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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8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신 은혜
본문 : 룻기 1장 21절
나는 가득 찬 채로 이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번역>
때는 아직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라 ‘사사 시대’라고 불리던 시절입니다. 죄와 부르짖음과 구원과 은혜의 쳇바퀴가 계속 되던 시절이었고, 정돈되지 못하고 혼돈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과도 거의 흡사한 때였으리라 생각됩니다. 무엇인가 불안하고 불투명한 시대,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기근 즉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살고 있던 한 사람을 우리에게 소개하십니다. 바로 ‘엘리멜렉’입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 태생이었고, 에브랏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참고로 에브랏은 베들레헴 그리고 에브라다와 같이, 같은 지명을 일컫는 다른 이름 중 하나입니다. 처음 성경에 등장할 때는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죽어서 장사 된 곳으로 등장합니다.
라헬이 죽으니, 사람들은 그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다가 묻었다. 야곱이 라헬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 묘비가 라헬의 무덤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35장 19~20절, 새번역>
그래서 야곱에게는 아픔의 땅이면서 그리움의 땅이기도 한 곳입니다. 또한 야곱이 라헬을 위해 세운 묘비가 있었기에 아마 이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야곱과 라헬에 대해서, 그리고 요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예상이 됩니다. 비록 작은 고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부심이 가득한 이 가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언급은 미가서 5장 2절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가서 5장 2절, 새번역>
이런 가문에서 태어난 엘리멜렉은 결혼을 해서 ‘나오미’라는 아내를 얻었으며, ‘말론’과 ‘기룐’이라고 하는 두 아들을 슬하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의 이름이 가진 뜻이 꽤나 흥미롭습니다. 먼저 엘리멜렉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이 둘의 이름까지는, 즉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시대까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세대임이 분명하고, 회복과 생명이 있었던 시기였기에 하나님과 함께 했던 세대에 지어진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은 자식의 이름은 완전히 다른 뜻이었습니다. 먼저 말론은 ‘질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룐은 ‘황폐’라는 뜻입니다. 어느 누가 자식의 이름을 이렇게 짓겠습니까? 아마도 아버지 엘리멜렉이 시대를 바라보며 지은 이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은 병들어 있었고, 황폐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기에 흉년까지 찾아 들었으니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힘든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엘리멜렉은 임시로 모압 지방에 가서 살려고 가족을 데리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 선택은 그리 좋지 못한 선택이었습니다. 첫 단추를 잘 못 끼우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떠나자마자 바로 이런 결과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다. <룻기 1장 3절, 새번역>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남편 엘리멜렉은 모압 지방에서 죽고 맙니다. 머나먼 타지에 와서 죽었으니 제대로 된 무덤도 없었을 것이며,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아내 나오미는 힘들고 괴로웠지만, 두 아들을 위해서라도 억척같이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슬픔도 잠시 커다란 현실이 눈앞에 놓여 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나오미는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두 아들은 그래도 장성해서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말론은 ‘룻’이라고 하는 아내를, 기룐은 ‘오르바’라고 하는 아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두 여인 모두 모압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피해야 했습니다. 결혼 시기가 되었을 때에라도 이스라엘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압에서 배우고 자란 두 아들은 분명 모압을 떠나기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찾았던 것처럼, 야곱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않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였던 것처럼 했어야 하는데 그냥 그 지역에 있는 모압 여인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또 안타까운 구절로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으니,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 잃고, 홀로 남았다. <룻기 1장 5절, 새번역>
남편에 이어, 두 아들마저도 죽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입니까? 이 얼마나 원통하고 답답한 노릇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원망스러웠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이 ‘기쁨’이라는 사실 자체로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미는 홀로 남겨졌습니다. 매일 매일이 사는 것이었을까요? 그저 눈물과 비통함으로 살아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자신의 상황과는 정 반대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유대 베들레헴에서 다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나오미는 주님께서 백성을 돌보셔서 고향에 풍년이 들게 하셨다는 말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룻기 1장 6절, 새번역>
저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도 하나님께 원망스러웠을 나오미라고 생각합니다. 왜 자신들이 베들레헴에 있을 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으며,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들었냐고, 무척이나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나오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룻기 1장 20절, 새번역>
마라! 즉 ‘괴로움’이라고 자신을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그녀의 슬프고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오미는 고향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데,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위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었지만, 며느리 복은 있었던 나오미였습니다. 룻과 오르바는 정말 최선을 다해 시어머니를 봉양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고마운 마음이 들어 함께 길을 떠났지만 나오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건 좋은 행동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함께 갈 필요가 없으니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두 며느리는 극구 반대하며 시어머니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딸 같은 며느리들이 자신을 따라 나서서 타국에서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같이 가자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재차 이야기하니 먼저 둘째 며느리인 오르바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첫째 며느리인 룻만큼은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라가고자 합니다. 이 때 나왔던 고백이 정말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룻이 알든 모르든 나오미에게는 신앙을 회복케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룻기 1장 16~17절, 새번역>
저는 이 구절이 처음부터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고백이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모압으로 떠나기 전에, 비록 흉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백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나오미 역시 동일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꼭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하나님 안에서 살았어야 했는데, 지난 선택이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는 ‘룻’이라고 하는 며느리를 주사 함께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절망 가운데 희망이며, 어두움 가운데 한 줄기 빛 같은 감사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미와 룻은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고, 아마 삶의 소망과 믿음마저 잃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오미를 보는 아낙네들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행동하는 아낙네들이 있었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그 두 사람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니,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하고 말하였다. <룻기 1장 19절, 새번역>
온 마을이 떠들썩할 정도였기에 아마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오미와 함께 있는 조금 다른 모습의 어린 여인에게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을 마을 사람들입니다. ‘저 아이는 누구지?’, ‘유대인이 아닌 거 같은데?’, ‘남편이랑 아이들은 어딜 가고 혼자 돌아왔을까?’, ‘그러니까 내가 떠날 때부터 이럴 줄 알았다니까?’ 등등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걱정도, 비웃음도 모두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나오미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을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으면 고향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며느리 룻의 고백을 통해 깨달은 마음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가득 찬 채로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룻기 1장 21절, 새번역>
저는 이 구절이 처음엔 원망이 담긴 구절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시고 불행하게 하셨다는 것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기에 원망 가득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잠잠히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점점 나오미가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모든 실수, 즉 모압으로 떠났던 것부터 시작해서 하지 말아야 했던 모든 일에 대하여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자신을 치셨다고 말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셨음을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나오미가 아닌 마라라고 불러도 된다고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떠날 때는 아쉬울 것 하나 없었지만, 자신을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 그런데 그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면 결코 다시 하나님께서 복 주신 땅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그 은혜를 경험하기 위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기 위하여,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비록 수많은 것들이 잘 못 되긴 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해야 함을, 하나님을 믿고 있는 나오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탕자도 처음에는 가득 찬 채로 떠났습니다. 주머니가 두둑했기에 가는 곳마다 자신을 반겨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그 주머니에 난 구멍으로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말았고, 탕자는 곧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고, 돌아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텅 비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탕자를 치셨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치심이, 그 불행함이 아버지께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길이라면 새로운 감사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행은 존재합니다. 고통도 존재합니다. 답답함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란 터널에 어두움은 늘 존재합니다. 하지만 불행이 있다고, 고통이 있다고, 답답함과 어두움이 있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의 선택으로 불행과 고통과 답답함과 어두움을 선택하기에 괴로움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떠나지 않았다면!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떠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하나님 안에 거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왜 우리는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요? 왜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고, 왜 떠나보내야 소중함을 깨닫고, 왜 고난이 찾아와야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그 때도 늦지 않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돌아왔다면 새로운 국면으로 새로운 감사를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그런 기회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그를 따라 나선 며느리 ‘룻’을 통해서 말입니다. 비록 나오미를 치셨고, 불행하게 하셨고,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은혜’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기에 하나님만 다시 온전히 붙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마트에 가면 아이들은 금방 제 손을 놓고 뛰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장난감을 고르기도 하고, 인형을 고르기도 하고, 과자를 들고 오기도 합니다. 그렇게 금방 아이들의 두 손이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저의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 빨리 계산하려고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다 당연히 넘어지게 되고, 무언가에 부딪히게 되고, 아빠를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빠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빠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많은 인파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아빠를 놓치지 않으려면, 손을 꼭 잡고 있어야 하는데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 내려놓아야 안전하게 같이 걸을 수 있습니다. 아빠의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 될 때,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물건들도 카트에 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빈손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의 방법, 나의 생각, 나의 의지, 나의 계산 모두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혼자 해 나가려고 할 때,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앞서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압으로 떠나도 된다고 생각하고, 모압 여인들과 결혼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내가 옳은 대로 행동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살고 있던 시대가 사사 시대인 것이 새삼 와 닿습니다. 왜 복잡하고, 불안하고, 불투명한 시대였을까요?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사사기 17장 6절, 새번역>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하나님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행동했던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도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왕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뜻대로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이 왕이십니까? 여러분이 왕이십니까?
다시 우리의 하나님, 그 왕의 통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가고, 다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우리의 삶에 주인 되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혜의 왕으로 불리던 솔로몬이 모든 지혜를 통틀어 그토록 외치던 인간의 도리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전도서 12장 13절, 새번역>
그러기에 나오미를 통해 보여주시는 ‘빈손의 은혜’를 우리는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양 손 가득 채워주시는 것이 ‘은혜’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이고 바램일 뿐입니다. 나의 빈손으로 주님을 붙들 때, 그제서야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진짜 제대로 된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손을 붙드는 것이 양 손 가득 채워지는 것임을!
나오미처럼 다시 돌아가셔야 합니다.
나오미처럼 자신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치심도, 불행하게 하심도, 텅 비게 하심도, 오히려 은혜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은혜이기에, 오히려 다시 감사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이 되겠노라 생각하고 돌아온 탕자는 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아들입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이름의 아들입니다. 탕자라는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이름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나오미는 나오미, 즉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회복, 돌아옴을 축하하기 위해 룻기를 펼쳐 가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나오미를 다시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오미가 빈손일 때 만난 며느리 룻을 통하여, 빈손으로 돌아왔기에 다시 붙든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인생을 다시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룻기 4장 17절, 새번역>
지금 빈손이십니까? 아무 것도 붙들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불안하십니까?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까? 내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은혜’가 시작되는 모멘텀, ‘절호의 찬스’가 생긴 것입니다. 빈손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빈손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빈손으로 하나님을 붙드시면 됩니다. 그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신 은혜를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마라’가 ‘나오미’로 변하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꼭 그 경험이 삶 가운데 있으시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결단 찬양 - 하나님의 그늘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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