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한 달간 힘든 시기 동안 역사책을 읽고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고 찾아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세세한 부분을 중점으로 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단순히 어떤 지나간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건 너머에 있는 인간의 본성이 신앙에 접목됐을 때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은 서기 10세기에서 20세기 동안 천년의 기간과 중국과 고려, 조선,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탄핵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정치와 권력의 상관관계 속에 여인들이 그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자료도 인간의 본성을 종교와 신앙이라는 틀을 벗어나 원래 어떤 구조적인 메카니즘이 작용했는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역사학자도 아니고 또 한 달 동안 이런 사실을 공부한다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큰 틀 안에서 봤을 때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고 안 사실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다큐멘터리 하나를 본 게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냥 우연히 발견하고 본 것인데 제가 한 달간 공부한 역사를 단칼에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중요한 결론을 내린 게 있는데 그걸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기록을 통해서 본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 본성 안에 내재적으로 가진 본성은 아무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해도 또 문화가 다르다고 해도 그건 거의 변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출현과 지금 현생 인류가 되기까지의 자료와 고증이 이런 결론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의 전면에도 등장한 경우도 있었지만 역사의 후면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보통의 일반적인 시각과 통념으로,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여성은 상대적으로 남자에 비해 적다고 하는 인식이 있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만 사회적인 구조 때문에 그게 발현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여성도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 못지않게 어쩌면 남자보다도 더 큰 권력욕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조금은 놀라웠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하나 느낀 게 있습니다.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식까지도 살해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과 고려사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적인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단순히 세상적인 권력욕구 때문에 자식을 죽인다는 그 사실이 이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런 역사가 있었단 사실입니다. 이건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사실과 관련해서 최근에는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모성애'입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애는 기본적으로 인간 속에 내재된 본능이라고 하는 사실이라고 흔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사실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선천적으로 지닌 속성이 아닐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있습니다. 아직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립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모성본능인 모성애도 후천적으로 경험과 학습에 의해 습득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최근 나온 이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조금전에 언급된 역사적인 사실에 대입해보면 이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권력욕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선천적으로 내재된 본능인 모성애라는 기존의 관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최근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이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제 지금부터는 신앙의 눈으로 이 사실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봤을 때 권력욕이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도 하나의 인간의 부질없은 욕망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죄에 가까운 죄성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제가 어떤 신학자의 글을 통해서 그런 설명을 한 것을 봤습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을 다 통틀어 하나로 정리를 해본다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결론도 최종적으로는 신앙의 눈으로 전체를 봤을 때 나올 수 있는 결론입니다. 인간은 원래 원래부터 가진 고유의 본성은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건 동서양 시대와 시간적인 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이라면 공통적인 성질인 것입니다. 길게는 지금부터 2만 년 전 인류까지도 그게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의 인류도 만약 지금 시간을 되돌려 지금 존재한다면 그 사람들도 교육을 하고 하면 비행기도 운행할 수 있고 우리와 똑같은 행동과 지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재의 연구는 이런 사실을 뒷바침할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고난, 본성적인 본능도 중요하지만 후천적으로도 그 본성과 본능을 보완하거나 수정할 다른 환경적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영향이 선한 영향이면 선한 쪽으로 변화가 될 수 있지만 그게 선하지 못한 환경적 요인이라면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근묵자흑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권력욕과 같은 욕망 이런 것도 죄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최종적으로, 통합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속에 있는 근본적인 죄성을 씻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근본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하는 고정된 시각으로만 본다면 절대 변할 수 없고 고칠 수도 없습니다. 변화가 될 수 있는 환경에 일단 노출이 되어야 하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환경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예를 든다면 마치 여성들이 태교를 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듣고 하는 그런 환경입니다.
마치 인간의 본성인 모성애가 후천적인 요소에 의해 형성될 수도 있다는 그 이론과 통합해서 본다면 그렇습니다. 이건 실제 이런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 우리가 끊임없이 노출되지 않고 그냥 맹목적이고 관성적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항상 유아기 때 신앙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적장애인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육체적인 변화가 있는 성장은 분명 눈에 나타나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어느 지점에서 성장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사람도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신앙의 성숙은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시간적인 양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양도 중요하지만 그와 병행해서 자신이 변화가 되려고 하는 의지적인 측면이 없다면 단순히 육적인 몸의 성장과 변화만 있지 영적인 영혼의 성장은 멈춘 채 시간만 흐르고 변화가 없는 신앙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신앙으로 한평생 신앙을 하게 된다면 인간적으로 봤을 때 불행한 신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또 어떤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런 방법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남들 장에 가니 따라 가는 그런 신앙은 어쩌면 불행한 신앙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