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한국천주교 첫 신부가 되신 ‘김대건’ 책을 읽어 본다.
그는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다. 첩첩산중 뱀이 많은 마을이라‘골배마실’이라불렀다. 땅도 비옥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천주교 믿음을 지키며 살았다. 대건이가 살던 조선시대는 사람마다 양반, 중인, 천민 등으로 신분이 다른 사회였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했다. 대건의 가족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고 작은 할아버지도 믿음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다. 대건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고 자주 아팠다.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며 지내던 어느 날 “천주님 세상은 뭐가 다른가요?" 물었다. 천주님 세상이 오면 가난한 사람도 노비도 양반도 임금도 구분 없이 모두 천주님의 아들딸로 차별 없이 살 수 있다 하기에, 대건이는 이야기를 나누며 천주교를 받아 들였다.
어느 날 프랑스에서 한 신부님이 마을에 와 미사를 이끌며 세레도 주고 대건이에게 안드레라는 세례명을 주며 의사소통이 안 되는 신부는 안드레아를 유심히 보고 성경공부를 시켰다. 대건은 모방 신부와 한성으로가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체스코, 서로 존중하며 공부했다. 중국어, 라틴어, 프랑스어까지 익히려니 어려웠으나 열심히 공부하던 중 모방신부는 세 사람을 마카오로 가서 공부 할 것을 권합니다.
마카오는 중국 땅에 있는 도시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열두 번도 더 가야하는 거리였다.
대건은 친구들과 마카오에 있는 외방 전교회의 조선 신학교가서 아시아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선교단체에서 공부를 하며 조선의 신부 꿈을 꾸었다. 당시 마카오는 일찍 서양과 교류를 시작하여 외국에서 들여온 갖가지 물건이 많았다. 그중엔 세계지도도 있었다. 대건은 조선에도 지도가 있기를 바라며 보는법을 익히고 꼼꼼히 살폈다. 그러던 중 함께 공부하던 방제가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군함 한척이 마카오에 정막 후, 함장이 조선 학생이 프랑스 말을 한다기에 찾아왔다고. 함장은 조선으로 간다기에 고향으로 가려는 꿈을 꾸고 있던 중 조 약식을 보려고 회의장에 모여 김대건은 그동안 갈고 닦은 프랑스어로 통역을 해 회의만 끝나면 조선으로 갈려고 했는데, 세실함장은 유능한 대건의 통역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때는 천주교인을 신고하면 포상을 받고 박해는 더욱 심해서 김대건은 결국 청나라로 되돌아갔다. 이년 뒤 김대건은 최양업 신부 아래 직위인 부제가 되었다. 십 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기쁨도 잠시 눈이 나빠져 꼼짝도 못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박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 교우들이 위험에 빠질까봐 스스로 나서서 체포 되었다는 이야기에 교우들은 안타까워했다.
김대건은 천주교를 전하려고 조선으로 오는 신부들을 위해 지도도 만드셨고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셨다. 페레올 신부는 대건에 머리위에 손을 얹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사람들을 쉬지 않고 돌보겠느냐’ 하셨다. 은이 마을로 돌아온 대건은 어머니를 얼싸 안고 울었다. 조선 땅에서 미사를 처음으로 드리며 우리말로 천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교우들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러나 박해는 점점 심하고 늘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중 천주교는 외국 사람들을 끌어들여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이유로, 김대건을 처형하기로 결정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한강 모래사장인 새남터로 끌고 가 김대건 신부를 처형하여 눈을 감았다. 그는 1846년 9월16일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스물 여섯 살의 나이로 천주님 품으로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