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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베드로 다미아노(1069년 2월 22일)
라벤나(Ravenna)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폰테 아벨라나(Fonte Avellana)에 있는 보속(補)을 중시하는 은둔 수도원의 원장이며, 개혁을 기꺼이 추구한 추기경이자 예술가이며 학식 많은 신학자로서 특히 교부(Kirchenlehrer)라는 명예스런 칭호로서 알려졌었던
성 베드로 다미아노(Petrus Damiano)는 연옥 영혼들의 위대한 친구였다. 일찍이 고아가 된 성 베드로 다미아노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작은 일화가 벌써 그것을 보여준다. 그의 제자이며 전기 작가인 요한 폰 로디(Johannes von Lodi, 1105년)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 고아가 된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어느 날 우연히 돈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돈으로 그는 철없는 어린이들이 보통 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욕구를 채우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죽은 부모를 위해 미사를 올려 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 돈을 사제에게 갖다 드렸다"고 썼다.
또한 특기할 만한 것은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후에 폰테 아벨 라나의 은자 단체를 위한 규칙에서 수도자들이 기도할 때 위령 기도도 함께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는 점이다. 죽은 형제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 베드로 다미아노의 수도 단체에서는 많은 기도와 미사 봉헌 및 참회와 고행, 그 밖에 갖가지 선행 등을 실천하였다. 또 성인(이하 성 베드로 다미아노를 가리킴이 세우고 이끌었던 수도원과 은자 단체들이 연옥에서 정화되고 있는 죽은 동료들을 염려하여 기도의 친교(Gebetsverbrüderung)를 형성했던 것처럼.4 라벤나에 있는 폼포사(Pomposa) 수도원에 보낸 성인의 편지에서 도이 수도원이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의 친교를 채택하도록 간청하였으니 여기서도 우리는 그의 불쌍한 영혼에 대한 열절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몬테 카시노 (Monte Cassino)에서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그가 다른 수도원에서 했던 것과 같은 식으로, 죽은 수도자를 위한 기도와 미사 봉헌을 올리도록 힘썼다.
프랑스에 있는 클루니 수도원장 후고(Hugo)는 어떤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성 베드로 다미아노가 방문해 주기를 청했다. 그때 성인은 그의 간절한 소원인 수도원의 기도 단체 허가를 충족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그 청을 승낙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래에 있을 그의 사망 추모일에 그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집회 미사의 봉헌과 불쌍한 사람들에게 급식을 제공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클루니 수도원에서 머무르는 동안 추기경 성 베드로 다미아노는 수비니 (Souvigny)에 새로 건립된 교회를 축성하고 거기서, '위령의 날'을 제정했던 위대한 클루니의 수도원장 성 오딜로의 성해(聖飯)를 찬미했으며, 이 수도원장의 생애를 저술했다.
성인은 1058년 이래 베네딕도 수도회의 모체 수도원인 몬테카시노를 이끈 수도원장 데시테리우스(Desiderius)-이 수도사는 1059년 성 베드로 다미아노와 마찬가지로 추기경이 되었다.와 친교를 맺고 그를 위해 여러 가지 놀라운 이야기와 현상에 관하여 (Über verschiedene wunderbare Erzählungen und Erscheinungen) 리는 소책자를 썼다. 거기에서 성인은 많은 불쌍한 영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주 유익한 것이었다. 이 책의 제 5장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쾰른의 거룩한 주교 세베린 (Severin)은 일생 동안 내내 비범한 재질을 갖고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특별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서거한지 얼마 후에 자신의 주교좌 성당의 참사 위원에게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도 완전히 연옥의 불길에 휩싸인 채였다. 주교좌 참사 위원은 매우 놀란 채, 고인이 된 세베린 주교에게, 세상에서 그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도 축복받은 것이었고, 그의 이름은 전 교회에서 찬미되고 있는데 어째서 그가 그렇게 무서운 정죄화(淨罪火)의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를 물었다. 그때 이렇게 나타난 주교는 대답했다. "내가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은 어떤 다른 것 때문이 아니네. 단지 내가 황제의 궁전에서 자문관으로서 머물렀던 그 시기에 교회의 기도 시간을 교회에서 정한 그 시간에 봉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네. 나는 너무나 많은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드리는 모든 기도를 매일 아침 한꺼번에 드리는데 익숙해 있었지. 나중에 그 밖의 다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지. 이렇게 교회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토록 고통으로 속죄해야만 한다네. 그러니 내가 부탁하건 대, 자네는 어서 가서 교회의 다른 사제들과 독실한 신자들에게 내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를 말해 주게, 그리고 그들에게 기도와 자선과 미사 성제의 봉헌을 통해 나를 구원해 주도록 부탁하게. 그러면 나는 곧 이 형벌에서 벗어날걸세!" 성 베드로 다미아 노는 이 이야기에 자기의 견해를 덧붙였다. "그토록 경건한 사람도 비교적 작아 보이는 하나의 죄 때문에 그렇게 무서운 연옥의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참으로 큰 죄를 짓고 있는 우리에게도 나중에 어떤 판결이 내려질 것인데, 나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어찌 슬퍼하 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편지에 늘 "Petrus peccator (죄인 베드로)"라고 서명하던 이 성인은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 성인은 매년 성모 승천 축일에는 수천 명의 불쌍한 영혼들이 연옥에서 해방된다고 기록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당시 로마에서 일어났던 다음과 같은 사건을 이야기했다. 즉 그 당시 로마에는 신자들이 성모 승천 축일 전야에 타오르는 촛불을 손에 들고 일정한 교회를 방문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날 밤에 카피톨리노 언덕의 제단에 있는 성모상에 이르는 교회 통로에서 한 부인은 바로 일 년 전에 사망한 대모를 갑자기 보았다. 정말로 죽은 대모인지 혹은 착각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 부인은 교회의 문에서 자기 앞에 나타났던 사람을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잠시 후에 대모가 교회의 문 쪽으로 왔다. 그 부인은 용감하게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와 무엇인가를 잠시 이야기하고 그녀가 대모 마로지아(Marozia) 인지를 물어 보았다. "물론이지," 하며 죽은 이가 대답하였다. "내가 대모란다." 그러자 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죠? 대모님은 이미 여러 달 전에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삶들 속에 다시 있을 수 있나요? 죽은 이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젊었을 때 저질렀던 많은 질투의 죄에 대한 형벌 때문에 무시무시한 불속에 빠져 있었단다. 그러나 오늘 교회에서 베푸는 성모 승천 대축일의 축제를 맞아,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셨단다. 그리고 나와 매우 많은 영혼들을 연옥의 불속에서 해방시켜 주셨지. 매년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자비 깊은 기적을 새롭게 하시지....이런 은총에 감사하기 위해 우리는 이날 밤 성모님의 성지(Heiligtüm)를 방문한단다. 비록 나 혼자만 너에게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지금 여기에는 숱하게 많은 죽었던 이들이 와 있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 한다. 내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너에게 말해 주겠다. 너는 일 년 뒤 오늘, 곧 내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죽게 될 것이다. 나의 예언이 확인되지 않고 이날이 지나간다면 너는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거짓으로 생각해도 좋다." 이 성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를, 부인은 그 시간 이후부터 기도와 덕행으로 훌륭한 죽음을 마련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쏟지 않았는데, 그녀는 정말로 다음해 성모 승천 대축일의 전야에 갑자기 병에 걸려서 그 다음날 죽었다는 것이다.
1. 채사리우스 하이스터바하(1240년)
믿음이 깊은 수도사이며 시토회 (Zisterzienserkloster)의 수도원장인 지벤게비르게 (Siebengebirge)의 하이스터바하(Heisterbach)는 성인 명부에 오른 성인도 아니며 훌륭한 신학자도 아니지만 환영과 신(神)의 현현(Erscheinung), 그리고 기적에 관한 그의 보고와 기록 모음집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당시의 경건한 민중 신앙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들에 대한 훌륭한 증인이었다. 그 당시 교회는 알비파(Albigenser)와 발드파(Waldenser)가 주장하는 종과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 종파들은 인간 영혼이 본래 천국에 있었는데 죄를 범한 벌로 육체 속으로 내쫓겼다고 가르쳤다. 이들에 의하면 현세는 인간의 영혼에게는 연옥이며 정화의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여기에서 완전히 정화되어 서, 다시 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내세의 정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오리게니즘으로 소급되는 이런 이단들에 비해 시토회의 수도사 하이스터바하의 견해는 내세의 정화는 실존하는 것이며 그곳의 영혼들을 기도와 미사 성제에 의해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훌륭하고도 명확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견해를 올바르게 뒷받침해 주는 역사적 사건을 들어 볼 수 있다." "높은 신분을 가졌던 한 젊은이가 시토회의 수도사가 되었다. 그에게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숙부가 있었는데 그는 주교였다. 이 주교는 조카의 됨됨이를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수도사가 되려는 것을 알았을 때 수도원으로 찾아가 세속적인 생활로 되돌아가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였다. 수련 기간이 끝나서 그 젊은이는 서원(願)을 했다. 최초의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내쫓게 만든 그 악마의 유혹이 그를 자신의 맹세와 직분에서 떨어져 나가게 만들었다. 가장 나쁜 것은 그가 자신의 창조주와 자신이 속해 있는 수도회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가족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을 수치스러워했기 때문에 결국 도둑떼에 가담했다. 여기서 그는 너무나 타락하여 이전에는 보통 사람보다 더 착했던 그가 이제는 악인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느 성(城)을 포위 공격했을 때 그는 화살을 맞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마차가 그를 가까운 마을로 실어 갔고 몇 사람이 그의 간호를 위해 남았다. 현세의 죽음을 피할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해 성사를 보아 최소한 영원한 죽음만은 모면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그는 답하였다.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또 엄청난 죄악을 범한 나에게 고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는 당신의 죄악보다도 더 큽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는 그들의 간절한 권면을 받아들였으니 내게 신부님을 불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사제가 와서 그 환자 옆에 앉았다. 돌처럼 차가운 마음을 녹이실수 있는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로써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에 대 왜 수차례 반복해서 흐느낌과 눈물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깊은 참회를 하도록 도와 주셨다. 마침내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말하기 시작했다. '신부님 저의 죄악은 바닷가의 모래보다도 더 많습니다. 저는 시토회의 수도사였으며 수도회에서 사제로 임명 되었습니다. 저는 격정에 못 이겨 수도회를 떠났으나 배교자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둑떼에 가담했으며 그들을 능가하는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도둑들이 재산을 빼앗을 때, 저는 생명을 빼앗았으며 아무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둑들이 때때로 인간적인 감정을 느껴서 누군가를 살려 줬을 때에도 저는 마음속의 악으로 해서 제 손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살려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많은 부인과 처녀들을 능욕했고 많은 것들을 불로써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악행 속에는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사제는 이 모든 것을 듣고는 그 무서운 죄악에 깜짝 놀랐다. 다소 고지식한 데가 있는 그 사제는 고지식하게 말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큽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부님, 저는 인간의 악행과 하느님의 자비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듣고 읽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에제키엘(Ezechiel)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최인은 자기의 죄를 참회할 때 구원된다.' 그리고 '나는 죄인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마음을 고쳐 살기를 원한다!' 그 때문에 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신부님께서 내게 징벌을 부과할 것을 간청합니다!' 그 사제는 '나는 당신에게 어떤 징벌을 부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타락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전에 수도사였던 그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신부님, 저는 당신에 의해서 벌을 받을 자격조차 없기 때문에 제 스스로 벌을 부과하겠습니다. 저는 연옥에서 이천 년을 있겠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후에야 저는 주님의 은총 앞에 설 것입니다!' 그는 마치 연옥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구원에 대한 희망이라는 두 개의 맷돌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신부에게 말했다. '당신이 저의 구원을 위한 보속은 거절했지만 저에게 병자 성사의 성체만은 거절하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그 고지식한 신부는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보속을 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내가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감히 제공한단 말입니까? 그 사제가 두 가지 성사 중 어느 것도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환자는 다시 한 가지를 부탁했다. '제가 지금 어떤 사정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 편지를 쓸 테니 그것을 저의 숙부 인 그 주교님에게 갖다 주십시오. 주교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저는 바랍니다.' 신부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그 이전에 수도사였던 자는 참회를 하고 죽었고 연옥으로 갔다. 사제는 주교에게 가서 그 죽은 이의 편지를 전했다. 주교가 이 편지를 읽었을 때, 그는 몹시 울면서 말했다. '나는 한 인간을 이렇게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가 수도회에 들어갔을 때도, 그리고 신앙을 등졌을 때도 슬퍼했으며, 지금도 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살아 있을 때도 사랑했으므로 역시 죽었을 때도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는 참회하며 죽었고 그 때문에 그를 도와 줄 수 있으므로 내 관구의 기도에서 그를 빠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주교는 영원 불멸의 영혼을 구하는 일을 맡고 있는 관구의 모든 고위 성직자들, 곧 수도원장, 부원장, 대교구 수석 사제, 주임 신부를 소집하여서 그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를 드리도록 부탁했다. 또한 그는 수녀원에도 사람을 보냈고 참석자에게는 친히 그리고 부재자에게는 편지를 통해서 그들이 모두 그 한 해 동안 죽은 이의 영혼의 안식(Seelenruhe)을 위해 그가 지시한 특별 기도를 드리도록 간절히 부탁했다. 주교는 죽은 이를 위한 자신의 기도와 희생에 그치지 않고 연옥에서의 그 영혼의 해방을 위해 미사 성제를 올렸다. 그리고 절박한 상황이나 병 때문에 계속할 수 없을 때는 다른 사제가 대신하게 했다.
일 년이 지나 미사가 모두 봉헌되었을 때 그 죽은 이가 창백하고 초췌하며 수척한 채로 어두운 옷을 입고 주교에게 나타났다. 그의 안색과 용모에서 그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주교가 그에게 어떻게 지냈으며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고통 속에 있으며 고통 속으로 부터 왔습니다. 주교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희생과 기도 때문에 그리고 주교님의 전 관구에서 제게 보여준 영신적 선행 때문에 연옥에서의 천년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일 년을 더 이렇게 저를 도와 준다면 저는 완전히 구원될 것입니다.' 주교는 이것을 듣고 기뻐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주임 신부와 수도원에 편지를 보내어 이 모든 환영(Vision)의 내용을 전했다. 그는 일 년을 더 그들에게 위임된 기도를 계속해 달라고 썼다.
주교 자신도 다음 한 해 동안 앞서 말한 모든 것을 계속하였고 그의 확신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더 열심히 했다.
한 해가 지나 주교가 그를 위해 미사를 봉헌했을 때, 그는 이번에는 눈같이 흰옷을 입고 즐거운 얼굴로 나타나서 모든 것이 소망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주교에게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주교님의 사랑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교님, 저는 당신의 노력을 통해 고통 속에서 구원되었습니다. 이 두 해가 저에게 이천 년으로 계산되었습니다!' 라고 얘기했다. 주교는 그 이후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1. 성 시몬 스톡(1265년 5월 16일)
영국의 성 시몬 스톡(Simon Stock)은 그에게 나타난 환영 때문에 불쌍한 영혼들의 친구가 되었다. 로마의 "성인 명부"에는 "이 성인에 대해 어떤 확실한 것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는 가르멜 수도회의 여섯 번째 수도회 총장이며 스카풀라 형제 수도회(Skapulierbruderschaft)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는 1164년에 영국 켄트(Kent) 주의 헤어포트(Herfort)에서 명망있는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그는 은자로서 황무지에 있는 속이 빈 참나무 줄기 속에서 살았다. 13세기 초에 두 명의 영국 귀족 은수자가 가르멜 산에서 내려와 영국의 노드험버랜드 (Nordhumberland)의 언덕과 켄트 주의 에일즈포드(Aylesford)에서 수도원을 창설했을 때, 성 시몬 스톡은 1212년에 이 은수자들과 합류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엄격한 생활 방식과 특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그들의 열렬한 공경이 그의 마음을 감탄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수도 서원 후에 수도원장은 50세가 다된 성 시몬 스톡을 신학 연구를 위해서 옥스포드(Oxford)로 보냈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수도원에 돌아온 그는 1225년에 수도회 총장의 보좌 신부로 임명되었다. 1226년에 그는 로마로 가서 교황 호노리우스(Honorius) 3세로부터 수도원 계율(Ordensregel)을 인준 받았다. 성 시몬 스톡은 로마에서 가르멜 산으로 갔는데 거기에 서 그는 6년 동안 엄격한 성찰과 통회의 시간을 보냈다. 가르멜 산에 이주한 대다수 회교도들의 압박 때문에 그는 성지를 떠나갔다. 수도회의 다섯 번째 수도회 총장의 보좌 신부로서 돌아온 그는 1245년에 80세의 백발 노인으로 가르멜 수도회의 여섯 번째 총장이 되었다. 그는 지혜와 두터운 신앙으로 100세까지 총장직의 직무를 수행했다. 성모 방문제(訪問祭) 중인 1265년 5월 16일에 그는 보르도(Bordeaux)에서 죽었으며 거기의 주교좌 성당에 유해가 묻혔다."
성 시몬 스톡에게는 성모 마리아의 은총으로 스카풀라의 환영 (Skapulier-Vision)이 나타났다. 성모 마리아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거나 가르멜 산의 성모 마리아의 형제회에 받아들여져서 그 제복을 입거나 가르멜 수도회의 스카풀라리오를 부착하는 사람 및 수도원의 정신에 일치해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은 후에 즉시, 혹은 죽은 후 첫 토요일(Sabbato)에 연옥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성모님께서 성 시몬 스톡에게 전하신 말을 글자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그들이 죽은 후에 그 영혼들에게로 내려가 거기 연옥에 있는 그들을 어머니의 자애함으로 구원해 낼 것이다.""
성 시몬 스톡의 스카플라 환영은 교황 요한 22세가 내린 1322년 3월 3일자의 안식일 교서 (Sacratissimo uti culmine)와 관계가 있다. 여기에서 교황은 성모님의 중재 기도로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가르멜 수도회와 그들과 연계된 스카풀라 형제회에 영원한 구원과 죽은 후 다음 토요일에 행해지는 연옥에서의 구원에 대한 보증과 함께 내린 풍부한 대사를 선포해야만 했다.
이 안식일의 특은(Privilegium Sabbatinum)은 로마의 저명한 가르멜회 수사 익시베르타(Xiberta)가 상세하게 소개한 것처럼(Depotone sancti Simonis Stock, Roma 1950) 많은 교황들, 곧 비오 11세가 1922년 3월 18일에 인준하였고, 그리고 비오 12세에 의해 일반 형식으로 인준되었다. 교황 요한 22세의 안식일 교서의 정당성에 대한 커다란 의혹이 풀렸음은 물론 오늘날 가르멜 수도회의 명망 있는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그 정당성이 인정되고 있다. 교회사가 튀헬레(H. Tüchl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식일 교서는 아마도 모든 수도회에 특별한 방식으로 전대사를 주기를 원했던 중세 후기 민중의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 창작물일 것이다. "" 성 시폰 스톡의 스카폴라 환영은 신앙이 깊은 민중의 경건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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