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오늘 우리 순교복자 103위가 시성되었던 것을 기억하자. 그런 날의 주교회의의 공식 사이트에 있는 매일미사를 다운 받으면 오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해마다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왔는데,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주일’로 바꾸고 5월 첫 주일로 옮겼다. 이는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자는 데 뜻이 있다”. 그래서 오늘이 생명주일이다.
2005년 1월 10일, 죽음을 약 석 달 앞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주 교황청 전 세계 대사들과의 만남에서 유명한 연설을 한다. 발언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분의 떨리는 목소리만 들렸던 연설이지만, 그 연설문은 세상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것이었다. 바로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라는 테마였다. 당시에 교황께서는 인류가 살아가는 데 있어 생명의 문화에 반대되는 죽음의 문화로, 기아, 낙태, 인공임신, 인간복제, 안락사, 동성결혼 등을 제시했다. 이들은 이미 오랫동안 교회에 의해 단죄가 되었던 주제들이만 교황께서는 이 세상에 하시는 당신의 윤리적인 유언일까? 다시 한 번 리스트를 만들어서 꼭 집어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악의 축” 정도일 것이다. 이들 각자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교회가 이런 단죄를 하고 있을 때 교회를 비난하고, 오히려 이런 “인간적” 운동들이 더욱 사회적 캠페인을 벌이면서 지평을 넓혀가고 있음을 이야기하련다. 예를 들어 Gay Pride가 있는데, 유럽의 동성애자들의 축제이다. 요즘은 대범하게 Europride라고 부른다. 작년에는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Lady Gaga를 모시고 이 축제를 성대히 치렀다. 그 분께서 얼마 전에 대한민국도 방문하셨다고 들었다.
교회는 생명을 사랑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생겨난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닌가? 그러기에 영원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생명이 가지는 가치를 평가하니, 다른 어느 이념이나 집단이 바라보는 생명보다 훨씬 초월적인 시각을 가지고 생명을 경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영원을 바라보는 교회에게 있어 생명은 생물학적인 개념도 있지만, 인격적이고 영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생물학적 생명을 교회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 생명 안에 영적인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이미 생물학적 생명에서 영원을 보고, 영적인 생명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생명을 본다. 더 나아가 지상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 두 가지 분리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 내적 일관성과 연관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 주위에 생명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영적인 가치와 정반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담론으로 일고 있는 환경의 문제가 한 예일 수 있다. 대통령 직함을 가지고 있는 자와 그의 추종자들 덕에 국토가 만신창이 되어서 덕분에 이 담론이 더욱 커지고 있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까? 또한 그들 덕에 일어난 촛불의 외침이 있다. 기본적인 인권인 먹을 권리까지 유린하는 그들 덕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더욱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들에게 더욱 감사해야 할까? 우리나라를 바라보면 생물학적 생명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생명 그리고 영적인 생명을 아무 개념없이 잔인하게 폭행하는 일들이 제도권 안에서 양심의 가책없이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생명에 대한 고귀한 설명이나 추상적 대화를 가지고 인격적인 담론장을 우리나라에서는 만들기 이미 어렵다고 판단한다. 강탈당하고 짓밟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사람이 죽어 가는데 삶의 질을 높이는 아름다운 이야기나, 시민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오늘 읽은 작은 아티클은 유럽의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에 대한 젊은 사회학도의 성찰이다. 그의 성찰에 따르면 서양은 과거 이천년간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전통이 성장해서, 어린이나 태아, 지체부자유자, 심지어 말기환자들에 대한 권리를 발전시켜 왔다고 한다. 반면에 인간의 존엄성을 질적으로 판단하는 문화도 발전시켜 왔다고 본다. 질적이라는 표현은 건강, 아름다움, 즐거움 더 나아가 자기완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인간을 보는 문화도 성장시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웰빙까지 가는 문화이다. 이런 두 문화는 하나의 사회 안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해 왔지만, 결론적으로 개인의 권리라는 요소가 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죽음의 문화에 해당하는 낙태와 안락사와 같은 과학의 창조물들이 득세를 한다고 본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가 서방을 지배하는 현대에 이 생명의 문화와 죽음의 문화라는 담론 주제는 늘 토론의 장을 넓게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훨씬 더 길지만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여기에서 우리나라로 가고 싶다. 우리나라에 인간 생명은 귀한 것이었는가? 적어도 신분계급의 차이가 있던 시절에 인간생명은 상위 1%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 생명도 가벼이 여길 사회적 문화적 토양은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눈으로 보면 천민의 목숨, 노예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던 시대에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지배계급이 제도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적으로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을 수 있었던 시절에 생명존중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는 생명에 대한 인식에서 엄청난 발전을 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감사하자. 하지만 위에서 말한 질적인 생명의 논제는 우리나 서양이나 같이 겪고 있는 문제이다. 인간생명 존중과 인간의 자유의 존중이 생명보호라는 차원에서 만나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우리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의 이유로 불임에 관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계몽하고 선도했다. 낙태는 천국이다. 안락사 추세는 성장하고 있다. 거기에다 우리들의 자랑 황우석 박사는 혁명적으로 생명과 경제를 연결시켜 엄청난 각광을 받았다.
이런 모순과 혼돈의 대한민국이 오늘 생명주일을 지내면서 무엇을 먼저 하면 좋을까? 생명이 왜 귀한지에 대한 설명, 인간생명이 인간관에서 가지는 절대적 의미에 대한 설명, 더 나아가 인간 인격에서의 생명이 가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한 가지만 나누고 싶다. 배아복제 실험이 한창이던 시절에 나는 교회의 문헌을 이 잡듯이 뒤져서 왜 인간이 복제가 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 했었다. 너무나 새로운 도전이고 예상하지 못한 시련이어서 교회의 문헌도 작게는 배아줄기 세포에 관한 실험의 위험이 가져올 잠재적 결과인 인간복제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엄청나게 하고 있다. 좌우간 그 때에 발견한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소개한다. 그것은 “유일회성 unicity”이다.
사람은 같은 사람이 단 하나도 없기에 귀하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과 다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공유할 수없다. 각자는 자유가 있다는 현대의 새로운 종교적 맹신 앞에서 이 유일회성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자유는 내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교집합 혹은 공집합의 도식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독자적인 것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자체로 독자적이고 유일하다. 이 유일성을 위해 지금의 시대가 인간을 신격화하여 만든 수많은 화두와 권리가 존재하며, 그것들이 바로 이 유일회성을 더욱 유일회성답게 만들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회성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영성적으로 그 유일회성은 그 누구에게도 없는 “나”를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본성이 되는 것이다. 이 유일회성의 시각으로 인간생명을 바라본다면 보다 많고 건강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사회 안에서도 보다 인격적인 담론의 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생명주일에 교회에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나도 교회지도자라고 신자분들이 생각하시겠지만, 이런 담론을 교회에 펼 생각은 하니 왜 이리 내가 무기력하고 무능력함을 느낄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5,5).
ㅈ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