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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下)
중흥 계기 마련한 적광전 불사
스님.신도.주민 합심 ‘大佛事’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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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 노임 체불… 불법 벌목 경찰서 신세 ‘최악 조건’
<사진설명> 월정사 탑 주위를 적광전.서별당.동별당이 감싸고 있다. 현재 구도는 만화스님 당시 모두 갖춰졌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운데서도 인법당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시고 공부를 중단하지 않았던 월정사 대중들은 정화가 끝난 뒤 본격적인 불사에 들어갔다. 그 때가 1964년 일이다. 월정사 본전인 적광전을 다시 건립하는데 대중들은 매달렸다. 하지만 불사금이 문제였다. 직업이 없어 놀고 있는 평창군내의 주민들과 산속의 재질이 좋은 목재가 있다 해도 기와나 다른 목재 등은 돈을 주고 사와야 했다. 주민들 노임 역시 돈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 몇 년을 고민하던 만화스님은 우연히 만난 한진그룹 조회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불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화재 전 적광전은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고 했다. 규모도 작았다. 만화스님은 새로 짓는 법당을 최대 규모로 짓겠다고 했다. 관음암 선덕 인보스님은 “이왕 짓는 것 최고로 짓겠다며 만화스님이 전국의 법당을 돌며 관찰하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적광전 배치를 감안해 설계했다”고 말했다. 설계도가 나오자 공사는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우선 목재를 고르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좋은 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오대산에서도 상원사 계곡 주변의 나무가 특히 우수했다. 건축을 지휘하는 도편수가 산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점찍고 이어 인부들이 몰려가서 베었다. 인보스님은 “나무는 가을에 베었다. 여름 나무는 물이 많아 무르기 때문에 쓸수가 없다. 반면 가을 나무는 단단하고 벌레가 슬지 않아 좋은 재목이 된다. 나무를 베어놓고 겨울 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끌고 내려오기 좋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스님 신도 인부 등이 모두 달라붙어 운반하지만 큰 나무는 며칠 씩 걸렸다고 한다.
당시 산감을 했던 장길환씨는 “모두 손으로 운반하고 제작했다. 산속에 직접 제재소를 차리고 가공하기도 하고 월정사 경내에 마련된 공사장에서 다듬기도 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기둥은 주로 상원사 보궁 근처 계곡이나, 병내리 현재 매표소 근처 등에서 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당시 인부는 마을 주민이 90%였다. 장씨는 “먹을 것도 할 일도 없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월정사 불사는 유일한 일거리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노임 체불이 예사였다.
3년 동안 한푼도 지급 못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인보스님도 “노임을 주지 못했지만 추석이나 설이 되면 그래도 제수용품이라도 줘야하니 만화스님이 강릉 등지를 다니며 화주를 했다. 그걸로 쌀 등을 팔아 나눠줬다”고 했다.
불사금 고민하던 만화스님 무작정 서울로
‘기이한 인연’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 도움
“이왕이면 최고로” 규모 늘려 1968년 완공
월정사 인근 사하촌 주민들은 주로 월정사 토지를 경작하며 도제를 지불한다. 그 전통은 지금도 내려온다. 장씨는 “노임도 줄 곡식도 없으면 도제에서 제했다”며 “그렇게 어렵게 불사를 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먹지 못하고 일하다 보니 오전 오후 울력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리면 도망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오랫동안 월정사를 지키고 있는 정희도씨는 “하루 종일 산을 타야 하는데 한번은 보리쌀과 감자로 싸준 점심 도시락에서 쉰내가 나 데모를 벌인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산에 나무를 베는 것은 불법이다 보니 툭하면 영림서에 잡혀갔다. 스님이나 공사를 책임진 사람이 잡혀가면 불사가 차질을 빚다 보니 책임지는 사람을 아예 정해놓았다. 정희도씨는 “고인이 된 김태은 씨가 주로 책임을 졌다. 원주 영림서에 며칠 구류를 살고 있으면 월정사와 친분이 있는 검사 판사 등을 통해 ‘내 산 나무로 내 절 짓는데 왜 잡아가느냐’며 따지면 즉시 보내주었다”고 했다.
적광전 불사는 이처럼 최악의 조건 속에서 스님.신도.마을 주민이 합심이 돼 만든 대작이었다. 이렇게 해서 공사 착수 4년만인 1968년 적광전이 완공됐다. 월정사측은 “적광전 외부 기둥 18개중 16개가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고 공식 기록하고 있다. 인보스님은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는데 불사를 하면서 하나씩 배워갔다”고 말했다. 적광전 공사가 끝나고 1970년대부터 불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0년대말 뜻하지 않게 월정사 수입이 늘어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69년 폭설로 인해 월정사 주변 소나무가 모두 주저앉는 대 참사가 벌어졌다. 이는 정부에서 기름을 조달한다는 이유로 송진 채취허가를 내줘 소나무가 힘이 없어 발생한 것이다. 어쨌든 월정사는 그 소나무들을 팔아 재정이 한결 나아졌다. 동별당 공사부터는 월정사 나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사오는 여유가 생겼다. 정희도씨는 “동별당 서까래를 강릉에서 사왔는데 불자인 시장의 덕이 컸다”고 말했다.
동별당에 이어 용검루 서별당 등의 공사가 연이어졌다. 인보스님은 “대중울력을 통해 밥을 먹고 나면 곧바로 공사에 들어가는 일상이 계속됐다”고 말했다. 장길환씨는 “대중공양이라는 것도 땅바닥에 주저 앉아 먹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인보스님은 “서별당 공사까지 끝나자 소문이 나서 신도들이 찾아오는등 형편이 많이 나아져 그 뒤부터는 불사 방식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월정사는 잠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불사도 자연 주춤해졌다. 하지만 큰 틀은 만화스님대에 대부분 갖춰졌다. 이후 불사는 주로 월정사를 더 세밀하게 다듬는데로 옮아갔다. 현해스님이 주지를 맡은 90년대 이후 불사는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현해스님은 “내 재임 중에 140억 불사를 했는데 그중 45%가 국가 예산이었다. 20%가 신도 화주, 나머지는 절 살림을 아껴 모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월정사 박물관 공사를 시작하고는 1년에 50~60회 가령 법문을 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으고 서울 출장가면 명동 칼국수 먹는 것이 최고 비싼 음식일 정도로 출장비를 아껴 모아 불사금을 조달했다”고 한다.
불사에 정부 지원금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불사 양식도 많이 달라진다. 90년대 이후 시작된 불사가 대부분 그 유형을 따랐다. 하지만 월정사 초기 불사는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하고 새겨야할 모습이다.
그래서 인보스님은 “당시는 스님이 모두 하나가 되어 불사에 헌신했고 마을사람들도 내일처럼 도왔다. 목수들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석으로 공부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자만 집을 짓는다. 자연히 하자도 많이 생긴다”고 안타까워했다.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과의 인연
<사진설명>월정사 불사에 큰 공헌을 한 한진그룹 조중훈회장 공덕비가 경내에 서있다. 탄허스님이 비문을 썼다.
월정사 불사는 지난해 작고한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 시작은 월정사 중건주 만화스님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만화스님은 적광전 불사를 계획해놓고도 자금이 없어 몇 년을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은 서울로 화주를 떠났다. 딱히 아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부자가 많이 사는 서울에 가면 무슨 길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무작정 떠났다.
조계사에서 밤을 지낸 만화스님은 다음날 새벽 일찍부터 탁발을 돌다가 한 부잣집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집이었다. 바로 조중훈 회장 집이었다. 회사 사정은 아직 어렵고 규모도 크지 않아 고민이 많았던 당시 조중훈 사장은 전날 밤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한 스님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할 것인데 시주를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예사로 여기며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있는데 밖에서 염불소리가 났다. 집주인이 나가자 그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 사는데 불사를 하기위해 탁발을 왔다”며 시주를 청했다. 꿈에서 본 그 스님 얼굴이었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월정사가 6.25때 불타 대웅전을 지어 부처님을 모셔야하는데 돈이 없다”.
“시주하면 좋은 일 생길 것”
꿈에 본 스님 다음날 나타나
불사 시작된 뒤 사업 번창
아무리 꿈에서 보았다고 하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조 사장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아침 밥을 차려 먹고는 곧바로 월정사로 갔다. 사실이었다. 집주인은 돈이 얼마가 드냐고 물었다. 조그만 기업체 사장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하지만 “되든 안되든 지원을 약속하겠다”고 했다. 불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꿈의 영험인지 불사가 시작되면서 조 회장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졌고 갈수록 시주금액도 늘어났다. 이제 고인이 된 조회장은 계속해서 월정사와 인연을 맺어 적광전 불사 뿐만 아니라 월정사 범종, 박물관 등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만화스님의 상좌로 은사스님의 뒤를 이어 조회장과 인연을 맺은 현해스님은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꼼꼼하며 검소했던 조회장이지만 월정사 불사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해스님은 “적광전 단청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견적을 3곳에서 받아오라는 거야. 1억5000만원 가량 드는 불사였는데 내가 비싼 걸로 하겠다 하자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 그래서 싼 것은 공해 물질일 뿐만 아니라 곧 빛이 바랠 것이라고 하자 돈을 직접 주더라고” 일주문 근처에 조회장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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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월정사에 가끔 갈 때도 이렇게 깊은 정성이 담겨져 있는 것도 모르고 .... 나무 관세음보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