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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강론 모음 스크랩 마더 데레사 수녀 ``영적고뇌``의 진실
안미화엘리사벳 추천 0 조회 33 08.05.19 00: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특별기고] 마더 데레사 수녀 ''영적고뇌''의 진실

 

강유수 신부(가르멜남자수도회 광주수도원장)

 


▲ 캘커타 사랑의 선교수녀회 본원 발코니에 걸려 있는 마더 데레사 수녀 사진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현존을 말해야 한다. 하느님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현존을 나와 함께 있음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인식하고 감지하는 것이라 한다면, 하느님 부재는 사랑스럽고 친밀한 그런 현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내 앞에 현존한다는 것은 그와 나와의 관계가 있고 교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두 생명이 끈끈하게 결합된 상호간 내적 흐름으로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심령의 흐름이다.

 따라서 하느님 현존을 밀도 있게 체험해 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부재를 알아 듣거나 말할 수 없다. 하느님의 부재감은 예전에 느꼈던 사랑스럽고 친밀한 교류가 느껴지지 않아서 오는 허전함, 그로 인한 지독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체험 없이 부재 느끼지 못해
  가톨릭에서 말하는 하느님 부재는 가톨릭 밖에서 비종교인이 말하는 하느님 부재(무신론)와는 다르다. 가톨릭 밖에서 말하는 그것은 하느님이 안 계시기에(무신론) 그분과 교류가 없다. 무신론적이기에 하느님께 관한 관심이 없을뿐더러, 하느님이 계시지 않음을 느껴도 그것이 고통이 되거나 자신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죽기 약 8개월 전에 이 하느님 부재를 체험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하나(연대)가 되어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죄인들의 식탁에서 빵을 먹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 안에서 이 부재를 겪을 때 드러나는 양상은 무신론자와 비슷한데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더 깊은 정화를 위해 겪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깊이 탄식하며 하느님을 갈망하고 찾는 것이다. 반면 무신론자들이 체험하는 하느님 부재는 하느님을 찾지도 않고 하느님 없이 평온히 잘 지낼 수 있다.

 데레사 성녀가 이 부재의 고통으로 심히 괴로워할 때 예수님께 이렇게 푸념한 적이 있다.

 "당신은 나를 보고 계시는데 나는 당신을 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자비하신 예수님이 이런 불공평한 일을 허락하실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만일 저는 당신을 볼 수있고 당신은 나를 볼 수 없다면 주님은 이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이같은 불평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계시는데도 그분의 감미로운 현존이 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부재를 신비신학에서는 ''어둔 밤(정화)''이라고 부른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흥미로운 것은 하느님 현존을 강하게 체험한 정도에 따라서 부재에 대한 고통도 깊고 크다는 것이다. 하느님 현존 체험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 부재에 대해 불평하거나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 현존수련에 몰두했던 복녀 성삼의 엘리사벳도 이 부재의 고통을 체험하고선 "아! 그윽한 하느님의 현존을 맛본 뒤에 느끼는 이 부재의 고통은 얼마나 쓰라린지요? 그러나 신앙은 제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하느님은 여기, 내 안에 계신다 하고요."

 이 부재를 통해 신앙이 더욱 순수해지고 강해지고 뿌리내리게 된다. 이 어둔 밤- 하느님 부재-속에서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다는 것은 영웅적 신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실 하느님께서 이 어둔 밤을 허락하심은 영혼을 이처럼 순수한 사랑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저버림 받는 고통을 느낀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초심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부르짖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란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셨는데 어떻게 이토록 사랑하는 아들에게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아버지의 부재''를 허락하셨을까? 이는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의 이 저버림 받은 고통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저버림으로써 당신은 평생에 이루신 그 많은 기적과 일들보다 훨씬 더 큰 일, 그리고 하늘에도 땅에도 일어나지 않은 크나큰 일을 하셨으니, 은총으로써 전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결합시키신 바로 그 일인 것이다. 즉 이 일이 이룩된 때가 바로 주께서 당신을 온전히 멸각(滅却, 조금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림)하신 그 때요 그 순간이었다."(가르멜 산길 2권 7, 11)

#''어둔 밤''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
하느님 편에서 보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에 든 사람에게, 또 인간편에서 보면 하느님을 더 깊이 온전히 사랑하려고 열망하는 영혼들에게 이런 신비스런 고통-하느님 부재-을 허락하신다. 그래서 하느님 부재는 그 고통을 통해서 영혼의 순수한 사랑을 더욱 커지게하고 드러내게 하며 예수님 인류 구원의 공동 구속자가 되게 한다.

 따라서 하느님 부재는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저버림받은 이 구원의 신비와 연관시키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

 하느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 하느님 현존을 충만히 누린 사람들이 하느님 부재를 경험한다. 하느님 부재를 경험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총애받고 축복받은 사람이다. 또한 이 부재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기사원문 보기]

[평화신문  2007.09.09]

 

 

테레사 수녀, 부처에게 묻다.

[이 글은 12월 10일 부디스트채널에 실린 반테 담미카(Bhante S. Dhammika)의 기고문 ‘Dhamma, Doubt and Mother Teresa’를 옮긴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성녀(聖女)로 추앙을 받고 있는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하느님[神]의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었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서간문집 『테레사 수녀: 빛으로 오소서!(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출간이 가져올 충격 또한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번역/이병두- 편집자]

 

싱가포르 -- 종종 ‘빈민가의 성자’로 불리던 테레사 수녀에 관해 최근 책이 출간되면서 가톨릭 세계와 바깥 세계에 불안과 걱정의 잔물결을 몰고 왔다. 『테레사 수녀: 빛으로 오소서!(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라는 제목의 이 책은 60여년 이상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저명한 수녀가 쓴 편지를 모아놓은 것이다.

 

 

 

이 편지들은, 수녀로 생활하기 시작한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는 테레사 수녀가 단 한 차례도 예수님의 존재를 느꼈던 적이 없었고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계속 괴로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테레사 수녀를 둘러싸고 벌어진 최초의 논란이 아니다.

 

1990년대 초, 그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부부가 다 기독교 신자인 가정에만 입양을 시켰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 고아원의 이런 정책이 알려진 뒤에, 인디아에서 폭넓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테레사 수녀에 관해 1997년에 쓴 책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는 독재자들이나 엉터리 사업가들과 어울려 이익을 꾀하고 그들의 기부를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려냈는데, 이들 - 독재자와 엉터리 사업가들- 은 산아제한과 낙태가 세계 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간주하고,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통제 투여를 거부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방치하는 사람들이다.

 

히친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든 아니든, 이번에 새로 나온 책[『테레사 수녀: 빛으로 오소서!(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는 테레사 수녀의 내적인 삶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극적일 정도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숱한 고백자(confessor)들에게 연달아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절망감과 자포자기에 가까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그 가련한 여인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갖지 않고는 이 책을 읽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해 말썽이 일어날 소지도 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의 편지를 모두 파기하라는 매우 엄격한 지시를 내렸었다. 자신이 내적으로 공허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바람[願]을 따라주지 않았고, 이제 매우 사적인 이 기도문들[missals]은 누구든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테레사 수녀에 대해 최근 이처럼 의외의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톨릭교도들은 ‘성자로 널리 인정되어온 누군가가 어떻게 그처럼 영적으로 결핍되고 고통스런 삶을 영위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녀가 가졌던 의심은 “그녀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제안을 내놓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라거나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하느님은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평론가는 “테레사 수녀가 남긴 편지들은, 자기 삶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거나 하느님이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ministry]이 될 수도 있다”고 썼다.

 

현대의 기독교 호교론(護敎論)자들을 보면 나는 가끔 한 알코올 중독자를 떠올린다. 그[알코올 중독자]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딱 한 병밖에 마시지 않았다.”고 우긴다. 그를 데려온 친구들이 그를 한옆으로 옮겨놓고 “이 사람은 너무 많이 마셨고 우리들에게는 번번이 ‘언제라도 내가 원하는 때에 술을 끊을 수 있다’고 기분 좋게 이야기한다.”고 살짝 알려준다. 집안 곳곳에 숨겨놓은 위스키 병을 아내가 찾아내면,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주려고 준비해둔 것이다.”고 우긴다. 계속해서 술에 취해 직장에 나가다가 결국 실직을 하고 난 뒤 그는 가족들에게 “실은 윗사람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에 해고되었다”고 설명한다. 몇 해가 지나고 그와 정반대 증거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상식에 어긋나게도, 그 알코올 중독자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시킬 수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항상 [자기만의] ‘답’을 갖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몇 년 안으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하느님이 왜 테레사 수녀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명백한 답 이외에는 그녀의 기도에 왜 응답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수천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만이 당신에게 평화를 줄 수 있다”고 영원히 주장하는 복음주의 기독교도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그리스도의 존재를 그토록 간절히 염원했는데도 불구하고, 테레사 수녀처럼 헌신적이고 겸손하며 자기희생적인 여인이 왜 짧은 순간의 평화조차 거의 갖지 못했는지?” 설명하느라 진땀을 뺄 것이다.

 

테레사 수녀의 비극은 그녀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모든 영성(spirituality)의 바탕’이라고 여기는 신앙을 안고 태어났다는 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여러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는 “만약 하느님이 없다면 인생은 무의미하고, 윤리적인 기분들은 바탕이 없을 것이며 우주에 대해 설명할 수 없을 것이 틀림없다.”라고 확신했었다.

 

그녀가 남긴 여러 편지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가 하느님에 대해 가졌던 믿음은 1948년 캘커타로 옮겨가 ‘죽음을 앞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the Home for the Destitute Dying)’을 세운 직후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교도에게는 이런 일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상처에 구더기가 들끓고, 살아 있는데도 쥐들이 뜯어먹고 있는 걸인들을 보면,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테레사 수녀가 그랬듯이 그 누구라도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것이다. 그 뒤로 여러 해 동안 테레사 수녀는 다양한 고백자들에게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편지로 써서 보냈고, 그들은 “인내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라”고 권하였다.

 

그녀의 고백자들이 해주는 충고와 격려가 가끔은 도움이 되어 궁지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기도 했지만 그 어려운 상황은 항상 되돌아왔다. 만약 부처님께서 그녀의 고백을 들어주는 고백자였다고 가정해보자. 그녀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이 갑니다.”고 말씀드리면, 부처님께서는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은 좋은 것이오. 의심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오. 불확실[不明]은 의심이 가는 어떤 것에 대해 일어납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앙굿따라 니까야』1)

 

그녀가 살아온  상황에 비추어, 이런 말씀이 그녀에게 쇼크를 주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이렇게 여쭈어볼 수도 있다. “세존이시여, 하지만 하느님이 없다면 불멸의 영혼도 절대로 없을 것이고 따라서 구원도 없을 텐데요!” [이 질문을 받은]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누군가가 ‘아, 내가 그것을 가졌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것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몹시 슬퍼하고 한탄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픔을 느낄 것이오.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동요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오.” (『맛지마 니까야』1)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그녀에게 ‘무아(無我; anatta)’의 진리를 설명해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 다음에 ‘업’에 대해 말씀을 해주어 그녀가 “상과 벌을 내세워 모든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고도 윤리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실상을 볼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 ‘여덟 가지 고귀한 길[八正道]’를 가르쳐주어, 그녀가 “예수님이 안 계실지라도, 삶은 방향과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해주실 것이다. 그분은 또한 “의심을 가지는 것이 꼭 반역과 죄가 있다는 표시는 아니며 오히려 가끔은 지성의 표시일 수 있다”고 확신시켜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는 명상법을 보여주어 그녀가 내적으로 평정심과  평화를 닦게 해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테레사 수녀는 그녀가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선행을 계속해서 하고 동시에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새롭게 드러난 자료에 비추어 볼 때, 테레사 수녀가 그 동안 열광적일 정도로 활동하고, 자신에 대해 가혹하게 대하며 인간성을 요구해온 것들이 모두 그토록 힘들게 싸워온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그녀가 남긴 거의 모든 편지에서 발견되는, 끝없는 자기-비하[self-abasement]도 똑같은 이유에서 연원한다. 이 중 단 하나도 테레사 수녀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그 어떤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그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울인 헌신은 - 적어도 성자라는 말을 종교적인 의미로 쓰지 않을 경우에는 - 그녀를 성자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더욱 심각한 의심을 낫게 된다.

 

테레사 수녀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도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을 할 수 있었고, 이제 우리는 “그녀가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해왔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최소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가지는 동안에만은 그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상,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하느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녀의 삶을 그처럼 불행하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의 책임이 아니고] 오직 그녀의 신념이었다.

 

향 산/불교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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