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중의 작은 장원 시가장(柴家莊)은 상당한 농토를 소유한 천석 부호가 되어 있었다. 장주 시세진(柴世眞)은 생각이 깊은 인물이었는데 문무를 겸비한 재사로서 주변에 거처하는 소위 양양의 세 명사(名士) - 단계의 수경(사마휘), 현산의 방공(방덕공), 면남의 아승(황승언) - 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에 따라 당연히 사마휘의 제자들과도 만날 기회가 없지 않았는데, 그 중 시세진이 주목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영천 태생의 서서 원직과, 낭야 양도현 태생의 제갈량 공명이 그들이었다. 특히 와룡이라고 불리는 제갈량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아마도 비단 시세진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으리, 대공자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세류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세류 - 시가장주 시세진의 처음 낳은 아이. 시무현(詩武賢)의 이름을 얻고 있는 젊은이로서 왕제가 된 유성과는 오랜 지우이다.
천하를 주유하며 유성과 함께 시를 읊는 모습은 천하 화도(畵道)의 명인(名人) 제령화(濟玲畵)의 작품으로 그려져 천상이공자(天上二公子)라는 제목으로 화계 최대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흔히 시무현공자 혹은 세류공자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그 세류가 거의 7여년만에 집에 돌아온 것이다. 유성으로부터 무슨 언질이라도 받았는지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시가장의 정문이 그날따라 활기로 넘쳐 보였다.
시가장은 유성이 세워놓고 떠난 이후 크게 자라 있었다. 유성은 처음 자신의 기점으로 시가장을 세워 세진에게 맡겨버리더니, 무림지존으로서 운조를 휘어잡자 아예 그 총본부까지 시가장에 위임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시가장은 짧은 시간에 융중의 대부로 자리잡게 되었고 유성의 비호를 받으므로 무림과 현세를 넘나드는 하나의 관문이 되었다. 무림에 속하고 싶거든 시가장을 먼저 찾으라는 말이 하나의 법칙처럼 세워질 정도였다.
그 시가장의 대공자, 제 1 공자가 세류였다. 집을 떠나 천하를 떠돌며 시명(詩名)을 날리던 자식이 돌아왔다는 말에 집무실에서 서류더미를 쌓아놓고 있던 세진은 버선발로 달려나왔다. 세류는 빙긋 웃으며 공손히 예를 올렸다.
"그간 안녕하셨사옵니까. 아버님."
"세류야! 어서 오너라."
세진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피었다.
"네 이름은 귀에 먼지가 앉도록 들었다. 어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하하하. 그래. 자 어서 들어오너라. 오랜만에 한 잔 하자꾸나."
"예. 아버님."
세류는 살짝 웃으며 세진을 따라 들어갔다. 섬돌을 막 밟고 올라설 때, 세류가 살짝 말했다.
"전하께서 주신 비둘기는 잘 있사옵니까?"
세진은 멈칫했다.
"어허, 이 녀석. 술 맛이 싹 가시게 하는구나. 오자마자 그 이야기냐? 아니면, 그 일로 잠시 들른 게냐?"
"실은 그러하옵니다."
세진의 얼굴에 순간 심각함이 스쳐갔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 - 그러나 그는 곧 시원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쯧쯧……. 어째 연락 한 번 않던 녀석이 얼굴 내밀 때부터 이상했지만……. 그 일로 들렀다니 내가 할 말이 없구나."
"송구하옵니다. 아버님."
"됐다. 그놈들도 이젠 한몫들 해서 새끼도 제법 쳤다. 보러 가겠느냐?"
"예. 아버님."
세류는 시세진과 함께 뒤뜰로 향했다. 새소리가 요란했다.
발목에 고리가 달린 푸른빛, 옥색, 흰빛, 회색 등 여러 빛깔의 비둘기가 산새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세류가 들어서자 까치 소리가 맑고 우렁차게 울리며 속사포처럼 쏟아지고 있던 참새 소리를 눌렀다. 세진은 씩 웃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후 - 뒤뜰을 벗어나는 두 사람의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
"……그렇습니까. 제갈공명이라고요."
"그렇다.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정말 차기 대군사, 지낭감인데……."
"놀랐습니다. 그렇게까지 왕제전하를 꿰뚫고 있다니요. 지낭으로 세운다면 다시없는 좋은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허나……. 그는 아무래도 세상에 나갈 사람 같더구나."
그 말에 세류는 움찔 놀랐다. 수림에 묻힌 선비를 세상에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세진은 그 사람을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는 말이 된다.
단순히 차기 지낭감으로 생각했다면 무림맹에 일찌감치 일을 넘겼을 것이다. 운조의 일을 총 집산하는 것만으로도 일이 넘쳐 사람을 수십 명 고용해야 할 지경인데 사람 하나를 계속 본다는 것은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진은 계속해 제갈량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 세류는 호기심이 일었다.
"수경 선생 사마휘님의 제자라고 하셨지요?"
"그래, 그래서 나도 두어 차례 본 일이 있지만, 그 쪽에서 먼저 오는 일은 아예 없었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주군께서 세상에 나가시기 전부터 사마휘님과 인연이 있었잖느냐. 그 때부터 알고 있었지. 늘 조용히 웃으며 성실하게 듣는 사람이었어.
주군의 출도 이후로는 사숙에 나오는 횟수가 더 늘어났지만, 주군의 거취에 대해 짧게 물은 것 외에는 먼저 내게 말을 건 일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사람을 보내거나 시간을 빼내고 빼내 직접 화젯거리를 들고 찾아갔지. 그래도 그와 대화로 반 시진을 넘겨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들은 것은 굉장히 많은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수경 선생님께서 와룡이라 부르실 정도이니까."
"그의 생활은 어떠하옵니까?"
"스스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지. 수경 선생님의 사숙에 가지 않으면 늘 집에 있다. 책을 읽거나 거문고를 타고, 혹은 가까운 곳의 정자 포슬정에 올라 휘파람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내려오기도 한단다.
가끔 친구들이 놀러오면 함께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이치를 논하고 영웅을 말하지. 그럴 때마다 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꼭 관중과 악의에 자신을 비한단다."
"관중과 악의에 말씀이옵니까……?"
세류는 놀랍다는 듯 웃었다.
"후훗…….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알겠습니다. 아버님. 제가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거라. 수령과 염화를 붙여 주마."
"수령과 염화를요……?"
"전하의 전언이 계셨다."
"알겠사옵니다. 하오면 그들과 함께 가도록 하지요."
"지금 그를 찾아가 볼 셈이냐?"
"예. 그의 집은 가까우니, 지금 가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그 두 사람은 아침에 그의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순간 세진은 흠칫 놀랐다.
"집에 와서 자지 않고……?"
"오늘밤에는 비가 많이 올 것입니다. 그의 아우와 누이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허나……."
"저는 시무현이라는 허명을 얻고 있으니, 저라면 말을 해 줄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수경 선생님께서 와룡이라 부르실 정도의 숨은 재능……. 큰 포부와 기개……. 정말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꼭 찾아보겠습니다."
세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아버님? 서원직은 어떠하온지요?"
"……그는 아직도 전하를 주군으로 생각하고 있다. 조만간 출사하여 밝은 주인을 찾으려 하고 있지."
"알겠사옵니다. 하오면 다시 가 보아야 하겠사옵니다."
"네 동생들은 안 보고 갈 참이냐? 일 때문에 밖에 나갔으니, 조금 있으면 올 터인데……."
"나중에 다시 틈을 내어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보지요."
"알았다. 잘 가거라."
"예. 아버님."
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세류의 뒷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새로운 싯귀를 떠올린 듯, 세류는 무언가를 흥얼거리며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던 세진은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허허, 녀석! 어릴 때부터 그처럼 시를 좋아하더니……, 제 어미를 꼭 닮았단 말야……."
희미한 노랫소리만 바람처럼 남아 있었다.
물가에 나는 한 마리 새는
온 몸이 흰데 날개 끝만 검어서
공중을 세 번 날아도
물줄기 한 개도 그려지지 않네.
세상에 붓을 잡은 선비들이여
한 방울 묻힌 먹을 헛되이 마오
공중에 속절없이 뿌려진대야
저 나는 새와 같이 밖에 더 되겠소.
세류는 2년 전부터 시무현(詩武賢)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무예에 두루 능통할뿐더러 작금에 그와 비할 만한 시인(詩人)이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족자를 파는 점포에는 세류의 시작(詩作)이 최고의 인기 상품으로 팔렸다.
그럼에도 병적으로 권력을 싫어하여 황제나 조조가 친히 여는 시회에 참가하라는 명을 수 차례 받았지만 그때마다 핑계를 대어 빠져나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면서도 왕제인 유성과는 절친한 세류였다(당연하지, 은인이고 친우인데).
시가장을 나선 세류는 와룡강을 넘자마자 제갈량의 초려를 찾을 수 있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그날따라 혼자 - 세류는 얼굴을 붉히며 주인을 부르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안채 쪽에서 낭랑히 시를 읊는 목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세류의 입가에 소녀처럼 고운 미소가 어렸다. 세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제갈량! 그 사람이로군!"
봉황은 천리를 날되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아니하고
선비는 땅 한 모퉁이에 숨어살지언정
주인 아닌 이를 섬기지 않는다.
스스로 밭 갈기를 즐겨함이여
내 초려를 내가 사랑함이로다.
거문고와 책으로 무료함을 달램이여
다만 천시가 오기를 기다림일 뿐이네.
세류는 소리내어 웃었다. 시흥이 일었다.
"하하하. 와룡답구나. 그럼 내가 화답을 해야겠지."
하늘의 때는 알 수 없으나
전도자의 입술에 지혜로움이 머물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땅은 침묵의 외침 속에 있다.
서서 하늘을 우러르며 꿈을 꾸니
성스러운 이름을 소망하네.
사람이 그 길을 따라감이여
하늘이 그 때를 허락하시리로다.
크게 놀라는 기척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달려나왔다. 세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갈량이었다.
학창의에 윤건을 쓴 신선 같은 풍채. 관옥 같은 얼굴은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첫인상은 합격 - 세류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가장의 시세류라고 합니다."
"귀한 손이 오신 줄 몰랐습니다. 소생 제갈량이라 합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간단히 수인사를 끝내 버리고 방안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곧장 대화를 시작했다.
"밖에서 주인을 부르려다가 그만 높으신 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객기가 일어 화답을 드렸는데 실례가 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무현의 화답을 받았으니 오히려 소생이 기쁜 일이지요.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과분하신 말씀을 하시는군요. 소생이 집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와룡선생의 이름을 듣지 않은 적이 없어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오히려 소생이 더 기쁘군요."
"하하하. 과찬은 공자께서 하십니다. 수경 선생님께서 주신 과분한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못 되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송구스럽다니요.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소생이 보기에 선생께서는 충분히 그 이름에 어울리는 분이십니다."
"하하하……. 이거 너무 추켜세워 주시는 것 아니십니까? 민망합니다."
세류는 빙긋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
"마음을 얻고자 함이겠지요. 높으신 뜻을 듣고 싶으니 말입니다."
"저런 - 천상의 두 공자 중 한 분이시라는 공자께서 소생의 마음을 얻고 싶으시다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히려 제가 공자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제갈량도 장난스레 받아 넘겼다. 세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이야기하지요?"
"그러시지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일단 화두를 튼 분위기는 좋았다. 이제부터는 언어의 합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세류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물었다.
"세상에 뜻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갈량은 순간 얼굴을 굳혔지만, 곧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류가 다시 물었다.
"누구를 보고 계십니까?"
그는 살짝 물러나며 다시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글쎄올습니다……. 이미 다 알고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글쎄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시치미를 떼시는군요. 어떻게 하면 그 입술로 진실을 말해주시겠습니까?"
"진실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어도 꿰뚫어 알기는 어렵지요."
순간 세류의 얼굴에 확 홍조가 돌며 눈동자에 순간적인 투기(鬪氣)가 스쳐갔다. 말하던 제갈량이 오히려 놀라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세류는 재빨리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입에서 듣는 유성의 이름이 세류의 가슴을 쾅 하고 두들겼던 것이다.
"아, 하하하……. 아, 아닙니다. 유성 공이라 하셨습니까?"
세류가 이렇게 묻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제갈량, 공명은 전에 지켜보았던 어떤 사람들보다 지금은 유성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류가 아는 바 그대로라면 초야의 다른 선비들도 이와 같은 이가 상당했다. 그것은 그만큼 유성의 존재가 세상에서 커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사람 또한 그것은 다르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듣기에 공자는 왕제 전하와 절친하시다 들었습니다만……. 자주 만나 보시는지요?"
공명은 대뜸 유성 공이라는 부름에서 왕제 전하라는 부름으로 수정하며 물었다. 세류의 얼굴이 잠깐 동안 다시 홍조를 띄었지만, 이번에는 아주 순간이어서 공명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세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대답했다.
"예, 지금의 지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여러 차례 뵈어 왔습니다. 가친의 은공이시고, 주인이시지요."
공명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소문대로 아름다우시던가요?"
"어느 여성보다도 아름다우십니다. 춘추시대 모장과 서시보다 낫다는 말이 맞지요. 그야말로 눈이 부신 분입니다."
세류는 장난기가 도는 눈으로 말했다. 공명은 빙긋 웃었다. 그가 아름답더냐고 물은 것이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닌 줄 세류 또한 알고 있음을, 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공명은 다시 물었다. 사실은 - 그것은 그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그분의 뜻 또한 그분의 자태만큼 아름다우셨습니까?"
"……?!!"
"그분께서 무엇 때문에 검을 드셨는지, 무엇 때문에 시무현인 당신의 입을 빌어 노래하고 계시는지, 저 하늘사랑의 노래(天愛頌)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세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세류 또한 유성에게 전수받은 바가 있어 약하다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시무현이라는 석 자 이름 중 무(武)자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유성으로부터 벗의 징표로 백봉환과 함께 은의 소검(사실은 미스릴)까지 받은 세류였다. 세류가 차분하게 반문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르게 품속으로 향하려던 손을 억제해야 했다.
"그것이 궁금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물으시는지요?"
세류는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명은 아련한 눈길로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소생은 본래 세 가지 아귀가 맞아야 세상에 나가리라고 결심해 왔습니다. 첫째는 때가 와야 함이요, 둘째는 날 모시러 와야 하고, 셋째는 나와 뜻이 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
"왕제 전하에 대해 알게 되기 전에는 다른 여러 사람들을 지켜보며 저울질을 해 왔었지요. 그러나 전하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그분에 대해 그 전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가졌던 관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관심이 쏠리는 데다 그분의 행보(行步)와 시가(詩歌)들이 하나하나 이해가 되고 눈에 밝히 보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예에 어긋나겠지만, 마치 그분과 제가 하나인 듯한 느낌이 들 정도랍니다."
"!"
세류의 눈에 순간 살기가 스쳐갔다. 무서운 눈빛이었다. 공명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래서……, 그래서 더욱 그분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 진실한 마음을 말입니다."
마음이……. 움직인다. 감정과는 달리.
"말씀해 주십시오. 세류 공자."
세류는 머뭇거렸다. 가슴속에서 폭풍 같은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성의 마음, 공명이 알고 싶어하는 진실을 세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지상 천국, 대자연의 진리와 이치가 가르치는 진실에서 하늘과 땅의 성스럽고 순결한 사랑을 찾아 그 사랑을 인간의 마음 속에 품음으로서 율례와 법칙을 완성한 땅 위의 하늘나라. 전쟁과 가난과 환난이 없이 모두가 똑같은 사람으로 부대끼며 거리낌없이 웃음과 평화 가운데 살아가는 지상낙원. 하늘 왕국의 극히 일부라도 떼어다가 땅 위에 세운 나라!'
그것이 세류가 아는 유성의 꿈, 유성의 뜻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청년은 충분히 그것을 알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 한 가지 마음이 세류의 입을 조개처럼 다물게 하고 있었다. 공명은 질문을 던져 놓고 간절한 심정으로 세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세류는 눈과 입술을 닫은 채 한참을 생각했다. 공명은 한 번 더 말했다.
"세류공자. 제가 그것을 듣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말하기 어려우시다면, 글로라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
"지금은,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아니 됩니다."
전혀 예상외의 대답을 들은 공명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세류가 이야기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자신에게 놀라고, 세류의 대답에 놀라며 반문했다.
"어째서……, 입니까?"
"그분을 만나시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흔적 속에서 그분을 찾으실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고 곧 뵙게 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저를 아십니까?"
세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 자신만큼이나 잘 알고 계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서운합니다. 제게 말해주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으신 듯 하니……."
공명은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세류는 마주 웃어 주었지만 가슴속 한 곳에서는 전고(戰鼓)가 울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밤이 되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 시국과 세상 돌아가는 것, 천하의 미래와 유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물론 세류는 끝까지 유성의 진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단 그것이 아니더라도 유성에 대해서라면 할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밤이 깊자, 세류의 예견대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꽤 굵은 빗방울이었다. 땅바닥이 푹푹 패일 정도로 거센 비였다. 바람이 들어오는 대청까지 흠뻑 젖어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의 옷도 젖어들었다.
"아, 이런……. 비가 거세게 오는군요. 방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아우들이 많이 늦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비가 와서야 오려고 해도 못 오겠군요. 시장하실 텐데……. 저녁이라도 간단히 드시지요?"
공명은 미안하다는 듯 말했지만, 세류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감사히 받지요. 마음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귀한 손님이신데요. 일단 옷을 갈아입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많이 젖었습니다."
그러면서 공명은 장에서 옷 한 벌을 꺼내 주고 부엌으로 나갔다. 세류는 짧게 한숨을 쉬며 빠르게 젖은 옷을 벗고 공명이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휴……!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군.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지다니……. 역시 대단한 인물이야. 전하께 말씀드릴 일이 생겼으니 다행이군.'
세류는 조금 전 공명의 말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무너지는 나라를 붙들고 죽기까지 힘쓰려 하였으나, 하늘이 다시 이 나라를 일으키려 하시니 그 손의 힘이 된다면……. 이라고?
후훗……. 결국 세상에 나서겠다는 게지. 와룡이라는 이름답게, 세상에 나서면 천하를 다 놀라게 할 거야. 능히 천하를 경영하고도 남을 그릇이야……. ……만약, 전하보다 이 사람을 먼저 만났다면……? 앗! 내가 무슨 생각을? 말도 안 돼!'
세류는 흠칫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약간 젖은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세류공자?"
"아, 예?"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계셨습니까? 몇 번을 불렀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조금 전 하셨던 말씀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지요?"
공명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세류는 몰랐지만, 조금 전부터 방에 들어와 있던 공명은 세류가 여러 번 표정이 변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세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무너지는 나라를 붙들고 죽기까지 힘쓰려 하였으나, 하늘이 다시 이 나라를 일으키려 하시니 그 손의 힘이 된다면……. 좋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하하. 그랬지요."
"선생께서 세상에 나서신다면 천하를 다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능히 천하를 경영하고도 남을 것 같군요."
"허허, 너무 지나친 칭찬을 주십니다. 공자. 자 - 찬은 없지만 좀 드시지요."
세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저를 들었다. 조금 전 생각한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전하보다……. 전하보다 이 사람을 먼저 만났다면……. 지금 내 모습은 이게 아닐지도 모르지……!'
식사를 하고 나자 둘은 또 이야기를 시작했다. 희한하게도 상대에게는 가슴속의 생각을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끌리면서, 서로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세류는 조용히 공명의 눈을 쳐다보았다. 맑았다. 무언가 슬픔을 한 가지 안고 있는 것 같았지만 더없이 맑은 눈이었다.
그 시선에 공명은 조금 놀랐다. 세류의 시선은 자신을 꿰뚫어보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눈동자는 심연의 우주를 담은 듯 빛나며 혼을 빨아들일 듯 빛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세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공께서는, 정말 맑은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맑은……?"
"예. 분명 무언가 어지러운 고통을 지나오셨을 텐데……. 그 고통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대신……."
세류는 잠시 말을 얼버무리며 적절한 단어를 찾다가 말했다.
"넉넉함이랄까요?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차 있습니다. 난세를 지나오신 분이라기엔 너무 맑고 넓어요."
"하하. 이런. 아까부터 계속 칭찬만 주십니다. 게다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시면 민망합니다."
"아버님께서 선생을 지낭(智囊)으로 끌어들이셨으면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시공께서요……?"
"아시다시피 제 가친께서는 시가장의 장주, 전하의 그림자를 지휘하고 계십니다. 선생이 수림에 묻혀 지내신다기에 선생을 무림의 지낭으로 하고 싶어하셨지만, 선생께서는 세상에 뜻이 있으신 듯하니 전하께 말씀을 드려라고 하셨지요."
공명은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저는 이곳 융중에서 농사짓는 촌부에 지나지 않는데 전하께서 저를 아신다 하여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제게 감추지 마십시오. 때를 기다리는 분이여. 당신의 때는 당신을 위하여 준비된 것……. 반드시 움직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순간 공명은 잠깐이지만 세류에게 마음을 열어 보였다.
"기다리고 있지요."
공명은 세류의 손을 살짝 잡았다. 세류는 속으로 움찔 놀랐지만 겉으로는 기색을 완벽히 감추고 말했다.
"기다리시면 올 것입니다."
세류는 자고 있지 않았다. 누운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별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인 양, 맑게 빛나며 공중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시(詩)를……."
세류는 짧게 공명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러더니 곧 입을 열었다.
너를 울린 사람이 누구이며
너를 멍들게 한 이가 누구인가
나의 사랑하는 아이야
온 세상이 다 희게 빛난다고 해도
네가 슬퍼하면 아름다울 수 없어
나의 손을 잡고 가자
너의 그 눈물이 필요 없는 곳으로
기쁨을 찾아 떠나가는
짧지 않은 여행의 길을 떠나자
비록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나의 손이 너의 손을 잡고 있으니
외로운 길은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내가 네 눈물을 닦게 해 다오
……
……
공명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천금을 주고도 즉석에서 들어보기 힘들다는 세류의 자작시(自作詩)…….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아이란……. 백성을 뜻하는 것입니까?"
세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선생께서는……. 사랑을 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사랑……, 이요?!"
"이건 제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천하를 떠돌아다니실 때 지으셨던 것이지요."
"……."
"저는……. 가끔씩 욕심을 부려 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였으면 하는……."
"……?!!"
"한 사람을 죽도록 사랑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공명님?"
공명은 놀라고 있었다. 평정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를 놀라게 할 만큼 세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당황하고, 또 그럴 리 없으리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저는……, 아직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세류는 어느 새 눈을 감고 있었다. 공명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세류공자. 그만 진정하시고 주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누우시기 전에 반주가 과하셨던 모양인데……."
"……."
세류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뺨에는 어느 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 뒤, 막 잠들려던 공명은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세류의 눈물보다도, 그 눈물과 함께 흐르기 시작한 세류의 목소리에…….
그것은 눈물, 그것은 생명……. 한 청년의 생명이 그대로 노래가 되고 눈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산도 넘고 물도 건너고
수많은 성벽과 골짜기도 지나왔는데
님의 곁에 놓인 울타리 앞에서
멈춰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임을 이 가슴에 품지 못하고
울타리 너머로만 바라보는 것은
이 가슴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이며 괴로움입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우신 나의 님은
무슨 사정이 있어서
스스로 저 울타리를 두고
거두지 않으시는 걸까요?
여리고 약한 새의 가슴처럼
나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듯한데
사모하는 님은 이 영혼의 떨림을
아시나요 아니면 정녕 모르시나요.
태산과 험곡을 넘어온 날개건만
님 곁의 울타리를 넘을 수 없어
목소리로 메아리를 만들며
슬프게 바라보기만 합니다.
님이여 제발 저 울타리를 걷어주세요.
내 날개는 점차 힘을 잃고 있습니다.
누가 나를 주워가 버리기 전에
제발 저 울타리를 걷어주세요.
애절한 목소리였다. 대체 누가 저토록 세류의 마음을 몰라주는지 눈앞에 있다면 한대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호소력이 강한, 신비한 마력이 담긴 목소리였다. 공명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금 전의 놀라움은 이미 가시고, 그는 그의 노래에 빠져들어 세류가 안타깝게 느껴지고 있었다.
'누구일까? 세류공자가 저토록 사랑하는 사람은……. 전설 속 북해빙궁(北海氷宮)의 빙설공주(氷雪公主)라도 된단 말인가? 세류공자만한 신랑감도 없을 텐데 왜 그토록 그를 거절한다는 말인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군…….'
세류의 노래는 계속되었다. 공명이 잠든 것으로 아는지 여전히 목소리는 나직하고 그윽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음색은 점점 더 슬퍼졌고 가슴을 베어낼 듯 아프게 했다. 내용도 더욱 처절한 사랑의 호소로 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분이여.
부디 그대의 빛을 내게 주세요.
나는 광야에 솟은 대나무
겨울은 나에게도 찾아오지만
푸른빛은 이울어지지 않아요.
아아, 온 천지가 그대로 인해 하얀데
나 홀로 시들지 않은 듯하니
바람이여 나를 쓰러뜨려요.
내가 쓰러지면 님의 흰 마음
내게 살포시 덮일까 하니.
사랑하는 분이여.
당신이 없으면 전 살지 못합니다.
이 푸른 빛 이울어지도록
그대를 사모하옵니다.
그대의 빛으로 물들지 못하는
이내 몸 죽도록 고통스럽습니다.
부러질 가지가 휘어질지언정
당신을 사모하옵니다.
살아서 그대 곁에 있지 못하면
죽어서 그대 곁에 있으리라 했지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
누군가 나의 이 마음만큼
나를 사랑하여서
나를 임에게서 가져갈까 하는 것.
그 전에 당신 손에 죽으오리다
살아서는 그대를 떠나지 않으리니
그대 손으로 나를 거둬주어요.
노래가 그치자, 세류의 눈에서는 끝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공명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세류에게 다가갔다.
"공자."
세류는 엎드려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공명은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공자가 사모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
"공자의 마음을 그토록 애타게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제게 말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세류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감히 어떻게……."
공명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눈물로 젖은 세류의 얼굴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저는…….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지만……. 제가 사랑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을 떠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지만……. 떠나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순간 공명의 뇌리에 스쳐가는 사람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설마……. 공자, 그 사람이……. 혹시……?"
갑자기 세류가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공명은 자신도 모르게 세류를 끌어당겨 안고 다독거렸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세류……."
애증이 불꽃처럼 일어난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감정에 몸을 맡겨버리고 말았다.
세류는 울음을 그쳤다. 부드러운 입술이 마주 닿아 있었다. 더없이 편안한 가슴이 자신의 몸을 품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뜻해…….'
그 순간 세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뜨겁고도 달콤한 불꽃, 그 불꽃이 입술에 닿았다고.
섬섬옥수(纖纖玉手)라는 말이 잘 어울릴 아름다운 손이 사내의 목을 살짝 끌어안았다. 비에 흠뻑 젖은 새처럼 세류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파고드는 뜨거움이 너무나 감미로워, 두 사람 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을까. 한없이 서로를 갈망하던 입술이 살며시 떨어졌다. 눈빛이 촉촉하게 풀어져 있었다.
세류는 따뜻한 눈으로, 그러나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공명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애증을 불러일으킬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 그러나 공명은 말없이 세류의 머리를 가슴에 안았다.
"자, 이젠 자도록 하세요……. 일어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세류는 그 말대로 눈을 감았다. 포근한 느낌, 빠른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잠이 밀려왔다.
공명은 세류를 살짝 자리에 뉘어 주고는 가만히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입술이 뜨거웠다.
'내가 무슨 짓을……. 사내에게…….'
그러나 세류는 사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갖고 싶을 정도였다. 잠든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미칠 듯 강렬한 유혹이었다. 공명은 자신을 억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세류……. 당신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다 드는군……. 그대가 여자라면 아내로 삼을 것을……. 여자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답잖아……? 이것이 환상이라면……."
그는 무의식적으로 앙증맞을 정도로 귀엽게 튀어나와 있는 세류의 목뼈를 살짝 쓰다듬었다. 순간, 그는 거의 기절할 만큼 놀랐다.
조금 전의 다분히 감정적이었던 입맞춤은 별것도 아니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아니, 막연히 바라기는 했으나 진실이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세, 세류……, 시무현 세류가……."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이 환상은……. 분명……. 아아,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잘못 안 것이겠지……. 세류가……. 여자일 리가……."
공명은 애써 자신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세류의 옷깃을 헤쳐 보았다. 부드러운 목덜미 아래로 딱딱한 천 같은 것이 느껴졌다. 긴장감이 온다. 언뜻 보면 상처를 감싼 붕대 같았지만, 옷깃을 다 열고 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공명은 휙 손을 떼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세류……!"
그러나 확신할 수 있었다. 공명은 조금 전 떠올랐던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갑자기 확신이 섰다.
"설마, 아니 역시……. 그처럼 애절하게 부르던 사랑하는 사람이……. 왕제전하였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유성의 이름이 나오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던 대화 중의 세류가 떠올랐다. 그에 대해서 말해 주기를 꺼리던 얼굴도 스쳐갔다. 이제 생각하니 그것은 분명, 마치 자신의 귀중한 것을 내놓기 싫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실수였다. 왜 이제야 깨달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유성은 세류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세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된다. 세간의 말대로 친구, 단지 그뿐일 관계인 것이다.
공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류가 자신에게 유성의 진의를 끝내 말해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들을 되씹어 보았다.
- 회 상 -
"왕제 전하에 대해 알게 되기 전에는 다른 여러 사람들을 지켜보며 저울질을 해 왔었지요. 그러나 왕제전하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그분에 대해 그 전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가졌던 관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관심이 쏠리는 데다 그분의 행보(行步)와 시가(詩歌)들이 하나하나 이해가 되고 눈에 밝히 보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예에 어긋나겠지만, 마치 그분과 제가 하나인 듯한 느낌이 들 정도랍니다."
- 회상 끝 -
"그런 말을 했으니……. 그분을 사모하는 이 여인으로서는 질투가 일어났던 것이겠지……. 여자는 여자로군……. 후훗……."
공명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세류를 쳐다보았다. 곤히 잠든 그녀의 입술 사이로 무언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명은 미친 듯 솟구치는 마음 속의 한 감정을 누르면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
그것은 실로 놀라운 내용 - 아니, 어떤 잠언(箴言)과도 같았다. 낮고 맑은 목소리가 신비로운 지혜를 말하고 있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잇다.
연장을 쓸 때가 있으면 써서 안 될 때가 있고 안을 때가 있으면 그만 둘 때가 있다.
모아 들일 때가 있으면 없앨 때가 있고 건사할 때가 있으면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으면 기울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울 때가 있으면 평화로울 때가 있다.
그러니 사람이 애써 수고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하늘이 사람에게 시키신 일을 생각해 보았더니
하늘은 모든 것이 제 때에 알맞게 맞아 들어가도록 만드셨더라.
그러나 하늘이 사람에게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을 주셨지만
천제께서 어찌 일을 시작하여 어찌 일을 끝내실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전에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이젠 알 것 같다. 이 목소리는 분명 여인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그녀가 어찌 저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현 거자(鋸子) 진혼(鎭魂)이 듣는다면 원로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할지도 모르겠군 - 가만, 그녀가 묵가의 사상을 공부했다면 진혼이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럼 저것은 묵가의 사상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그녀는 저런 것을 안 것일까. 그녀의 생각은 분명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일 텐데……. 아마도 왕제 전하이시겠지. 그런데, 대체 저것은……?"
세류의 음성은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탄식이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에
아직 젊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기 전, 비가 온 다음에
다시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그를 기억하여라
그 날이 오면 두 팔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수문장같이 되고
두 다리는 허리가 굽은 군인같이 되고
이는 맷돌 가는 여인처럼 빠지고
눈은 일손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는 여인들같이 흐려지리라
거리 쪽으로 난 문이 닫히든 귀는 먹어
방아소리 멀어져 가고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모든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리라
그래서 언덕으로 오르는 일이 두려워지고
길에서는 놀랄 것이니 나서는 일조차 겁이 나리라
머리는 파뿌리가 되고 양기가 떨어져 보약도 소용없이 되리라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공명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무서운 저주의 말이로다……. 두려움이 엄습하는구나. 창조자를……. 청년의 때에 기억하라고? 이것은 무슨 뜻일까?'
"세류……. 역시 그 비밀을 알고 있군. 천애송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노래 속에 감추인 비밀, 왕제 전하의 비밀을. 그분이 당신에게 이야기하셨는가……?"
그런 생각을 하던 공명은, 문득 자신이 왕제 유성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처음 느껴보는 마음, 서운함과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어떤 감정이었다.
"설마……. 내가, 질투를?"
공명은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일어나다가 문득 세류의 얼굴을 보았다.
"세류……. 나는 아무래도 그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된 것 같군. 그대가 여자인 것이 기쁘고,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왕제전하인 것이 안타까워…….
그대는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해서 왕제전하로부터 그대를 데려가 버리는 것이 두렵다고 했지, 아무래도 그 주인공은 내가 될 것 같군……. 당신을 갖고 싶어, 세류……."
공명은 코까지 쌕쌕 골며 깊이 잠들어 버린 세류의 자태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안아버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래, 이 아름다움은……. 천하이미(天下二美)의 일좌(一座)를 차지할 만한 아름다움이야……."
공명은 세류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갖다댔다. 조금 전 미친 듯 탐했던 입술의 감촉이 다시금 촉촉히 살아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달콤하고 황홀했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숨이 막혀 왔다.
"……단 한 번의 입맞춤, 단 한 번의 앎으로 이렇게까지 마음을 빼앗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세류. 당신을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세류……."
곤히 잠든 세류의 귓가에, 그는 뜨거운 마음을 속삭였다. 잠시 후, 그는 불을 끄고 방 밖으로 나와 버렸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