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 남해 노도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바로 앞에 있는 '노도(櫓島)'는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옛날에 배를 저을 때 사용하는 노를 많이 생산했다 하여 '노도'라 부른다고 하며,
벽련포구에서 바라보면 마치 '삿갓'처럼 떠 있어 '삿갓섬'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노도는 경남 남해 앵강만의 입구 상주면 양아리에 있는 작은 유인도로
벽련(碧蓮) 마을에서 2㎞ 정도 떨어져 있어 배로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노도가 서포 김만중의 마지막 유배지요, 그의 문학적 배경이라고는 하지만
섬에는 김만중의 흔적이라야 서포가 직접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과
그가 죽은 후 잠시 그의 시신을 묻었다는 허묘(虛墓)가 남아 있을 뿐
그의 유허지에는 ‘서포김만중선생초옥터’라는 작은 표석만 초라하게 놓여 있고
다른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국문학사에서 아주 빼어난 작품인 국문소설 <구운몽>의 저자인 서포 김만중은
그의 나이 53세 때인 숙종15년(1689년)에 이 섬으로 유배를 와서 3년 정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숙종18년(1692년)에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김만중은 직언(直言)을 잘 하던 신하로
그의 생애 중 세 번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강원도 금성과, 평안도 선천에 이어 노도가 그의 마지막 유배지였습니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희빈 장씨를 세우려 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서울에서 천 리나 떨어진 이 곳 남해의 노도로 유배당한 것입니다.
그가 노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지 10개월이 채 못 되어
어머니 윤씨부인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듣고 '정경부인 윤씨행장'을 썼다고 합니다.
<구운몽>도 그가 어머니를 위해서 하룻밤 사이에 쓴 소설이라고 전해지니
유복자로 태어난 그의 효성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년 뒤, 노도에서의 유배생활 3년여 그는 한 많은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구운몽>은 그가 선천에서 귀양살이 할 때 지은 작품이라고 하며,
'사씨남정기'나 '윤씨행장(行狀)', '서포만필' 등은 모두 이 곳 노도에서 썼다고 합니다.
시간이 없어 배를 타고 직접 들어가 보지 못하고 먼 발치로만 본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벽련 마을'입니다.
멀리서 당겨 바라본 '노도'입니다.
남해 금산에서 새벽에 바라본 다도해. 저 오른쪽 위 어디쯤에 노도가 있을 듯...
첫댓글 구운몽을 하룻밤 사이에 쓰실 정도의 놀라운 필력을 지니셨던 천재 문인께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셨던 곳도 당시로는 상당히 외진 곳이었네요~ 유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지난 가을 남해도에 가서 앵강만을 접하고 바라본 기억이 선명하군요. 남해고도 그 어디마다 시인묵객이나 귀양살이 지조높은 선비들의 장탄식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