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
초정 약수의 인근에 "운보의 집"이라는 관광지가 있다..
운보를 언급하기전에~~
남농, 이응노, 김기창, 변관식, 김은호등 일제 강점기 전후 탄생한문인과 화가등 예술가들은 활동을 통한 부역등으로 친일에 대한 평가와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한 개인적인 불이익과 제재에서 자유로울수 없는 대한민국이 태동하던 혼란스런 격동기를 살아가신 분들이다..
언급한 대부분의 분들은 조선말이나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신 분들이며 유무명에 관계없이 제가 알고있는 일부 예술가들~~
이들의 조금은 불합리한 평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언급하여 봅니다!
자력으로 나라를 지킬 여력도 없는 상황에서도 권력자들은 시대적인 우려는 추호도 없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조선말과 일제 강점기..
일부 기득권자들 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던 분위기에서 서민들이 제대로 된 민족의식의 고양이나 주체성에 대한 교육을 받을수 있는 여건이 거의 없었다..
광복후 후세대들은 시대적인 여건에 대한 고려없이 그들의 활동을 조사하며 재능을 통한 일제에 대한 부역이고 반민족적인 친일행위자로 규정하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망구 개인적인 생각..
조선 말기 서구 열강들의 병점과일본의 침략이 시작될때 집권층이었던 조선은 과연 나라라고 칭할수 있는 조직을 가지고 있었나?
일부 기득권층인 양반이 모든 것이 제것인양 소유하면서 민초들도 자기들의 소유물로 생각하면서 어떤 지도자도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백성들을 합리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안중에 없었다..
암울한 세월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겨우 생명만을 부지하던중 일제 강점기를 접하였고 서민의 입장에서는 부조리 투성이었던 조선말보다 오히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법치사회로 변화되고 운영이 되는 것을 느꼈을 듯~~
일본이라는 집권층과 조선이라는 피지배계층으로 분리되어 외세 통치라는 고통을 경험하기는 했으나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없어지면서 민초에게 기회는 오히려 조선말보다 더 균등하게 부여되었다고 생각할수도~~
흔히 매도당하는 "수구 꼴통 친일파"의 사고방식인가요?
역으로 가정하여 지금까지 조선 시대가 연장되었으면 일제 강점기의 문인과 화가들 중 대부분은 부의 편중과 신분 차별로 이름도 없이 사라졌을 분들이 수두룩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격동기에 태어나서 나라의 도움보다는 일본의 도움속에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고 또 인정을 받으면서 성장하신 분들~~
이분들은 재능만 있고 재능을 꽃비우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면 신분 차별을 벗어나 민초나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의 기회를 잡을수가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기득권 세력들의 밥그릇 싸움이 치열하였던 해방후 격동의 세월속에 아무런 지원도 없는 가운데 재능이 있어도 꽃피우지 못하고 지독한 생활고속에 불우한 삶을 마감한 분들보다는 예술인으로 오히려 많은 기회를 누리고 살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미화를 위한 합리화로 을사조약이후 36년간을 일제 강점기로 애써 축소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기 구실을 못한 강화도 조약(1876년)이후 부터라고 보아야하니 최소 2배이상의 시간이 일제 강점기로 지속되었으며 우리가 광복이후 보낸 세월과 비슷하다고 보아야한다..
그 시대를 산 분들중에 일부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친일 언급이 있었으며 언급한 분 중 김은중, 김기창등은 작품을 통하여 친일을 한 대표적인 분으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나니 또 이데올로기의 망령이 이들을 괴롭히면서 생사가 묘연하거나 옥고를 치르신 분들도 많고~~
일제 감점기에 태어나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란분들이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생활하고 또 재능을 인정 받은 것은 사실~~
그런데 이런분들이 민족주체성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면서 한국이 통일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기는 했을까요?
우리는 흔히 열사, 의사등 독립투사를 언급하면서 상반된 개념으로 친일 인사들을 분류합니다~~
해방후 "반민특위"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처단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잣대와 기준이라면 그 시대를 사신 분들은 무장 투쟁을 하지 않으면서 그 시대에 생활을 영위하였으면 모두 민족 반역자아닌지?
일제 강점기 관리들은 모두 친일파 운운하면서 해방이후 대한민국에서 독재정권의 관리들은 독재정권의 권력하에서 부귀 영화를 누렸어도 시대적인 여건으로 무마되고 미화되는 것은 또 무슨 논리인지?
운보 김기창을 언급하기 위한 모두가 너무 길었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운보의 작품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김기창(1914~2001)은 서울 태생으로 어린시절 장티푸스의 후유증으로 청각장애인이 되면서 언어장애를 가지게 됩니다!
"불굴의 화가 김기창"이라는 일대기로 소개되면서 세인들에게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꾸준하게 활동하였으며 일만원권의 세종대왕 초상 화폐도안을 한 작가이며 일본 강점기 작품을 통한 부역활동으로 친일화가로 분류된 작가라는 정도만 알뿐 사실 작품도 친견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초정약수 인근에 "운보의 집"이라는 관광지가 소개되어 방문~~
동절기 수도 동파로 휴관중인데 입장료가 무려 6천원..
오픈했어도 들어가지는 않았을듯~~
고향이 이곳도 아니고 말년에 이 장소에서 살다가 2001년 타계했다고 합니다..
집 입구 가보고는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저녁 시간이 널널하다보니..
사진은 운보의 집 입구 모습과 그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군마도입니다!
끊임없이 친일파로 매도되고 있으며 그는 모친이 내린 아호 운포(雲圃)에서 논란에 대한 대안인지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난다는 소회에 함께 "口"를 떼어내고 아호를 雲甫로 개명까지~~
아이러니한 것은 정부와 문화계는 그의 사후 친일논란에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도 했네요~~
약력을 보니 일단 곤궁함과는 무관한 삶을 영위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