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내가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백일장에서 입상하고 문예반에 들어가서 문학에 한껏 관심을 가졌던 때였다. 지금도 나는 박경리의 대표 소설로 토지 보다는 ‘김약국의 딸들’을 꼽는다.
그때까지는 가난하거나 불행하게 살던 아이가 부잣집 도련님이 되거나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마무리로 끝맺음 하는 동화적인 소설이 재미있었다. 김약국의 딸들은 그게 아니었다. 통영의 부잣집이 망해가는 이야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줄거리와 전혀 다른 소설이 나에게 감동을 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어린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재미만 찾던 소설 읽기에서 의미를 찾는 읽기로 바뀌어 가는 것도 나의 성장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리라.
고향 마을에 어렸을 때부터 같이 뛰놀던 친구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천석군 부자 이어서 마을에서는 이 부잣집 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왜정시대에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자랑하였다. 여름에도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는 우리 면의 유지였다. 친구를 불러내려면 바깥마당을 지나 행랑채 대문에서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주로 바깥마당에서 놀았다. 안마당에 들어가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친구는 틈만 나면 ‘할아버지 때는 ------’라면서 집안 내력에 대한 자랑이었다.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했고, 작은 엄마가 둘씩이나 된다면서 분노를 터트렸다.
집안 내력을 이야기하면 나는 조금은 기가 죽었다. 초등학교 때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을 배우면서 내가 그의 후손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퇴계 이황 선생을 배울 때는 퇴계 선생이 우리의 선대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 했다. 자랑거리라고는 없는 우리 집을 초라하게 생각했다. 예전에는 잘 살았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샘이 났다. ‘할아버지 때는 ------’라는 말이 나오면 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마음속으로는 우리 할아버지도 부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들었다.
‘ 김약국의 딸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 친구를 떠 올렸다. 청년기를 지나면서 어렸을 때 부러워하면서 들었던 그 친구의 이야기가 사실은 슬픈 이야기였음을 알았다. 그 친구가 자랑하였던 집안의 내력은 김약국처럼 한 집안의 몰락을 보여주었다. ‘김약국의 딸들’의 읽기를 통하여 내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사랑 이야기가 이어진다. 고등학교 때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왜 부잣집 딸이 머슴과 눈이 맞아 도망을 갔을까?’ 사랑? 지금까지도 나는 사랑 때문에 가족을 버린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동네 사람이 ‘가시나가 바람났네’ 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머슴과 도망을 간 김약국의 딸의 사연도 ‘바람났네’로 생각했다.
김약국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구세대가 몰락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딸들 중에 공부를 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된 딸에게 희망을 남겨두었다. 내가 공부에 가치를 둔 것도 김약국의 딸에서 받은 영향인지도 모른다.
대학을 다닐 때였다. 만취당 일기(?) 라는 단편을 읽었다. 작가도, 정확한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무척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양반댁 종가집의 만취당이라는 건물을 소재로 다루었다. 선대들이 글을 읽고, 시를 짓던 사랑채였다. 산업 사회가 휘몰아치던 시대에 만취당 주인은 전통을 지키느라 점차 시대의 물결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이 마을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수백 년을 버티어 온 만취당도 마침내 부르도자의 굉음 속에서 허물어지는 이야기였다. 만취당 주인은 도시로 이사를 가서 판자촌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삶의 가치가 바뀌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냉엄함을 알았다. 어머니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서 보내 주는 돈으로 힘겹게 대학을 다니면서 시골 마을과는 다른 도시의 냉엄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도시의 판자촌에 머문 만취당 주인을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분명한 것은 나는 만취당 주인이 아니었다, 만취당 주인의 아들처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다고 믿었다.
‘나중에 나도 이런 소설을 한 번 써보았으면------’ 청년 시절의 나에게 남아 있었던 문학적 감수성의 한 자락이었다. ‘나중에’가 10년이 되었고, 20년이 되었고, 다시 30년, 40년이 흘러서 지금의 내가 되어 있다.
생업에서 은퇴를 하고 노년을 보내면서 다시 박경리의 소설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대표작이라는 ‘토지’에도 신분이 다른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 이야기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김약국의 딸들’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박경리는 왜 신분이 다른 사람끼리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흔히 다룰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의 지나 온 삶을 눈 여겨 보았다. ‘불륜’이랄 수도 있는 사랑이 그의 개인사에 있었다. 글에서 이 사실을 얼핏 내세웠다가 선배 작가에게 불손하다는 질책도 들었다.
문학 이야기를 한다면서 나의 이야기를 길게 하였다. 소설 읽기를 통하여 나의 성장을 보았고, 화석처럼 굳어져 있는 나의 사유 세계도 보았다. 청-소년 시절에는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지만, 삶에 밀려 문학의 변두리를 맴돌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더라도 문학은 항상 나의 곁에서 나의 성장과 발맞추고 있었다. 아니, 나의 성장이 문학과 발맞추면서 오늘의 내가 만들어 졌다. 문학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문학 속에 내가 숨 쉬고 있음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