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료명 |
조선수군세력(척) |
일본 수군 세력(척) | |
『宣祖實錄』(이순신 장계) |
전선13, 초탐선32 |
130여 | |
『宣祖修正實錄』 |
전선12 |
200 | |
『亂中日記』 |
초서체 Ⅰ |
|
133 |
초서체Ⅱ(속) |
|
130여 | |
全書수록본 |
|
330여 | |
「行錄」 |
10여 |
333 | |
『懲毖錄』 |
12 |
200여 | |
『亂中雜錄』 |
|
수백 | |
「故統制使李公遺事」 |
13 |
500〜600 | |
「鳴梁大捷碑」 |
10여 |
| |
『再造藩邦志』 |
13 |
500〜600 | |
『宣廟中興志』 |
10여 |
100여척(수백겹) |
위〈표1〉을 통해 볼 때 당시 참전한 양국수군의 세력에 대해 사료마다 다양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宣祖實錄』에 수록된 이순신의 장계가 가장 신뢰성 있는 자료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당시 조선수군의 세력은 전선 13척에 초탐선 32척이었다. 아울러 당시 명량수로에 진입하여 조선수군과 접전을 벌인 일본수군의 전선은 130여 척으로 보아진다.
이상의 수로환경과 조일양국의 전력을 염두에 두면서 당시의 해전경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亂中日記』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기타 사료로 보완하고자 한다.
〈그림3〉명량해전 상황도1
9월 16일 이른 아침에 망군이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온다고 하였다.51) 이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령을 하달한 후 정박해 있던 배들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그러면 여기서 이순신이 휘하 함대를 이끌고 나간 전투해역은 어디쯤일까?
여기에 대해서도 논의가 분분하다. 예컨대, 기존 연구 성과를 검토해 볼 때 해전장소로 두 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먼저 〈그림3〉의 상황도1에 표시된 바와 같이 명량수로의 최협부 근처와 그 바로 뒤쪽의 해상을 들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 해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조류의 영향이 미미한 상태여야 한다. 그래야만 전선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림3〉에서 이순신의 기함이 떠 있는 곳은 명량수로의 최협부로써 가장 유속이 빠른 곳이다. 따라서 당시 7knots이상의 조류가 흐르고 있는 상황에서 3knots에 불과한 선속으로 그 지점까지 노를 저어 갈 수도 없을뿐더러 그 뒤에 포진한 조선수군의 기타 전선들도 마찬가지로 역류를 타고서 진을 칠 수는 없다. 따라서 이곳은 전투해역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한편으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수중철쇄를 설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52) 그러나 이것 역시 사료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예컨대 이순신 함대가 나가자 일본 함대 130여 척이 조선함대를 에워쌌다고 한 『亂中日記』의 기록53)에 부합되지 않는다. 아울러 수중철쇄를 설치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하는 김억추에 대하여 이순신이 신뢰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러한 내용이 당시 사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54)
격전지로 제시하는 또 하나의 주장은 〈그림4〉해전 상황도2의 우수영 앞 해상에 포진한 가운데 전투를 벌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곳은 조류가 급하지 않아 배를 제어하기가 용이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기록과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림4〉와 같이 우수영 앞 해상에 진을 치고 있을 경우 『亂中日記』의 기록 중 다음의 내용들을 설명할 수 없다.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1마장 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있어 묘연했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했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점차 다가와서 사세가 낭패될 것이다.55)
즉 위 기록 중에 우수영 앞바다에 진을 친 상태에서 뒤로 물러난다는 사실은 우수영이 있는 육지를 말한다. 따라서 전투해역의 규모가 천 야드 미만에 불과한 곳에서 조선전선들이 1마장(약400미터)이나 뒤로 물러난다는 것과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가 멀리 떨어져 묘연할 정도의 현상은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조선함대가 우수영 앞 해상에 진을 치고 있다고 상정하더라도 명량수로의 최협부를 넘어온 일본함대 전체가 오른쪽으로 회전할 수는 없다.56)
이러한 분석결과와 당시의 조일 양국 수군의 전략을 고려해 볼 때 필자는 제3의 해역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그림1〉의 (C)해역이자 〈그림5〉와 같이 양도를 최전방으로 하여 포진한 형태를 상정할 수 있다. 이곳이야말로 당시 조일양국의 전략에도 부합되고 『亂中日記』의 기록에도 합치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시 일본의 전략이라는 것은 서해상으로 진출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마찬가지로 조선수군 역시 일본수군을 명량수로를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데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즉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는 것은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일일뿐더러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이라 그것이 신의 걱정하는 바입니다.”57) 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서해상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해전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순신이 우수영 앞 바다에 포진한다는 것은 일본군을 그대로 통과시켜 주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일본군을 수로 중앙을 끊어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그림5〉의 장소가 적합하다고 본다.
어쨌든 탐망군의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을 소집하여 일장 훈시를 한 다음 전투해역으로 진입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적선이 조선전선의 10배 이상 되는 대규모이므로 피난선 100여 척을 동원하여 후방에서 포진하도록 하였다.58) 일종의 擬兵戰術인 것이다. 아울러 휘하 13척의 전선 중 12척은 명량해협을 가로질러 일자진을 형성하도록 하였다.59) 그리고 그 자신은 최선봉에서 일본함대와 접전을 벌였다.
이순신이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11시 전후로 추정된다. 조선수군이 포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함대 130여 척이 순류를 타고 명량수로를 넘어와 조선수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러한 적의 막강한 세력에 질린 휘하 장수들은 조수를 따라 자꾸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보이지가 않을 정도였다.
이순신 기함은 선봉에서 홀로 버티면서 지자와 현자총통을 쏘았다. 특히 조란환은 마치 바람과 천둥처럼 맹렬하였고, 군관들도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 적선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워낙 많은 수의 적선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순신 기함에 승선해 있던 군졸들이 잔뜩 겁을 집어 먹었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이순신은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 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라고 독려하였다.
그러나 긴 시간을 홀로 버틴 이순신은 더 이상 버티다가는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중군의 令下旗를 세워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을 부르는 동시에 招搖旗를 세워 다른 장수들을 호출하였다. 이때 거제현령 안위의 전선이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이순신은 안위에게 전투에 적극 임하지 않고 회피한 행위에 대해 군법을 적용시키겠다며 전투를 독려하였다. 이어서 도착한 중군장 김응함을 불러서는 대장을 구하지 않는 죄를 물을 것이로되 우선 공을 세워 갚으라고 질책하면서 전투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두 배가 적진 속으로 돌입할 즈음에 일본군 장수가 탄 배가 휘하 2척과 함께 안위의 전선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선 3척이 안위의 전선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안위 배의 격군 7~8명이 바다에 떨어지는 등 위태로운 광경을 연출하였다. 안위 배의 군사들은 登船하려는 일본군을 맞아 몽둥이와 긴창, 수마석 덩어리 등으로 적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기운이 다할 무렵 이순신의 기함이 일본군선을 맹렬히 공격하여 일본군선 3척이 거의 뒤집히게 되었다. 이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잇달아 합력하여 적을 섬멸하였다. 이때 바다에 빠진 일본군 장수를 降倭 俊沙가 알아보고는 ‘마다시[來島通總]다’ 라고 하여 그를 건져 올려 효수하여 적에게 보였다. 이에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후 오후 1시 30분경에는 조류가 남동류로 바뀜으로써 조선수군들에 유리한 형세를 보였다. 조선수군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계속 대포를 쏘아 적선을 격침시켰다. 한편 오후 4시가 넘어서는 조류가 최강류로 흐르고 북풍도 강하게 불어와60) 바람을 이용하여 화공전을 전개하였다.61)
결국 해전의 결과 일본군선 31척이 완전히 침몰하고 무수히 많은 적선이 파괴된 채 일본군은 남해상으로 후퇴하였다.62) 그리고 저녁 무렵에는 일본군선이 모두 퇴각하였다. 조선수군은 적을 쫒아 명량수로 동남단으로 가려고 했지만, 회항시 역풍이 염려되어 일단 진을 친 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썰물인데다가 바람이 워낙 강하게 불고 파도마저 높아 건너편 진도 쪽 포구로 대피하였다.63) 그러다가 밤 8시경 조류방향이 북서류로 바뀜을 틈타 달빛을 타고 진을 唐笥島로 옮겨 밤을 보냈다.
이 해전에서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이순신 기함에 승선한 장졸 중 2명이 전사하였고 다른 전선들에서도 다수가 전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자료는 없지만 근접전을 치렀기 때문에 조선수군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향선에 승선한 가운데 전투에 참전한 의병들 중에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조선수군의 전선은 1척도 침몰되지 않았다.
한편 일본수군의 인명피해를 보면 장수 來島通總이 사망하였고, 일본군의 절반 이상이 死傷하였다. 아울러 조선수군의 화포공격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도망하는 자가 많았으며, 다른 수군장수 藤堂高虎는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64)
Ⅴ. 조선수군의 승리요인
1. 전선과 무기체계의 위력
명량해전 당시 조선수군이 보유한 전선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이중 전투력을 갖춘 전선은 판옥선 13척 뿐이었다. 반면에 일본전선은 130여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1척도 격침되지 않았고 일본전선만 31척이 침몰하였고 많은 전선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조선수군의 전선과 무기체계의 위력이 일본의 그것에 비해 우수하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수군의 전선은 판옥선과 귀선, 그리고 사후선 또는 협선이었다. 이중 사후선 또는 협선은 전투선이 아닌 연락 또는 정탐용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명량해전 당시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귀선은 참전할 수 없었다. 오직 판옥선만이 전투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당시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일본의 전선에 비해 어떤 점이 뛰어났을까? 그 기능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특징으로 대변할 수 있다. 첫째,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갈라놓고 비전투원인 노군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 수군에는 전투력을 가진 병사와 노역만을 하는 격군으로 구분되었었는데, 판옥선에서 격군은 판옥 안에 자리 잡고 적에게 노출됨이 없이 櫓役에만 전념하고 병사들은 상갑판 위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둘째, 병사들이 높은 자리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전투에 임할 수 있게 된 점이고, 더욱이 적이 접근해서 배 안에 뛰어들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장점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해전의 전술과도 관계가 깊다. 이를테면 일본의 수군은 무조건 적선에 접근해서 배 안에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여 적선을 송두리째 점령해 버리는 전법을 장기로 하였다.65) 그런데 판옥선은 선체가 판옥구조로 높이 솟아 있어서 일본 군사들이 아무리 접근해도 기어오르기가 매우 힘들게 되어 있다.66)
셋째, 조선수군의 판옥선에는 총통으로 대변되는 화포를 장착할 수 있었다. 조선수군의 화포는 당시로서는 첨단무기였다. 당시 조선수군의 화포종류와 사정거리를 다음 〈표2〉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표2〉임진왜란 시기 군선탑재 화기의 종류 및 성능
총통종류 |
피사체 |
사정거리 |
천자총통 |
대장군전/조란환 400발 |
900보/10여리 |
지자총통 |
장군전/조란환 200발 |
800보/10여리 |
현자총통 |
차대전(은중차중전)/조란환 100발 |
800〜1500보/10여리 |
황자총통 |
피령차중전/조란환 40발 |
1100보/10여리 |
별황자총통 |
피령목전(철령전)/조란환40발 |
1000보/10여리 |
한편 일본의 수군은 대형선인 안택, 중형선인 관선, 소형선인 소조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안택은 갑판 위에 층루를 설치한 대형군선이었다. 그 크기는 판옥선과 비슷하였다. 관선은 임진왜란 당시 별로 크지 못한 중형군선으로 판옥선보다 훨씬 크기가 작았다. 그리고 소조는 조선의 사후선보다 약간 큰 소형군선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전투함은 안택선과 관선이었다.67)
그러나 일본군은 안택선과 관선을 막론하고 화포를 장착할 수 없었고, 오직 사정거리가 200미터 안팎이자 유효사거리 50미터에 불과한 조총이 유일한 화포였다.68) 따라서 사정거리가 일본군에 비해 훨씬 길고 파괴력 또한 뛰어난 조선수군의 화포를 일본군은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명량해전에서도 이러한 전력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난다. 예컨대 다음의 두 가지 기록을 통해서도 이를 여실히 증명할 수 있다.
안위가 황급히 곧바로 들어 싸우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적선이 안위의 배에 달라붙고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안위의 배가 있는 곳으로 있는 데로 갔다. 안위 배 위의 군사들은 죽기를 한하여 마구 쏘아대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같이 쏘아대어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조리 섬멸하니 천행 천행이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30척도 깨뜨림을 당하니 모든 적들은 당해내지 못하고 다시 범접해 오지 못했다.69)
상이 이르기를, “이 왜적은 천하에 대적하기 어려운 적이다. 임진왜란 때 천하의 힘을 동원하였지만 어디 당하겠던가?”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정유년에 울도와 명량도에 왜선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가 하나의 판옥선을 띄워 해전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하였다.70)
위의 사료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안위가 타고 있던 판옥선 1척에 일본전선 3척이 공격하였지만 안위의 전선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는 이순신의 기함이 도운 덕분이기도 하지만 도움 이전에 상당시간 동안 안위의 전선이 일본전선의 등선을 막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위의 사실을 통해볼 때 참전한 일본전선의 대부분이 관선 종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당시 조선수군의 무기체계가 얼마나 위력적이었는가를 살펴보자. 다음의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地字와 玄字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마치 바람과 천둥처럼 맹렬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71)
위 기록에서 보듯이 당시 이순신 기함은 地字와 玄字 등 화포를 쏘아 적선을 당파하였다. 여기서 ‘탄환’이라고 표현한 것은 조란환을 의미한다. 이는 앞의 〈표2〉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각각 200발 또는 100발의 탄환을 동시에 발사함으로써 적의 인명을 살상하는 데 매우 탁월하였다. 더욱이 당시 화포의 명중률이 높지 않은 상태에서 근접해서 쏘는 화포의 명중률은 매우 높았을 것이다. 비록 이순신 기함 1척이 분전했지만 일본군선이 감히 앞으로 돌진해 올 수 없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당시 조선수군의 전선은 비록 판옥선 13척에 불과했지만 일본전선에 비해 그 기능이 매우 우수하였다. 아울러 해전에 참가한 일본전선도 대장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관선 위주로 편성한 것도 해전승리의 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아진다.
2. 리더십
리더십은 하우스(House) 등에 의하면 “개인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동기를 부여하며 타인이 조직의 효과성과 성공을 위해 공헌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리차드와 엥겔(Richards & Engle)은 “리더십은 비전을 천명하고 가치를 구현하며 일을 달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72)
현대전에 있어서 전장의 역동성은 화력, 기동력, 방호력 그리고 지휘관의 리더십에 의해 발휘되듯이 16세기 말엽의 임진왜란 시기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당시에는 화력, 기동력, 방호력이 완벽하지 못했지만,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은 미흡한 여타 조건에 대한 보완은 물론 그 상승효과를 극대화시켰다.73) 명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승리하게 된 배경에도 이러한 이순신의 리더십이 기여한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명량해전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교서를 받은 이순신은 패잔전선 10여 척을 이끌고 명량해전을 맞게 되었다. 이전 칠천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궤멸적인 피해를 입어 이순신에게는 불과 13척의 전선과 전쟁공포증에 감염된 군사들 일부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일본군을 물리칠 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명량이라는 천험의 수로에서 물목을 지키면서 우수한 전선과 무기체계를 잘 활용하고 擬兵戰術까지 배합한다면 승부는 예측할 수 없지만, 한 번 해볼만한 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아진다.74)
그런데 문제는 부하들의 전투의지였다. 수백 척의 일본전선이 코앞에 당도하고 있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오는데 우리의 전선은 불과 13척, 10배가 넘는 일본전선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더구나 칠천량 해전에서 동료들이 전사하는 모습들을 목도한 후라 부하들의 전쟁공포증은 극에 달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도저히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이순신은 무엇보다도 부하들의 전투의지를 강화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해이해진 군기를 확립하는 것도 병행되어야만 했다.
이순신은 우선 부하들의 군기를 확립하고 전투의지를 고양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예컨대, 8월 17일에는 군량을 훔친 자에 대하여 장형을 가하였고,75) 8월 19일에는 교유서에 숙배하지 않은 경상우수사 배설의 죄를 묻는 차원에서 그 영리에게 장형을 가했다.76) 아울러 8월 25일에는 거짓 경보를 한 자들을 효시하여 군기의 엄정함을 보였다.77) 이순신 자신도 밤낮으로 전투구상을 하면서 갑옷을 벗지 않고 침식을 하였다.78)
아울러 조선수군이 어란포 앞 해상에 머무르고 있을 때인 8월 28일 일본군선 8척이 침입해 왔을 때 이순신은 선봉에 서서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적을 물리쳤다.79) 이어서 벽파진에 머무르던 9월 7일 일본군선들이 야습을 해 왔을 때 이순신 기함은 선두에 위치하여 적을 물리쳤다.80)
이와 같이 솔선수범의 자세로 부하들의 전의를 고양시킨 이순신은 大會戰을 하루 앞둔 9월 15일 벽파진에서 전라우수영 앞으로 진을 옮긴 후, 부하 전장병들을 모아 놓고 최후의 훈시를 하였다. 즉 “병법에 말하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는 말로서 부하들의 전의를 고양시켰다.
드디어 9월 16일, 순류를 타고 일본군선 130여척이 울돌목을 통과하여 조선 수군이 진을 친 곳에 이르게 되었다. 충무공은 자신이 탄 배를 맨 앞에 포진시키고 그 뒤에 부하들의 전선 12척을 횡렬진으로 포진시켜 적을 맞았다. 그리고 그 뒤에는 海上義兵들이 탄 100여척의 향선들이 저마다 배 위에 깃발들을 꽂고 호응하여 마치 멀리서 보면 우리 전선 같이 착각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일본 전선들이 이순신이 탄 기함을 몇 겹으로 개미떼처럼 에워쌌다. 이순신은 배에 함께 탄 장병들을 독려하면서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그 사이 뒤에 포진했던 부하들의 전선은 조류를 핑계로 뒤로 자꾸만 물러갔다. 왜적들의 엄청난 규모에 자신감을 상실한 것이었다.
이순신 기함만 홀로 적과 상당시간 교전을 하는 가운데 휘하 전선들이 참전하지 않자 기함에 승선한 장졸들마저 전의를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목도한 이순신은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에는 곧 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쏘아라.”라고 독려하면서 부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이순신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순신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산다.’고 전날 훈시한 말에 대해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다. 그 가운데에 이순신이 노린 효과는 두 가지로 생각된다. 한 가지는 일본수군들과의 싸움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솔선하여 가르쳐 준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지휘관이 이렇게 분전하는데 부하들이 도망쳐서야 되겠느냐는 죄책감을 일깨워 준 것일 것이다.
교전시간이 길어지자 이순신은 더 이상 홀로 싸우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이제는 엄정한 군기확립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임을 인지하였다. 따라서 ‘영하기’와 ‘초요기’를 올려 여러 장수들을 호출하였다. 이순신은 먼저 다가온 안위와 김응함을 군법적용을 하겠다며 전투를 독려하였다. 이를 계기로 다른 배들도 전투에 합류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조선수군은 혼연일체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이 리더로서 한 역할은 부하들의 두려움을 해소하여 전투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하여 시행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전략가로서의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고, 그는 자신의 이러한 판단을 믿은 가운데 이를 적극 실천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순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지만, 이순신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산다는 진리를 누구보다도 신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부하들의 전투의지를 고양시켜 적극적으로 참전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끈 것이다.
물론 이순신의 이러한 리더십은 부하들의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내재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순신이 평소에 리더로서 필요한 자질과 인품을 구비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순신의 리더로서의 능력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로 이순신이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전라도 연해안을 따라 서진할 무렵 그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종군하기를 희망한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8월 8일 순천에 이르렀을 때는 60여 명이 휘하에 몰려들었고, 보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120명의 군사가 막하에 자원입대하였다. 그리고 해남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수백명의 兵員을 확충할 수 있었다.
요컨대 명량해전의 승리는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과 그의 능력과 인품을 신뢰한 부하들의 적극적인 참전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3. 다양한 수군전술
명량해전 승리의 핵심요인으로 조선수군의 다양한 전술을 들 수 있다. 명량해전 때에 구사된 전술은 이순신 자신의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능력81)과 당시에 통용된 조선수군의 일반적인 전술이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순신은 패잔전선을 수습하여 벽파진으로 진을 옮긴 후부터 장차전에 대한 구상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치른 많은 해전을 통해 일본군의 전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했을 것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아울러 백의종군 중일 때도 통제사 시절의 막하 장수들로부터 전황에 대해 수시로 보고를 받음으로써 재침한 일본군의 전술에 대해서도 파악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칠천량해전 패전 후 수군재건 차 연해안을 답사할 때 만난 참전 장졸들로부터 칠천량해전 당시에 조선수군이 패한 원인과 일본군의 전술에 대해서도 상세한 파악을 했을 것으로 보아진다. 여기에다가 어란포와 벽파진에서 치른 일본수군과의 소규모 해전들은 그의 적 정보에 대한 확신과 전술구상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그의 해전지휘경험과 적 정보수집, 그리고 3차례의 소규모 해전을 치르면서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판단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조선수군의 전선과 무기체계가 일본군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다는 점,82) 조류가 거센 상태에서 일본수군이 그들 특유의 전법인 ‘등선백병전’을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 그리고 명량수로의 특성 파악을 통해 조류의 방향 변화에 대한 사전 지식, 일본수군의 전선 중 좁은 물목인 점을 고려하여 안택선보다는 관선위주의 수로 진입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 등이다. 이순신으로서는 이러한 전투에 대한 예측을 통해 조선수군이 승리할 방안을 강구하여 시행한 것이다.
한편 명량해전시 조선수군의 전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수군의 일반적인 전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수군은 높고 견고한 판옥선에 총통을 설치하여 이를 이용한 전술을 개발함으로써 해상에서 일본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전술 가운데 하나의 특징은 적 지휘선 또는 대장선에 대하여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승기를 잡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1592년 6월 2일의 당포해전에서 이러한 전술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다음의 장계를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을 들이받으면서 용의 입으로 현자 철환을 치쏘게 하고, 또 천자․지자 총통과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쳐부수자 뒤따르고 있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번갈아 쏘았는데, 중위장 권준이 돌진하여 왜장을 쏘아 맞히자, 쿵하는 소리를 내며 거꾸로 떨어지므로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흥양 보인 진무성이 그 왜장의 머리를 베었습니다.83)
이렇게 하여 적의 기함을 먼저 공격함으로써 적은 사기를 잃고 우왕좌왕 할 때 우리 수군들은 사기충천하면서 더욱더 공격에 박차를 가해 적을 소탕했던 것이다. 여기서 ‘층루선’이라는 적의 주력전선을 천자‧지자‧현자총통을 이용하여 먼저 당파함으로써 적선을 무력화 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당시 조선수군은 주력전선인 판옥선과 소수의 특수돌격선인 거북선이 큰 활약을 하였다. 이 두 종류의 전선에는 당시로서는 첨단무기인 총통이 탑재되어 있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조선수군의 전선에 최대한 근접하여 조총과 단병무기를 이용한 등선백병전만으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조선수군의 전선에서 적의 대장선 또는 선봉선에 근접하여 총통을 발사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을 수 있었다.
조선수군의 전술 중에서 대다수 해전에서 고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火攻戰이다. 화공전이란 화기를 이용하여 적선을 불태워 침몰시키는 전법으로 철선이 개발되지 않은 전근대시기 대부분의 해전에서 보이는 일반적 전술이었다. 이를테면 당시 모든 배들은 목선이었고, 따라서 불에 약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오늘날과 같은 자체 폭발에 의한 파괴력을 가진 피사체가 없던 당시로서는 화공전이야말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면 이 화공전술은 적에게 어떤 타격을 주었는가를 살펴보자. 우선 적의 배는 모두가 목선이므로 불에 닿으면 곧 불이 붙어 싸움보다 불에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그리고 적들은 모두 개인화기인 조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배 안의 화약에 불이 닿으면 쉽게 폭발되어 삽시간에 불이 붙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李忠武公全書』의「諡狀」에 기록된 다음의 당포해전 관련 기사를 통해 볼 때 이를 입증할 수 있다.
공은 잡아온 적의 층각 배를 앞으로 내어놓고 적들과 1리쯤 떨어진 곳에서 불을 지르니 배 안의 화약이 폭발하여 큰 소리와 불꽃이 진동하자 적이 또 패하여 달아났다.84)
이 화공전술은 적중하여 매 전투마다 적들은 크게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공전술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당시 전선에 탑재되어 있던 총통 등 대형화기의 역할이 컸음은 물론이다.
총통을 이용한 또 하나의 수군전술은 기동당파전술을 들 수 있다. 撞破란 적선을 충격하여 부수는 것을 말한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돌격선인 거북선에는 화포가 장착됨으로써 화포에서 발사되는 피사체85)에 의한 적선의 당파가 일반적인 전술형태로 정착되었다.
즉 일본군의 조총 사격이 미치지 않는 원거리에서 사정거리가 1km정도인 大箭類를 발사함으로써 적선을 당파한다. 적선이 무력화되는 것을 확인한 후 근접하면서 인마살상용인 조란환을 집중 발사하여 적의 인명을 살상한다. 이후 접근하여서는 화살 또는 승자총통을 발사하여 적을 완전히 무력화 시킴과 동시에 적선을 불태워 침몰시키는 형태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순신의 전술구상과 당시 조선수군의 일반적 전술형태를 염두에 두고 명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구사한 전술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일본함대와 교전할 때 이순신이 진을 친 곳은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속이 3knots정도 흐르는 양도 북서쪽 해상을 선택하였다. 이것은 당시 조선전선의 속도가 약3knots정도로 추산되므로 9.5knots의 최강유속이 흐르는 곳에 진을 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 진을 치기 위해서는 조류와 역방향으로 부지런히 노를 젓거나 닻을 내려 지탱하여야 한다. 그런데 노를 저을 경우 격군이 피로해져서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효과적인 조함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이순신은 모든 전선들을 일자진으로 형성한 후 닻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분의「行錄」86)과 이민서의「鳴梁大捷碑」87)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때 조선수군이 진을 친 형태는 횡렬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내재한 것으로 보아진다. 즉 첫째 일본군을 통과시켜 주지 않겠다는 전략적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둘째 화포의 위력을 극대화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군의 전투공간을 제한한다는 점이다. 이때 만약 종렬진을 형성했을 경우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우선 일본함대는 유사시 조선수군과 해전을 회피한 채 수로를 통과해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일본함대가 조류에 힘입어 조선함대 옆을 통과할 때 일본군선을 격침시킬 방안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아울러 일본함대로부터 全方位로 포위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조선수군이 펼친 횡렬진은 매우 적절한 진형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의 효과는 무엇보다도 일본군의 전선 수가 많아도 좁은 수로에 갇혀있는 상태다 보니 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게 했다는 데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함대 13척과 조선함대 13척이 각개 대등하게 전투를 벌이는 효과를 초래한 것이다. 따라서 전투초기 이순신 기함과 안위의 전선 등 몇 척으로 싸울 때는 조선수군이 위험할 수 있었지만, 전투 중반에 이르러 조선수군의 모든 전선이 전투에 투입된 때에는 조선수군이 우세한 상태에서 교전한 것이다.
다음으로 적 대장선에 대한 집중공격으로 적군의 사기를 꺾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조선수군의 일반적인 전술이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적 대장선을 집중 공격하여 대장선을 침몰시키고 적장 來島通總을 붙잡아 효시하였다. 이를 본 일본수군은 사기가 크게 꺾여 전의를 상실할 정도였고 반면에 조선수군은 전의가 크게 고양되었을 것이다.
명량해전에서 드러난 수군전술 중 필자가 가장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조류와 바람을 이용한 화공전을 적절하게 구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투가 치열해진 중반 이후에 주로 채택한 전술이었다. 다음 몇 가지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군은 싸울 뜻이 없는 양 보이며 거짓으로 적의 포위 속으로 들어가니, 왜적은 아군의 두려워하고 겁냄을 기뻐하며 육박하여 난전이 되었을 때 홀연히 장수 배에서 주라가 번갈아 불어대고 지휘기가 일제히 흔들리고 도고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이 적의 배에서 일어나 여러 배가 연소되니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창검이 어울려서 찌르니 죽는 자는 삼대가 쓰러지듯 하였고, 불에 타죽고 빠져 죽는 자가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88)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다투어 와서 덮쳐 둘러싸고 바싹 가까이 와서 싸웠다. 갑자기 장선에서 태평소를 불고 깃발이 일제히 일어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은 적의 여러 배에 옮겨 붙었다. 순신은 이긴 기세를 타고 공격하니 죽은 자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89)
순신이 적의 머리를 달아매고 배 위에서 풍악을 치며 도전하니 적이 분노하여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나오는데 순신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불을 놓아 여러 배들을 불태우니 시뻘건 불길이 바다를 덮은 속에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적병이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90)
위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조선수군은 해전당일 조류의 방향이 북서류에서 남동류로 바뀐 오후에 마침 불어 온 북풍을 이용하여 화공전을 구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위의 밑줄 친 기록을 볼 때 화공전은 우발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순신이 벽파진에 유진하고 있던 중 9월 3일부터 5일까지 북풍이 불었다고 기록한 사실과 더욱이 명량해전 직전인 9월 13일과 9월 14일에도 북풍이 분 사실을 기록한 것91)을 볼 때 북풍을 예상하여 전술을 구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화공전은 당시 적선을 침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매우 체계적으로 수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擬兵戰術이다. 즉 이순신은 우리의 수군세력이 일본군에 비해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적에게 우리의 전력이 막강하다는 오인을 하도록 鄕船 100여척을 동원하여 본진 후미에서 성원토록 조치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전술은 임진왜란 초기 첫해전인 옥포해전에서 鮑作船 46척을 동원한 사례와 유사하다.92) 즉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이 전투력이 없는 포작선을 동원한 것은 90여척의 대규모 함대로 예상되는 일본수군의 세력에 외형적으로나마 맞서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당시 전투력을 갖춘 24척의 판옥선만으로는 일본함대에 외형상으로도 위축될 것임을 인지한 이순신이 협선 15척과 어선 46척을 동원하여 외형상으로 위세를 돋군 것이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향선을 동원한 것은 조선수군에게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고, 일본수군에게는 조선수군의 전력이 막강하다는 인식을 통해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초탐선 32척도 함께 의병전술에 동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93)
4. 의병들의 활약
명량해전시 조선수군의 승리요인으로 이순신 막하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장졸들의 적극적인 참전을 꼽는 것은 당연하다.94) 그러나 이 분야는 앞에서 언급한 이순신의 리더십과 전술부문에서 언급된 면이 많기 때문에 생략한다. 여기서는 이순신의 현직막하 인물이 아닌 義兵으로 참전한 인물들의 활약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이러한 의병들에 관한 활동내용은 『湖南節義錄』과『李忠武公全書』의「同義錄」에 수록된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95)
의병활동과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피난민들이 100여 척의 鄕船을 동원하여 후방에서 후원하였다는 것이다. 피난민들은 가까운 해안 지방의 여러 읍에서 모여든 다양한 신분계층의 집단이었고, 그 지도자들은 모두 士人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활동에 관해 잘 나타낸 것으로 『李忠武公全書』의 「紀實」과「同義錄」에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그 때 백진남, 김성원, 문영개, 변홍원, 백선명, 김택남, 임영개 등 십여 명이 각각 피란선을 가지고 와 모였는데 “... 듣자오니 공이 방금 피란선으로 하여금 먼바다에 열을 지어 군대같이 가장하라 하시니 이 기회에 같이 나간다면 파죽의 승세가 오직 이 한번에 있을 것이오”하므로 이순신은 대답했다.96)
이공은 공로를 세워 속죄하라는 명령을 받자 어머니의 상사를 만나고, 다시 상중에 기용되어 바로 순천부로 달려갔다. 불에 타다 남은 배 13척과 수군 수백 명을 수습하여 왜적을 명량에서 크게 깨뜨렸다. 그 때 호남 백성의 피란선 백여 척이 이공을 믿고 의지를 삼아 약속을 받고 군량을 도와 후방의 성원이 되었는데, 거기에는 백송호도 있고 정운희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97)
명량해전 당시 피난민 우두머리로서 이순신의 작전에 호응했던 인물로는 위의 기록에서처럼 장흥․해남․영암․흥양 등지에서 온 마하수․백진남․김성원․문영개․변홍원․백선명․김택남․임영개․김안방․백송호․정운희 등이 있었다.98)
그리고 향선의 의병지도자 중의 일원이었던 오익창은 본진과 피난선단 사이를 왕래하면서 義穀을 전달하고 冬瓜〔동아〕를 공급하여 수군의 갈증을 풀어주기도 하고, 솜이불을 모아 물에 적신 다음 적의 철환을 막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99)
또한 피난민들은 적을 피하라는 이순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명량 인근지역을 떠나지 않고 군량이나 군복을 조달하거나 피난선을 이용하여 세력이 강하게 보이는 등 응원전을 펼치기도 하였다.100) 아울러 피난선 300여 척에서 모여든 백성들과 나주진사 임선․임환․임업 등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군사들에게 군량을 지원하기도 하였다.101) 그 외에도 전 홍산현감 윤영현과 생원 최집, 무안에 사는 김덕수도 군량을 제공하였다.102) 이렇게 전라도 해안지방 각처에서는 많은 의병들이 이순신의 막하에 와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병참지원 등 수군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의병활동은 또 다른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주로 해안지역 각지에서 수십 명에서 수백에 이르는 의병조직을 갖추어 해안에 출몰하는 적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는 형태였다.
예컨대 명량해전이 있었을 무렵 명량수로와 가까운 전라우도의 장흥․강진․해남․영암 등지에서도 활발한 의병전이 전개되었다. 영암의 전몽성․유장춘과 나주의 박문립 등이 수군과 협력하여 명량 인근의 해안지대에서 유격전을 펼쳤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李忠武公全書』의 「同義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왜적은 바깥 바다에서 연해의 여러 고을에 침입하여 목포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와서 방자하게 노략질하였다. 마침내 통제사 이순신이 우수영에 머문 왜군을 치게 되자, 이 의병의 진중으로 편지를 보내 목포 일대와 바다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왜선 수십 척이 고을 서쪽 해암포에 머물러 있어 즉시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십대로 나누고 영장을 두었다. … 드디어 군사를 정비하여 나아가 노략질하는 왜적을 격파하였다.103)
이처럼 명량해전을 전후하여 강진․해남․영암 등 가까운 연해지방에서 펼쳐진 의병의 유격전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시 말해 만약 일본군이 명량수로 연해의 육지를 장악하여 육지에서 조총으로 공격할 경우 우리 수군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 것이 바로 육상에서의 의병들이 벌인 유격전이었다. 이와 같이 수군의 활약뿐만 아니라 의병의 활동도 명량해전 승리의 주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영암의 전몽성․유장춘․박문립 등이 주축을 이룬 의병활동이 수군과의 긴밀한 협력 하에 전개되었으며,104) 해남 의병이 “왜인의 머리와 환도 한 자루를 가져와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서도 소규모의 전투에 의병이 참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05) 이러한 의병활동들이 수군의 전력을 보강하고 해상작전을 뒷받침하여 명량대첩의 승리에 기여하였을 것이다.
한편『湖南節義錄』에 의하면 명량해전에서 다음의 인물들이 큰 활약을 했음을 알 수 있다.
宋德馹 … 정유년에 진도 군수로 제수되었는데 이충무공이 공을 裝船使에 겸하여 수군 前部將으로 삼았다. … 왜적을 명량에서 막았으며, 왜적의 장수 馬多時를 죽이고 다시 왜선 수십 척을 쳐서 깨뜨렸다.
徐壽長 … 달성 사람으로 임진년에는 어가를 호종했다가, 정유년에는 발포의 만호로 진도군수 송덕일을 따라 명량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宋智 … 정유년에 이충무공이 다시 통제사로 부임하자 공은 조카인 진도군수 덕일과 더불어 이충무공의 막하로 들어갔다. 수군 후부장이 되어 송계현 등과 더불어 명량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왜적과 싸워 왜적의 장수를 쏘아 죽이고 통정 승지에 승진되었다
宋繼賢 … 정유재란에는 족형 희립 및 두 아우 계량, 계창과 진도군수 송덕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가지고 명량싸움에 많은 공을 세웠는데, 충무공이 그의 전공을 기특히 여겨 조정에 보고하여 조정에서는 군자감에 제수하였다.
宋繼昌 …정유년에는 족형 희립을 따라 함께 이통제사의 막하로 가서 군무와 작전에 참획하고 명량에서 싸워 크게 승전하였다.106)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송덕일․서수장은 현직에 있었던 인물로서, 송지․송계현․송계창 등은 의병의 신분으로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유렴은 집안 하인들을 거느리고 의병을 모아 명량해전에서 전사하였고, 김응추는 김억추의 동생으로서 형을 따라 명량에서 싸우다가 탄환을 맞고 운명하였으며, 장우한은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서 군량을 마련하고 나대용과 박문룡과 함께 전투에 기묘한 비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107)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명량해전시 조선 수군이 승리한 배경에는 이순신이 재기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전라도 지역 연해민들이 자원입대하여 활동하거나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등 수군의 빈약한 전력을 보강시켰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나아가 이들 중 다수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공훈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수군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Ⅵ. 맺음말
명량해전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많은 쟁점을 낳고 있다. 그중 참전한 양국 수군의 세력과 거북선 참전문제, 그리고 조류의 시간대별 방향과 유속 등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해전장소와 승리요인 등은 아직도 쟁점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명량해전에 대해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특히 여러 가지 쟁점 사안 중 해전장소와 전술문제를 중심으로 조선수군의 승리요인을 도출해 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먼저 해전장소는 기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명량수로의 최협부나 우수영 앞바다가 아닌 양도보다 북서쪽으로 더 멀어진 장소가 격전지로 타당하다는 판단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이순신의 전술과 많은 자료들에 나타난 기록들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이다.
다음으로 조선수군이 승리한 원인은 기존연구에서 제시한 조류를 이용한 이순신의 전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수군의 전선과 무기체계의 위력이 일본군을 압도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견고하고 높은 조선의 판옥선은 보다 약하고 낮은 일본의 관선을 압도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일본군이 조총과 도검류만으로 무장한 데 비해 조선수군은 대형총통을 이용한 우세한 화력으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둘째, 조선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참패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후 패잔전선을 수습하고 부하들의 전의를 고양시켜 궁극적으로 승리를 이룩한 이순신 자신의 리더십을 들 수 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후 전략구상과 함께 조선수군의 전의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적인 수단은 솔선수범과 엄정한 군기확립이었다. 특히 명량해전 당일에 이순신 자신이 탄 배가 가장 선두에서 활약한 것은 그의 솔선수범적 리더십의 백미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명량해전 당일에 구사한 다양한 수군전술을 들 수 있다. 이는 이순신의 전략전술구상과 당시의 조선수군의 일반적 전술이 접목된 형태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명량수로를 사수하는 방법으로 조류의 영향이 비교적 작은 양도 북서쪽의 해상에 횡렬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전선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닻을 내려 전선의 속도와 비슷한 유속에도 작전을 할 수 있었다. 아울러 화포발사를 통해 기선을 제압함으로써 일본함대가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특히 일본군선을 침몰시키는 방안으로 당시 강하게 불어 온 북풍과 조류를 이용하여 화공전을 체계적으로 구사하였다. 그리고 피난선을 전선같이 꾸며 조선수군의 세력이 강하다는 오인을 하도록 하는 擬兵戰術로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넷째, 義兵들의 적극적인 참전이다. 이는 해상과 육상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해상의병들은 이순신이 동원한 향선에 있던 의병들로 이들은 군수물자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육상의병들은 해남‧강진 등 전라우도 지역의 육상에서 적의 침입을 막아 명량수로에 진입해 있는 조선수군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위와 같은 명량해전시 조선수군의 승리요인 외에 다음 몇 가지를 추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명량해전시 조일양국의 전선 숫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宣祖實錄』에 기록된 이순신의 장계와『亂中日記』의 기록을 토대로 할 때 조선수군의 전선 수는 13척이었고, 일본군의 전선은 명량수로에 진입한 관선으로 130여척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거북선 참전은 없었다고 보아진다. 이는 본문에서 선행연구의 성과에 동의한 면도 있지만, 당시 거북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조류의 영향이 지대한 명량수로의 특성 상 별다른 활약을 보일 수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수중철쇄 사용은 당시 기록과 해전상황을 유추해 볼 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도 선행연구의 결과를 따른 것이긴 하지만 해전의 격전지역이 명량수로의 최협부가 아닌 만큼 수중철쇄 사용은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1) 기존 이순신 관련 논저의 대부분에 명량해전을 기술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소개를 생략한다. 다만 명량해전에 관한 연구 성과는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韓國海洋史』는 육당 최남선이 1951년 5월 해군 촉탁군무원으로 임용되어 해군복무 중 남긴 유작으로 1954년 11월 10일 해군본부 전사편찬관실에서 발행한 책자이다. 이를 2004년 1월 30일 해군본부 군사연구실에서 영인본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자는 총 4편(제1편 고대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제2편 고려시대, 제3편 조선시대 전기, 제4편 조선시대 후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제3편 제12장에 명량해전에 관한 연구 성과가 기술되어 있다.
3) 崔碩男,『韓國水軍活動史』鳴洋社,1965, 253〜266쪽 ;『救國의 名將 李舜臣』(下)교학사,1992, 288~385쪽.
4) 李炯錫,『壬辰戰亂史』下卷, 壬辰戰亂史刊行委員會,1974, 1032~1039쪽.
5) 趙成都,「鳴梁海戰硏究」『軍史』제4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2. 이 논문은 해남문화원이 발간한『鳴梁大捷의 再照明』(1987)에 재수록 되어 있다.
6) 趙成都,「鳴梁海戰硏究」『鳴梁大捷의 再照明』해남문화원‧해남군, 1987. 104쪽.
7)『李忠武公全書』권9, 부록1 李芬 撰「行錄」“粧作龜艦 以助軍勢”
8) 趙成都, 앞의 논문, 101쪽, 주22) 참조.
9) 趙湲來,「壬亂海戰의 勝因과 全羅沿海民의 抗戰」『鳴梁大捷의 再照明』해남문화원‧해남군, 1987.
10) 위의 논문, 83쪽.
11) 趙湲來는 위의 글 83쪽에서, 靑柳綱太郞,『征韓役日韓史蹟』제35편「鳴洋峽」.146쪽에는 “순신이 미리 철쇄를 협중에 가라앉히고 조류를 헤아려 아군을 유인하니 아군은 철포를 쏴대며 열심히 진격하였다.…순신은 교묘하게 양중에 출몰하며 전황과 조류를 살피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급히 영을 내려 수중에 잠긴 철쇄를 양안으로부터 끌어당기게 하였다. 아병선의 선저는 모두 철쇄상에 얹힌 채 낭패하여 진퇴의 도를 잃고 말았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12)『顯武公實記』‧『湖南節義錄』‧『李忠武公全書』속편 권16 등이 있다(위의 논문, 84쪽).
13) 崔斗煥,「鳴梁海戰과 강강수월래」『龜海 趙成都敎授華甲紀念 忠武公李舜臣硏究論叢』海軍士官學校 博物館, 1991.
14) 위의 논문, 574〜586쪽.
15) 金一相,「鳴梁海戰의 戰術的 考察」『壬亂水軍活動硏究論叢』海軍軍史硏究室, 1993.
16) 李敏雄,「鳴梁海戰의 경과와 주요 쟁점 考察」『軍史』제47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17) 위의 글, 207쪽.
18) 위의 글, 195쪽.
19) 李敏雄,『壬辰倭亂 海戰史 硏究』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2002, 156쪽
20)대표적인논저로 參謀本部,『日本戰史朝鮮役』(財)偕行社,1924 ;有馬成甫,『朝鮮役水軍史』東京;海と空社,1942(民俗苑, 1992影印) ; 佐藤和夫『海と水軍の日本史』下卷 原書房, 1995 ;北道万次,『豊臣秀吉の朝鮮侵略』吉川弘文館,1995 등 다수가 있다.
21) 이순신의 『亂中日記』에는 8월이 큰 달로 표시되어 8월 30일이 있지만, 이는 실제 태음력과 다르다. 즉 1597년 8월은 작은 달로 29일까지 있다. 그리고 9월은 실제 큰달이기 때문에 30일까지 있어야 하지만 『亂中日記』에는 9월 29일까지 있다. 그래서 날짜와 간지가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8월 30일은 실제 9월 1일이 되어야 하고 명량해전일인 9월 16일은 실제로는 9월 17일이 되어야 정확하다. 이러한 기재상의 오류에 대해 최두환은 그의 저서 『새번역 亂中日記』에서 지적하였다(최두환,『새번역 亂中日記』학민사,1996,331쪽). 한편 일본인 학자 北道万次는 위의 사실을 지적하면서 『亂中日記』의 8월 30일은 9월1일의 잘못이므로 9월 30일까지 날짜를 하루씩 늦춰야 하므로 명량해전은 9월 17일이 정확하다고 지적하였다(北道万次 譯注,『亂中日記3』東京 ; 平凡社 ,2001, 340~341쪽). 그리고 이후 그의 논저에서는 명량해전일을 9월 17일로 확정하여 사용하고 있다(北道万次,『壬辰倭亂と秀吉‧島津‧李舜臣』東京 ; 校倉書房, 2002, 232쪽).필자는 명량해전 일이 9월 17일이 정확하다고 보지만 이미 9월 16일로 고착화 되어 통용되고 있고 이것이 해전연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므로 9월 16일을 명량해전일로 채택한다.
22) 이순신의 『亂中日記』는 『李忠武公全書』에 수록된 일기와 초서체 일기로 구분된다. 이중 초서체 일기는 정유년 일기가 두 종류이다. 한 책은 정유년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기술되어 있고, 다른 한 책은 정유년 8월 4일부터 12월 30일까지 기술되어 있다. 그 중 명량해전에 관한 기록은 중복되고 있다. 여기서 앞의 일기를 『亂中日記』로, 뒤의 일기를 (속)『亂中日記』로 구분하였다. 이 두 종류의 일기 내용은 상호 다른 부분이 일부 있기 때문에 보완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다 활용하였다. 그러나 『李忠武公全書』에 수록된 일기는 초서체 일기를 가감한 면이 보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급적 활용을 배제한다.
23) 1597년 6월 18일~19일에 있었던 제2차 안골포 해전과 7월 8일~9일에 있었던 절영도 외양해전을 말한다.
24) 영천전통문화연구소,『海蘇實紀-국역본』1987, 72~78쪽.
25)『宣祖實錄』권90, 선조 30년 7월 22일 己亥.
26)『李忠武公全書』권9, 부록1 李芬 撰「行錄」
27)『亂中日記』丁酉年 8월 11일.
28)『亂中日記』丁酉年 8월 12일.
29)『亂中日記』丁酉年 8월 15일.
30)『李忠武公全書』권9, 부록1 李芬 撰「行錄」
“公啓曰 自壬辰至于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扼其路也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則是賊之所 以爲幸而由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微臣不死 則 賊不敢侮我矣”
31) 다른 자료에는 당시 남아있던 병선은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 경상우수사 裵楔이 이끌고 온 8척과 녹도선 1척 뿐이었는데,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金億秋에게 명하여 전선부터 수습․정비케 하였다.(時楔所帶戰船 只有八艘 又得鹿島戰船一艘 ... 分召全羅右水使金億秋 使之召集管下諸將五員 收拾兵船 分付諸將 粧作戰艦 以助軍勢)라고 기록되어 있다(『李忠武公全書』권10, 附錄「忠愍祠記」). 그러나 『亂中日記』에 의하면 김억추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12척의 전선이 구비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32)『亂中日記』丁酉年 8월 19일.
33)『亂中日記』丁酉年 8월 26일.
34)『亂中日記』丁酉年 9월 8일.
35) 8월 26일자 일기에서 이순신은 김억추에 대하여 “배의 격군과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꼴이 놀랄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 문구로 보아 김억추가 비록 격군과 기구는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지만 전선 1척을 대동하고 온 것으로 판단된다.
36)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37)『亂中日記』丁酉年 9월 2일.
38)『宣祖實錄』권110, 선조 32년 3월 乙酉.
39)『亂中日記』丁酉年 9월 7일.
40) 參謀本部,『日本戰史 朝鮮役』本編, (財)偕行社, 1924, 352~356쪽.
41) 李炯錫, 앞의 책, 1033쪽.
42) 趙成都, 앞의 논문, 95쪽.
43) 李炯錫, 앞의 책,1034쪽. 이와 관련 일본군이 관선을 갈아타고 해협통과를 시도한 이유로 해협의 수심이 얕았기 때문이라는 기록도 주목된다.(「藤堂家覺書」『改定史籍集覽』1902, 412쪽 ;上野市古文獻刊行會編,「黙記」『高山公實錄』, 淸文堂 : 大阪, 1998, 104쪽)
44)『亂中日記』丁酉年 9월 14일.
45)『亂中日記』(續)丁酉年 9월 15일.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爾各諸將 少有違令 則卽當軍律 小不可饒貸”
46) 趙成都,「鳴梁海戰硏究」『鳴梁大捷의 再照明』해남문화원‧해남군, 1987. 102쪽.
47) 崔斗煥,「鳴梁海戰과 강강수월래」『龜海 趙成都敎授華甲紀念 忠武公李舜臣硏究論叢』海軍士官學校 博物館, 1991. 572쪽.
48) 崔斗煥, 앞의 논문, 575~577쪽.
49) 대조란 조수의 차가 가장 큰 때의 밀물과 썰물을 말하며, 음력 초하루 또는 보름이 한 이틀 지난 뒤에 일어난다. 이 때는 지구‧달‧태양이 한 직선상에 있으므로 달과 태양의 인력이 같이 지구에 미치기 때문에 큰 조수가 일어난다.
50) 崔斗煥, 위의 논문, 575~577쪽.
51)『亂中日記』(속)丁酉年 9월 16일.(『亂中日記』丁酉年 9월 16일에는 적선 200여 척이 온다고 하였다.)
52) 崔斗煥, 앞의 논문, 583쪽.
53) 『亂中日記』丁酉年 9월 16일.
54) 명량해전에서 수중철쇄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李敏雄, 앞의 논문(『壬辰倭亂 海戰史 硏究』서울대 박사논문,2002,157~158쪽)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55) 『亂中日記』丁酉年 9월 16일.
56) 이 실험은 지난 2006년 9월 8일(금) 필자가 조타전문가 3명을 대동하여 진도 쪽에서 우수영 쪽 해역을 살펴보면서 실시한 것이다. 이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일본함대가 1열 또는 2열 정도로 명량수로 최협부를 통과할 경우 모두 우수영 쪽으로 진출이 가능하겠지만 5~6열로 최협부를 통과할 경우 전체 함대가 우수영 쪽으로 우회전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57) 『李忠武公全書』권9, 부록1 李芬 撰「行錄」
“今若全廢舟師 則是賊之所 以爲幸而由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58) 이순신이 향선을 동원하여 후방에서 성원토록 했다는 내용의 기사는 많은 사료들에 나타나고 있다.(『宣祖修正實錄』권31 선조 30년 9월 1일 己丑 ; 趙慶男, 『亂中雜錄』3, 정유년 9월 23일조 ; 李恒福, 「故統制使李公遺事」『白沙集』권4 ; 申炅, 『再造藩邦志』4 ; 李敏敍 撰, 「鳴梁大捷碑」; 李肯翊, 『燃藜室記述』권17, ‘宣祖條故事本末’ ; 辛錫謙,『宣廟中興志』)
59) 『李忠武公全書』권10, 부록2 李植 撰「諡狀」
60) 李恒福, 「故統制使李公遺事」『白沙集』권4 ; 申炅, 『再造藩邦志』4 ; 李肯翊, 『燃藜室記述』권17, ‘宣祖條故事本末’
61) 趙慶男, 『亂中雜錄』3, 정유년 9월 23일조 ; 李肯翊, 『燃藜室記述』권17, ‘宣祖條故事本末’ ; 辛錫謙,『宣廟中興志』
62) 『宣祖實錄』권94, 선조 30년 11월 10일 丁酉
63) 『亂中日記』丁酉年 9월 16일 기사에 정확한 지명이 없이 단지 ‘浦’라고만 적혀있다. 잠시 배들을 안전하게 머무르게 할 요량으로 임시 주둔한 지역으로 판단된다.
64) 上野市古文獻刊行會編,「黙記」『高山公實錄』,大阪 ; 淸文堂, 1998, 104쪽.
“御歸陣被成候ちとまへかとにこもかいへ御こしなされ候處にすいえんと申所にはん舟の大しやう分十三そうい申候大川のせよりはやきしほのさし引御さ候所の內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申候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申候それを見付是非ともとり可申よし舟手衆と御相談にて則御取縣被成候大舟ニテは今の瀨戶をこきくたし候依は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を御そろへ被成御かかり被成候さき手のふねともハ敵船にあひ手負あまたいてき申候中にも來島出雲殿うちしににて御座候其外ふね手の衆めしつれられ候からうのもの共もくわはん手負討死仕候處に毛利民部大夫殿せき舟にてはんふねへ御かかり被成候はん船へ十文字の釜を御かけ候處にはん船より弓鐵砲はけしくうち申候に付船をはなれ海へ御はいりなされあやうく候處に藤堂孫八郞藤堂勘解由兩人船をよせ敵船をおいのけたすけ申候朝の五しふんより酉の刻まて御合戰にて御座候みなとのやうすはん船能存候に付風を能見すまし其せと口を拔け步をひきかけはしらせ申について是非なくおつかけ申儀もまかりならすいつみ樣も手を二か所おはせられ候”
65) 이러한 전법에 대해 유사용어로 ‘근접백병전’(장학근)과 ‘등선육박전술’(이민웅)이 있지만, 필자는 ‘登船白兵戰’이라고 부른다.
66) 金在瑾,『續韓國船舶史硏究』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100~101쪽.
67) 金在瑾, 위의 책, 141쪽.
68) 물론 일본의 조총도 대통‧중통‧소통으로 분류하여 각기 그 성능이 차이가 있고 대통의 경우 포탄의 크기도 크고 사정거리도 일반 조총에 비해 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안택선 등의 일부 전선에 소수로 벽걸이 형태로 탑재했을 뿐이다. 따라서 대다수 군졸들은 소형 휴대용 조총으로 무장하였다.
69)『亂中日記』丁酉年 9월 16일 기사
70) 『宣祖實錄』권 126, 선조33년 6월 15일 丙戌
71) 『亂中日記』(속)丁酉年 9월 16일 기사
72) Gary Yukl, 이상욱 옮김,『현대조직의 리더십 이론』서울 ; 시그마프레스, 2004, 4쪽.
73) 李善浩,『이순신의 리더십』팔복원, 2001, 14쪽.
74) 이러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하는 단적인 예로 휘하 장졸들의 전의를 고양하는 여러 차례의 훈시와 “임진년에 크게 승리할 때의 꿈과 거의 같았다”( (속)『亂中日記』9월 13일 기사)라고 한 기사를 들 수 있다.
75) 『亂中日記』丁酉年 8월 17일
76) 『亂中日記』丁酉年 8월 19일
77) 『亂中日記』丁酉年 8월 25일
78) 申炅,『再造藩邦志』4
79) 『亂中日記』丁酉年 8월 28일
80) 『亂中日記』丁酉年 9월 7일
81) 이순신의 전략가로서의 성장과정과 전략전술의 특징에 대해서는 拙稿,「李舜臣의 水軍戰略과 閑山大捷」『軍史』제60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6.8), 103~122면 참고.
82) 1597년 9월 7일 일본군이 낮과 밤에 걸쳐 침입해 왔다가 조선수군이 쏜 화포의 위력에 퇴각하였다.(『亂中日記』丁酉年 9월 7일)
83)『李忠武公全書』권2, 장계1「唐浦破倭兵狀」
84)『李忠武公全書』권10, 부록2 李植 撰,「諡狀」
85) 적선 당파용 피사체는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 등의 대전류이다. 반면에 적의 인마를 살상하는 데는 조란환이 이용되었다.〈표2〉군선탑재 화기의 종류 및 성능참조.
86) 『李忠武公全書』권9, 부록1 李芬 撰「行錄」에는 “바다 복판에 닻을 내리자 적에게 포위를 당하니”(公有必死之志中流下碇爲賊所圍“라는 표현이 있다.
87) 李敏敍의「鳴梁大捷碑」에도 “좁은 목에다 뱃머리를 잇대어 닻을 내리고 바다 중간을 끊어 적들을 기다렸었다”(當海之隘口連艫下碇截中流待賊).라는 표현이 있다.
88) 趙慶男, 『亂中雜錄』3, 정유년 9월 23일조
89) 李肯翊, 『燃藜室記述』권17, ‘宣祖條故事本末’
90) 辛錫謙,『宣廟中興志』
91)『亂中日記』9월 3일, 9월 4일, 9월 5일, 9월 13일, 9월 14일 기사에 북풍이 강하게 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92) 이순신은 1592년 5월 7일의 옥포해전과 합포해전, 5월 8일의 적진포해전 시 전라좌수군 세력 총 85척 중 포작선을 46척이나 동원하였다.(『李忠武公全書』권2, 장계1 「玉浦破倭兵狀」“啓同日同時 舟師諸將 板屋船二十四隻 挾船十五隻 鮑作船四十六隻 領率發行 至慶尙右道所非浦前洋”)
93) 이순신이 임진왜란 기간 중 올린 장계 중 조선수군의 참전세력으로 전선과 함께 협선 또는 초탐선을 언급한 것은 옥포해전과 명량해전 뿐이다. 이것은 전투력이 없는 배를 동원할 정도로 세력이 약했다는 의미이자 擬兵戰術을 구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94) 명량해전시 이순신 막하인물들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拙稿,「임진왜란 시기 李舜臣 幕下人物의 활동」『역사와 경계』52, 부산경남사학회(2004.9),29~34쪽 참조.
95)『湖南節義錄』과「同義錄」은 18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자료들로서 모두가 수록인물들의 후손들에 의해 서술편집된 것들이란 점에서 사료채택 상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의 막하에서 의병활동을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은 이들 뿐이기 때문에 여기서 채택하되 기타 자료들로 보완하여 최대한 정확성을 추구하였다.
96)『李忠武公全書』권14, 附錄「紀實 下」馬氏家狀
97)『李忠武公全書』권14, 附錄「紀實(下)」丁運熙行狀
98)『李忠武公全書』권16, 附錄「同義錄」馬河秀․丁運熙條
99)『沙湖集』권1,「吳沙湖傳」
100)『李忠武公全書』권9, 李芬 撰,「行錄」
101)『亂中日記』丁酉年 9월 17일
102)『亂中日記』丁酉年 11월 7일, 11월 23일
103)『李忠武公全書』권16, 附錄「同義錄」全夢星條
104)『李忠武公全書』권16, 附錄「同義錄」全夢星條
“時賊自外洋 侵入沿海諸邑 沂上木浦上流 肆其剽掠 適李統制舜臣方討右水營屯倭 移書于本義陣 託以木浦一帶海防之務 適賊船數十 泊于郡西海岩浦 卽引兵而西 分作十隊 各置領將…遂整於進擊 殺抄賊”
105)『亂中日記』丁酉年 11월 7일
106)『湖南節義錄』권3,「忠武李公舜臣參佐諸公事實」宋德馹․徐壽長․宋智․宋繼賢․宋繼昌條
107)『李忠武公全書』권16, 附錄「同義錄」張宇翰條
첫댓글 해남명량대첩 세미나 자료입니다.
감사드림니다. 이렇게 올려 주시지 않으면 월드 리포터에 들어가서 돈내고 나서야 열람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저도 이순신을 무지하게 좋아헌디 녹우부인도 좋아하요

하
김선생님, 고맙수다. 대흥사에서 고마웠습니다.
강원고성군해설사 최점석입니다 좋은자료 공부좀 더하려고 제 블러그로 가져갑니다 (제 고향은 보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