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8. 9. 00:27
■ 20世 이연손(李延孫)
[생졸년] 1403(태종 2)∼1463년(세조 9) / 향년 6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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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이승(李昇)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그 해 상호군(上護軍)으로 원종공신일등(元從功臣一等)에 올랐다.
1457년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내고, 1459년 다시 첨지중추원사를 제수받았다. 동년 7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겸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고, 1462년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이렇게 여러 벼슬을 거쳐 참판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윤번(尹璠)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부인 윤씨가 대왕대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동생이다. 아들 이철견(李鐵堅)은 1460년(세조 6) 경진무과에 급제하고, 1466년(세조 12) 병술등준시무과(丙戌登俊試武科)에 합격하여 이듬해에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이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486년에는 좌찬성(左贊成)이 되었고, 이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평안도(平安道)·영안도(永安道)의 도체찰사(都體察使), 도총관(都摠管)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그의 묘비 문이 남아 있는데 이는 그의 14세손인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1873년(고종 10)에 개수한 것이다.
제1매는 〈공조참판증영의정이공연손지묘(工曹參判贈領議政李公延孫之墓)〉라는 제호를 탁본한 것이고 제2매는 비의 본문을, 제3매는 말미의 건립연도와 찬자를 탁본한 것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淸選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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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밀직부사 검교정승 예문관대제학 호 송암 시 문희공 휘 세기(高麗朝密直副使檢校政丞藝文館大提學號松巖謚文僖公諱世基)의 현손(玄孫)이요. 고려조 상서공 휘 과(高麗朝尙書公諱過)의 증손(曾孫)이요.
고려조 중정대부 지인주부사 조선조 증 이조참의공 휘 원보(高麗朝中正大夫知仁州府使朝鮮朝贈吏曹參議公諱元普)의 손자(孫子)요.고려조 전농판관 조선조 증 이조참판 휘 승(高麗朝典農判官朝鮮朝贈吏曹參判諱昇)과 증 정부인 전주최씨(贈貞夫人全州崔氏)의 장남(長男)이시다.
참의공(參議公) 휘 승손(承孫)이 아우이며, 전의이씨(全義李氏) 주부(主簿) 휘 지장(智長)은 매부(妹夫)이다.
公은 순충적덕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영평부원군 시 정정공 휘 윤번(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鈴平府院君諡貞靖公尹璠, 1384(우왕 10) ~ 1448(세종 30)의 세째 따님이신 파평윤씨(坡平尹氏) 슬하에 4남 6녀를 두셨다.
원종공신 첨지중추부사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절충장군(元從功臣僉知中樞府事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聰管折衝將軍) 휘 숭수(崇壽)가 장자요.
좌리공신 월성군 의금부판사 의정부좌찬성 오위도총부도총관 시 양평(佐理功月城君判義禁府事議政府左贊成五衛都摠府都摠官諡養平) 휘 철견(鐵堅)이 차자요. 봉사(奉事) 휘 정견(釘堅)이 삼자요. 충좌위부호군 종묘서령 어모장군 오위장(忠佐衛副護軍宗廟署令禦侮將軍五衛將) 휘 석견(石堅)이 사자이다.
첫째 사위(壻郞)가 병사(兵士) 여흥민씨(驪興閔氏) 휘 민(閔)이요.
둘째 사위(壻郞)는 학생 휘 희(暿)요.
셋째 사위(壻郞)는 감찰(監察) 전의이씨(全義李氏) 휘 일동(一仝)이요.
넷째 사위(壻郞)는 대사성(大司成) 이천서씨(利川徐氏) 휘 강(崗)이요.
다섯째 사위(壻郞)는 부사(府使) 예안우씨(禮安禹氏) 휘 신(晨)이다.
公은 세조대왕(世祖大王)의 동서(同壻) 일곱 중 세째로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고,
1446년(세종 28) 4월 19일 교하현감(交河縣監)으로 재직 중에 조전미(漕轉米)의 부정이 기록됨.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4월 19일 병진 1번째기사]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卽位)하자
11月 11日 임금 내외가 장모(丈母)를 뵙고 처가형제(妻家兄弟)들에게
표리(表裏. 옷감) 각기 1투(套)와, 초피이엄(貂皮耳掩. 모피로 만든 방한구) 각기 1개를 하사(下賜)하였다.
12月 27日에 정삼품 상호군(正三品上護軍)으로 원종공신 1등(元從功 臣 一等)에 올랐다.
1457年(세조 3) 01月 18日에 공조참판(工曹參議)에 제수되고,
同年 02月 20日에 종2품 첨지중추원사(從二品 僉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03月 06日 사정전(思政殿) 왜사연회(倭使宴會)에 초청되고
03月 08日 병약한 세자(世子) 해양대군(海陽大君)의 병치유(病治癒) 기도(祈禱) 를 위해 감악산(紺岳山)에 파견(派遣)되었다.
06月 01日에 위장(衛將)으로 왜사(倭使)를 위로(慰勞)하는 연회(宴會)에 참석하였고,
1458年(세조 4) 09月 07日에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제수받고,
同年 10月 12日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받고,
10月 26日 공신 연회 (功臣 宴會)에 참석하였다.
1459年(세조 5) 01月 04日 행 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院事)를 制守받았다.
同年 07月 03日에 중추원부사 겸 전라도관찰사(中樞院副使 兼 全羅道觀察使)가 되었으며,
1460年(세조 6) 06月 07日에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任命)되었고,
1461年(세조 7) 02月 16日 화위당(華韡堂) 술자리에 참석하였고
1462年(세조 8) 04月 06日에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제수받았다.
08月 01日 유구국 사신(琉球國使臣. 오키나와)을 접견(接見)하는 근정전(勤政殿) 음복연(飮福宴)에 참석하였고,
08月 06日 충순당(忠順堂) 주연(酒宴)에 참석하였고,
08月 08日 사정전(思政殿) 주연(酒宴)에 참석하였고, 막내동서인 임금을 찾아 문안하였다.
10月 19日 사정전(思政殿) 주연(酒宴)에 참석하였고,
11月 14日 사정전(思政殿) 주연(酒宴)에 참석하였고,
1463年(세조 9) 05月 05日에 중(僧) 지청(智淸)과 이명(李明)의 반역고변(叛逆 告變)으로 삭탈관직(削奪官職)되고, 넷째 사위 서강(徐岡)과 함께 의금부(義禁府)에 투옥(投獄)되었으나,
05月 06日 조사 결과 거짓고변(告變)이 밝혀져 즉시 석방(釋放)되었으며,
한달 닷새 후인 06月 11日(세조 9.天順 7. 癸未)에 향년 60세(歲)에 기세(棄世)하셨다.
윤 07月 27日 진위현 동천동(振威縣東泉洞 342-1) 북쪽에 안장(安葬)하였으니 예장(禮葬. 국장(국상) 다음가는 국가장(國家葬)으로, 훈친(勳親)이나 공적(功績)이 뛰어난 종1품 이상 문무관(文武官) 및 공신(功 臣)에게 베풀어주는 장례)에 의한 것이다.
1464年(세조 10) 8月 23日 파평윤씨할머니에 대한 탐오(貪汚)하고 비루(鄙陋) 한 강성군(江城君) 봉석주(奉石柱)의 모함(謀陷)을 받아 곤경(困境)에 처하게 되자 제부(弟夫)인 임금에게 도움을 요청(要請)하여 해결(解決)한 사건(事件)이 있었다.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 8월 23일 갑진 2번째 기사]
1470년(성종 1) 2월 13일 - 파평윤씨할머니와 딸에게 부역(賦役)과 세금(稅金) 을 면제(免除)하게 하였다.
1470년(성종 1) 5월 9일 – 사위 서강(徐岡)의 직첩(職帖)을 돌려달라는 요청 (要請)을 성종(成宗)이 신숙주(申叔舟) 등의 동의(同議)를 받아 허락하였다.
1475년(성종 6) 12월 23일 – 막내 여동생 정희왕후(貞熹王后)가 가난(家難)한 셋째 언니에게 쌀 일백석을 하사(下賜)한 것을 두고 지평(持平) 윤혜(尹惠). 최여문 (崔汝文) 등이 국고(國庫)를 사사(私事)로이 처리(處理)했다고 따지자
성종 임금이 해명하기를 국고를 유용한 것이 아니고 대왕대비(大王大 妃)의 사재(私財)를 사용(私用)한 것이라고 함.
후손들이 매년 10月 셋째 주 일요일에 동천재(東泉齋)에서 고려상서공(高麗尙書公) 휘 과(薖), 지인주사공(知仁州事公) 휘 원보(元普), 전농판관공(典農判官公) 휘 승(昇), 그리고 참판공(參判公) 휘 연손(延孫) 등 4위의 향사(享祀)를 모신다.
증직(贈職)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이시다.
봉분 앞에 비석이 있는데 비문(碑文)은 봉교 최팔준 짓고(奉敎 崔八俊 撰)
후손 유원이 다시 세우고 글을 첨가하였다.(裕元 改豎碑 追記)
글 포천 너베기 李元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