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항해 73 강의
73.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철학 비판 : 존재와 생성의 대립
파르메니데스 사상의 핵심은 존재나 '있는 것'은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있다. 그 반면 비존재나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존재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불합리하다 고 한다.
그러나 일상 언어에서 우리는 없음 혹은 무(無)에 대해서 언급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없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라고 한다. 즉 “영구 없다” 라는 말은 잘못이다.
일상 언어에서 “없다”는 것은 위에서도 한번 언급한 것처럼 실은 “분리”를 말한다. 혹은 소멸, 멸망 같은 말도 마찬가지이다.
물리학의 질량 보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단 우리 눈에 안보이게 될 뿐이다. 따라서 없음 혹은 무(無)란 것도 실은 연결이 안 되는 것에 불과하다. 두 사물의 연결이 끊어질 때 우리는 흔히 무(無)라는 개념을 쓴다. 허무(虛無)도 같은 말이다. 가령 죽음 같은 현상도 소멸이나 멸망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의 분리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생성 역시 두 개 이상의 사물들의 결합으로 보아야 한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도 동일한 논리가 성립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처럼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그대로 전제하고 그 원리와 원인을 찾으려 한 자연철학 대신 다원론자들은 (pluralists) 원자나 원소 등의 영원하고 불변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이들의 결합과 분리를 가지고 생성과 소멸의 원인을 규명한 것이다.
이제부터 파르메니데스의 저술 “자연에 대하여”를 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은 6보격의 운율로 이루어진 시(詩)이다. 그 구성은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서론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진리의 여신의 인도를 받아서 밝은 진리의 신전에 도착한다는 내용이고 2부는 진리(aletheia), 3부는 억견 (doxa)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명제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2. 좋다, 이제 나는 당신에게 어떤 탐구의 방식이 유일하게 사유되는지를 말하겠다. 당신이 듣는 말을 잘 새겨 두시오.
첫 번째 길은 : “있음은 있음이며”, “있지 않음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신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는 진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 있지 않음이 있다는 것이며 있지 않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 길은,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탐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있지 않음을 인식할 수도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3. 왜냐하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있음은 있고 없음은 없다” 는 파르메네데스의 명제가 가지는 중요성은 엄청나게 큰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철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은 자연철학 이라고 한다. 자연철학은 자연과 그 변화의 원리를 찾는 철학이다. 대표적인 철학자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이다. 이들은 자연의 다양성과 생성, 변화를 인정하고 ㅡ당연한 사실이긴 하지만ㅡ 이들의 원리와 원인을 추구했다.
철학의 시조이자 자연철학인 탈레스는 “만물의 원인(근본)은 물” 이라고 했다. 물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한 밀레토스 학파 (=자연철학) 를 계승한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의 개념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인데 그는 물이 아니라 ㅡ탈레스ㅡ 무한자 (to apeiron)에서 삼라만상이 펼쳐져 나온다고 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동료인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근본적인 물질로 삼았는데 공기가 희박하게 되면 불이 되고 농축이 되면 바람이 되고 다시 구름이 되고 물, 불, 흙 순으로 변한다. 즉 아낙시메네스의 원리는 농축(condensation)과 희박 (rarefaction) 이다.
위의 사례들 중 아낙시메네스의 공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공기가 물로 변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즉 “공기 → 물” 이다. 공기는 사라지고 대신 물이 생성된다. 눈에 보이는 이 현상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힘든 면이 있다. 즉 공기는 어디가고 물이 나왔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공기는 소멸하고 물은 생성된 것이다.
현대 과학도 이런 현상을 소멸과 생성이 아니라 물 분자의 운동과 분자간의 간격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이 과학에 반영된 결과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연과학의 수준이 극히 미미하여 원자, 분자 등으로 물질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있음은 있을 뿐 없는 것으로 될 수 없다」 라고 갈파한 것이다. 자연 과학도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입증한다. 즉 공기가 사라지고 물이 생성된 것이 아니라 물이 기화함으로서 분자간의 거리가 멀어진 것일 뿐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영원하다, 변화가 없다 는 사상은 일상 경험이나 자연 현상과 다른 것처럼 보이나 이 철학 때문에 철학과 과학이 발전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이 원자나 분자 개념으로 옷을 입은 것이다.
물질의 변화와 생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고대인들은 무(無)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무(無) 개념은 그 자체가 성립하기 불가능한 모순적 개념이다. “무(無)가 있다” 는 표현은 자기 모순을 범한다. 그래서 그들은 “무(無)가 요청된다” 라고 말했다.
필자의 번역에서 이는 “있지 않음이 있다는 것이며 있지 않는 것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라고 했다.
“무(無)의 요청” 개념을 일상적인 사실을 통해서 한번 살펴보자. 예를 들어 사람은 출생한다. 즉 무(無)에서 생성된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은 분명 있다. 남녀의 번식 행위가 그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한 아이는 태어난다. 또 인간은 죽는다. 사라진다. 「무(無)로 돌아간다」라고 한다. 인간은 무(無)에서 나와 다시 무(無)로 가는 것이다. 이런 탄생과 사망 혹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득불 무(無)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게 바로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무(無)의 요청” 사상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를 부정, 비판한다. 아무리 필요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무(無) 개념은 자기 모순이다” 라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따르면 “있지 않음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그는 있음은 있다. 왜냐하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멸망하지 않는다. (• • •) 어떻게 존재자가 멸망하며, 어떻게 그것이 생성하겠느냐? 라고 한다.
6. 꼭 필요한 것은, 단지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고 또 사유하는 것이다.
(• • •)
8. 그런데 단 하나의 이정표가 남는다. 즉 있음은 있다. 왜냐하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멸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구성에 있어서 완전하고 부동적이고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전체로서, 일자로서, 결합시키는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 •)
어떻게 존재자가 멸망하며, 어떻게 그것이 생성하겠느냐? 왜냐하면 그것이 생성했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마찬가지로 그것이 미래에 있게 된다고 해도 (현재에는) 있지않다. 따라서 생성은 소멸되고 소멸은 실종되어 버렸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명제의 문제는 현실 세계 즉 생성과 변화의 세계를 부정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다” 는 철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붕괴된다. 왜냐하면 자연철학은 변화와 생성, 소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원인을 밝히려 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와 생성 자체가 잘못이다」라고 한다, 설령 그런 것이 눈에 보이는 자명한 사실이기는 하나, 어쨌든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오류라는 것이다.
이런 철학에 의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변화 역시 오류이다. 현실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정말 대단하고 담대한 주장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를 전후로 해서 크게 양상이 바뀐다. 그 후 부터는 “존재하는 것은 불변적이고 영원하다” 라는 전제하에서 철학적 사유를 펼쳐가게 되었다. 예를 들어 흔히 다원론자라고 하는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그리고 데모크리투스의 철학이 그렇고 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를 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우리는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다원론자들을 만물은 유전한다고 본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실재는 유일불변이라고 본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조정하려고 한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우리가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거시적인 복합적인 사물에는 부단한 변화의 성질이 있다고 보았고, 이 거시적인 사물들을 구성하고 있다고 여긴 미시적인 원소의 하나 하나에는 불변의 통일성이 있다고 보았다. 즉 변화하는 사물들은 변하지 않는 부분들로 되어 있으며, 사물에 있어서 일어나는 변화는 동일한 항구적•불가분적인 궁극적인 원소들의 재배분 (再配分)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이 세계를 다원론적으로 보았고, 그 각 원소들은 불가분(不可分)적인 일자라고 보았다. 서양철학사, 스털링 P. 램프레히트 저 36~37 쪽
그래서 그리스 철학계에서는 더 이상 변화의 원리를 추구하는 자연철학은 성립할 수 없었고 불변적이고 통일적 실체를 통해서 삼라만상을 설명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나 데모크리투스의 원자(atom) 등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에 해당한다.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 역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에 해당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