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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az, 평화의 도시라 불리지만,,, |
La Paz.
'평화'라 불리는 도시다.
해발 3,600미터의 알티플라노 고원 430미터 깊이의 협곡에 들어 앉은 이 도시는 낮은 지역에서 높은 지대(엘 알토 El Alto)까지 오르내리려면 생각보다 벅찬 곳이다.
누군가의 가슴에 불을 질러 사표까지 내던지고 여행길에 오르게 한 우유니 사막을 목전에 두고 볼리비아의 행정수도인 라파즈에 들어왔다. 목적지에 도착을 했음에도 차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높은 고도에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도시, 모두가 심란했던 것일까?
도시의 첫 인상은 어딘가 정리가 안 된 듯 어수선했고 혼란스러웠다. 붉은색 일색인 도시의 건물들은 시커먼 먼지로 얼룩진 차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에 섞여 더욱 음침하고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리마에서도 느꼈고 쿠스코에서도 겪었지만 역시 이곳에서도 시장 주변은 엄청난 인파와 차량이 몰려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메인 도로의 좌우로 뻗은 비탈진 골목길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상점들과 사람들로 넘쳐났다. 장날인가? 하지만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이곳에도 산동네 달동네가 있다.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협곡의 비탈을 타고 올라간다. 주인 없는 땅을 찾아 새끼줄을 치고 흙으로 벽을 세워 노곤한 육신을 눕힐 곳을 찾아 리마에서처럼, 쿠스코에서처럼 이곳의 집들도 오르고 또 오르고 있었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흩어져 날리고 과일 몇 개 올려 놓은 빈약한 노점들은 지나가는 발걸음만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시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한구석 어딘가에 식민 시대의 무거운 그림자가 찌든 삶을 꽉 붙들고 있는 듯한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
라파즈가 지금의 이런 모습을 갖추게 된 데는 배경이 있었다. 1548년 스페인 침략자 알론소 데 멘도사가 옛 잉카의 마을에 도시를 세우고 현재 La Paz의 기원이 된 '평화의 성모(Nuestra Señora de La Paz)'라 이름 지었다. 이후 인근의 포토시Potosi가 남미 최대의 은광산으로 활기를 띄자 이곳에서 채굴된 은을 태평양 연안으로 수송하는 교통의 중심에 있던 라파즈가 주요도시로 부각되면서 수많은 캄페시노Campesno(안데스 산골의 가난한 농민들)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협곡 도시인 라파즈는 몰려드는 인구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었고, 좁은 협곡에 갇힌 도시는 협곡의 양 측벽을 타고 높을 곳으로 오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말은 낳아 제주도로, 사람은 낳아 서울로" 를 외치며 먹고 살 길을 찾아 또는 자신의 미래를 찾아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던 6,70년대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연상됐다.
볼리비아 경제는 좌파인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집권한 2006년 이래 다국적기업으로부터 강력한 세금 확보정책을 통해 사회인프라 확충과 빈곤퇴치운동을 실행하고, 엄격한 물가통제정책으로 2013년에는 무려 60%라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2006년 국민 3명 중 1명이 극빈층이었던 것이 현재는 5명 중 1명 꼴로 개선 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가운 이야기였다. 머지 않아 볼리비아에도 "옛날 얘기 하면서 살게 될 날"이 오겠지. 그러기에 라파즈에 막 도착한 여행자에게 보이는 지금 저 모습들은 비와 먼지로 얼룩진 차창 때문에 생긴 '가장 어두운 한 단면'이기를 빌었다.
숙소가 있는 라파즈 이얌푸 lllampu거리. 차량과 사람들로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오후 5시경, 비가 뿌리는 가운데 수많은 사람과 차량들을 헤치고 힘들게 라파즈에 들어선 봉고차는 흐리고 매연 가득한 도로 한켠에 멈춰섰다. 차에서 내리자 주변의 시선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여기서는 우리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숙소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 위 쪽의 이얌푸 lllampu거리와 아이작 타마요 Isaac Tamayo거리를 잇는 아로마Aroma거리의 경사진 골목길에 있었다. 큼직한 캐리어를 끌고 잠시 오르막을 걸어야 하지만 캐리어를 끌고 오르는 일이 버겁다는 생각은 숙소에 들어서자 씻은 듯 가셨다. 숙소는 리셉션부터 각 층의 벽면 계단, 각 방안까지 온통 원색의 화사한 그림으로 채워져 있어 힘들게 언덕을 올라온 여행자의 수고를 보답해주었다. 이곳에서 내일 모레 우유니로 들어가기까지 2박 3일간 컨디션을 조절하면서 고산 극복을 위한 준비를 갖추기로 했다. 잘 먹고, 잘 자고,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곳에서 할 일이었다.
시장거리의 콩. 우리의 것과 아무 것도 다를 게 없다.
숙소에 도착해 방 배정을 하기 위해 가위 바위 보를 했다. 참가하지 않아서도 안 되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그런 게임. 결국 마지막까지 한 사람도 이기지 못해 제일 꼭대기 4층이 당첨돼 높고 높은 고산의 도시 라파즈에서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을 오르내려야 했다. 규칙이 없는 일방적인 배려는 누군가의 불만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힘든 여정의 단체생활에서 이런 식의 결정은 매우 바람직했다. 남녀노소 개개의 형편과 사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만, 공정한 결정 이후에 사랑스런 우리 젊은 동반자들이 4층에 당첨된 우리 부부를 위해 캐리어를 전부 올려다 주었다는 것은 지금에 와서도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우려했던 일이 결코 벌어지고 말았다. 배낭여행자는 무조건 당한다는 떠도는 얘기가 단순하게 떠도는 얘기가 아니었다. 짐을 정리하고 난 다음, 안전을 위해 몇몇이서 그룹을 지어 숙소 앞 Liiampu거리에 있는 환전소에 가서 볼리비아 현금을 찾아 숙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란이 일었다.
얼마 전 푸노에서 권총강도를 당한 친구가 그 다음 날 이곳 라파즈에 도착해 기분전환을 하려고 과일을 사러 나섰다가 또다시 스마트폰을 소매치기 당하는 불운을 겪었노라며 조심하라고 그리 경고를 했었는데, 일행들과 따로 떨어져 둘이서(20대 여성)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던 H의 주머니에서 한 사내가 스마트폰을 빼내 유유히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것도 바로 숙소 앞에서. 고산지대여서 쫒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쫒아간다해도 그 위험성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냥 멍하니 바라다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놀란 H를 달리 위로할 말이 없었다. 흐트러진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늦게까지 맥주 한 잔씩을 나누었다. 상심을 견디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라파즈 여행이 시작되는 산 프란시스코 광장의 과자점
2015년 4월 2일 목요일 아침, 라파즈의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며칠 전부터 이어진 긴 이동으로 몸이 상당히 피로한 데다 라파즈의 높은 고도를 견디기 일이 생각처럼 녹록치가 않았다. 간밤에는 방이 추워 침낭을 펼치고 겨우 잠을 잤는데 그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서도 개운치가 않았다. 아내도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에 내려가니 이곳의 아침 식사도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이나마도 여행자에게는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식단, 두말 없이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행들과 투어 일정을 조정했다. 오전에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을 거쳐 무리요 광장, 하엔 거리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텔레페리코를 타고 라파즈 야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제의 스마트폰 소매치기 사건이 있었던 데다 지금까지 잘 견디던 SJ가 심하게 아프다는 소식이 들려와 분위기가 조심스러워졌다. 여행에서 몸 아픈 것이 제일 서러운일인데 늘 생글 웃으며 즐겁게 여행하던 그녀가 탈이 나다니, 고산은 젊은 청춘도 피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
일단 SJ는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의사를 불러와 정확한 진찰을 받기로 했다. 숙소에 몇몇이 남아 돌보기로 하고 나머지는 예정대로 투어를 위해 오전 10시 숙소를 나섰다.
산 프란시스코 광장과 산 프란시스코 성당.
산 프란시스코 광장은 라파즈 관광이 시작되는 중심지역이다. 이 광장에 있는 산프란시스코 성당은 1549년에 지어졌다. 성당 뒤 편에 있는 숙소에서 성당 왼쪽의 사가르나가 거리를 거쳐 5분 이내에 있는 곳이어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 수시로 거쳐갔던 이 광장은 수많은 관광객들과 현지 시민들로 항상 북적였다. 성당 뒤로 보이는 높은 지대의 집들과 탑들이 무척이나 이색적이었다. 성당의 파사드의 성인상 주변에 포도와 함께 코카잎이 조각되어 있는데 성당을 짓는 도중 여러 차례 붕괴가 일어나자 코카 잎을 새겼더니 이후부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카톨릭도 현지화 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는 모양이다.
산 프란시스코 성당 앞 구두닦는 사람들의 반응이 심상찮다.
함께 시내 투어를 나온 팀원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누군가 저 사람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인다고 알려주었다. 시력이 약해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데다 사진을 찍느라 인식하지 못했는데 검은 두건을 쓴 볼리비아 구두닦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다른 곳의 구두닦는 사람들은 자기들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데 왜 이들은 이처럼 어두운 반응을 하는가? 사정을 모르면 묻지 말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사람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사람 사는 일도 복잡다난하니까.
마리스칼 산타 크루즈 대로. 식민 시대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생활구역을 갈랐던 도로였다. 사진 왼쪽은 이곳에서 유명한 란싸 Lanza시장이다.
산 프란시스코 광장과 꼬르메시오 거리 Calle Comercio를 연결하는 육교
산 프란시스코 광장에서 무리요 광장으로 가는 번화가 꼬르메시오 거리 Calle Comercio
꼬르메시오 거리에서 기타 연주하는 이를 향해 작은 손길을 내밀었다. 그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꼬르메시오 거리 풍경. 우리의 명동 거리쯤 될까. 오가는 사람들과 상가들로 번화했다.
라파즈의 중심지 무리요 광장.
산 프란시스코 광장에서 육교를 건너 꼬르메시오 거리를 지나면 그 끝에 제법 짜임새 있는 규모의 광장이 있다. 라파즈의 중심 광장인 무리요 광장이다. 이 광장의 주인인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 Pedro Domingo Mullio (1757~1810)는 1809년 7월 16일 이곳 라파즈에서 볼리비아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듬해 이 광장에서 스페인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상 기단 4면에는 평화 Paz, 단결 Union, 명예 Gloria, 그리고 힘 Fuerza이라는 상징 문구가 새겨져 있다.
무리요 광장은 라파즈의 대표적인 광장이기는 하지만 리마나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적었다. 원래 이 광장도 남미 대부분의 광장들이 그러하듯이 아르마스 광장으로 불리웠으니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광장 중앙에 볼리비아 독립 영웅인 무리요 장군 동상을 세우고 이름도 바꾸었다고 한다. 그들 광장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면 광장에 수많은 비둘기들이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이를 먹고 노닐면서 광장을 특징지우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광장 주변에는 작년에 3선에 성공하여 2020년까지 임무를 수행하게 될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 관저인 께마도 궁(사진의 오른쪽 건물)이 있고, 대성당(대통령궁의 오른쪽에 있어 사진에는 안 보인다)과 국회의사당(사진의 정면 검은 탑이 있는 건물)이 있다. 특히 국회의사당 건물의 시계는 거꾸로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을 찍은 시각은 10시 52분, 사진을 확대해보면 시간을 나타내는 아라비아 숫자가 일반 시계와 반대로 되어있다.
거꾸로 가는 의사당의 시계
비둘기가 머리에 내려앉자 놀란 표정을 짓는 무리요 광장의 꼬마 아가씨
라파즈 대성당, 사진 왼쪽 아래에 베네수엘라 출신 대통령이었던 수크레 대통령을 밀어내고 1828년 대통령에 오른 Andres de Santa Cruz 대통령의 묘소를 위병들이 지키고 있다.
라파즈 대성당 앞
대통령 관저인 께마도 궁 정문 근위병들
우리의 청와대를 생각해보면 볼리비아의 대통령이 얼마나 국민들과 가까이 있는지 짐작이 갈 법하다. 물리적 거리를 놓고 가깝다 멀다를 논하지 말자고 한다면 그 또한 옳다 하겠으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정서적으로 가깝다 말한다면 왜 몸은 가까이 있으면 안 되는지. 지나가는 여행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주는 이들의 몸과 마음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문명국이니 문화대국이니 하는 것은 경제력이 낫다고 해서, 언어나 글로 멋지게 표현한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볼리비아 아이마라 족 출신으로 코카 재배 농부였다가 대통령에 오른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남미지역 정상들 중 가장 적은 월급(한화 약 292만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작년에는 볼리비아의 한 프로축구팀에 입단하여 월 22만원을 받고 미드필드로 뛰기로 했다는 소식은 참 신선했다. 물론 작년에 3선 연임에 성공하였기에 일반 축구선수들처럼 직접 공을 차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국민들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대통령 관저인 께마도 궁. 대성당(사진 오른쪽)과 나란히 있다.
현재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고 있는 께마도 궁은 1550년대 식민지 시대 원주민 강제 노동으로 지어진 건물을 개조하여 사용해 온 것이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정부는 지금까지 과거 어두운 식민 시대 행정관의 집무실을 아무런 비판이나 평가없이 사용해 왔다면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2016년 완공을 예정으로 지금의 관저 뒤편에 29층 짜리 "민중의 큰 집 Casa Grande del Pueblo " 을 짓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통령 궁 뒤편에 이런 큰 건물이 들어서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에 짓는 것일까?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회의사당 앞 도로의 껌을 제거하고 있는 근로자.
무리요 광장 주변을 걷다가 국회의사당 앞 뜨거운 햇빛 아래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떼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다가가서 무엇을 하는가 보았더니 검은 얼굴로 씽긋 웃으며 도로에 시커멓게 들러붙은 껌을 들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무리요 광장 인근의 도로 풍경
하엔 거리로 가는 길의 도로 보수 현장
무리요 광장을 벗어나 인근에 있는 하엔거리를 찾아가다가 어디쯤에선가 한창 도로를 보수하고 있는 현장을 만났는데 우리와는 다르게 현장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요즘 우리의 건설현장에 가면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대부분 기계나 장비들이 일을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공사장에 사람이 많은 까닭은 인건비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하엔 거리로 가는 길목. 이 길 막다른 곳에서 하엔거리가 시작된다.
하엔 거리 Calle Jaen가 시작되는 넓은 공간의 벤치에 노인들이 나란히 앉아 휴식을 즐기고 있다.
하엔거리. 원색의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높은 지대의 집들이 배경으로 들어있다.
볼리비아 독립운동사에 하엔과 무리요 두 사람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 인물들이다. 이들 두 사람은 원래 이 골목에서 살았었는데 독립 운동에 뛰어 들면서 다시는 이 거리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 하엔 거리에는 현재 무리요가 살던 집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하엔 거리는 라파즈에서 식민 시대의 분위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으로 라파즈의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이 골목 만큼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골목은 야트막한 오르막 길 한 블럭에 불과했지만 다양한 문양의 예쁜 조약돌들이 깔린 바닥과 스페인 풍의 건물들이 옛 모습을 지니고 있고, 악기박물관을 비롯하여 무리요 박물관, 해군박물관 등 박물관만 네 개나 들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작지만 저마다 특색있는 그림들과 가죽 용품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것들이 제법 있었지만 가격들이 만만치 않아 뒷짐만 지고 있었다.
뻬드로 도밍고 무리요 박물관의 창틀
뻬드로 도밍고 무리요 박물관
하엔 거리를 걷다가 시끌시끌한 사람들 소리를 따라 무심코 들어간 곳은 무리요 박물관이었다. 닫힌 철망 안에서는 대학생들 처럼 보이는 젊은 볼리비아 청년들이 계단에 올라 뒤로 돌아서서 동전을 던져 등뒤의 분수에 넣는 게임을 하면서 즐기고 있었는데, 마침 일정이 끝났는지 문이 열리면서 학생들이 밖으로 나오는 틈을 타 안으로 들어가도 좋은가 물었더니 티켓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티켓은 생각치도 못했는데,,,,
하엔거리를 벗어나 인근에 있는 한인마트에 들렀다. 여행에 필요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 가지 골라 박스에 담아 두고 인근의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부페식 점심을 먹었다. 맛있게 잘 차려진 식사였다.
라파즈 한인마트 인근의 도로에서 만난 잉카의 여인들.
점심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가던 중 번화한 대로변 한켠에 자리를 잡고 볼펜, 노트, 파일첩 등 문구류를 팔고 있는 두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전통모자를 쓰고, 어깨에 숄을 걸치고 통이 큰 주름치마를 입은 이 두 초리따의 관계가 궁금했다. 모자지간일까? 아니면 이웃한 노점상일까?(실제 사진 오른쪽에는 왼쪽과 똑같은 노점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 매상이 얼마나 될지는 묻지 않아도 될 법했다. 그런데 유독 이 두 여인의 모습이 갈 길 바쁜 여행자의 발 길을 붙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이들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 만큼 살았기 때문일까?
볼리비아 전통의상을 한 여인들을 '초리따'라고 한다. 검은 머리를 길게 따 내리고 주름 잡힌 통이 큰 치마에 챙이 짧은 모자를 쓴 모습이 우리가 알고 있는 볼리비아 여인의 전통의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의상은 원래 이 지역 인디오의 전통복장이 아니라 식민 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변형된 형태라고 한다. 원래 인디오 치마는 평평하고 단순한 형태였지만 지금의 주름 잡힌 치마의 형태로 바뀐 것은 당시 스페인 여인들이 입던 주름치마의 영향이었다. 당시 스페인 지배자들은 인디오들이 전통의상을 입는 것을 금지시키고 스페인 스타일을 바탕으로 인디오의 지역적 특색을 부분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복장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사용 같은 모자가 어떻게 인디오 여인들의 모자가 되었는가 하면 당시 한 영국인이 장사를 위해 이 모자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잘 팔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고민 끝에 이 영국인은 이 모자가 영국 상류층 여인들에게 최고의 인기가 있는 모자라는 소문을 냈고 그 결과로 오늘날 인디오 여인들의 모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모자를 옆으로 삐딱하게 쓰면 남편과의 사이가 안 좋다는 표시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전통은 소중하다고 누누이 강조를 하면서도 정작 전통을 지키려하면 불편이 앞선다. 그래서 한때 우리 정부에서는 입고 활동하기가 불편한 우리의 전통한복을 입기 쉬고 활동하기 쉽도록 개량하여 보급했지만 오늘날 일상에서 한복을 입는 모습은 그리 흔하지 않다. 꿋꿋하게 전통을 지켜가는 볼리비아 여인들에게서 묵은 과거를 붙들고 산다는 이미지보다는 자신의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고 보존하려는 의지가 더욱 돋보였다.
야경투어를 위해 숙소로 돌아오는 시각(오후 2시)의 한인마트 앞 도로. 교통량이 상당했다.
라파즈 시내의 콜렉티보 시내버스
산 프란시스코 성당 앞의 산타 크루즈 대로
이곳에도 산동네 달동네가 있었다.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협곡의 비탈을 타고 산으로 올라갔다. 주인 없는 땅을 찾아 새끼줄을 치고 흙으로 벽을 세워 노곤한 육신을 눕힐 곳을 찾아 리마에서처럼, 쿠스코에서처럼 이곳의 집들도 오르고 또 오르고 있었다.
거리에는 쓰레기가 흩어져 날리고 겨우 과일 몇 개 올려 놓은 빈약한 노점들은 지나가는 발걸음만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시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한구석 어딘가에 식민 시대의 무거운 그림자가 찌든 삶을 꽉 붙들고 있는 듯한 냄새가 물씬 배어났다.
산 프란시스코 성당 옆 사가르나가 거리
산 프란시스코 상당에서 숙소로 가는 사가르나가 길의 한 골목, 상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오후 3시,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야경 투어를 하기 위해서는 체력 관리가 중요했다. 몇 시간 동안 분지형 도시를 오르락 내리락 하느라 모두들 지쳐 얼굴이 퀭했다. 휴식을 위해 잠시 숙소로 돌아왔다.
우유니로 가기에 앞서 이곳에서 2박 3일을 머물며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지만 고산에 적응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높은 고원지대의 환경에 잘 적응하는 체질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아침부터 몸이 불편했던 SJ는 아직 의사가 오지를 않아 여전히 힘들어 했고 오전에 함께 투어에 나섰던 아내도 자꾸만 침대에 드러누웠다. 내색은 안 했지만 아무래도 힘이 달리는 모양이었다.
타이타닉 전망대 Mirador Taitanic에서 야경 보기
오후 5시 반,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는 가운데 야경투어에 나섰다.
몸이 불편한 SJ를 비롯하여 체력이 달린 아내와 몇몇 일행은 결국 야경 투어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얌프 Illampu와 아이작 따마요 Isaac Tamayo를 잇는 비탈길의 아로마 Aroma 골목의 숙소.
평소에는 숙소에서 나와 오른쪽에 있는 이얌프 Illampu거리를 거쳐 라파즈 중심가로 투어를 나섰지만 야경 투어는 반대편인 왼쪽의 아이작 따마요 Isaac Tamayo거리를 따라갔다. 이 거리는 거리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시장이었다. 누가 물건을 파는 사람인지 누가 물건을 사는 사람인지 조차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상인과 손님이 뒤섞여 물건을 사고 팔았다.
숙소 주변은 과일시장, 꽃 시장, 마녀시장 등등해서 온 천지가 전부 시장이었기에 길을 나서기만 하면 온갖 다양한 시장들을 만났는데 라파즈에서 꼭 들려봐야 한다는 마녀시장 만큼은 들르지도 않았고 길을 오가다 눈에 띄여도 의도적으로 사진에는 담지 않았다. 딱히 피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냥 느낌이 없었다.
야경 투어에 나서면서 만난 거리 풍경, 텔레페리코 정거장을 찾느라 묻고 또 묻고,,
라파즈의 중심지구인 센트로와 고지대인 엘 알토를 연결하는 텔레페리코 레드라인 스테이션
라파즈에는 산악지대나 고원에서 유입된 수많은 인디오 서민들을 위한 복지향상과 도심 교통 혼잡을 해소하기 위하여 2014년 5월부터 텔레페리코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구간별 운행 요금은 약 500원 정도로 아주 저렴했으며 구간에 따라 옐로우, 블루, 레드노선이 있는데 센트로와 엘 알토 지역을 연결하는 레드노선의 타이타닉 전망대가 가장 멋진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기에 그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텔레페리코. 우리의 케이블카와 유사한 것으로 안전요원의 안내에 따라 쉽게 타고 이동할 수 있다.
도심의 건물들 위로 줄지어 오르는 텔레페리코.
라파즈 시내에 있는 공동묘역. 규모가 상당히 큰 묘지가 도시 한 가운데에 들어서 있는 것도 이색적이었다.
협곡의 높은 지대 El Alto를 향해 오르는 텔레페리코
텔레페리코가 정상에 이르자 해거름의 라파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타이타닉 전망대
타이타닉 전망대에서 본 만년설이 뒤덮인 6,460미터의 일리마니 Illimani 산
텔레페리코 레드라인의 타이타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는 라파즈 시내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와 완연히 달랐다. 매연이 뿌옇게 낀 도심에서 비까지 내린 흐린 날씨, 혼잡한 도로와 시장, 소매치기에 대한 경계심으로 실제 도시의 이미지보다 더 부정적으로 평가한 탓에 라파즈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전망대에 오르자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협곡 사이로 가득히 들어선 집들과 건물들을 해발 6천 미터가 넘는 고산들로 둘러싸인 라파즈는 한폭의 그림처럼 멋졌다. 손에 잡힐 듯 들어오는 만년설이 쌓인 일리마니 산의 모습에서 이곳이 얼마나 높은 곳인지를 실감했다. 협곡의 꼭대기인 고원지대 El Alto 까지 올라온 집들이 더 이상 팽창하지 못하고 있는 저 곳은 알티플라노 고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
전망대에서 본 라파즈 야경. 삼각대가 없어 애를 먹었다.
숙소에서 야경 투어를 위해 삼각대를 챙겨 나서다가 그만 계단에서 떨어트리고 말았다. 볼헤드를 체결한 핵심 부위가 그만 뚝 부러지고 말았으니,,, 삼각대 없이 야경을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행의 흔적을 위해 모양새만 갖추었다.
2420 텔레펠리코 타고 내려와 정거장에서
라파즈 밤 풍경을 두 눈에 가득 담고 내려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팀원들이 나를 에워쌌다. 카메라를 메고 있었기 때문인데 밤인데다 숙소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 사이 무슨 일이 발생할 지 모른다며 그리 하기는 했지만 참 가슴이 답답했다. 여행 중에 사진을 마음대로 찍지도 못하고 강도나 날치기가 염려스러워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다니,,,상상이나 해 봤을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안전이 제일 우선이었기에 모든 걸 감수했다. 아무 사고 없이 라파즈의 전망대와 알토지대를 자유롭게 여행을 했다는 여행자들도 있다. 또 라파즈는 경찰력이 강력하고 권총을 소지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총기 소지가 허용되는 남미의 다른 지역보다 안전하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이미 도착하자마자 사고를 당한 입장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귀담아 들릴리 없었다.
앞으로 이 여행기를 마칠 때까지 카메라와 스마트폰에 관한 이야기를 몇 차례 더 하게 될 것인데 브라질의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므로 여행 중 예상되는 위험이 특별히 볼리비아가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더 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남미 여행 자체가 그런 것이다.
2015년 4월 3일 금요일. 우유니로 이동
라파즈에 들어온 지 사흘째. 오늘부터 이곳은 부활절 연휴에 들어가기 때문에 시장도, 상가도, 음식점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렇게 혼잡스럽던 시장거리도 한가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 저녁 밤차를 타고 우유니로 먼 길을 떠나야 하니 이곳저곳 다니며 필요한 것들도 준비하고 미쳐 보지 못한 것들도 더 보아두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컨디션 관리를 위해 충분한 휴식을 갖기로 했다.
어제 SJ를 진료하기 위해 의사가 오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지 오지 못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딱해 아내가 누룽지를 끓여주었지만 그마져 손도 안 댔다. 의사가 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먼 거리에 있는 여행자 전문병원으로 갔다 왔는데 다행이 큰 이상이 없고 고산의 피로와 장염이 겹쳐서 나타난 증세라 하니 일단 음식을 조심하면서 조리하기로 했다.
SJ와 함께 병원에 다녀온 일행들의 전언에 따르면 대형 여행사의 패키지로 남미 여행을 왔다가 고산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병원에 나흘째 입원해 있던 한국 여행자를 만났다는데 그는 결국 우유니와 알티플라노 고원지대의 투어를 포기하고 몸을 추스린 후 이곳에서 곧바로 칠레 산티아고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세계 여행 중인 한 부부는 남편이 끝내 라파즈 고산을 극복하지 못해 앞의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울면서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는데 고산을 넘는 일이 만만치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는 예였다.
대체로 젊은 청년들인 우리 팀원들도 마추픽추에서부터 이곳 라파즈, 그리고 앞으로 우유니를 거쳐서 알티플라노 고원지대를 지나면서 여러 명이 아예 차에서 나오지도 못할 만큼 힘들어 하다 칠레 아타카마에 들어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을 정도였으니 고산에 대한 대비는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오늘부터 부활절 연휴여서 거리가 텅 비어버렸다. 차가 다닐 수 없을만큼 혼잡하던 곳인데,,,,
숙소앞 대로변에 있는 작은 가게의 장부
우유니로 출발 하기에 앞서 몇 가지 필요한 물품을 사려고 숙소 앞의 작은 가게에 들렸는데, 재미있게도 이곳 여주인은 우리가 고른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장부 세 곳에 각각 기재를 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바코드를 찍는 장비가 없으니 판매와 재고 관리를 위해 그리하는 것 같았는데 초스피드 시대에 만난 재래식 부기가 참 신선했다. 우리에게 영수증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부에는 그녀가 판 물건들의 이름과 가격이 꼼꼼하게 기록되었다. 여주인의 필체가 달필이었다.
볼리비아 한인마트에서 산 비상식량. 그 중에 으뜸은 저 파란병이다. 버금은 그 아래 상자에 든 라면과 김치
우유니에 가면 아무 것도 없다. 아니 비단 우유니 뿐만이 아니다.
높고 높은 안데스 알티플라노 고원에서 고산증과 싸우며 하룻밤을 자야하고 물가 비싼 아타까마도 거쳐가야 했다. 비싸기도 하지만 살 곳도 없다 하니 불편하더라도 최소한의 필요품은 준비를 해야했다. 하지만 내 돈 냈다고 모든 게 내 것은 아니었다. 우유니에 도착해 이슬 한 모금 생각이 나 찾았더니 이미 그 밤이 오기도 전에 어느 젊은 여인의 가슴에 녹아버렸다 했다.
우유니로 가기 위해 라파즈 버스터미널로 이동 중
라파즈 시외버스 터미널. 라파즈 시내에서 제법 반듯한 건물이다.
라파즈 시외버스 터미널 구내
1809년 무리요에 의해 독립이 선포되고, 1825년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독립을 이룬 볼리비아(볼리비아라는 국명도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따 지었다)는 1981까지 총 193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만큼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그러나 최근 30년간은 비교적 안정적인 정국이 유지되고 있어 어느 정도의 경제발전도 이루었다.
하지만 볼리비아는 여전히 남미 국가중에서도 최고 가난한 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데다 인디오 비중이 상당히 많은 편이어서 헌법에 명시된 공식 언어만 36개나 된다. 그런데다 1879년 아타카마 사막에 있는 초석산지를 둘러싸고 벌인 칠레와의 태평양 전쟁에서 져 태평양 연안의 땅을 잃고 내륙국가가 되고 말았다. 국민의 2/3가 고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연명을 하고 있으며 90%가량이 초등학교에 다니기는 하지만 실제 공부하는 기간은 1년이 채 안된다고 한다.
농사를 짓던 원주민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노력으로 최근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고, 천연가스 매장량도 남미 국가 중 두번 째로 많기 때문에 향후 성장 발전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이지만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로서의 한계와 다민족 국가로서의 대국민 통합 문제, 상존하는 정치적 불안요인 등등을 고려할 때 식민시대의 착취와 억압으로 악화된 서민들의 빈곤이 언제쯤 복지라는 이름으로 바뀔지는 지켜볼 일이다.
볼리비아가 지니고 있는 기록들을 보면,
세계에서 제일 많은 쿠데타가 일어난 곳, 헌법에 명시된 공식 언어가 36개나 되는 곳, 남미에서 처음으로 원주민 아이마라 족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3연임을 하고 있는 곳. 대통령이 프로 축구단에 입단하여 축구선수로 활동하는 나라,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싸늘하게 죽음을 맞이한 곳, 바다로 나가는 길이 없는 나라,,,, 등등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재미있고 호기심 많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전 세계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안데스 알티플라노 고원의 그 눈부신 소금사막 우유니가 있으니 볼리비아는 축복받은 땅이다. 이제 그 아름다운 우유니를 향해 야간버스를 타고 12시간을 달리게 될 것이다. 버스는 지금까지 탄 버스 중에서 가장 불편하고 청결하지 못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그곳까지의 도로 사정도 최악이라 했다. 오후 6시, 단단히 각오하고 버스에 올랐다.
첫댓글 넘 가고싶네요ㅠ
사진이 다 이뽀요
풍경도, 소녀도... :)
잘 준비하셔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후회되지 않을 여행일 것입니다~~^^
우유니등 볼리비아는 항상 여행사쪽에서 보면 쥐약같은곳입니다
사고도 많고 고산이고 요금등도 멋대로에요
여행객들이 현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출발해야됩니다
함선생님
전체일정을 메일주시거나 이곳에 올려주세요
잘참조할게요
지금 여수 금오도에 와 있습니다
올라가서 전체 일정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글을 잘 쓰시네요
오랫동안 글과 사진에 빠져 즐겁게 읽었습니다
많은 정보도 얻었구요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최근의 자료를 찾는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항상 미흡한 듯해서 글 읽는 회원님들께 미안한 마음입니다^^
12년도에 저도 다녀왔는데 아직도 사진정리 못하고 외장하드에 숙성중인데 ... 설명 너무 상세히 잘하시네요
정말 잼있게 읽었습니다
사진 정리해서 여행기 쓴다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여행기를 정리하고 나면 또 한번의 여행을 한 것처럼 여행의 전과정이 분명하게 인식된다는 좋은 점도 있어서 틈틈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응원해주셔서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