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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이 주목하는 사람. 요3;1-21. 2014.8.24
참 신앙인, 참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주제가 요사이 많이 회자 됩니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 하면 참 신앙인, 참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아끼고 생각하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예수님에게 어떤 사람이 관심이 많은가? 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많이 하실까? 예수님은 어떤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실까? 물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또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만나는 사람과 찾아오는 사람 또한 힘들고 어렵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들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들을 세워주고 그들과 함께 복음의 귀한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워진 사람들에게 나타난 2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꿈을 꾸는 사람이고 하나는 나는...다 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특징이 있는 사람이 이 어려운 세상을 이기고, 이끌어주며 인도하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비젼과 함께 <나는 누구이다>가 중요합니다, 나는 주님의 사람이다. 나는 비전교회 목사다. 나는 비전교회 항존직, 장로 권사, 안수집사이다. 나는 비전교회 교인이다. 나는 비전교회 성가대이다. 이 인식이 중요합니다. 특별히 항존직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교회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배자의 일원입니다.
여러분, 삼손을 잘 압니다. 삼손은 죽을 무렵에 지도자가 됩니다. 그냥 살다가 마지막 무렵 삿16;28에 삼손이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합니다. 마지막인생에서 하나님의 참 신앙인 행복한 사람, 세워진 사람입니다. 죽을 무렵에 꿈을 가졌고 죽을 무렵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 시대에 말씀이 기갈이 되고, 표상이 없고, 어두움의 시대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로 부터 시작하여 그의 출생과 함께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됩니다. 특히 하나님은 사무엘과 깊은 대화를, 많은 멧세지를, 주시고 나누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사무엘을 이끄셨습니다. 그 만큼 사무엘은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입니다. 출생과 함께 꿈을 꾸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인식한 사람입니다. 처음 가졌던 비전과 인식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전 인생에 걸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 지도자라고 합니다.
모세 어떻습니까? 출생과 함께 죽어야 하는 인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것도 2년만에 나일강에 버려진 인생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궁중에서 40년을 살고 그때서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스스로 히브리 사람이라고 합니다. 꿈을 꾸지만 이집트의 궁정 안에서 바라보는
비전입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살인을 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꿈도 인식도 잊고 그리고 그곳에서 40년을 삽니다. 자기의 소속된 양도 아니고 장인 이드로의 양, 몇 마리 안 되는 양을 치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오래다보니 비전도 인식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서 비전을 갖게 되고, 이 전에 가졌던 인식을 합니다. 다른 것을 통해서 비전을 갖게 되고 인식을 하게 됩니다. 가졌던 비전과 인식이 잊어지게 되고 버리게 되고, 새로 다시 갖게 됩니다. 그 사람이 모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꾸는 자가 오도다.>라고 하나님은 요셉을 가르켜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전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비전이 있어야 좌절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비전을 이루려면 비전과 동시에 <나는 누구이다 >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가 스스로 결정을 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지 않습니다. 비전을 따라 살고, 비전을 이루고, 삶을 성공으로 이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예배를 통해서 비전과 함께 < 나는 누구이다>라는 인식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여러분 자신 앞에 위대한 영적인 사람, 복 받은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신약성경이 주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사도 요한이 의식을 하고 기록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님이 주목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약의 인물을 주목할 때 제일 먼저 누구를 생각하게 됩니까? 예수님의 수석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생각합니다. 믿음의 대상도 확인이 되어야만 신뢰와 믿음을 갖는 도마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탄생케 하고 지금 우리에게 까지 복음이 전파 되게 한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울 되게 했던 바나바, 복음서의 기초를 놓았던 마가 요한, 실라,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귀하게 여기고, 니고데모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생각하고 관심을 가졌다고 말씀하실까요? 몇 가지 특징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최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최고의 대접, 최고의 인격, 최고의 깊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3절 5절 11절에서 진실로진실로 반복하여 세 번씩이나 말씀을 합니다. 6번 진실로를 반복을 합니다. 그러면 진실로가 무슨 말입니까? 진심으로 진정으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진정으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니고데모에게 말한다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최상급이 없습니다. 내가 너를 가장 좋아한다. 내가 너를 누구보다도 좋아한다. 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가장 좋은, 가장 진심으로, 라는 최상급의 말은 이런 말이 됩니다. 두 번씩 연속하여 3번 반복하면 최상급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최상급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니고데모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나 어느 누구도 최상급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또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편애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저나 여러분을 가장 사랑하고 많은 것으로 복을 주시고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를 최상급으로 대해주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가르켜서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1절에 유대인의 관원이라. 10절에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그러니까 관원, 선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 관원, 지도자라고 합니다. 베드로를 가리켜서 지도자라고 선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니고데모에게만 지도자,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하시는데 대화의 내용이 다릅니다. 거듭남, 하나님의 나라, 영생, 성령, 하늘의 일 뭐 이런 내용입니다. 가장 중요한 진리를 표현했고, 가장 본질적인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베드로 , 요한, 제자들한테 이런 말을 안 했습니다. 뭐 알아야 하지요! 이야기해도 몰라요. 그냥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뭐 이정도입니다. 본질적인 것, 진리의 내용들을 말씀하지 않았는데 니고데모에게만 했습니다. 내용이 어렵지요. 그래서 은혜를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4> 니고데모는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표적을 가지고 니고데모가 해석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 선생이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공인입니다. 산헤드린 회원입니다. 아무나 선생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돈, 모든 유대인과 로마로부터 존경을 받는 명예가 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수가 없고 예의범절과 규모가 갖추어진 인간으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그 가운데 제한된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체면과 품위 유지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체면이 아닙니다. 정직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여러분, 왜 찾아왔을까요? 쉽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다 가져도,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어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유가지고 해결하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을 이야기 하고 거듭남을 묻습니다. 여러분, 고민하는 사람은 중요합니다. 고민 없이 산 사람이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고민 없이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아픔을 알겠습니까? 고민 없이 살아온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질병의 고통을 어떻게 알고 이해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절망과 낙심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인간의 조건을 다 갖추고도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복에 대하여 고민한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깊이가 있고, 참됨이 있고, 진국이 나옵니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에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5> 예수님과의 대화의 양이 제일 많습니다. 깊은 대화를 합니다. 어느 누구와도 이렇게 깊고 내용이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에게만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극진히 사랑하고 축복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왜 이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진정한 신앙인, 진정으로 복 받은 사람,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원칙과 방법과 핵심을 가르쳐주고 참된 목표를 갖게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저와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1.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있거나 겁쟁이면 아니 됩니다.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 등으로 표현되는 종교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은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그리스도인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명품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이건 아닌데, 하면서 고뇌하는 눈치를 보다가 결국 그런 자신을 통회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니고데모가 왜 밤에 찾아 왔습니까?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신앙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신앙의 궁극적 목표인 영원한 생명이나 참 평화, 큰 깨달음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과 그 경지에 도달하고픈 큰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이란 자신의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방법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밤에 찾아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두 가지 성경적 학설이 있는데 하나는 조용한 가운데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밤에 왔다고 합니다. 낮에는 예수님이 너무나 바빠요. 사람들이 집으로 안 돌아갑니다. 그래서 밤에 조용하게 고민도하고 대화도 하고, 삶의 본질을 알고 싶어서 밤에 찾아 왔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인 지위 때문에 밤에 찾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관원이, 선생이 벌건 대낮에 쑥쓰럽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성경학자가 후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목이 두려웠던 것이죠. 여러분, 이목,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를 어떻게 보느냐?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중요하지요. 바로 우리들의 모습 아닐까요.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 당당하지 못함. 누가 보면 어쩌나. 누가 뭐라고 하면 어쩌나. 내 삶에 있어서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는데, 그것마저도 남의 눈치를 보는 당당하지 못함. 스스로를 억압하는 행위. 니고데모입니다. 오늘 우리들입니다. 이목 때문에 진실하지 못하잖아요. 이목 때문에 보이는 눈길을 피해서 뒤켠에서 눈물을 흘리잖아요. 그렇지만 니고데모는 결국 밤에라도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베짱이 있습니다. 베짱이 두둑 해야지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오늘날 이 구원을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보라. 겁쟁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거기에 방법과 해답이 있습니다. 주님이 방법과 해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2. 핵심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10절에 너는 선생이라 하면서 이 것도 모르느냐? 주님은 니고데모가 핵심지식을 지니기를 바랬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잡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 핵심지식을 모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핵심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어는 알지만 개념을 잘 몰라요. 성경적 지식에 막연히 압니다. 복, 구원, 영생, 사탄,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십자가, 부활, 하나님의 나라, 등 30여 가지 만 이라도 분명한 개념정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 그 것이 복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고난도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눈물도 복입니다. 여러분, 눈물과 고난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결과가 먼저가 아니라, 눈물과 고난이 먼저입니다. 잘못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결국은 망한다고 말씀합니다. 참 신앙인, 참된 그리스도인은 핵심지식이, 성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3. 원칙만이 아니라, 방법까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리라> 말씀을 합니다. 구원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구원의 원칙은 아는데 방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어떻게, 지금, 이렇게 장성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2차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물어 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고 방법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원칙만 가르치고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죄악입니다. 얘 야! 공부 잘해야 한다. 알아요. 공부 잘 해야 하는 것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원칙은 다 압니다. 앉아 있는 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방법을 가르쳐 드려야지요! 공부를 잘하려면 tv도 끄고 책상에 앉아서, 뭐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르쳐 줘야지요. 여러분, 사업이 잘 되어야지요. 그런데 원칙은 잘 아는데 방법을 모르니까? 세상 사람들조차 고객은 왕이다.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직장이 듣든 해야지요. 원칙 다 압니다. 그러나 이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방법을 알아야지요. 우리교회 정 다운, 조 신영 집사님, 한 분이 새롭습니다. 원칙만 알려주면 되겠습니까? 방법을 알려 드리다 보니까 한국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영적인 좋은 지도자 만나시고 그리고 미래를 향하여 제기된 문제를 풀어야지요. 그래서 방법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사카교회에 계신 신 범진, 이 은경집사님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언어의 천재입니다. 예수님은 원칙과 동시에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분, 오병이어 기적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빌립이 방법을 모르고, 안드레가 방법을 모릅니다. 말씀과 함께 육신의 떡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방법을 모르기에 예수님께서 앉게 하시고, 축사하시고, 떼어주며 나누었습니다. 거듭남,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대로 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복을 받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들어옵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그래요. 알아요. 그런데 방법을 모르잖아요. 여러분, 모방자체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창조를 위한 모방은 모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새로움이 있고, 거기에 결과의 그 어떤 것이 나옵니다. 방법까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피로, 예수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은력으로..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4. 인생의 참된 목표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니고데모는 잘 먹고 잘 삽니다. 니고데모를 보고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인데 그런 것도 모르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산헤드린 회원 중에서도 사람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최고 관리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정신문화원이나 카이스트 같은 곳, 동경제대나 교토대의 교수입니다. 그런 명예와 실력과 귀함을 갖춘 니고데모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예수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듣고자 그가 고민하면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인생의 참된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니고데모란 이름의 뜻은 ‘승리’라고 하는데, 그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승리의 길로 이끌었습니다만 그의 이름처럼 자신의 참된 인생에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참된 인생의 목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 된 영원한 생명 아닙니까? 여러분, 인생의 제일 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에 사람의 제일 되는 인생의 목표가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제일 되는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구체화 시키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것도 영광입니다. 사탄 마귀의 권세에서 빠져 나와서 주의 백성이 되는 것도 영광입니다. 미기처럼, 이사야처럼 울부짖고 백성들에게 강한 멧세지를 전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고난 속에서 욥처럼 배가의 축복을 받는 것도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잘되고 위대한 사람으로 영적 존재가 되는 것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다 달라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 각자가 처하고 맡겨진 사역에서 위대하고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체화 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잘 설명을 했습니다. 롬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 안에서 바르게 살아야하고, 성령 안에서 평안해야 되고 성령 안에서 즐겁고 기뻐야 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무슨 억울한 일이 있든지, 무슨 꼴을 당하든지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주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 는 로마서의 진술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는 고린도전서의 진술에서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위의 문장에서 모두 주어로 사용이 됩니다. 그것도 "성령"이나 "능력"이란 용어와 함께 사용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현실적인 삶에 관련을 지었습니다. 살아 있는 현재의 참된 목표와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참된 목표를 말씀합니다.
5. 인간, 사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관계입니다. 사람을 알아야 전도도하고 사람을 알아야 이끌어 줄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나를 반기고 어떤 사람은 배척을 합니다. 같은 말 같은 조건, 같은 여건이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심라학자 윌리암 제임스라는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잔인한 동물이다. 부정적으로 잔인한 동물이래요. 그래서 상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면이 다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합니다. 사람을 모르면 내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모르면 다른 사람을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사람을 가르치겠습니까? 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전을 이룰 수 있고, 그 비전을 이루기 우ㅏ아여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을 잘 압니다. 아이비리그 대학입니다. 그런데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 아들이 다녔던 학교에 교육사업으로 전 재산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관리장이 막습니다. 미리 연결이 됐습니까? 아니요 총장을 뵙고자 왔습니다. 선약이 없으면 아니 됩니다. 학교를 지으려면 얼마나 들어갑니까? 제가 어떻게 압니까? 결국은 부 노인 분들은 발걸음을 되돌렸습니다. 돌아오면서 기부한다는 그 원칙은 변하지 말자 그러면서 방법을 바꿉니다. 그 노인 부부의 이름을 따서 스탠포드 대학으로 대학을 세웁니다. 지금 스탠포드 대학에서 배출된 사람들이 미국의 한 부분을 담당합니다. 사람을 몰랐습니다.
.대전의 송천교회를 아십니까? 박경배 목사님이 담임이신데 그 분도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박 목사님께서 마석 공동묘지에서 100미터도 안 되는 지역 돼지막사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누가 오겠습니까? 일본의 장례문화와 한국이 많이 다릅니다. 한국은 공동묘지가 멸 십만평이 됩니다. 사람 소리가 없습니다. 거기에 창문에 유리도 없이 비닐로 유리 대신하고 예배를 드리니 누가 오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조상의 묘지를 참배하고자 한 가족이 공원 묘지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십자가 달린 교회를 봅니다. 그리고 참배가 끝난 이후에 전 가족이 그 교회를 방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박 목사님으로부터 경위를 듣고 생각을 듣습니다. 그리고 서울 마포에 있는 가든 호텔 옆 성원빌딩 10층으로 오라고 합니다. 박 목사님께서 정한 날짜에 방문을 해 보니 이랜드 그룹 박성철 회장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분이 몇가지를 알아보고 그리고 백지수표에 8500만원을 줍니다. 그래서 그 모토로 대전에 지난 4월에 2400평의 문화교육 복지 센타를 준공을 했습니다. 사람을 잘 알아야 합니다.
6.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을 이루게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요한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딱 축약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말씀을 니고데모와 의 대화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안 가르쳐 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가르쳐 주어도 모릅니다. 나를 누구냐 하는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 사랑이다. 몰라요. 요한 일서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깊은 멧세지를 전한 사도 요한도 십자가를 지는 그 현장에서 사랑을 알게 됩니다. 밧모섬 유배의 생활을 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시고 기록케 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깨닫습니다. 베드로는 부활이후에 다시 만난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으로부터 알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전까지 니고데모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절에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을 예로 듭니다. 왜 그랬을까요? 공의의 하나님만을 압니다.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인과응보가 정확합니다. 그런 하나님만을 니고데모가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공의의 하나님이시고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요한3;16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전서 13장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할 수 있지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 이유를 묻지 않는 것,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지금 주님을 만난 이후로 임마누엘 하나님, 주님과 동행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이 본문 말고도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나옵니다. 두 번째 등장은 7장 45절부터인데 여기서는 니고데모가 종교재판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산헤드린의 한 일원으로 이 재판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합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증거하실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교훈이 자신들이 가르치는 율법과 다르며, 예수께서 자신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비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하속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아 오게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에 대해 비방할 때, 그중 한 사람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해 변호의 말을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다른 의원들과 반목하기보다는 자신의 위치를 보호하고 동료들의 관계를 깨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하자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대해서 한 번 더 숙고해보자고 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정죄하는 것에 대해 비난을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적극적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를 변호함으로써 예수가 진리가 되심을 간접적으로 시인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찾아가 직접 말씀의 교훈을 받아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로 알았기에 감당을 합니다.
다음 세 번째는 19장 중반절이후에 등장을 하는데 38절에 예수님께서 죽은 뒤에 몰약과 침향을 가져와서 장례 치르는 니고데모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주 귀하고 비싼 물품들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본격적으로 시인한 것은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밤중에 찾아왔을 때 중생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뱀을 든 것같이 예수님도 들려야 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를 알고 영생을 압니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비로소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전까지는 마음으로는 예수를 긍정하면서도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서 밖으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바로 압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뭇사람의 그것과는 달리 자신이 진리이심을 증거하는 죽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십자가의 주님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시는 그래서 영원히 주님을 따르고 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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