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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호 남대문” 에서 “국보 남대문” 으로 국보의 이름이 바뀌다!
2021년 11월 19일 부터 대한민국의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은 이름이 “국보 숭례문
(남대문)” 으로 바뀌었는데..... "문화재 서열화 및 일제의 잔재" 라는 이유로 25년간
이어져온 ‘국보 1호’ 논쟁이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가 사라지면서 마침내 일단락 됐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33년 국보를 관리하기 위해 남대문을 보물 1호, 동대문을 보물 2호로 지정했으니
임진왜란때 왜군 가토 기요마사는 숭례문(남대문)을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흥인지문(동대문)으로 서울에 진입했는데 1600년 세키가하라전투후 고니시는 역적으로 참수
됐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이후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는지라 남대문을 1호로 지정한 것 같습니다?
숭례문(崇禮門) 은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의 수도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
이니 남대문(南大門) 이라고도 부르는데.....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중국인들이 만든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으니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 의 5덕(五德) 을 표현한 것이라 숭례문의 '례' 는 여기서 유래합니다.
숭례(崇禮)는 '예절(禮)을 높힌다' 는 뜻으로, 사서인 대학, 중용, 논어, 맹자 중에 하나인 유교
경전 “중용” 에서 따온 말인데... 중용 27장에 敦厚以崇禮(돈후이숭례), 예를 높이는 것
으로써 돈독하고 두터워진다라는 말에서 지은 이름으로 동대문인 흥인지문은 인(仁)
을 기른다는 뜻이며 “숭례문” 현판이 가로가 아니고 세로인 것은 화재를 막기 위함 입니다.
1962년에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1933년에 조선총독부가 정한 보물 1호 남대문, 보물 2호 동대문,
보물 3호 원각사지십층석탑 보물 4호 보신각종 문화재 지정을 참고해서는.... 남대문을 국보
1호,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국보 2호, 동대문을 보물 1호, 보신각종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합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하면서 옛 성과 성문을 대부분 다 허물었는데 조선총독부에서도 한양
도성을 철거하기 시작했으니 더욱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숭례문(남대문)을 허물려고
했는데, 그 오래 전인 1905년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교통에 방해되는
남대문을 대포로 부수려고 하자 주 경성 일본 거류민단장 나카이 키타로가 반대 했습니다!
남대문은 그 자체로도 보존 가치 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 가 입성한
우리나라(일본)의 역사유적" 이라고 청원 했는데..... 그후 조선총독부가 도로를 확장할
때도 비뚜름히 길을 내 살아남았으며, 동대문 역시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역사유적" 이라는 이유로 살아 남았지만... 서울의 다른 성문과 성벽은 모두 철거하게 됩니다.
임진왜란때 4월 28일 신립의 1만 6천 조선군이 고니시 유키나가군에게 패배하니 생존자는 이일
등 4명에 불과한 참패를 당하자 선조는 서울과 백성을 버리고 달아나는데.... 고려 현종은
거란군 침입시 나주로, 고종은 몽골군 침입시 강화도로, 공민왕도 홍건적 침입시 안동으로
도주했고 훗날 인조도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때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달아났으며 고종도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는데 유독 선조만 크게 비난을 받는 것 같습니다?
선조는 4월 30일 밤에 달아나는데 그 전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고 도원수 김명원에게는 한강방어를
맡기고 우의정 이양원을 유도대장(留都大將) 으로 한성 수비대장으로 임명했는데, 왜군이 한강에
도착했으나 배가 없어 건너지 못하니 기마 몇기가 물에 뛰어드는 시늉을 하자 김명원은 혼비백산해
도주했고 도성 방위군도 밤중에 하나둘 빠져나가 사라지니..... 이양원도 한성(서울)을 버리고 후퇴합니다.
서울 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관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의 신라 혁거세왕 조에는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고 이후 도읍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런 이름들은 수도(京)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BC 18년 백제가 송파, 강동 지역에 도읍을 정한후 492년간 한성백제 시대가 이어졌으니... 강남의
풍납토성은 위례성으로 불렸으며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함략하고는 한강 북쪽인 광진, 성동, 구리 지역
을 북한산군 남평양으로 지정했고, 553년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여 신라의 한산주 한양군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양주(楊州)로 부르다가 250년간 수도 개경에 대비되는 남경으로 한양(漢陽) 이라 불렸는데
조선시대는 한성(漢城)으로 개칭되어 510년 동안 수도였고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경성으로 불렸으며
해방후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로 불리는데 중국에서는 首尔(首爾 수이, Shǒu’ěr 소알?) 이라고 부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된 관청으로 격하시켰는데..... 일본
에서는 京(경) 이라는 한자를 “게이” 라고 발음하니 수도를 京(경) 이라고 부르면서 교토
를 의미할때는 “게이” 대신에 “쿄”라고 발음한지라 메이지유신후 도쿄로 수도를 옮기면서
동쪽 수도라고 東京(도쿄)라고 부르면서 기존의 교토는 “京都” 라고 쓰고 ”교토“ 라고 불렀습니다.
저런 이유로 조선의 수도를 한성(漢城)에서 경성(京城) 으로 바꾸고는 발음은 “쿄 京”는 일본 수도를
말하는지라 조선 수도 경성(京城)은 “게이죠” 라 발음했는데 이는 일본인이 일본의 유물만 “국보”
라고 칭하고 조선의 유물들인 남대문과 동대문등은 “보물” 이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성(京城)이란 단어는 고려와 조선에서도 쓰였던 것이었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 경성이라는 단어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일제강점과 관련된 단어로 변했으며 해방후 서울, 경성, 한성 등 혼재된 이름을 사용하다가
1년 후인 1946년 8월 15일자로 서울특별자유시로 이름이 바뀌었고, 경기도와 대등한 관계의 행정기관이
되었으며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 11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서울특별시로 정해져 오늘날에 이릅니다.
일본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들어온 태극과 음양오행사상및 풍수지리설이 퍼져 있는지라... 조선
의 혈맥을 끊기 위해 백두대간 태백산맥의 주요 지점 산 봉우리에다가 1미터가 넘는 철심을 박았는데
누구는 헬리곱터를 타고 서울을 내려다 보면 서울은 大日本(대일본) 이라는 글자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청도인의 한국교회사 글에도 보면 미국 해군성이 부산 정보 파악을 위해 3만피트에서 찍은 사진
을 제주대가 입수한 1945년 8월 부산 항공사진에서 보면 용두산신사는 현 용두산 타워
아래 화단자리인데, 부산교도소(大 삼익아파트)- 경남도청(日 동아대 박물관 ) - 부산부청
(本 부산롯데월드) 건물의 모습이 놀랍게도..... 大日本(대일본) 으로 배치된게 보인다고 합니다.
부산 건물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울은 세로로 서 있으니 大(대)는 경무대(총독 저택, 청와대) 이고 日(일)
은 조선총독부이며 本(본)은 경성부청(서울시청) 자리라는데.... 김영삼 대통령때 중앙청(조선총독부,
미군정)을 철거하면서 꼭대기 원형부분은 천안 독립박물관으로 옮겼는데, 천장에는 일본의 건국신화
인 이자나미외 이자나기신이 그려져 있었으니 그 아래서 수십년간 대한민국 국무회의가 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경복궁내 300채 전각 을 허물고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해방후 미군정청청사
로 사용되다가 1948년 부터는 대한민국 중앙청 으로 사용되다가 80여년만인 1996년
김영삼 대통령때 철거 하다가 놀라운 벽화 가 발견되었으니.... 대한민국 국무회의 가
열리던 홀의 천장 에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이자나미신과 이자나기신의 벽화 그림” 이라!
일각에서는 숭례문(崇禮門) 을 남대문(南大門) 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폄하하기 위해 고친 것이니 남대문이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봅니다, 조선에서 숭례문(崇禮門) 은 정식 호칭이고 남대문(南大門)
은 속칭이었으니....... 정식으로 부를 때는 숭례문(崇禮門) 이라고 부르는게 맞다고 봅니다!
1592년 5월 3일 가토 기요마사는 남대문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대문으로 무혈입성하니 처음
에는 성문이 열려 있는지라 공성계인가 싶어 쉽게 진입하지 못했다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성에 사는 주민은 항복하여 해당 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쟁에서 기본 방식이라 일본군은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하고는 처절한 전투를 각오했던 것입니다.
나라의 도성이 비어있는지라 점령한 일본군 입장에서는 자기들 상식과 관례에 맞지 않으니 굉장히
당혹스러워했고 이후 조선 백성들이 의병으로 정복자에 대항하는 실정에서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일본에서 백성이란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는 영지에 부속된 농노나 전리품이었습니다.
해서 9명의 일본 장수들은 서울과 8개도를 하나씩 맡아 다스리는 통치에 들어가는데(전라도는 점령하지
못함) 일본과 조선에서 백성들의 이러한 차이를 모른 채 정복한 조선에서 당연히 보급과 급료 등 비용
을 쉽게 충당할수 있다고 여겼으므로 조선을 통치하겠다는 일본군의 기본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철거를 면한 또 다른 경우로는 "광화문" 이 있으니...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우느라
경복궁의 전각 수백채를 허물면서, 경복궁의 정문으로 정도전(鄭道傳) 에 의해 사정문
(四正門)으로 명명되었다가 1425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 이라고 바꾸었으며 임금
이 행차하는 문인지라...... 천정에는 주작(朱雀) 을 그려 넣은 광화문을 허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1927년 조선총독부눈 광화문을 없애지 않고 해체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는데 이후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 되었으나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 시켰지만 그나마 도로확장
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으니 2006년에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
를 다시 하였는데 서영아씨는 동아일보에 “야나기와 광화문” 이란 글을 올렸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유종열) 는 1922년 8월 동아일보에 5회에 걸쳐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 를 게재했으니 “일본이 조선에 합병돼 에도(江戶)성이
헐린다면 일본인들은 이 무모한 일에 대해 분노를 느낄 것” 이라며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경성에서, 강요받는 침묵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고 고발했으니 일본과 조선 양국에서 발표된
기고문은 큰 반향을 일으켜 광화문은 부수지 않고 1926년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져 보존됐습니다.
1907년 일본 황태자(뒷날의 다이쇼 덴노)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 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서울 성곽을 헐어버렸다.
성곽을 허문 자리에는 도로와 전차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석축을
쌓았는데 지금의 대한상공회의소 앞쪽에 성벽같이 생긴 담벽이 바로 숭례문 성벽입니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채종기의 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으니 문화재
청에서 원형에 가깝게 복구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숭례문(남대문)은 화재로 소실된후 재건축 되었다는 점에서도 국보 1호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증폭되었는데 문화재보호법은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 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고 제작
연대가 오래되었으며 그 시대를 대표하며 또 제작 기법이 우수해 그 유례가 적은 것을 말합니다.
일본에서 국보성은 5개가 지정되었으니 희메지성, 히코네성, 이누야마성과 마쓰모토성에 마쓰에성인데
크기와 웅장한 규모에 역사적 유래로만 본다면 오사카성, 나고야성, 구마모토성과 도쿄성이 훨씬
앞서지만 저런 성들은 무느진후 현대에 들어 재건축한 건물들이라 문화재적 가치가 적어
국보성에서 제외되었으니 그렇다면 현대에 재건축한 남대문은 국보로서 가치는 덜하다고 할 것입니다.
6.25 전쟁때 큰 참화를 입고 간신히 살아남았던 우리의 국보 1호 숭레문은 2008년
화재로 5시간만에 무느졌으니 충분히 진압할 시간이 있었지만 역설적
으로 “국보 1호 라는 중압감” 때문에 진압에 실패했는데 문화재청이나
서울시에 소방본부등.... 아무도 총대를 메고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화재로 불씨는 건물 내부 심층부로 파고 들었으니 드릴이나 도끼로 건물 일부를 “부수어
내부까지 드러나게 구멍을 뚫어서 물을 쏘았으면” 건물 일부는 파괴되었겠지만 화재는
진압하고 부분 보수로서 살릴수 있었던 것을 “사후에 책임문제”를 꺼려 누구하나 나서서
실행하지 못하고 다들 다른 기관의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앞장서 주기를 바라고 미룬 것입니다?
복원 공사를 마친 숭례문에서 단청이 갈라지는 현상이 6개월만인 2013년 11월 발견되었는데
아교의 코팅 재료로 들기름과 합성수지를 쓰면 벗겨짐을 막을 수 있었지만, 전통 기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유동나무 기름(동유)를 썼기 때문이었으니 문화재청이 실험을 한 결과
안료가 갈라지거나 벗겨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내용의 보고서도 썼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단청을 한 곳에 100개가 넘는 균열과 변색에 나무에 새긴 그림과 글씨가 갈라지고 일어나
떨어지는 것을 “박락 현상” 이라는데 단청 작업에 들어가는 재료인 아교 외에도
조개 껍데기를 갈아서 만드는 백색 안료인 “호분” 에도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맥이 끊어진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처럼 저런 전통안료 를 생산하는
기술이 단절되고 일본과 중국에서 안료를 수입해서 써 왔는데, 숭례문 복원에는 국민의
관심이 워낙 크다 보니 전통재료를 살리려고 3년을 애쓰다가 실패로 끝나자 급한김에 외국
에서 안료를 수입해 완공 기일을 맞추려고 서두르다 보니 저런 불상사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 페인트를 사용하는 단청은 수명이 3년이지만 호분을 쓰면 100년이 간다는데.... 일본에서 그 외
에도 옻칠을 하는 장인들의 칠붓의 재료는 18~ 20세 여성의 긴 머리털이라고 하는데..... 파마나
염색을 하지않고 샴푸로 감지않은 머리카락인데, 더욱 해초를 먹은 여성의 머리털을 최고로
쳐주니 오래 전에 그런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절에서 미리 기증을 받아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백락현상에 이어 한달 후인 2013년 12월에는 숭례문 기둥에서 균열이 발견되었는데 나무를 잘 말려서
써야 하지만 급히 사용했기 때문이었는데, 2014년 1월에는 숭례문에 사용한 소나무로
삼척에서 벌목된 금강송 대신 러시아산 소나무를 썼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니 금강송은 강원도
와 경북 북부 일부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독특한 기후 조건에 의해 강도가 높은 고급 소나무입니다.
숭레문(남대문)과 광화문 얘기를 햇으니 말이 나온김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생각해 보는데.... 불국사
는 신라시대인 1,345년 전에 건축되었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50년간 조금씩
복원했는데 1920년대초 조선 총독부가 중건하고 다시 1970년 박대통령이 중창해 오늘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지금 불국사 건물은 50년 밖에 안되었다는 것인데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마저 8년밖에 안됐으니..... 일반 건물이라면 일부를 부수어 진압했을 것이지만
국보 1호라는 중압감 때문에 구멍을 뚫지 못해 화재진압에 실패한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니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1981년 3월 30일 레이건 대통령이 한 호텔에서 연설 후 나오다가
힝클리 라는 청년에게 피격되어 총상을 입어 조지 워싱턴대 병원으로 이송된 후 대통령이라는
귀빈이 아닌... 그냥 일반 환자의 방식대로 수술을 집행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경호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1974년 미국 포드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해 워커힐 호텔에서 함께 공연
을 보던 도중 갑자기 정전되어 불이 나가자 소동이 일었는데, 불이 들어오고 보니 미국 경호원
들은 포드를 구석에 끌고가 눕힌후 경호원들이 겹겹이 포갰는데 반면에 우리나라 박대통령
은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고...... 경호원들은 한국말로 소리치며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는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