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으로 그리는 언어, 황홀한 발레의 선율
발레리노 출신의 박귀섭 사진전 <LAYER>
2024.5.9.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된 박귀섭 작가의 사진전 ‘LAYER’를 보고 왔다. 대한민국 발레축제 기획전시로, 2024.5.4.-5.12 기간 중 전시됐다. 2021년 11월에도 청담동 올리비아박 갤러리에서 <Human>이란 제목으로 개인전을 가진 적이 있다. 2023년 11월에는 아트인더글라스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갖기도 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전시장을 들어서면서부터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전시실 외벽 전체를 꽉 채운 오선지! 무심히 보면 음악연주회 아닌가 착각할 정도인데, 이는 음악연주회가 아니라 발레무용수들의 다양한 몸짓을 작곡하듯 오선지에 그려넣은 것이다.
몸의 언어를 수묵화 그리듯 사진으로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독창적(Creative)인 작품활동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했다. 무용수들의 동작을 다양하게 그린 작품들은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을 포착한 사진들로 파격 그 자체였다. ‘몸짓의 흔적’에는 무용수들의 땀과 눈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박귀섭 작가는 원래 국립발레단 소속의 발레리노였다. 박 작가는 2006년에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2007년 뉴욕 인터내셔널 발레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잘 나가던 그가 2010년부터 뜻한 바 있어 사진영역에 뛰어 들었다.
발레란 몸짓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는 발레리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동작들을 다시 사진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귀섭 사진작품의 놀라운 면은 '독창성'이다. 발레 무용수들의 몸놀림을 주된 오브제로 택한 것도 새롭지만,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시각과 접근방식, 사진에 대한 종래의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이다.
오선지에 음악가가 작곡을 하듯 무용수들의 몸짓들을 악보로 옮겨놓기도 하고, 그들의 몸놀림들을 나뭇가지처럼 엮어 거대한 나무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 건물구조물같은 인간연결고리로 인간관계를 은유하기도 한다. 작가는 ‘나’라는 ‘나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미로와 같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 중 ‘Shadow #2-0’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의 러시아판 표지사진으로 선정되기도 하고, 오선지 위 음표 작품인 ‘Shadow#2-4’는 미국 유명 음반회사음반 표지용으로 팔리기도 하는 등 이미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파도가 출렁이는 듯한 형상을 표현한 작품도 보인다. 누드의 등과 히프 곡선으로 선(線)의 율동과 명암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명은 Shadow #2-1. 작가는 “무용수의 몸짓은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적 언어다. 수많은 감정의 몸짓이 모여 만든 형상은 각기 다른 감정을 전달한다”고 말한다.
박귀섭 작가의 작품에는 분명한 제목이 없다. Shadow, Vision 등 일반적인 이름에 일련번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는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이 다른데, 느끼는 것도 모두 다르지않을까요? 특정한 제목이야말로 작가의 편협한 고정관념이지요 작품을 보는 이들은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관점을 통해 작품은 얼마든지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강조한다.
또, 작품 SHADOW2-3은 어떤가? “나무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자세히 보니 땅속 깊이 물을 찾아 갈망하듯 뻗은 가지는 모두 사람의 몸이다. 얽히고 설킨 뿌리에서 인간들의 복잡하고 고통스런 삶의 현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박귀섭 작가의 이번 전시제목은 ‘LAYER’다. 레이어란 사진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 사진보정과정에서 작업용지를 하나하나 쌓아가듯 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뜻한다. 박 작가는 “우리의 삶 또한 겹겹이 쌓인 레이어로 완성된다. 수많은 경험과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는 “ 무용수의 하루는 하나의 선(Bar)에서 시작된다. 긴 봉(Bar)에 몸을 맡기고 서서히 잠든 근육을 깨우는 클라스 시간은 마치 음악가가 악기를 조율하듯 무용수의 몸을 예술로 향한 여정에 준비시킨다. 반복되는 동작은 하나의 선을 넘어 자유로운 표현으로 승화되고, 무대 위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기억될 0.01초, 아름다움의 정점! 발레는 짧고 순간적인 예술”이라고 풀이한다.
그렇다. ‘0.01초의 예술’. 이는 ‘사진‘이 추구하는 ’결정적 순간‘과도 맥이 이어진다. 박귀섭 씨는 발레리노이면서 사진작가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동료무용수들의 순간적인 몸짓을 직접 카메라라는 매체를 통해 예술적 결과물로 승화시키고 싶어서였을까? 카메라는 0.01초가 아니라 0.0001초의 순간도 놓치지않고 포착해낼 수 있는 도구이다. 박귀섭 작가는 '결정적 순간'에 무용수들의 다양한 몸짓을 놀랄만한 예술적 감각과 시각으로 멋지게 그려냈다. 수십점에 달하는 LAYER 2-2 전시작품들이 그것이다.
발레 무용수들의 몸짓은 ’선율‘이다. 몸으로 그리는 악보다. 전시실 중앙 공간에서는 은은한 거문고 소리와 함께 무용수들의 몸동작들이 오선지 위에 출렁인다. 기발한 영상이다. 박귀섭 작가는 “거문고의 선과 무용수의 선으로 선율이 만들어진다. 무용수는 하나의 선(Bar)에서 다양한 몸의 선을 그리며, 거문고는 24개의 ’악구‘를 겹겹이 쌓아가며 다채로운 선율을 만들어내어 하나의 곡이 되고 악보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또, 우리가 겉으로 쉽게 볼 수 없는 발레무용수들의 숨겨진 흔적들도 여러점 전시됐다. 발레 의상은 매우 타이트하다. 14세기 유럽에서 코르셋(corset,허리를 가늘게 조이는 몸매보정용 속옷)이 유행하면서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숨을 참고 치장한 것처럼, 발레리나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지는 그 타이트한 발레 의상들은 탈의 후 발레리나의 몸에 수많은 흔적을 남긴다고 한다.
또, 발끝으로 온 몸을 세우고 아름다운 몸짓을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고통이 따랐을까? 발가락이 뭉개지고 발목이 휘어지는 아픔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발레를 볼 때 마다 필자 역시 늘 궁금하고 함께 아파했던 흔적들이다. 순간순간의 고통과 인내가 오랜 기간 레이어로 쌓이고 쌓여 예술로 승화된 것이 아닌가?
작가에게 인간의 ‘몸짓’은 감정을 전달하고 소통을 이뤄내는 일종의 ‘언어’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그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이어주는 ‘매개자’라 할 수 있다. 유명 발레리노 출신으로서 누구보다도 '몸짓'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잘 아는 박귀섭 작가는 '빛으로 그리는 그림'인 사진에서도 이를 정제된 언어로 놀랍도록 황홀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박귀섭 작가는 이제 단순한 포토그래퍼가 아닌 비쥬얼 아티스트다. 그는 “비주얼이라고 하면 막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진, 영상, 디렉팅, 무대연출과 같은 도구를 통해 몸에 관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요”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2020년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 타이틀을 시작으로 한국관광공사의 ‘가락 더 무브먼트 인 코리아’ 등의 영상 연출로 호평받았다. 또한, 댄스필름에도 관심이 많은 인천공항 미디어타워의 ‘한국의 미’와 경기아트센터의 ‘상태와 형태’의 영상 감독으로 참여했다. 앞으로 직접 스토리까지 쓴 댄스필름을 만드는 한편 퍼포먼스를 연출하겠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A-apollon' 은 그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의 이름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과 시를 관장하는 신, 넓게 보면 예술의 신 아폴론의 이름을 빌려왔다고 한다. 바키(Baki)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임윤식)
*이곳에 올린 사진들은 전시장의 작품들을 필자가 직접 찍은 것이어서 원본에 비해 화질이 많이 떨어지며, 일부 작품은 편집필요상 필자가 임의로 크롭한 것도 있음을 밝혀 둠. 모든 작품들은 박귀섭 작가에게 지적재산권이 있으므로 작가 허락없이 전재하거나 임의로 사용할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