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문학관을 다녀와서
박애경
코스모스가 만발한 가을을 맞이하여 현대문학교실에서 하동군 북천면으로 문학기행을 가기로 하였다.
10월 6일 수요일 오전 6시 50분에 삼문동 오리배 선착장에 이광남 선생님과 현대문학교실 회원 7명의 인원이 모여서, 이광남 선생님의 차를 타고 하동 북천역으로 가는 7시 38분 경전선을 타기 위해 삼랑진역으로 출발했다.
경부선은 가끔 타지만 경전선은 처음이라, 높푸른 가을하늘 만큼이나 새로운 기대감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한림정역을 지나고 진영역과 창원역 등을 지나 함안역을 지나자 시골정취가 한껏 다가왔다. 말로만 듣던 역사(驛舍)도 없고 역원(驛員)도 없는 작은 간이역들은 생소하고도 특이한 느낌이었다.
진주역을 거쳐 갈 때는 마침 진주유등축제 기간이라, 남강의 물결 사이로 유등들이 잔잔히 물결치고 있었다. 밤이 되어 오색불빛에 어리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를 생각하니 못보고 그냥 지나쳐야함이 아쉽게 느껴졌다.
북천역에 도착하니 코스모스들이 그린듯 지천으로 하늘거리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코스모스와 닮은 소년 소녀의 마음으로 돌아가 사진도 찍고 철로 위도 걸어보았다.
하동은 동쪽으로는 진주시와 사천시, 북쪽으로는 산청군, 함양군과 전남 남원시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해를 두고 남해군과 마주하며, 서쪽으로는 섬진강과 통꼭봉(905m), 불무장등(不無長嶝:1,446m) 등의 연봉의 경계로 전라남도 구례군 광양시와 각각 접하는 고장이다.
전라남도와의 경계를 이루는 섬진강은 화개면에서 남해 노량만의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흘러간다.
하동군의 동남쪽에 위치하는 북천면(면적 : 32.96㎢)은 하동군의 관문으로서 북쪽은 하동군 옥종면과 사천시 곤명면에 접하고, 남으로는 진교면, 동으로는 사천시의 곤명면, 서쪽은 횡천면과 양보면을 접하고 있는데, 서남 고(高) 동북 저(低)로 농경지보다 임야가 많은 지역이다.
북천면의 인물로는 조선중기의 무신으로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배종했으며, 재자관으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도 ‘신’이란 말을 쓰지 않을 정도로 청나라를 증오한 강직한 성품의 죽당 최탁(1598-1645), 그리고 작가인 나림 이병주가 있다.
오늘 우리의 여행일정에는 시간상 하동의 유명한 화개장터, 소설 ‘토지’의 평사리 최참판댁이나 섬진강가의 재첩국을 맛볼 수 있는 곳은 포함되지 않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북천역에서 미리 예약하여 둔 ‘금촌산마루식당’의 차 두 대를 이용하여 첫 목적지인 ‘이병주 문학관’에 도착하였다.
이병주 문학관은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231번지의 2,992㎡의 대지에 2층 건물로 세워진, 전시실과 강당 및 창작실을 갖춘 작가 나림 이병주의 창작 저작물과 유품을 상설 전시하는 문학기념관으로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80여권의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의 균형성 있고 총체적인 시각을 느낄 수 있는 문학현장으로 꾸며져 있었다.
전시실에는 연대기 순서를 따라가며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엿볼수 있도록, 관련 유품과 작품 등이 소개글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는데, 중앙에 대형 만년필의 모형과 함께 육필원고지가 천정을 장식하고 있어서 문학전시관 다움과 함께 그 분의 열정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강당에서 나림 이병주의 생애와 영상자료를 8분간 관람할 수 있었다.
나림 이병주(1921-1992) 작가는 경남 하동에서 출생하여 일본 메이지 대학 전문부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 재학 중 학병에 동원되어, 중국 소주에서 군 생활을 했다.
광복후에 귀국하여 진주 농과대학 교수(1948)와 해인대학 교수(1951)를 지냈고, 『국제신보』 주필(1955)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5년 7월 『세대』에 중편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보기 드문 지적 문체와 듬직한 역사 의식 및 폭넓은 제재로 해서 등단 수년만에 작가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 시기에 「매화나무의 인과」(1966), 「관부연락선」(1968~1970), 「마술사」(1968), 「쥘 부채」(1969) 등의 중·장편을 썼으며, 소설집 『마술사』(1968)를 펴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정력적인 창작으로 작가적 역량을 과시한다. 「지리산」(1972~1978), 「여인의 백야」(1972~1973), 「산하」(1974~1979), 「낙엽」(1974~1975), 「행복어사전」(1976~1982), 「조선공산당」(1976), 「황백의 문」(1979~1982) 등이 그 예다. 그의 왕성한 창작 활동은 1980년대에 와서도 그치지 않는데, 그 중 「미완의 극」(1981),
「유성(流星)의 부(賦)」(1981), 「그해 5월」(1982), 「니르바나의 꽃」(1985), 「소설 남로당」(1987) 등이 대표적이다. 교육계와 언론계에 종사하던 그가, 40대 중반에야 뒤늦게 소설가로 등단하여 문단활동 27년 동안에 장편과 작품집만도 60권이 넘게 발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도쿄 유학이나 학병 및 분단 등 민족적 현실에 대한 체험을 성공적으로 작품화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다양한 역사 체험과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에 두루 걸친 그의 해박함이 낳은, 「관부연락선」, 「지리산」 등의 소설은 분명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성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병주 문학관 밖에는 시조작가들의 작품들이 코스모스와 어우러져 전시되어 있었다.
가을풍경과 어울려 마음에 남는 시조가 하나 있어서 적어본다.
고향집
청송 박상준
유년에
철부지를
놓고 온 옛집에는
곰삭은
흔적들만
섬돌에 기대서서
무상한
파란 그리움
바람처럼 쓸고 가네
점심은 북천 코스모스 메밀꽃 축제를 하는 북천면 직전마을의 야외식당에서 메밀국수와 메밀묵 무침, 비빔밥과 메밀 동동주를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올해 4회째를 맞은 북천 코스모스․메밀꽃 축제는 북천면 직전리 직전마을 일원에서 매년 9월 중순에서 말경(개화시기) 까지 열리는, 메밀․ 코스모스 등 경관보전직불제 사업과 연계하여 농촌경관을 활용하고 농촌체험관광형 축제를 육성하기 위하여 시작된 행사로, 농촌 부가가치 제고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는 작황이 좋지 않아 코스모스와 메밀 씨를 여러번 다시 뿌렸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 마치 유화그림을 보는 듯 우리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 듯, 몽환적이기 까지 한 환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메밀은 뿌리는 노랑, 줄기는 빨강, 꽃은 하양, 열매는 까망, 잎은 초록의 다섯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김복만 회원님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되었다.
발걸음을 돌려 「아름다운 마을숲」 제2회 우수상을 수상한 직전리의 숲길을 거닐었다. 오래된 수령의 소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오솔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밀양 영남루의 석화와 닮은 소나무 뿌리가 밖으로 드러나 만들어진 꽃들이 우리들을 반겨 주었다.
돌담길을 손으로 만져보며 고즈넉하고 한가로운 시골풍경에 잠시 취해 정자에 기대 앉으니, 바람마저 살랑살랑 불어 현대문학회원 모두가 그대로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오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아쉬운 듯 일어서서 조롱박 터널로 향했다.
길이가 400m나 되는 긴 터널 안에는 조롱박, 아레스, 골든볼, 정말 베레모와 비슷하게 닮은 ‘베레모’, 메리트 등 60여종의 다양하고 희귀한 박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코스모스가 옷자락에 물들듯 줄지어 한들거리는 하천을 걸어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이병주 작가가 다닌 북천초등학교로 향했다. 이젠 만날 수도 없고 얘기를 나눌 수도 없지만, 그 분이 다닌 학교에 들어섰다는 것만으로도 나림 이병주의 때묻지 않은 그 시절의 숨결과 열정이 느껴지는 듯 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고 했던 그 말씀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북천역으로 향했다.
이번 가을은 이병주 작가와의 만남과 함께, 눈길 가는 곳 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코스모스와 메밀꽃으로 인해 많이 행복하였고, 뒷날 조금씩 조금씩 꺼내어 봐도 조금도 줄어들 것 같지 않은 깊은 감동이 값진 추억이 되어 남았다.
첫댓글 코스모스기 지천으로 핀 곳. 나도 갔어야 하는데 못갔군요.~ 이병주 문학관 진경님의 글로 구경잘했어요.~
아래 신비로웠다는 조롱박 사진 이로군요.
좀 다듬어서 올렸어야 했는데....바빠서 그냥 올렸답니다....다음엔 꼭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