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토론문 - 이기정 (미양고)
1. 문재인 대통령의 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22일에 발표한 교육공약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 무너진 교실을 다시 일으키고 잠자는 학생들을 깨우겠습니다.”
“ 모든 교육은 교실에서 시작됩니다. 교실혁명으로 교육혁명을 시작하겠습니다.”
2. 교실혁명의 킹핀(Kingpin)은 무엇일까?
무너진 교실을 일으키고, 잠자는 학생들을 깨우는 교실혁명이 이루어지려면 수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 많은 것을 동시에 바꾸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킹핀은 없을까? 볼링 경기에서 스트라이크를 치려면 킹핀을 노려야 한다. 5번 핀인 킹핀을 쓰러뜨려야 다른 핀들이 연쇄적으로 넘어진다. 눈에 잘 보이는 1번 핀을 노려선 연쇄효과가 작아 스트라이크를 치기 어렵다. 스트라이크를 치려면 연쇄효과가 큰 핀을 노려야 한다.
교실혁명에도 볼링의 킹핀에 해당하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고교학점제다.
3. 고교학점제의 킹핀은 무엇일까?
고교학점제를 성공시키려면 수많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수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 많은 것을 동시에 바꾸기는 너무나 어렵다. 킹핀은 없을까? 고교학점제의 성공에 기여할 킹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4. 킹핀 중의 킹핀 - 내신 절대평가제
고교학점제에 킹핀이 있다면 그것은 내신 절대평가제다.
내신 절대평가제가 학점제를 저절로 성공시킨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른 많은 제도와 정책이 시행되고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내신 절대평가제도가 먼저 시행되지 않으면 고교학점제가 성공하기 어렵다. 내신 절대평가제는 하나의 제도이지만 다른 제도에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제도다. 하나의 정책이지만 이후에 실시되는 다른 정책에 큰 영향을 주는 정책이다.
내신 절대평가제가 없는 학점제는 학생과 학교에 끝없는 혼란과 갈등을 줄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과도기적 혼란과 갈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끝이지 않고 지속될 혼란과 갈등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내신 상대평가제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과목을 마음껏 선택할 수 없다. 선택에 따른 입시에서의 유•불리 때문이다. 현재의 상대평가제에서 학점제가 시행되면 학생들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과목을 버리고 성적 경쟁에 유리한 과목을 선택하라는 강한 정신적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학교로 하여금 학점제를 소극적으로 운영하게 만들 수 있다. 적극적인 학점제 운영이 오히려 학교의 입시성과를 나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재의 내신 상대평가제에서 수학포기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수학을 떠나면 어떻게 될까? 수학을 잘하는 학생들의 성적이 그만큼 나빠진다. 예컨대 수학포기 학생의 절반이 수학을 신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1등급 학생이 절반으로 줄고, 5등급이었던 학생이 9등급으로 떨어질 수 있다. 내신 성적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현재의 입시제도에서 이것은 (중상위권 대학) 입시성과를 크게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입시 성과는 학생과 학교 모두에게 중요하다. 어찌됐든 그게 현실이다. 그런데 학점제를 진실하게 활용한 학생이 손해를 보고 학점제를 교묘하게 악용한 학생이 이익을 보는 상황에서 어떻게 학생들이 갈등하지 않겠는가? 학점제를 적극적으로 운영한 학교보다 소극적으로 운영한 학교가 더 높은 성과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학교가 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절대평가제가 없는 학점제는 학생과 학교를 끝없는 혼란과 갈등에 빠뜨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갈등과 혼란의 조짐은 고교학점제와 관련하여 언론에 자주 등장한 00고등학교에서도 실제로 나타났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학생부종합전형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안이한 생각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이 대안이 될 수 있다면 내신 절대평가제의 도입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학생부종합전형이 고교학점제가 낳을 부작용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면 내신 절대평가제가 낳은 부작용의 대안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학생부종합전형은 그 정도로 유능한 입시가 아니다.
5. 또 다른 킹핀 – 교사별 평가제, 교과서 자유발행•자유선택제
학점제의 성공에는 교사별 평가제 또한 중요하다. 내신 절대평가제 만큼 중요한 제도는 아니지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제도다. 이 제도가 시행돼야 수업의 다양성이 이루어진다. 주로 국•영•수 과목에서 나타나는 형상이지만, 지금처럼 몇 명의 교사가 반드시 동일한 시험문제를 출제해야하면 어떻게 될까? 교사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수업의 내용과 수준을 반드시 서로 일치시켜야 한다. 결국 교사 개개인이 창의적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워 여전히 수업이 획일화될 수밖에 없다. 이래선 학생 선택권이 충분한 의미를 갖기 어렵다.
교과서 자유발행•자유선택제도 중요하다. 학점제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다양한 교과서가 개발되어 교사들이 자신의 수업에 최적화된 교과서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과서를 지금 보다 더 자유롭게 발행할 수 있어야 하고 교사 개개인이 교과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발행제는 다양한 교과서의 개발을 부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교과서가 존재해도 교사 개개인이 자기 수업에 맞는 교과서를 선택할 수 없다면 다양한 교과서는 그림 속의 떡일 수 있다. 자유발행제를 통해 교과서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자유선택제를 통해 교사 개개인이 자신의 수업에 맞는 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6. 킹핀을 손대지 못한다면?
그러나 교육과정평가원 연구 자료는 학점제의 핵심 요소인 내신 절대평가제, 교사별 평가제 등을 중장기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한계가 뚜렷하다.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들이 도입되면 입시제도에 대변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과도기적 혼란이 엄청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내신 절대평가제, 교사별 평가제 등을 중장기 과제로 돌린 것은 어쩌면 현명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중장기 과제로 돌린다면 고교학점제의 대한 기대치를 크게 낮춰야 한다. 기대치를 낮추지 않고 욕심을 내면 자칫 부작용만 크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가급적 고교학점제 사업은 가급적 중앙정부(교육부)의 사업으로 진행하지 말고 교육청과 학교의 사업으로 넘겨야 한다. 그래야 부작용을 줄이고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이것이 교육부의 권한을 축소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과도 일치한다.
실제로 내신 절대평가제, 교사별 평가제, 교과서 자유발행•자유선택제 등의 문제에서 중앙정부(교육부)가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이 아니라면 고교학점제가 굳이 교육부의 사업일 필요가 없다. 대통령의 공약일 필요도 없다. 그것은 교육청의 사업이어도 충분하고 교육감의 공약이라야 적당하다.
7. 또 다른 편향에서 벗어나야
고교학점제가 시행된다고 해서 학교가 학생에게 한없이 다양한 메뉴(과목)를 제공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인문계 고등학교로서의 존재 이유가 있다.
선택은 가급적 학교 안에 이미 존재하는 교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에 없는 새로운 메뉴를 도입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면 안 된다. 특히 학교 간 연합을 해야만 개설할 수 있는 메뉴가 있다면 그런 것은 굳이 도입할 필요가 없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비용(예산 + 교사 업무) 대비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학생의 선택을 너무 제한하는 쪽으로 편향됐었다. 그렇다고 또 다른 편향에 빠져선 곤란하다. 기존 교과 내에 없는 메뉴를 한없이 개설하는 것은 고교학점제의 본질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예산과 교사의 에너지를 가성비 떨어지는 일에 낭비케 하는 일이다.
8. 교사의 불안감을 해소해야
비(非) 국•영•수 교사들은 학생들이 국•영•수 과목만 선택할까봐 불안해한다. 당연한 불안이다. 그러나 국•영•수 교사들은 국•영•수 교사들대로 불안할 수 있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자. 입시에서 제일 중요한 과목이 수학이라 하지만 그것은 상위권 대학의 경우다. 수능 위주 입시전형을 보자. 수학을 포기하고도 갈 수 있는 대학이 널려있다. 수학은 물론 영어와 국어를 포기하고도 갈 수 있는 대학도 많다. 전문대는 거의 그렇다. 그런데 공부를 포기한 학생이 제일 많은 과목이 수학이다. 수포자(수학포기자)란 말이 등장할 정도다. 그런데 수학포기 학생으로 하여금 수학을 선택 하지 않게 해놓고 수학을 잘하는 학생들이 수학을 더 많이 선택하지 못하게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것은 학생의 교과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수학 교사들을 학점제의 반대자로 내모는 일이다. 자칫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존 교과 내에서 선택이 이루어져도 교사들은 불안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기존 교과 외부에서 자꾸 메뉴(과목)를 개발하려 하면 교사들은 더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선택권도 중요하지만 교사들의 신분안정도 중요하다. 이 둘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사들이 불안하면 고교학점제가 성공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
9. 마무리
현실적인 여건으로 인해 내신 절대평가제, 교사별 평가제, 교과서 자유발행•자유선택제 등을 도입할 수 없다면 고교학점제의 목표를 아주 낮게 잡아야 한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대치는 00고등학교가 도달한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00고등학교의 특수한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일반 고등학교의 경우는 목표를 그보다 낮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정도 가지곤 무너진 교실을 일으키고 잠자는 학생들을 깨우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 그야말로 턱도 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우리는 한발자국의 전진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에겐 조그마한 성공도 소중하다. 고교학점제의 성공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