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다> 장성의 최초 근대 교육기관은 1907년에 설립한 사립 장명학교다. 성산리 장성향교에 설립한 장명학교는 청소년들의 계몽과 민족자주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명륜당 등 4곳에서 과학, 산수, 국사 등을 가르쳤다. 훗날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병한 뒤 공립 장성보통학교로 바뀌었고, 1921년 성산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침탈 위기에 있을 때 젊은이들에게 민족자주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설립한 사립 장명학교를 개교한 사람이 회산(晦山)공 변승기다. 회산공은 어렸을 때 이름은 처명(處明)이오, 휘(諱)는 승기(昇基), 회산은 호로, 1866년 11월 24일 장안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신묵재(愼黙齋) 변태용(1836-1897)과 할아버지인 봉서(鳳棲)공 변상철(1818-1886), 증조할아버지인 기옹(碁翁) 변종락(1792-1863)은 모두 장성에 이름난 선비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훌륭한 문집을 남겼으며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회산공은 어려서 조부인 봉서공에게 학문을 배웠고, 서고(西皐) 김채정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신호(莘湖) 김녹휴(1827-1899), 송사(松沙) 기우만(1846-1916)선생을 찾아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1900년 성균관 동제(東齊)의 재장이 될 만큼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다.
<계몽과 자주민족 운동에 앞장서다>
국운이 날로 쇠퇴하고, 왜적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면서 회산공은 애국 계몽운동과 민족자주 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고, 1907년 3월 위암(韋菴) 장지연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간을 맡게 된다. 대한매일신보는 위기에 처한 국난을 타개하고 배일사상을 고취시켜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창간된 것으로 민족진영 애국지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출발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의병활동에 대한 보도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고, 1910년 조선이 일본의 강제 침탈에 의한 합병이 이루어진 뒤 매일신보로 바뀌고 말았다. 일본은 1905년부터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며 엽전인 구화를 신화인 지폐로 교환을 빌미삼아 식민지 경제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납세 비중이 높은 결세(토지세)를 부과하면서 신화보다 가치가 높은 백동화 유통지역이던 경기, 강원, 충청 지방은 8원을 징수하고, 용전지역이었던 전라, 경상, 함경 지역의 결세는 12원을 부과했다. 영`호남 사람들은 이에 대한 부당성에 항의하고, 익산에서는 민간인의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다. 회산공은 1907년 장성향교에서 성균관 박사 송영순과 함께 유림을 소집하여 균세운동을 결의하였고, 이러한 내용이 대한매일신보 등에 크게 보도되었다. 공은 이 사건으로 일제 통감부 광주 검찰국에 의해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겪게 되었고, 오히려 이 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라, 경상도민들의 납세 거부운동을 가져오게 하였다. 1908년 5월 납세 거부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정부는 회의를 소집하여 전라`경상 지역의 결세를 8원으로 결정하게 만들었다. 회산공의 균세 운동이 거둔 쾌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07년 장명학교를 세운 회산공은 노사 기정진 선생을 기리기 위한 고산사(高山祀)를 창건할 때 통문을 띄워 설립에 크게 기여했고, 유도창명회(儒道彰明會)를 조직하여 지역주민의 교화에 나섰다. 만년에는 명승고적을 탐방하며 서유가, 동유록, 금강록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호남학보에 나타난 그의 사상>
1907년 7월 서울에서 결성된 호남학회는 호남출신 애국지사들이 설립한 애국계몽단체로 회산공은 호남학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게 된다. 1908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호남학보에 회산공은 과거의 폐습을 버리고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신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1908년 4월에 발행한 호남학보에 회산공은 신구동의(新舊同義)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는데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이를 근심하여 학교를 세우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직분을 행하게 하고, 실업을 닦게 했으며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여 그 지식을 통달하게 하였다”며 “외국과의 교류를 하며 가르치지 않으면 통할 수 없고, 모든 나라가 서로 개방하고 교류하는 시대에 병사를 튼튼히하고, 나라를 지키며 교섭하여 서로 상생하기 위해서도 백성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구학(舊學)과 신학(新學)이 하나의 수레와 같으니 우리나라가 학교를 세우고 가르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회산공이 장성향교에 장명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에 나선 것은 그의 철학과 소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1908년에 발행한 호남학보에서는 혁거구습(革去舊習)이라는 제목이란 글에서 “세상의 모든 사물의 이치는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니 사람이 구습의 폐단을 알면서도 고통을 감수하고 용단을 내리지 않으면 폐습을 없애기 어렵다”며 “옷이 더러워지면 빨지 않고 깨끗해질 수 없고, 구슬의 때를 닦지 않으면 맑음을 되찾지 못하고, 거문고의 줄을 다시 매지 않으면 음율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 사람의 일도 이와 같다”며 “요즘에 선비라는 사람들이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으로 청절(淸節)이라 하고, 나라를 돌보지 않는 것으로 은덕(隱德)이라 하며 세상의 물정을 알지 못하는 것을 청렴한 행이라 하고, 세상의 일에 대해 듣지 않는 것을 고상한 삶이라 한다”며 “선비(儒)란 구하여(需) 쓴다는 뜻으로 세상에서 구하여 쓸 수 없다면 선비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선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고상한 척 글이나 읽고, 은둔하여 사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회산공은 거듭 청년`자제들을 학교로 보내 정치와 법률을 익히게 하고, 세계문명을 배워 과거의 구습을 과감히 버리지 않으면 나라의 권리를 세울 수 없다고 강조했다. 1939년 13권 2책으로 발행된 회산집(晦山集)을 남겼으며 대한민국 제2, 3, 4대 국회의원과 농림분과위원장을 역임한 고암(蠱巖) 변진갑의원이 회산공의 아드님이다
<회산 증조할아버지때부터 대를 이어 온 화로>
회산(晦山) 변승기(변昇基, 1866-1937)의 자(字)는 처명(處明)이다. 공(公)은 신묵재(愼黙齋) 변태용(台容, 1836-1897)의 아들로 태어나 조부(祖父) 봉서(鳳棲)공 변상철에게서 한학(漢學)을 배웠다. 신호(莘湖) 김록휴(金祿休, 1827-1899),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을 찾아 경사(經史)를 문답하고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서른네 살에는 성균관동재(成均館東齋)의 재장을 맡아 여러 권의 경의(經義)와 사서(史書)를 저술하는 등 여러 명사들과 교유했다.
공은 1907년 3월 위암(韋庵) 장지연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간을 맡았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부터 국권을 빼앗길 때까지 발간되었던 일간신문으로, <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원인 베델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창간했다. 이 신문의 중요 논설은 대부분 양기탁이 집필했고 박은식, 신채호등 애국지사들의 논설도 실었다. 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애국운동에 앞장섰다.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고 민족의식을 드높여 신교육에 앞장섰으며 매국적인 친일 세력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베델이 죽고, 1910년 국권피탈이 되면서부터는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이 대한매일신보의 주간을 맡을 때가 이 신문이 애국계몽과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일제는 1905년 8월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어 재정권과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또한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郞-Taft密約]’,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한국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얻은 상황에서 일제는 1905년 11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관리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늑결(勒結)하였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 재정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화폐(貨幣)정리사업이었다. 일제는 일본인 재정고문 모쿠가다(目賀田)를 앞세워 옛날 돈(舊貨幣) 열 냥(十兩)을 새 돈(新貨幣) 1환(圜)으로 환율(換率)을 정하고, 백동화(白銅貨) 유통지역이었던 경기, 강원, 충청, 황해, 평안지역의 결세(結稅, 토지세)는 8환을 징수하는 반면 엽전을 사용하는 전라, 경상, 함경지역의 결세는 12환이었다. 그러나 엽전으로 결세를 낼 경우에는 8환에 해당하는 80 냥만 내도록 했다. 엽전은 구리(銅)의 함유량이 많아서 금속으로써 가치가 높았다. 더구나 1906년에는 국제적으로 구리 가격이 폭등하여 이를 수출할 경우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결국 일제의 화폐개혁과 결세 차등 정책은 엽전을 회수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제는 엽전 통용지역이던 전라, 경상도에서 신화폐의 납세를 허락하지 않고, 오직 엽전만을 강제 징수했다.(황성신문, 1906년 4월6일자)
이 때 회산 변승기가 처음으로 제기한 운동이 바로 균세(均稅)운동이다. 균세운동은 한마디로 엽전통용지방에서도 백동화 통용지역과 같이 신화폐 8환으로 납세하자는 운동이다. 균세운동은 여론형성기와 건의운동기 그리고 납세거부운동기의 3단계로 진행되었는데, 1907년 2월27일 장성향회에서 변승기의 주도로 김성규(金星圭, 1863-1935), 송영순(宋榮淳, 1841-1916) 등이 함께 엽전통용지역의 향교에 균세운동의 필요성을 알리고, 군민대표를 소집하여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송영순은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항일의병운동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항일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 장성읍 안평마을에 있는 회산 변승기 선생의 기적비.
변승기는 주민대표와 그가 발기인으로 참여한 호남학회회원들을 중심으로 탁지부(度支部,국가 재정을 담당한 조선의 관청), 중앙관서에 30여 차례나 균세를 건의하였다. 변승기는 1907년 4월13일 탁지부에서 열린 정부회의에 참석하여 균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적극적으로 대항하겠다고 했다. 결국 탁지부에서는 훈령을 내려 1908년부터 전라, 경상지역에서 결세를 8환으로 통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제는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삼아 고종(高宗)을 퇴위시키고, 조선의 식민지화 작업을 진전시키며 균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한 탄압에 들어가 김성규와 송영순 등을 체포했다. 변승기는 전주 감독국장(監督局長)에 의해 피소되어 광주검찰국에 구금되기도 했다. 균세운동의 주동인물들이 체포되자 잠시 주춤했던 균세운동이 오히려 1908년 3월에는 납세거부운동으로 번지자 일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08년 5월20일 정부회의를 소집하여 엽전통용지역의 결세를 8환으로 결정 공포했다. 김혜정은 <구한말 일제의 엽전정리와 한국민의 저항>이라는 서강대학교 대학원 논문에서“변승기가 주도한 균세운동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경제화하기 위한 침탈에 대항한 항일운동의 하나였다”고 규정했다. 이는 변승기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전통적인 유학(儒學)을 수학한 위정척사(衛正斥邪) 계열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 믿음을 더해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던 변승기는 유림대표 20인과 함께 도내 향교에 통문을 보내 정읍 내장사에서 1903년 7월15일 호남유림대회를 계획하고, 일제의 조선침탈에 대한 집단 항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호남학회 설립 발기인으로 학보편집위원을 맡기도 한 변승기는 균세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서 애국계몽운동으로 변신하게 된다. 호남학회는 1907년 7월 서울에서 호남 출신 계몽운동가들이 설립한 애국계몽단체로 호남 각 지역의 사립학교 진흥, 호남 출신 서울 유학생 후원, 기관지 《호남학보》 발간, 강연회와 토론회 개최 등을 펼쳐 나갔다. 1910년 회원수가 565명에 달했던 호남학회는 애국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열어 민중계몽과 애국사상의 고취에 노력하다가 1910년 8월 통감부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변승기는 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 1908년 4월19일 사립 장명학교(현 성산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영재교육과 국민계몽에 나섰다.
1907년 장성군수 서리(署理)를 맡기도 했던 변승기는 일제가 조선을 강제 합병하고, 관직을 미끼로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유도창명회(儒道彰明會)를 조직 주민 교화에 나섰다. 공은 그 뒤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향사(享祀)하는 고산사(高山祠) 창건을 위해 여러 향교와 유림에 통문을 보내는 등 유학의 창달에 앞섰다.
일제의 강제 침탈에 항거하기 위한 애국지사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회산 변승기는 균세운동과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 등을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깨우친 선각자로 길이 남을 것이다.
결세(結稅) : 고려시대 이후의 세제(稅制)는 결부법(結負法)에 따라 논·밭을 측량하고 결(結)에 따라 세금을 매겨왔다. 조선시대에는 매년 9월 15일 이전에 각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실지조사를 하고, 이것을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조정에서는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의 관원들이 모여 세금의 비율을 결정하였다. 지세의 세율은 대략 1결에 쌀 4말[斗], 삼수미(三手米)로는 2말 2되였다.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변씨 댁 가보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전남 장성 축령산 기슭에 사는 변씨 댁에는 5대째 내려오는 화로가 있다. 하지만 변씨 댁에서 진짜 가보(家寶)로 여기는 것은 골동적 가치가 있을 법한 화로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재(ash)다. 흔히 가장 하찮고 허무한 것을 지칭할 때 재 같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어찌 이걸 가보라 하는 것일까? 심지어 변씨 댁에서는 새 며느리를 맞으면 이 재를 대물림한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렇다. 재는 가장 쓸모없고 가치 없는 분진처럼 여겨지기 일쑤다. 하지만 그것이 여기서는 5대를 이어온 역사요 자긍이다. 대단한 집안 내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매서운 칼바람 이는 추운 겨울에도 화로를 둘러싸고 앉은 가족의 정겨움과 끈끈함으로 그 혹한을 이기고 이제껏 살아왔다는 자부심과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재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 화로 속의 남은 재 모두가 5대째 내려오는 묵은 재는 아니겠지만 설령 그 재 중에서 단 한 줌일지라도 정녕 5대를 내려오며 쌓이고 묵힌 것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바로 거기엔 혼이 담겼으리라. 그 어떤 어려움도, 그 어떤 혹한도, 그 어떤 주변의 냉대도 모두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가족의 단란함과 끈끈함이라는!
# 변씨 댁에는 먹감나무 상(床)이 있다. 거기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그런데 이 먹감나무라는 것이 참 묘하다. 감나무는 자기 속이 검게 썩어가면서도 열매를 맺는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나중에 나무가 죽어 잘라보면 그 속이 검다. 물론 감나무의 떫은맛을 내는 타닌 성분이 검게 얼룩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변씨는 이것을 ‘부모의 마음’과 같다고 여긴다. 자식열매 맺고 그것들을 키우느라 속이 까맣게 뭉그러져가면서도 겉으론 전혀 내색하지 않다가 죽어서 베어 보아야 속이 까맣게 탄 것을 알게 되는 먹감나무처럼 부모의 애끓고 속 타는 마음 역시 자식들은 부모가 죽어서야 겨우 알게 된다. 그런 뜻에서 먹감나무의 그 검디 검은 얼룩을 ‘부모의 마음’이라 이름 한 것이리라. 변씨 댁에 있는 먹감나무는 전남 함평 월야에서 300여 년을 살다 지난 2005년 쓰러져 베어낸 나무란다. 그 나무를 갈라보니 정말이지 자연의 화가가 따로 없었다. 검은 먹감 무늬가 나무의 심중을 물 흐르듯 관통하고 있었다. 그 어떤 기성의 화가도 쉽사리 흉내내기 어려운 추상화가 거기 그렇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정녕 먹감나무는 300여 년의 세월 동안 쉬지 않고 그렸던 것이리라. 그야말로 천지인(天地人)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낸 자연의 추상화인 셈이다. 그 세월 동안에도 먹감나무는 해마다 감을 영글게 했으리라. 속이 검어지는 아픔도 감춘 채!
# 변씨 댁의 마지막 가보는 다름 아닌 장독대다. 세상의 음식은 ‘장독대 있는 음식’과 ‘장독대 없는 음식’으로 갈린다고 변씨는 힘주어 말한다. 자고로 음식은 시간을 담그는 일이다.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것도 시간을 담그는 것이요, 된장국 하나를 끓여내는 것도 결국 시간을 우려낸 깊은 맛의 된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한 번 맛깔난 음식은 도처에 많다. 하지만 며칠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음식은 흔치 않다. 한 번 맛깔난 음식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을, 아니 평생을 먹어도 물리지 않고 더욱 더 그리운 그 맛이 진짜 맛이다. 그 맛은 다름 아닌 시간을 담근 장독대에서 나온다. 자고로 담가서 묵혀야 진짜 생명이 살아나고 참맛이 나는 법! 그래서 변씨 댁 허름한 장독대는 그 자체로 가보다.
# 천안 사는 이씨에겐 쌀 푸는 데 쓰는 짜개진 표주박이 가보다. 짜개진 것을 굵은 실로 꿰매가며 40여 년째 쓰고 있는 이 표주박 덕분에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다고 믿기 때문에 가보인 것이다. 그렇다. 물건 자체가 값 있어서 가보가 아니다. 그것에 어떤 마음을 담고 어떤 생각을 갖고 대하느냐가 진짜 가보를 만드는 것이리라. 지금 나의 가보는 어디에 있나? 명절이 다가오는 때인 만큼 스스로 마음의 눈을 밝혀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