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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독교 교회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정성욱
남해와 사천은 오래전 부터 전도를 가고 싶었던 지역이였습니다.
사실 김해에서 경산으로 이사를 가기 전에 남해와 사천 전도를 계획하고 떠나려고 하였으나 당일에 몸이 몹시 좋지 않아서
전도 여행이 좌절이 되었었는데 1년을 훨씬 넘어 이제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토순례전도단'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단이 생겼는데 이 전도단체는 서울 또는 경기 지역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단장 목사님을 중심으로 모여서 월요일과 화요일을 활용하여 전국을 다니며 복음 소책자를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단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순회 전도를 12년 4월 달에 시작하였으니까 저보다 1년 늦게 순회 전도를 시작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단장님께서 먼저 순회 전도를 하고 있는 부족한 저에게 관심이 가지셨는지 저의 카페에서 잠시
활동해 주셔서 알게 되었으며 단장 목사님과 이 전도단을 알게 되어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구동성으로 전도를 하는 목회자는 드물다고 하는데 거기다가 자비 또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 재정으로
자신들의 교회를 벗어나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그분들의 교회와 가정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그러다가 그 전도 단체에서 저보다 먼저 사천전도를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참으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서울에서 남쪽 끝인 사천까지 내려와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저는 경상남도에 살면서 1년 가까이 순회 전도를
다니고 있었지만 소위 경상남도 순회 전도사 그리고 영남 순회 전도사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경상남도에 위치하는 사천시
전도는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 부산에 살고 있는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느라 내 마음대로 멀리 가지
못한 것도 어느정도 작용하였습니다. 또한 전날 남해전도 또한 순회 전도를 시작하고 처음이였습니다. 사실 순회 전도 초기에
남해에서 목회하시는 연로하신 목사님께서 저를 초청해 주셨지만 하필 전도가는 당일에 큰 태풍이 오게 되어 목사님께서
다음으로 미루시게 되어 남해 전도가 좌절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서 어느 곳에 전도를 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셔야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간단하게 말해서 건강이 되지 않거나 돈이 없으면 다른 지역으로 전도를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사천 전도를 하는 것이 뒤늦게 복음을 전하는 것 같아서 참으로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에서야 국토순례전도단에 사천 전도 보고서를 읽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협력 교회를 찾지 못하여 모텔에서
자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모텔 주인은 믿는 집사님으로 방마다 성경책을 비치해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연인즉 '경남 사천 항공 우주 엑스포'에 참석하기 위해서 신일덕 장로님께서 모텔에 묵게 되었는데 장로님은 대한항공 기장
출신으로 40년간 2만 1200시간의 비행경력을 가지신 대한항공 수석기장이며 사단법인 한국항공선교회 항공선교사 1호로 임명
되어 지금도 선교사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모텔 부부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신장로님께서 월남전에도 두 번이나 참전을
하였는데 성경책이 보호해 주었다는 간증을 듣게 되었고 요즘은 모텔에서도 불미스러운 사고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장로님의
권유로 전도와 보호에 믿음으로 방마다 성경책을 비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신장로님에게 선교비도 지원하고 장로님은 성경책을 보내 주시는데 모텔에서는 1년에 10권 정도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럴 때마다 집사님들이 채워 놓으며 한 번은 손님 중에 성경을 보고 기분 나쁘다며 돈을 환불해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국토순례전도단에 사천 전도 보고를 읽으면서 비록 사천에서 협력 교회는 찾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모텔로 가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고 제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복음 사역자라면 이번 사천 전도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실는지 기대반 걱정반 하였습니다.
전날 삼천포 대교를 건너기 전에 잠잘 곳을 알아보는데 처음에는 찜질방도 생각하였으나 잠자리도 불편하거니와 음란한
곳이고 모텔도 있지만 그곳도 여행객들을 위한 휴식처에서 변질이 되어 간음의 장소가 되었기에 내키지 않으며 돈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기도원도 생각하였으나 마땅한 기도원이 있어서 1인실에서 자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올때는 모텔비
정도의 돈을 주고 나오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순회 전도를 기뻐하시면 잠잘 곳을 예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까운 교회를 찾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전도하였던 남해에서 자려고 하였으나 남해 전도는 이미 끝났고 인구가 적고 복음화율이 낮은 섬이라 교회도 적었기에
삼천포대교를 건너면 바로 있는 삼천포에서 교회를 찾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삼천포 교회를 검색하니 몇 개의
교회가 검색 되어 한시가 급해서 교단은 아예 보지를 않고 무조건 전화를 걸어서 소속을 말하고는 전도 여행을 왔는데 예배당도
좋으니 하루만 재워달라며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실 혹시나 하여 침낭을 자동차에 실고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는 곳도 있고 외출하고 아이들만 있는 교회도 있었으며 목사님과 통화는 되었지만 사택과 예배당이 멀다며 안 되겠다고 하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천포에서 교회를 찾는 것은 포기하고 그곳에서 내륙 지방으로 20키로 떨어진 사천시에서 교회를 찾기로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계획이 사천시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알게 되었지만 삼천포시와 사천군은
나뉘어 있었는데 1955년에 삼천포와 사천군이 통합이 되어 사천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합될 때 시의 명칭을 두고
갈등이 있었지만 '잘 나가다가 삼천포호 빠진다'는 속담으로 삼천포에 대한 인식이 안 좋다 하여 사천시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알게 되었지만 이 속담의 근원은 과거에 남부지역에서 부산을 향하여 운전해갈 때 삼천포로 가는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삼천포로 가는 길은 똑바로 되어 있고 부산으로 가는 길은 꺾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똑바로 나 있는 길을
부산으로 가는 길인 줄 잘못 알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산으로 가는 길을 지금까지 잘 왔는데 거의 마지막에
삼천포로 빠져버리게 되어 붙여진 속담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속담을 들으며 영적으로 비유해 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지금까지 천국가는 순례의 길을 잘 왔지만
거의 마지막이나 중간에 좁은 길에서 넓은 길로 탈선하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은지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속담에서도 배울 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끝까지 좁은 길, 십자가의 길, 주님가신 길을 따라가는
성도님들과 사역자분들이 되시길 축원하는 바입니다!
사천시에 처음 전화를 걸었던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받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갑자기 전화를 해서 숙식을 제공해 달라면 곤란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말이 어눌하여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해서 죄송스러웠습니다.
아마도 두번째 전화를 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조금 연세가 있어 보이시는 목사님께서는 선뜻 교회로 오라고 하시며 같이 잠을
자든지 아니면 방 하나가 있는데 그곳에서 잠을 자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참으로 놀라고 감사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전도단은 전도를 떠나기 오래 전부터 숙박할 교회를 찾았을 터이지만 그런 교회를 찾지 못하였는데 나는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이 즉흥적으로 그것도 늦은 당일에 몇 군데 전화를 걸어서 숙박할 교회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네비게이션으로 교회에 도착하니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의 허름하고 작은 교회였는데 교인수는 10명 남짓되는
통합 교단이였습니다.목사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목사님께서 자신의 방을 저보고 쓰라고 하시며 사모님이 사용하는
옆방에서 주무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예배당도 감지덕지 하였는데 목사님이 사용하시는 방을 저에게 주시니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왔다고 하였는데도 계속 저녁을 먹고 왔냐며 걱정하시며 나중에는 고구마와 김치와 물을 갖다
주셔서 든든하게 먹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새벽 기도가 있다고 하여서 시간에 맞추어 갔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도 나오지 않으셔서 피곤하고 추워서 다시 방으로
들어 왔는데 조금 뒤에 목사님께서 새벽 기도를 드리러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피곤해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제 시간에 나오지 않으시고 제가 들어오자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셨다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뒤에는 닭장이 있었는데 새벽에 수닭에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알람 시계가 없는 옛날 사람들을 위해서 수닭에 울음소리로 알람시계를 대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오래만에 시원한 지하수 물로 세수를 하고는 머리를 손질하고 아침을 먹고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는데 일명 품앗이
전도라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목회자분들이 모여서 매주 목요일에 교회를 번갈아 가며 전도를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노회의 서기를 오래 하셨는데 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은퇴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여 은퇴한 교회 사택에서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자신도 이렇게 하다가는 그렇게 될 것 같아서 그때 부터 사모님과
노후 대책을 하였는데 사모님께서 교회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목회자 사모가 일을 한다며
반대도 있었지만 피아노 학원을 통해서 교회로 나와 신앙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매년 생겼기에 목사님께서는 선교에도 도움이
된다며 설득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돈을 조금 모으고 목조 주택을 지어서 5년 뒤에 팔았는데 보통 주택은 아파트와 달리 짓고 나면 오르지 않고 가격이
내린다고 하는데 그 집은 가격이 올라서 거기서 조금 이윤을 남겨서 가지고 있는 돈을 합하여 아파트 두채를 사게 되었고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를 받으며 큰 어려움 없이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노년이 되어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노후대책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저에게 유익이 되는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헤어질때는 이것저것 챙겨주시며 다음에 다시 사천에 전도를 오게 되면 그때도 잘곳이 마땅한데가 없으면 교회에서
재워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참으로 감개무량하였습니다. 또한 마치 자상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듯이 저를
대해 주셔서 그렇게 어질고 자상하신 목회자분이 있다는 사실의 매우 놀랐으며 목사님을 통해서 은혜 충만하게 받고 사천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체격이 좋고 손도 굉장히 크고 굵으셨는데 왕년에 힘을 쓰셨는지 의원 보좌관 제의도 있었으
나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 계기로 통합 교단의 속한 목회자를 배척하거나 미워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통합 교단이 자유신학을 가르치고 WCC를 찬성하고 가담하여 상종하고 싶지 않은 교단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런 교단의 속하여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는 통합 교단 목사님들도 상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계기로 자유신학과
WCC에 동참하는 통합 교단은 배척하되 그곳에 소속 목사님들과 성도들은 배척해서는 안 되겠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나와서 사천읍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도시가 크지 않았으며 삼천포가 어업 중심이라면 사천읍은 공업 특히 국내 기술로
비행기를 만들고 넓은 비행장이 있는 곳이였습니다. 아침부터 시내 이곳 저곳을 다니며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목사님에게서 받은 교회 전도지를 가지고 사천읍시장과 버스 터미널과 거리에서 전도지와 물티슈를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역 교회가 생기면 그 교회 전도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지와 다르게 물티슈는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잘 받는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복음을 전하면서 영업도 하였습니다. 사실 저의 일은 기존 거래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영업하여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일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었으나 하나님께서
순회 전도의 복을 주셔서 비록 최저 단가로 영업이 성사되어 이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사천에서 영업이 세개나 성사가
되었습니다.
사천읍을 떠나기 전에 시내 초등학교 뒷산에 사천읍성이 있어서 잠시 다녀왔으며 다음으로는 사천에서 12키로 정도 떨어진
진주시로 향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오후에 삼천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였지만 다시 남쪽으로 20키로를 내려가고 다시 올라
오려면 시간이 많이 허비되고 갈 길도 멀기 때문에 아쉽지만 삼천포는 다음에 전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상황에 따라서 계획은 변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주시에 도착하여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며 가는데 옆으로 경상대학교가 보이는데 학교가 굉장히 컸으며 정문으로 학생들도
제법 왕래를 하고 있어서 정문 맞은편에 주차를 하고는 차량으로 잠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을 지나서 조금 더 가니까 낮은
산쪽으로 연암공업대학도 있어서 정문으로 오고 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공업대학교에서 한 번만 복음을 전하고 가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꾸어 한 번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대한 사람이 앉아서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하고 생각하고 주차를 하고는 그분에게도 갔습니다. 먼저 전도지를 주며 복음을 전했더니 예전에 교회를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어느 교회에서 나왔냐고 물으셔서 순회
전도자인데 가까운 교회를 나가시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몸집이 너무 거대하여 겁도 났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2m 27cm에 거인이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2미터 27센치미터가 얼마나 큰지 실감을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부차적으로 설명하자면 오래전 김해에서 프로 배구
경기가 열렸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조금 불편하신 2층 아저씨가 그곳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체육관
에서 경기를 잠시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키 큰 배구 선수들을 보면서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남니다.
참고로 현 프로 농구 선수들의 평균 키가 189.8cm입니다.
또한 군대에서도 189cm에 거구가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볼 때는 골리앗 못지 않게 무섭고 크게 보였습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의 키가 198cm 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한때 이만기 선수와 활약하였던 씨름판의 거인 이봉걸 장사가 205cm 입니다.
오래전 농구선수로 활약한 한기범 농구선수도 205cm 입니다.
그리고 한때 우리나라에서 최장 농구선수 였으며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한 서장훈씨가 207cm 입니다.
젊은 시절의 서장훈 선수가 방송에 나왔을 때에 서장훈 선수에 키와 체격에 참으로 놀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서장훈 선수보다 키가 큰 사람은 씨름판에서 잠시 격투기 선수로 활약하였던 김영현 선수가 217cm 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홍만이 218cm 입니다.
마지막으로 현 농구 선수중에서 최장신이며 마치 골리앗을 연상케하는 하승진 선수의 공식적인 키가 221cm 입니다.
근래에 하승진 선수와 서장훈 선수가 나란히 붙어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거대한 서장훈 선수가
하승진 선수와 함께 있으면 마치 어린아이 같이 보이고 그렇게 작고 외소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승진 선수보다 6cm가 더 큰 거인을 만났던 것입니다.
사실 오래전 대구 달성공원에는 유명한 거인 아저씨가 수문장으로 계셨습니다. 바로 거인 류기성씨인데 신장 225cm로
1971년 부터 27여년간 달성공원 수문장으로 시민들을 반갑게 맞아주시다가 1999년에 당뇨등으로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최장신으로 알려진 그분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더욱이 그 사람보다 2cm가 더 컸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주시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한국에서 가장 큰 거인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내가 만난 거인 아저씨는 오래전 텔레비젼에도 몇 번 출연을 하였는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결혼도 하지 못하고
기초 수급자로 생활하며 거기다가 관절이 좋지 않아 정상적인 활동을하기가 어렵고 세월까지 흘러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거인으로 비춰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골반 수술을 받아서 키가 줄어 들어 2m 25cm 정도라고는 하지만 원래 키는 2m 27cm
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사진도 찍고 사천교회 목사님에게 받은 사탕과 건빵과 수건과 건강전도지를 주고 헤어졌는데 덩치와 다르게 성격이
너무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진주에 복음을 전하러 갈 일이 생기면 형편이 되는대로 간식 거리와 생활 필수품등을 가지고
다시 방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보면서 최근에 읽었던 성경 말씀이 떠오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시려고 그분을
만나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생존하는 한국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보이며
너무 거대하여 사람이 아니라 무슨 다른 종족을 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골리앗도 마치 다른 종족 같이 그 당시에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거인이였으며 골리앗은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골리앗을 실제로 대면해 보니 외적으로는 두렵고 무섭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관절이 좋지 않아서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으니 재빠른 사람에게는 당할 수가 없을 것이며
일어서도 똑 바로 서지를 못하고 구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우리 대장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미 머리가 박살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더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속히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로마서 16장 20절 -
그곳을 나와서 진주 시내를 다니며 차량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을 위해서 일부러 진주성에 들어가서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촉석루의 전경과 논개가 왜장을 앉고 투신한 의암 바위등을 촬영하였습니다.
사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왜적들과 큰 전투를 벌려 대승을 거둔 장소이면서 임진왜란 전투에서
가장 인명피해가 많았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즉 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알려져 있으며 3천 800여 명으로 약 3만여명의 왜적과 싸워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역사적인 전투입니다. 그런데 진주성 2차 전투에서는 조선에 출병한 모든 군사를 집결하여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왜적에 수가 10만 대군을 이루었으며 결국 여러가지 요인과 함께 중과부적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고 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진주성 안에는 관군과 의병 뿐만이 아니라 진주 대첩의 영향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진주성에 있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5만여 명의 백성들이 진주성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이 함락되자
이 전투에서 사상자가 6만여 명에 달하여 임진왜란 모든 전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임명 피해를 입은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견고한 성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견고한 성은 바로 우리의 피난처 되시며 산성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 시편 91편 1~7절 -
진주성 북쪽 문으로 들어와 동문에 있는 촉석루로 가기 위해서 성을 가로 질러가는데 진주성의 역사를 알아서 그런지
그곳을 걷고 있노라니 발걸음이 무겁고 마치 피비린내나는 시체 더미 위를 걷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관광지 안에서는 왠만하면 전도를 자제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여호와증인 할머니가 팜플렛을 나눠주며 포교를 하고
있어서 훈계를 해주었는데 완강하게 듣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전도를 다니다 보면 가장 많이 포교활동을 하는 종교 집단이 여호와증이라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저도 진주성 안에서 몇몇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였으며 진주성을 나와서는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며
시내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마침 근처 남자 중학교 하교시간이라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정문에서 학생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했는데 받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완악하게 받지 않거나 장난을 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학생들도 많아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곳을 나와서 진주 중앙 시장이 보이고 마침 장날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보여서 그 근방을 여러번 다니며
차량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주차를 하고는 중앙 시장과 맞은편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번화가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였으며 마지막에는 간만에 시장과 번화가를 다니며 외치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경남 전도를 하루 더 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산청군과 합천군을 지나서 오다가
고령군에 도착하여 잠시 스트레칭을 하며 시내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다가 늦은 시간이였지만 우연히 영업이
하나 성사가 되어서 비록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날 하루 일당도 벌 수 있었습니다.
10시 반에 집에 도착하여 어린 자녀들을 다시 보게되어 기뻤으며 우리 하나님께도 자녀 삼은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고 흐뭇하게
여기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 주님이시여, 진주시에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사천시에도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경상대학교 정문
연암 공업 대학
거인 아저씨와 기념 사진을 찍음
진주성
사천 공항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교회
교회 언덕에서 해뜨는 모습을 촬영함
삼천포 대교
촉석루
사천읍성에서 바라본 사천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