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요약]
■이붕수(李鵬壽)
1545년(인종 1) - 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별장으로 활동한 의병장으로,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중항(仲恒). 아버지는 이팽년(李彭年)이며, 어머니는 여씨(呂氏)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병사가 관북(關北)으로 밀어닥쳐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회령 사람인 국경인(鞠景仁) 등이 두 왕자와 재신(宰臣) 및 장리(長吏)를 사로잡아 항복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이 소식을 듣고 거사계획을 세우던 차에 북평사 정문부(鄭文孚)를 만나 강문우(姜文祐), 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과 함께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정문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별장이 되었다.
9월 부령을 수복하여 국경인 등의 목을 베고, 11월 길주 장평(長坪)에서 승리하고, 12월 쌍포(雙浦)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3년(선조 26) 1월 단천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적병이 후퇴, 남하하기 시작하자 이를 추격하여 옥탑평(玉塔坪)에서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1665년(현종 6) 당시 함경도관찰사 민정중(閔鼎重)이 임진왜란 때에 충절을 다한 이 지방 인물들에 대하여 포상하여줄 것을 건의함에 1666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고, 경성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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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집(木齋集)제7권 / 갈명(碣銘) / 홍여하(洪汝河, 1621~1678) 저
증 감찰 이군 갈명 기해년(1659, 효종10)
(贈監察李君碣銘 己亥)
임진년(1592, 선조 25)의 병란이 일어나 나라가 와해되자 포의(布衣)로 재야에서 떨쳐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이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비록 드러남과 은미함,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는 잘 따져 봐야겠지만, 적개심으로 절의를 다하여 죽음에 이르러도 후회하지 않는 마음은 모두 똑같다. 북관(北關)에 있어서는 경성부(鏡城府)의 이붕수(李鵬壽) 군도 그 사람에 해당된다.
그해 7월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북로로 들어와 여러 진(鎭)이 함락되자 회령(會寧)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ㆍ경성(鏡城) 영노(營奴) 국세필(鞠世必)ㆍ명천말수(明川末樹)ㆍ목남(木男) 등은 두 왕자와 재신(宰臣)ㆍ장리(長吏)를 사로잡아 적과 내응했다.
왜장은 모두를 거짓으로 절도사나 주사(州事)ㆍ부사(府使)에 임명했다. 세필이 본부(本府)에 주둔하여 병세가 더욱 커졌는데, 이군은 강개하여 성을 내며 몰래 토벌하고자 동지 최배천(崔配天)ㆍ지달원(池達源)ㆍ강문우(姜文佑) 등과 뜻을 같이하고 의병을 모아 군대를 만들었다.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산중으로 달아나 숨었는데, 물색하여 찾아내 무계리사(武溪里舍)로 맞이해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현룡(鄭見龍) 또한 달려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문우는 척후장(斥候將)이 되고 이군은 창의별장(倡義別將)이 되었다.
임명장이 나가기도 전에 야인들이 부령(富寧) 접경을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로 인해 심부름꾼을 보내 세필을 달래기를, “나라가 엎어져 우리들은 충을 다할 길이 없으며, 왜병들도 철수해 돌아가면 그대 또한 홀로 버티기 어렵다. 지금 만약 같은 마음으로 협력하여 적의 기병을 막고 이 삭방(朔方) 구진(九鎭)을 보전하면 또한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기회를 잃지 말라.”라고 했다. 세필은 그 계획을 옳다고 여기고 그대로 따랐다.
9월 아무 날에 이군은 정문부를 따라 의병 수백 명을 조직하여 부의 서쪽 유정(柳亭)에 나아가 주둔했고, 세필은 많은 군사를 풀어 정탐했다. 문부가 드디어 성으로 들어가 다음날 아침에 공격하기로 기약하니, 동쪽의 병사들은 이로 인해 세필을 주장(主將)으로 추대했다.
세필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문부에게 재삼 사양한 뒤에야 허락을 받았다. 이튿날 새벽에 문부가 남루(南樓)에 올라 대장기를 세우자 여러 장관(將官)들이 차례로 들어와 예를 행하였다. 세필이 먼저 들어가자, 문우에게 지목되어 남문 밖으로 끌려 나와 참수를 당했는데, 한 명의 군사도 감히 동요하지 못했다.
이윽고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서 거짓으로 서명한 자를 찾아 참수하니 의병군의 기세가 크게 진작되어 모집에 응하는 자들이 날로 많아졌다. 11월에 길주(吉州)와 장평(長坪)에서 왜를 만나 격파했다. 12월에 쌍포(雙浦)에서 크게 싸웠을 때 철기병(鐵騎兵)을 이끌고 왜진(倭陳)을 누벼 많은 목을 베었다.
이듬해 정월에 또 단천(端川)에서 싸워 물리쳤다. 이윽고 왜적들은 병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의병들이 백탑(白塔) 교외까지 추격하여 장차 전투가 벌어지려 했는데, 이군이 왜장에게 활을 쏘자 화살에 맞아 꺼꾸러졌다. 이군은 맨몸으로 문부의 말 앞에 우뚝 섰기 때문에 홀연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도 같은 날 죽었다.
문부가 중간에 행재소에 심부름꾼을 보내 소식을 알리자 함경도관찰사는 문부가 먼저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화내었다. 또 그의 공로를 시기하여 경거망동으로 군대를 잃었다고 무고하니, 조정에서 마침내 문부를 의심하여 그의 공로와 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래지나 일의 실상이 점점 드러나서 이군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되었다. 당시에는 나라의 태평이 오래되었다가 갑자기 미친 도적에게 화를 당해 팔도가 휩쓸려 어떻게 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이군은 일개 서생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흉악한 우두머리를 죽이고 주력부대를 꺾어 몇 개월 안에 구진(九鎭)을 되찾았다. 그 공의 위대함은 호남ㆍ영남의 의병들과 나란하지만, 호남ㆍ영남의 여러 공들이 무고를 당한 것처럼 끝내 관찰사에게 모함을 받았다.
아, 지방을 다스릴 임무를 맡아 전란을 당하자 충을 다해 죽음으로 직분에 임하지 못하고 도리어 다른 사람의 성공을 시기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음이던가. 66년 뒤에 나는 외람되게도 이 부(府)를 두 번이나 맡았다. 나를 위해 이군의 일을 외운다는 어떤 객이 있어 그에게 무덤을 물으니, 어랑사(漁郞社) 무계(武溪) 언덕이라 하였다.
나는 공무에 얽매여 그 앞에 생추(生蒭)도 올리지 못함을 한스러워했다. 군의 후손 동영(東榮)ㆍ동백(東白) 등이 장차 무덤 남쪽에 비갈(碑碣)을 세우려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의열(義烈)을 드러내 밝히고 가려졌거나 억눌림을 당한 이들을 신원하는 것은 벼슬하는 이의 책임이기에 어찌 사양하겠는가.
군의 자는 중흥(仲興)이고,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시조(始祖) 저(苧)는 벼슬이 고려 보문 제학(寶文提學)이다. 손자 근(懃)은 본조에 들어와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다. 후손 겸(謙)에 이르러 토호(土豪) 세력으로 연루되어 북쪽으로 이주하니, 군은 그의 4대손이다.
아버지는 팽년(彭年)이다. 군은 가정(嘉靖) 을사년(1545, 인종1)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조와 기개가 있었고 국량이 범상치 않았다. 장부(丈夫) 여섯을 낳았는데 아무개 등이다. 증손 남자들은 지금 60여 명이기에 다 기록하지 못한다. 동영과 동백은 모두 글을 업으로 삼아 나에게 와서 공부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비로서 용감하게 백 명을 막아낼 만했고 / 維士屹屹百夫防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자 강개한 뜻 품었네 / 遭國板蕩志慨慷
칼 잡고 병사들에게 맹서할 땐 노기를 날리고 / 杖劍誓衆氣怒揚
흉악한 무리들 마치 개와 양처럼 베었네 / 刲剔兇渠如犬羊
한 번 싸워 세 번 승리해 우리 강토 회복했지만 / 一戰三捷復我疆
아 시절 불리하여 장사가 죽으니 / 嗟時不利壯士亡
굳센 영혼 늠름히 나라 위해 순국했네 / 毅魂凜凜爲國殤
저 무계를 돌아보니 가래나무 황량한데 / 眷彼武溪梓木荒
조상들의 공로 사라져 나를 상심케 하네 / 遐耀湮沈令我傷
시 새긴 최고의 업적 오래도록 북방에 알리니 / 刻詩最績告朔方
충을 배우고 효를 요구함에 다함이 없기를 / 課忠責孝垂無彊
<끝>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전재동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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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監察李君碣銘 己亥
當執徐兵起。國中瓦解。由布衣奮農畝。倡義討賊者。指不勝屈。雖闡微成敗殊論。其敵愾盡節。蹈死不悔。則俱有焉。在北關則鏡城府李君鵬壽其人也。其歲七月。倭將淸正入北路。列鎭陷沒。會寧叛民鞠景仁。鏡城營奴鞠世必。明川末樹,木男等。縛執兩王子, 宰臣, 長吏以應賊。倭將皆僞署節度州府事。世必據本府。兵勢尤盛。君慷慨發憤。密謀討之。結同志士崔配天,池達源,姜文佑等。募義作隊。評事鄭文孚竄匿山中。物色得之。迎至武溪里舍。推爲倡義大將。鐘城府使鄭見龍。亦至爲中衛將 。文佑爲斥候將。而君爲倡義別將。部署未發。會聞野人。寇掠富寧境。因遣使說世必曰。國朝傾覆。吾等無地效忠。而倭衆撤歸。君亦難獨立。今若同心協力。捍禦虜騎。保此朔方九鎭。則亦轉禍爲福。機不可失。世必然其計。從之。九月某甲。君從文孚。勒義旅百餘人。進屯于府西柳亭。世必盛陳兵以候。文孚遂入城。期以翌早。東兵因推世必爲主將。世必伏地叩頭。讓於文孚再三。然後許之。遲明。文孚上南樓。建大將旗。諸將官以次入行禮。世必先入。自文佑擒之。曳出南門外斬之。一軍不敢動 。卽引而南。搜斬僞署者。軍聲大振。應募日衆。十一月。與倭遌于吉州長坪。擊破之。十二月。大戰于雙浦。引鐵騎橫衝倭陣 。斬馘甚多。越明年正月。又戰于端川。敗之。俄賊捲而南。義師追至白塔郊將戰。君射倭將。應弦而倒。君因挺身出立文孚馬前。忽中丸死。朱乙溫萬戶李希唐。亦同日死。文孚間遣使報聞行在。而本道主閫。怒文孚不先稟己。且妬其功。誣以輕擧僨師 。朝廷竟疑文孚。抑其功賞。久之。事稍白得。贈君司憲府監察。于時國家昇平久。猝被狂寇。八路靡然。無誰何之者。君以一介書生。糾勵義士。戮兇魁挫勁寇。數月之內。匡復九鎭。其功偉然。與湖嶺義師埒然。竟爲人誣枉。如湖嶺諸公。亦爲主閫所掩。噫。受任方面。遇大難。不能效忠死職。而反妬人成功。是誠何心哉。後六十六年。余忝貳茲府。客有爲余誦君事者。問其墓。云在漁郞社武溪之原。恨簿領纏繞。不得置生蒭於前也。君之孫東榮,東白等。將豎碣于隧南。請余文之。余惟甄義烈伸幽抑。卽莅土者責。庸何辭。君字仲興。公州人。始祖苧。仕高麗寶文提學。有孫曰懃。入本朝。拜承旨。至其孫謙。坐豪右北徙 。君其四代孫也。考曰彭年。君以嘉靖乙巳生。自少時有志槩。器宇不凡云。生丈夫子六。某某。曾孫男。見在六十餘人。不能盡錄。東榮,東白。皆業文。從余問學。銘曰。
維士屹屹百夫防。遭國板蕩志慨慷。杖劍誓衆氣怒揚。刲剔兇渠如犬羊。一戰三捷復我疆。嗟時不利壯士亡。毅魂凜凜爲國殤。
眷彼武溪梓木荒。遐耀湮沈令我傷。刻詩最績告朔方。課忠責孝垂無彊。<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