어형님과 함께 나눠 먹는다.
<지형도에 없는 삼각점>
사자봉의 땅끝전망대가 훨씬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거창하게 지어진 납골당을 넘어서서 잠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갈두재에 도착한다. 거북선 모양의 모텔이 오른쪽으로 세워져 있어 분명 마루금은 모텔 주변일 것으로 생각되어 모텔앞으로 갔으면 좋으련만 홍어형님이 성큼성큼 앞서 내려가신다.
<화려한 납골묘>
<이 모텔 안쪽에 마루금이 있을 것으로 생각됨>
할 수 없이 따라 내려서다 보니 다행히 우측으로 올라 설 수 있는 등로를 발견한다. 등록를 따라 우회하여 희미하게 나 있는 산길을 따라가니 모텔 뒤쪽으로 연결된 듯한 마루금과 조우한다. 마치 산책로와 같은 푹신한 등로가 훤하게 열린다.
<갈두재에서 내려서서 사자봉 올라가는 길>
<아직도 30대의 젊을 간직하신 홍어형님>
불과 10여분만에 땅끝 전망대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주차장 앞에 커다란 지도가 있고 그 뒤로 또 의미하게 기맥꾼들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전망대 뒤쪽에 도착하게 되고, 오른쪽으로 돌아 월장하여 전망대안으로 들어가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지만, 흐린 날씨 때문에 보길도와 노화도는 거의 조망이 되지 않는다.
<전망대에서 바로 본 땅끝마을과 방파제>
<전망대 꼭대기-박무때문에 조망이 좋지 않음>
전망대를 나오려니 입장료가 1,000원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별 것 아니지만 횡재했다는 기분도 든다. 홍어형님이 무릎관절 상태가 좋지 않아 땅끝마을로 내려 가시라 하고 혼자 땅끝탑을 다녀 오기로 한다. 그래랴 한구간이 완전하게 끝난 것이니깐... 10년만에 와 보는 땅끝탑은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땅끝탑>
<땅끝기맥의 끝>
땅끝마을에서 일행들과 만나 횟집에서 맥주와 소주를 섞은 소맥 세잔에 잠깐 잠이 든다. 늘푸른님이 네가 아무리 산을 잘 타봤자, 나를 술로 이기겠냐고 한다. 잠결에 듣는 말이지만, 저절로 웃음이 난다.
<땅끝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