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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두자립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단이
[녹색평론 3-4월호]
갑오년의 생각하는 새로운 농민혁명
농민에게 월급을!
변 현 단
한국의 국가부도 위험지표가 4개월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최근 신흥국 금융 불안과 중국 경기둔화 우려와 맞물려 미국 경기회복세까지 주춤하자 한국 경기 회복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주가하락·환율상승…韓금융시장 '불안' (2014.2.4 연합뉴스)
나는 인터넷 뉴스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다. 만약 이 촌구석에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전쟁이 터져도 알지 못한 채 일상을 지내고 있을 게다. 휘발유 값이 폭등해도 나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도로가 막혀도 나는 내 생명을 유지해 가는데 지장을 전혀 받지 않는다. 농사가 시원찮아도 벽곡방이나 구황방으로 연명할 수 있다. 자연 속에서 ‘동막골’ 같은 곳에서의 삶은 늘 안녕하다.
읍내나 도시로 나가는 것 모두 나에게는 ‘양념적’인 일에 불과하다. 양념이 없으면 기본식재로도 살아갈 수 있으니 염려할 일이 못 된다. ‘자립인간’이 ‘고립인간’을 말하는 것이냐고 일전에 홍세화 선생님이 내게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우리는 언젠가 최악의 상황으로 강제적 고립에 있게 될 수도 있음을, 그리하여 생활로 익숙할 수 있도록 자립인간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혹시 그런 질문에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을 것이란 낙관적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로부터 생계와 등록금을 봉양 받았던 대학생들은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마련했을까? 해가 거듭할수록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은 세상 누구도 다 아는 일이다. 백수가 널려있고, 비정규직 알바라도 구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2014년 대한민국에서 새해를 맞이한 사람들 중에 만족스럽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촌구석에서 사는 게 좋냐?” 팔순의 늙으신 아버지의 느닷없는 질문에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 중에 하나가 저 일거예요”라고 대답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네가 행복하면 됐지” 라고 말을 맺었다. 행불행을 자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생존과 생사를 오가는 고통, 쟁취와 욕구의 고통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관심은 돈과 건강 그리고 사랑이라고 하는데 나에게 돈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으며, 건강은 늘 항상 지키려고 하고 있으며, 사랑은 늘 오가는 크기만큼 조절할 나이가 되었으니. 고작 시골구석에서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을 쓰면서 ‘나 혼자만 잘 살기에는 미안해서’ 세상을 향해 행복한 삶의 길의 한 방편을 알려주러 다니는 것이다.
나의 행복함은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바라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지가 멀쩡하지 못한 사람, 건강하지 못한 사람, 자식을 잃어 아픈 사람, 당장의 땟거리가 없어 고통스러운 것 등, 소외받고 힘겨운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나는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일밖에는 없다. 나는 도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현실과 동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딴 이들도 나처럼 살면 되는 일인데 그렇게 선택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선택은 온전히 그들의 몫으로만 돌리기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그들이 짊어진 가족과 삶의 궤적을 이탈하기란 쉽지 않음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나와 함께 시골로 왔지만 다시 올라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돈이 필요했다. 자식이 대학을 다니고 싶어 하는 자식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서, 자식의 안위를 너무나 근심한 부모를 무시하기 어려워서. 지나온 세월에 다 못한 빚더미를 다 털어내지 못해서, 이런 저런 버거운 짐들을 내려놓지 못한 이들은 필요한 화폐를 마련하려고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간 도시에는 그들에게 흔쾌히 돌아오는 일자리는 없었다. 친인척의 빽도 소용없었다. 최고의 학부와 학력은 이미 지난날의 얘기이다. 오늘도 노상의 주차요원으로 일을 하고, 백화점 앞에서 친절요원으로 안내를 하고 있다. 이제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들은 그런 일이라도 찾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선거가 또 닥쳤다. 대한민국의 선거에는 ‘경제와 일자리창출’이 최고의 이슈다. ‘경제회생과 일자리창출’을 믿고 이명박과 박근혜를 찍어도 일자리는 창출되지 않았고 잘 사는 사회는 되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를 기대하면서 김대중과 노무현을 찍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정치 수장이 바뀌면 이 나라가 바뀔 것이란 환상을 국민들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 사회경제 시스템이 바꾸려면 어렵게 얻은 막강한 권력의 자리를 내놓아야 할 정도의 치열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정치가가 있는가?
자급의 관점에서 노동과 일자리를 생각한다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바닥을 치는데 100% 수출입에 의존한 한국경제가 어떻게 좋아질 수 을까? 산업금융 자본주의 경제는 100년의 세월동안 그 근간을 가능하게 했던 화석연료를 모두 끌어다가 석유세상을 만들었다. 우리는 석유의 화학적 분리에 의한 것을 먹고 마시고 입고 생활하고 심지어 생명을 연명하고 있다. 기업은 일회용의 세상을 만들었고 우리는 쓰고 버리는 사회를 만들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편리의 경제에 종속된 노예가 되었다. 우리의 일상은 자연이 오랫동안 천천히 활용하여 살아가도록 주어진 것을 인간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통해 일거에 소진시켰다. 이미 오래 전에 피크오일이 있었고 이제는 대부분의 석유 산업이 그 규모를 현저히 줄여나가고 있다. 자동차, 선박 회사, 각종 제조업이 문을 닫고 건설회사가 문을 닫는다. 4대강의 파헤쳐서라도 건설회사에게 이윤을 준 현대건설 사장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의 힘도 5년에 불과했다. 전국적으로 진행되던 건설사업이 중단되어 간다.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경제는 이제 일자리를 주지 않을 뿐 더러 현재 가진 일자리조차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모 대기업 자동차 생산직에서는 대학졸업자들이 대거 몰렸다. 종전에는 대학졸업자도 뽑았지만 지금은 뽑지 않기로 했단다. 대학졸업자는 머리만 크고 관리가 안 된다는 생산직 노장들의 항의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는 대학은 일자리를 전혀 주지 못한다. 법학과도 넘치는 법조계로 경쟁이 치열하고, 법과 규제의 위반과 소송이 많아야 법조계가 뜰 수 있는 아이러니를 가졌다. 경영학과나 경제학도 그러하다. 금융자본경제와 기업은 경영관리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는다. 해고할 때 우선순위에 불과하다. 기계공학도 산업경제의 피폐에 따라 위축되고 있고, 교육직도 예술인문직도 물론 애초에 대학이란 일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지만 한국의 대학은 사회 주류 편입을 위한 엘리트 코스였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대학졸업자는 많아졌는데 사람들의 자급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9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의 문이 넓어지고 전 교육과정이 대학교육 위주로 편성되면서 삶의 자립을 위한 기술은 천시되었다. 한국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대학 진학을 위한 교육체계에 편입된다. 아이들은 책상맡 학습만 강요당하고 경쟁 소모품으로 전락했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도태되고 학생들은 교육노예로 바뀌어간다. 교육산업은 나날이 번창한다.
지금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자급자립의 교육이 아닌 획일적 배타적 종속적 억압적 노예적 식민교육에다가 시장경쟁의 막가파식 미국식 교육의 절충인 작금의 교육 시스템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자급 자립을 위한 길로 아이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일자리도 전혀 제공할 수 없는 이 현실에서.
‘개미와 베짱이’의 동화는 어릴 적부터 근로자(勤勞者)를 양산해왔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논리는, 기업에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로, 팔기 위해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인으로, 미소를 판매하는 서비스업을 사람들을 몰아갔다. 이제 인간의 희노애락도 화폐로 거래된다. 자연의 모든 구성물도 화폐로 환산하는 마당에 인간의 신체나 활동이 화폐로 거래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노동은 하찮게 취급되었고, 그 덕에 가정을 보살피는 여성은 천대를 받고 살림 내팽개치고 산업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은 ‘자아실현’이라며 드높여졌다. 일하는 여성을 추켜세우고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를 무시한 경쟁으로 인해 여성은 이중으로 차별을 받아야 했다. 한편 일하는 여성의 가족은 식품기업과 전자기업의 이윤창출에 일조하고, 궁극적으로 의료산업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 대량생산 공장에 밀린 노인정의 볼품없는 짐짝의 노인네로 전락했고, 실버산업과 의료산업에 의존하게 되었다. 우리사회에서 소득이란 노동의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애초부터 자연을 이용하는 노동을 해왔다. 인간의 노동은 생명활동이다. 인간의 활동은 자급을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노동은 ‘노동=소득=임금’ 라는 노예적 등식에 규정되어 있다. 베짱이처럼 종일 노래를 부르는 일은 불필요한 노동으로, 지속할 수 없는 생활방식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인간노동은 생명으로서 살아있는 자들의 활동을 포괄한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은 교환되는 노동만을 인정하는 거래노동, 노예노동의 자본주의적 발상임을 있지 말아야 한다.
농촌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인간의 본연의 활동은 자급노동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식주의 활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농경생활을 바탕으로 둔다. 農者天下地大本이라고 하지 않는가. 농경사회는 종속된 사회가 아니라 자급 자립의 사회다. 다국적 기업의 세계경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의 지역경제가 존립하는 사회다. ‘식량을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는 말처럼 스스로 식량권을 갖고 남들로부터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의 방식이다.
지금의 박근혜 정부를 보면 1970년대의 박정희가 부활한 것 같다. 70년대의 이농현상은 내 기억 속에도 또렷하다. 소농 중심의 농촌의 기반이 파괴되었고, 대량생산을 위한 화학비료, 농약과 제초제로 망가진 땅에서 석유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농업이 육성되었다. 농촌의 전통적 삶과 농사 방식을 유기, 폐기하면서 농촌을 피폐하게 하고, 농부는 농업인으로 만들고, 젊은 인력을 도시의 노동자로 만들었다. 보따리 책가방과 검정고무신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세뇌된 우리는 가방과 운동화를 사달라고 엄마한테 졸랐다. 물건을 소비하는 행위를 충분히 못하면 가난한 것으로 알고. ‘가난은 벗어야 하’는 것이라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영화 광고를 통해서, 교과서와 새마을 교육을 통해서 우리의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나누어서 살던 풍요로운 삶을 가난한 것으로 여기도록 교육은 조작,각인했다.
이명박 시절에는 1억 농가 만들기를 기치로 부농농업인을 육성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다. 현재 농림축산식품부의 정책 기조는 부농의 농업인만이 살아남는 정책이다. 소득보전 논농사 직불금도 3천 평 이상만 해당된다. 농업인 육성정책 또한 특작목 중심의 대농 중심 체계다. 90일의 경작일수를 채우면 농업인으로 인정하도록 하여 쉽게 경작자로 인정받고, 쉽게 토지 거래가 가능하게 되었다.
농촌은 여기저기가 공사 현장이다. 이곳 곡성에도 둑 높이기 공사가 시작되었다가 건설업종의 관행적인 하청구조로 인해 인부들이 돈을 받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시골의 산과 들은 모두 토건사업 대상이다. 일단 파헤치고 보는 자연은 흉물스런 모습으로 방치되었다. 농촌을 지켜야하고 농민을 육성해야 하는 농촌의 지자체도 중앙 정부와 다르지 않다. 정당이 다르다고 뭔가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농촌의 도시화가 그들의 정책적 목표다.
이렇게 망가지는 농업, 농촌에도 다시 시골로 향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노인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시골을 귀농자들이 채워가고 있다. 지난 해 귀농귀촌인력이 12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불과 3년 전에 1만6천명이었던 것이 두해 사이에 10배를 넘어섰다. 사회경제적 미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시골로 향하도록 할 게다. 자급자립은 필연적 경로이다. 먹는 것을 기업에 의존한 도시 생활자들의 건강문제도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GMO식품들이 버젓이 우리 밥상에 오르는 현실에서, 건강을 지키는 일은 직접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일 밖에 없다. 아이들을 가진 젊은 부부들이 귀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다국적 종자회사들의 횡포와 개량종자들의 문제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대규모의 단일경작이 기후변화에 대응을 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고투입- 고수확의 논리로 이어진 관행농업은 에너지 문제와 맞물리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귀농귀촌인들을 중심으로 순환의 농사. 생활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억대부농을 꿈꾸며 시골로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도시형 공장형 농업인으로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추구한 도시적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귀농귀촌하는 사람들이 자급자립에 몰두하는 것이 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어떤 재해에도 어떤 세계시장 경제구조의 몰락에도 에너지의 고갈에도 자신의 생명권을 지킬 수 있도록 자립적 생활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결국 사회경제체제의 변화를 유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급자립의 농가들이 마을단위든, 넷워크 형성을 통해서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면서 살아가는 것 지역 순환경제의 한 축이 될 것이다. 마을을 중심으로 한 개인농가의 협력과 연대농가들이 많아질수록 자급자립의 삶은 국가와 기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자립인간이 많아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회경제적 혁명을 도모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완전한 자립을 이루기는 어려운 일이다. 국가와 개인, 사회와 개인의 연결에 필요한 최소한의 화폐가 필요하다. 주로 공공재의 사용비용이다. 내 경우, 전기세. 통신비, 건강보험료 등 한 달에 20만원은 있어야 한다. 거기에 약간의 교류를 하자면 돈이 더 필요하다. 서울을 오가는 교통비를 제외해도 40~50만원은 있어야 한다. 대부분 민간의학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래도 치과에도 가야하고, 안경테가 부러지면 안경을 새로 맞춰야 한다. 상품경제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요컨대 식주의가 자급하더라도 최소의 돈이 필요하다. (여기에 도시형 방식의 생활이 들어간다면 돈은 수없이 부족하게 된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화폐는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자급을 하고 남은 잉여 생산물을 직거래를 통해 판매하는 방법이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농촌에서 한 달에 50만원을 벌기 위해서는 최소한 5가구의 도시 회원을 확보해야 한다. 5가구에게 식자재를 공급해주는 일이다. 일년의 곡물을 포함해서 소소한 것까지. 그러기 위해서는 논 두 마지기, 밭 300평 이상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직거래를 통해 돈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귀농 초보가 이런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팔지 않고 나누어 주는데(투입비용만 제외하고) 그게 가능한 것은 강의 수입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귀농귀촌 인력들이 농촌에서 할 일은 많이 있다. 남자들은 간벌 작업에, 여성들은 각종 일손에 동원된다. 후자는 대체로 4-5만원, 남성들은 7-12 만원쯤 벌이가 된다. 필요한 만큼 날품을 팔면 된다. 하지만 일손을 원하는 곳은 일정기간의 지속성을 요구하고. 그래서 품을 파는 사람들은 자신의 농사에 전념하기 어렵게 된다.
이렇게 시골에서 최도한의 돈을 버는 일은 쉽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다. 그것은 결국 귀농귀촌을 했다가 다시 도시로 올라가거나 농업인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요인이 된다. 상품자본사회 시스템에서 농민으로 산다는 것은 여전히 그리 만만치 않다.
농민 기본소득으로 돌파구를
우리나라 농업정책은 농가소득 보전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대부분 지원금으로 일관한다. 농가소득과 농민복지를 위한 수많은 정책 지원금을 농민들은 ‘눈 먼 돈’이라고 부른다. ‘눈 먼 돈’을 끄집어내어 활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그래서 매년 초 농업인들을 농림축산식품부의 정책에 따른 예산 편성에 눈독을 들이고 열심히 면사무소를 오가면서 계획서를 제출한다. 농가지원으로 비닐하우스 반액지원도 있고, 작목 단위별 지원사업에는 수억 수천만원씩 굵직하게 나온다. 이런 돈이 농가소득을 향상시키고 농민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회에서 농민은 소수 1%를 제외하고 언제나 빈곤층이었으니까.
농촌지원 예산과 국가적 일자리 창출 예산 등 관련 예산으로 20세 이상 모든 농민들에게 매달 월급을 주면 어떨까? 노동을 하든 않든 농민으로 등록된 사람이면 된다. 현행법상 300평 이상 90일 이상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면 된다. 개인이든 법인 소속이든 농사를 짓는 성인이라면 무조건 매월 급여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자급자립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을 마련해주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이건 매우 간단한 일이다. 2014년 농축산식품 예산이 13조 534,4천억원. 이 예산의 사용처는 농가소득 보전을 위한 직불제와 재해보험, 건강보험과 같은 농촌복지, 농식품경쟁력 강화를 위한 지원금 등이다. 2010년까지 등록된 농어업인이 약 3백만 명이다. 이것을 300만 농민에게 나눠 주면 된다. 굳이 애써 행정인력을 낭비하고 사각지대를 형성하면서 지원금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13조 534,4천억을 3백만으로 나누면 1인당 451만원, 매달 37만 6,000원이 돌아간다. 게다가 지자체의 정책자금 및 농어촌 대책자금, 일자리 창출 비용, 친환경생명산업집중 투자비용 등 농민을 위한 5조 8억의 재원도 포함한다면 기본소득 재원은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다. 매년 책정되는 예산 중에서 농민을 위한 예산을 각 지자체별로 집행하면 중앙 행정기관과 국가의 축소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실현된다.
농민 개인에게 기본소득 매월 50만원을 주면, 우선 선거의 단골 핫이슈인 실업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 20세 이상 젊은 인력들이 농촌으로 유도할 수 있다. 대학이라는 빚잔치와 도시의 알바 인생에서 젊은이들을 벗어나게 할 것이다. 이들에게 농지를 적극적으로 임대해주고 농촌에서 살아가며 농사를 짓고 집을 짓거나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스스로 생산하는 식주의를 자급하는 장인이 되게 한다면 우리 농촌은 더없이 풍요롭게 될 것이다. 두 번째 50만원의 현금은 자급자립 생활경제의 기초를 형성한다. 매월 소요되는 돈을 벌어야 하는 부담이 줄어서 손수 자급하는 생활에 더 힘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세 번째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시골에 와서 꼭 농사에만 전념할 이유가 없다. 때론 고된 노동으로 시골의 삶이 고통스러울 필요가 없다. 특히 고령자들은 텃밭정도의 몸을 놀리는 최소한의 노동으로도 자신이 누리고 싶은 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나는 6마지기의 논농사와 4마지기 밭농사도 하지만, 밤에는 기타도 배우고 요가와 태극권도 배운다. 필요한 만큼 소비하고 나머지는 심신의 즐거움을 위한 기회로 돌린다.
넷째. 행정기관의 대폭 축소되고 작은 정부로서 인력이 절감된다. 정부 인력의 감소는 그들 또한 농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자연스럽게 농민이 늘어날 것이다.
다섯째. 농자천하지대본의 실현이 가능하다. 식량주권을 지키고 무엇보다 국가의 생명권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농민기본소득이 된다면 농민이 15%이상이 차지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여섯 번째 농민기본소득에다 지역화폐 20%를 포함하면 자립순환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 지역화폐는 신뢰할 수 있는 참가자들이 노동을 교환하는 시스템인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역화폐를 지자체에서 종이 화폐나 상품권으로 만들어서 지역에서만 유통되도록 한다. 지역 자체에서의 구매력을 높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 이자가 붙지 않은 순전한 교환 매개체이다.
일곱 번째 개인에게 주는 농민 기본소득제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다. 1인 가구가 살림을 합치면 소요되는 비용이 줄어든다. 귀농하는 1인 가구, 싱글들이 합쳐져 새로운 형태의 가족, 마을 공동체로 결합할 수 있다.
올 6월에는 지자체 선거가 있다. 이제는 복지정책이나 일자리 창출, 경제부흥이라는 허구에 국민이 놀아나서는 안 되며 각 정당과 정치가들은 더 이상의 경제나 일자리로 국민들에게 사기를 쳐서는 안 된다. 노령연금에서처럼 복지 대상의 연령대 논쟁도 필요치 않고, 수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복잡한 행정적 조사를 실시할 이유도 없다. 행정 절차와 소모적인 인력비용을 절감하면서 긍정적 효과를 확실히 보장해주는 기본소득, 농민이기만 하면 무조근 월급을 주는 농민 기본소득제를 채택하는 일만 남는다.
자급자립의 삶으로 세상을 바꾼다.
65세 노인에게 일괄적으로 2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은 재원조달의 문제를 들어 소득에 따라 차등지급 방식으로 올해 7월부터 실시한다. 남성의 유급 육아휴직 1개월을 추진하겠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재원조달의 정확한 검토 없이 선거용으로 기만한 공약들이지만 이는 국가가 제공하는 일정한 현금소득은 분명히 국민들의 생활고를 줄이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세출입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재원을 확보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예산을 검토해서 국가가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을 재검토하고 농민 관련 분야를 농민기본소득 자금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향후 토지 투기 불로소득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면 국민기본소득제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
도로, 학교, 관공서가 입지하여 토지가치가 상승하거나 자연경관에 의해 지대의 변화를 가져오므로, 불노(不勞)의 딱지를 붙인다. 따라서 불노소득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투기가 일어난다. 이러한 토지 투기 소득은 세금으로 징수하여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내용상의 토지 공유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땅 투기에 의한 불로소득의 최소 50%의 환수만으로도 토지 투기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땅을 생산에 기여하는 자원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한다. 이로써 각종 토건사업은 재평가 되고, 농경지 보전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휴경지를 젊은 농민들에게 임대하게 농촌이 활기를 띠게 만들 수 있다.
농민에게 월급을 주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그것은 귀농귀촌의 흐름에 회오리를 일으킬 것이다. 올해 지자체 선거에서 핫이슈는 무엇일까? ‘국민 행복’을 우선으로 한다면 박근혜도 대통령이 당선되자 경제민주화를 비롯한 수많은 공약을 파기하거나 변형했다. 각종 복지정책의 재원에 대한 사전 검토도 없었을 뿐더러 기존 예산 집행항목을 그대로 두면 재원마련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집행되고 있는 항목을 직접 이해 당사자들에게 직접 돌리면 될 일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작은 정부로 남고 싶지도 않고,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세금을 우리의 월급으로 돌려달라고 당당히 주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금 납부의 의무를 가진 국민은 세금 사용처에 대해서 주장할 권리도 가진다. 우리의 세금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고작 300만명도 안 되는 농민으로 어떻게 식량 자급과 국민의 생명권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수출입경제에 의존한 국가경제가 어떻게 국민의 노동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까? 이런 많은 난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줄 것이 국민 기본소득 이전의 농민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 이상의 소득을 창출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문제다. 잉여소득으로 소비지출을 확대하든 부농이 되든 그건 국가 책임 밖 일이다. 하지만 국가가 국민의 최소한의 행복을 챙겨주는 방법은 농민기본소득제, 농민에게 주는 월급을 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농민에게 매달 최소의 현금 50만원과 각 지자체에서 20만원에 해당하는 지역화폐(지역화폐는 각 지자체에서 관할하는 것)를 주면 된다.
정치권력의 가혹한 착취의 대상, 온순한 복종자였던 농민들이 한울을 모시고 새로운 국가 형성의 주인공으로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던 갑오년. 인간이 숨 쉬고 활동하고 입고 먹는 매일의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삶 속에 하늘의 이치와 만물의 본성이 있는 시천주, 먹고 사는 일이 바로 혁명임을. 농민이야말로 그 도를 실현하는 사람들임을. 농민을 잘 모셔야 그 나라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되새기며 갑오년에 새로운 혁명을 시작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전국의 수많은 생협단체들이, 아이들의 건강한 삶을 주려는 부모들이, 귀촌을 희망하는 은퇴자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꿈꾸는 귀농자들이, 자립적 삶을 꿈꾸고 일자리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시장경쟁의 학교를 너머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고픈 청소년들이,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서 “농민에게 월급을 주자”라는 목소리를 내자. 농민기본소득은 농자천하지대본의 도도한 흐름과 밥 한 그릇의 온 삶을 실현할 것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첫댓글 스크랩해서 널리 알려주세요. 핫이슈가 되도록....
네이버카페 인천도시농업네트워크로도 퍼갔습니다.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짧은 세월 너무도 급격한 변화가 우리사회에서 있었습니다.
어린시절을 회상하면 동네에 두어대의 텔레비젼이 있었고 한두대의 전화가 있어서 어찌보면 그러한 귀물들은 동네의 공공재 역활을 했습니다.
꼬맹이들은 꼬맹이데로 연세드신 분들은 그분들데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상영되면 남의집 안방을 차지하여 극장이 펼쳐지기 일수였고,
타지에서 급한소식이라도 전할라치면 전화를 가진사람의 신세를 지지않을수 없었습니다.
근근히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을 받고 농민이나 근로자로 살아가던 시절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좋은 일자리가 보장된
선택받은 사람들 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자식들의 출세를 위해 소팔고 전답팔고 아예 거주지를 대도시로 옮겨 더나은 기회를 찾아 끝없는 이농의 행렬이
줄을 이었구요.
한순간은 모든것들이 가능할듯도 보였습니다.
사회의 급성장과 맞물려 예전에는 꿈속에서나 가능할듯 했던 각방마다 TV수신기 스마트폰, 자가용, 유행을 쫒아가는 화사한 옷들,
해외여행... 예전에는 사치의 대명사였던 것들이 이제는 없으면 살지못하는 필수품으로 자리잡으면서
더욱더 소비를 부채질하고 그러한 생활을 뒷바침하기 위해서 끝없는 돈벌이로 내몰리는 우리의 현실에 아직도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지않은듯 합니다.
@길위에서 자식들에게 좋은교육만 시키면 모든고생이 끝날줄알았던 시골의 부모님들은 자가용몰고 찾아와서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자식들을 위해 꼬불쳐둔 쌈지돈, 애써지은 농산물들, 전답을 저당잡혀 농협에서 빚을 얻어 자식들의
손에 쥐어줍니다. 모든것이 인플레이션입니다.
한때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말단공무원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자 들어가는 사위를 얻으려면 열쇠 세개가 있어야 된다는 우웃개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사도 변호사도 넘쳐나는 세상이니 그들인들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말단공무원 모집에 대학원생들의 지원이 넘쳐나는것은 이미 잘알려진 사실이구요.
@길위에서 개인들도 회사들도 지자체도 정부도 빚이 넘쳐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파산이외에는 탈출구가 없다는 것도 눈치를 챘을테구요.
기업의 논리에 의해서 끝없이 소비에 내몰리고 무한경쟁의 교육에 내몰리는 국민들도 딱합니다.
결국 남는것은 빚과 노후걱정 뿐입니다. 언제쯤이나 이러한 삶의 지속이 가능치않다는 것을 자각할까요!
언제까지나 절약이 조롱을 받는 풍토가 지속될까요!
우리새대는 자식들의 크레딧으로 고급레스토랑에서 음식도 즐기고 고급쇼핑도 하고 흥청거리는
몰염치한 사람들입니다. 미래세대에게 지워진 빚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것입니다.
@길위에서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극히 짧은 세월을 우리는 참으로 흥청거리고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발전이 지속되리라 믿는 눈치입니다만,
오르막길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길도 존재하지요.
정부관계자는 쌀시장등 모든 농산물시장을 개방하여 공산품시장을 늘리면 값싼 농산물을 들여와 배불리
먹을수 있다고 착각하는 눈치인데 식량이 위태로우면 모든것이 위태로와 진다는것을 깨닫치 못하는듯합니다.
결국 언젠가는 비싼수업료를 내고서야 뼈저린 후회를 하겠지요.
세계경제에 휘몰아치던 태풍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안심하는 분위기입니다만,
글쎄요.. 이제 태풍의 눈에 잠시 머물고 있다는 생각은 안하시는지..
작년 경기도 화성시에서 일부 시범실시를 한 것으로 압니다. 그 평가가 궁금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행복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만 되면 좋겠네요. 그런 날이 빨리 오길
걍!!!믿고 싶네요 좋은소식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