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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스특허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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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스크랩 대마도는
킴스특허 추천 0 조회 35 08.12.08 00: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지리적 환경
  ㅇ 위치 : 동경129。,북위34。
 
  ㅇ 소속 :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소속으로 1市 6町으로 구성되어 있다. (쓰시마市,       이즈하라마치, 미츠시마쵸, 토요타마쵸, 미네쵸, 카미아가타쵸, 카미쓰시마쵸)
 
  ㅇ 면적 : 708.32㎢ (울릉도의 약 10배, 제주도의 약40%, 섬 전체 89%가 산림지대)
 
  ㅇ 거리 : 대마도에서 우리나라 부산까지 49.5㎞ (일본 후쿠오카까지 147㎞)
 
  ㅇ 인구 : 약 4만 2천명(2004), 인구 300명 이하 작은 마을이 74%
 
 


 
 
대마도의 중   심대마도의 중심도시 이즈하라마쵸 1만6천여명이 이곳에 산다. 도시 이즈하나마쵸
 
나. 해양학적 환경
  대마도의 어장은 대마도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흐르는 따스한 해류와 연안수의 혼합 등으로 변화가 풍부하다. 연안의 해저 지형을 보면 동측은 완만한 경사고, 서측은 급하여 해곡, 해분이 많다. 많이 잡히는 어종으로는 오징어, 방어, 도미, 정어리, 정강이, 고등어 등이며 전복, 소라, 성게, 미역, 돌김의 생산도 많다.
 
 
 
 다. 특산물
  ㅇ 진주 : 옛날부터 천연진주가 많이 채취되어 왔던 곳으로 현재는 양식을 주로 하는      데, 연 6,356Kg 정도를 생산한다.
 
  ㅇ 대주(對州) 자기 : 조선시대 초량에 있던 왜관에 막부의 명으로 다완요(茶碗窯)를       개설(1639년)하여 고려의 기법을 전수받은 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1717년부터      는 대마도 내(嚴原町 久田村)에 요를 만들어 도기를 제조했다. 명치시대이래 중단되      었다가 근자에 와서 다시 생산하고 있다.      
 
  ㅇ 약전(若田) 벼루 : 嚴原町의 若田川 유역에서만 나는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돌(항      암)을 사용하여 만든다.
 
  ㅇ 만산(滿山) 낚시바늘 : 1865년 대마도 사람 滿山俊藏이 고안하여 만든 수제(手製)      낚시 바늘로 휘지 않고 부러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낚시 바늘이다. 일본 각지에      서도 주문이 많고 현재 현지정 무형문화재이다.
 
  ㅇ 표고버섯 : 산지가 전체 섬의 88%인 대마도의 임업 주생산품은 표고버섯이다. 대     마도의 풍부한 원목에서 재배되는 이 표고버섯은 두텁고 단단하며 향이 좋아 일본      제일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대마도에서는 연간 마른 표고버섯 생산량이 300여 톤     에 이를 정도로 생산량이 많아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ㅇ 사슴고기 :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지만 대마도 사슴은 수렵기간도 있고 사슴목       장도 여러 곳에 있다. 기름기가 적은 사슴고기는 육회로 먹는 것이 가장 좋고 선       물용햄, 훈제고기도 판매되고 있다.
 
  ㅇ 가리비 : 빨강, 노랑, 보라의 화려한 조개껍질이 눈을 즐겁게 하고, 감칠맛 나는       조갯살은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나는 가리비 맛을 연상케 한다. 끝 맛이 깔끔하고       향긋해 회나 초밥의 재료로 주로 사용되는 대마도의 특산이다. 가리비와 함께 대마      도는 전복, 소라 또한 명산지다.
 
  ㅇ 오징어 : 대마도의 대표적인 수산물로 연간 20,455톤 정도 잡는다. 요즈음은 한국      산 오징어를 가공한 것도 가끔 있다고 한다.
 
  ㅇ 대주(對州) 메밀 : 대마도 메밀은 네팔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ㅇ 가스마끼(かすまき) : 대마도의 명과로 대표적인 토산품의 하나이다.
 
 

 라. 맛있는 음식 5선
  ㅇ 이시야끼 요리
  어부들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요리법을 만들어낸 독특한 생선요리로 대마도의 대표적인 맛으로 손꼽힌다. 갓 잡아 올린 생선과 조개에다 대마도 특산인 표고버섯과 각종 야채를 모닥불로 달군 돌 위에 얹어 구워먹는 것으로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신선한 생선을 재료로 쓰기 때문에 전혀 비린내가 나지 않고 불에다 직접 굽지 않고 미리 달군 자연석위에 얹어 굽기 때문에 타지 않아 정갈한 맛을 내는 것 또한 특징이다.

  ㅇ 이리야끼 요리
  대마도의 토종닭과 제철 어류, 특산의 표고버섯 등을 재료로 한 전통적인 찌개요리다. 우리나라 찌개와는 달리 다양한 재료들을 한 솥에 넣어 끓이는 것이 특징이다. 또 재료들을 잘게 잘라서 끓이기 때문에 적당량 덜어서 먹을 수 있고 우리 찌개처럼 맵짜지 않아 국처럼 느껴지지만 국과는 다른 독특한 맛을 띤다. 재료들을 솥에 넣고 끓여 담백하고, 깔끔한 국물이 우러나면 그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기도 하는데 그 맛 또한 일품이다.

 ㅇ 로쿠베
  대마도 특유의 보존식품으로 고구마를 잘게 부수어 발효시킨 다음 물로 씻어 전분과 섬유질을 뽑아내 만든 짧은 면으로 대마도의 토속음식이다. 한마디로 ‘대마도 고구마 국수’로 뜨거운 장국에 말아먹는 이 요리는 쫄깃한 면발과 담백한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애주가들에게는 술 마시고 난 뒤 속풀이 야식으로 안성맞춤인 음식이다.
 
  ㅇ 메밀국수
  대마도는 토양이 척박해 벼나 보리 등 내륙에서 흔히 먹는 식품 외에 풍토에 맞는 음식들이 개발돼 주요 먹거리로 자리 잡은 것이 많다. 로쿠베와 마찬가지로 이 메밀국수도 대마도 특유의 토속식품이다. 담백하고 차진 메밀국수의 풍미는 미식가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현대인들의 건강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특선요리이다.

  ㅇ 회 요리
 바다가 깨끗하기로 소문난 대마도는 역시 회요리가 최고 메뉴다. 대마도 연안은 씨알이 굵은 돔과 방어, 전갱이 등의 회요리에 적격인 신선한 생선의 보고다.
일본인들의 회맛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해 담백하게 즐기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우리 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미리 우리 회고추장을 준비해 가면 특별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국적인 풍미를 느끼려면 한 번쯤 일본풍의 회맛을 즐겨보길 권하고 싶다.
 

 

한국전망대와 와니우라

 

대마도 최북부지역에 있는 와니우라 언덕에 가면 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와 한국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는 날이 좋으면 부산이 또렷이 보이고 우리나라 손전화(016)로 로밍없이 국내에서 하는 것 처럼 스스럼없이 통화할 수 있다. 
 
부산은 특히 야간에 잘 보인다고 한다. 부산 시가지의 오색 불빛들이 바로 건너에 있는 것 처럼 환하게 보인다고 하니 대마도가 국경의 섬인 것은 분명하다.  
 
게절적으로는 여름보다 겨울이 잘 보인다고 한다. 여름에는 해무(바다 안개)때문에 거의 볼 수가 없는데, 운이 좋았던지 내가 가던 날에는 부산 전체가 선명하게 잘 보였다. 
 
  
 


 
한국 전망대가 있는 와니우라(악포)위의 언덕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수평선 너머로 부산이 뚜렷하게 보였다.
와니우라는 '악어 악(鰐)'에 '포구 포(浦)'로 실제로 포구 앞 쪽에 악어이빨처럼 날카로운 암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포구 앞쪽에 동서로 길쭉하게 보이는 섬은 '우니지마'로 우리 말로 해율도(海栗島)이다. 이곳에는 현재 일본 해상 자위대의 레이더기지가 설치되어 있다. 이 섬이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하며 '와니우라'를 보호하고 있으나, 섬 너머 바깥쪽에는 암초(하에노하, 남풍파:南風波라 한다)들이 악어 이빨처럼 솟구쳐 있기에 큰 폭풍때에는 이곳을 지나는 배들이 부딪쳐 재난을 당하기도 했다. 
 
 
 


 
 
와니우라 앞쪽에 악어 이빨처럼 버티고 있는 암초들
 
1703년 조선에서 파견된 역관사들도 이곳에서 조난을 당했다.  
역관사는 대마도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약 100여명씩 파견하는 조선의 사절단으로 숙종 29년인 1703년 음력 2월 5일에 한천석을 대표로하는 역관사 일행 104명은 대마도 도주 종의진의 죽음을 애도하고 새로 번주가 된 종의방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대마도에 파견되었다가 풍랑때문에 이곳에서 좌초되어 전원이 죽었다. 
 
 
 


 
 
조선국 역관사 조난 추도비
 
와니우라 앞 바다에서 죽음을 당한 한천석 일행을 추모하기 위해 한국 학자(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 등)들과 대마도 관계자들이 힘을 합쳐 세운 비석으로 비신을 받치고 있는 돌들이 총112개이다. 초석을 112개로 한 이유는 역관사 일행 104명이 조난당할 때 배안에는 8명의 대마도 사람(대마도 관리 4명과 뱃길 인도자 4명)이 타고 있다가 함께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국 전망대
 
와니우라 언덕위에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전망대로 한국에서 수입해온 재료를 가지고 한국 기술자들의 힘을 빌려 철저히 한국풍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이 전망대 앞쪽에서 광주에 있던 아내와 통화할 수 있었다.
 
 
 


 
 
한국 전망대 위에서 손전화로 통화 시험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011이 이곳을 비롯하여 대마도 몇 곳(에보시타케 전망대, 쓰쓰자키 해상공원 등지)에서 국내와 통화되었다고 하나, 일본이 방해 전파를 설치하여 현재는 터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시험삼아 016으로 해보니 통화가 되었다. 아마 일본이 011통화 방해만 생각했지, 016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나보다.
자장면집에 전화하여 짜장면을 불러먹으려다가 식대가 너무 많이 나올 것 같아 참고 광주 집에 있던 식구들과만 통화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전화는 019인데, 국내에서도 통화품질이 좋지 못하더니 역시 이곳에서 통화되지 않았다. 하기사 우리나라인 마라도에서도 통화가 힘들었으니 이곳에서 019로 통화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엘지텔레콤이 빨리 정신을 차려야 내가 좀 편할텐디` ` ` . 참고로 나는 019를 쓴다.  
 
 
[에피소드] 이승만 정권 시대에 일본은 한국 전망대가 있는 이 지역에 세계 최대의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우리나라 부산항에서 뜨는 경비선을 감시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 연안의 수자원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승만 라인을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대한해협에서 일본배가 고기잡이 하는 것을 금지시키자, 일본 어선들이 우리 경비선에 잡히지 않고 조업을 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망원경의 성능이 얼마나 좋았던지, 일본 어선이 우리측이 설정해 놓은 선을 넘어서 고기를 잡아도 우리 경비선의 행동 반경을 이곳에서 항시 파악하고 있었기에 일본 어선을 경비선이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망원경으로 경비선의 행동 반경을 파악하고 있다가 일본 어선에 경비선이 접근하면, 어선이 도망갈 방행까지 가르쳐 줬다고 하니 닐러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박제상 순국비

 


 
 
박재상 순국비
 
박제상 순국비는 한국전망대에서 약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에 홀로 서있다.

이 비가 여기 서있는 이유는 박재상이 죽었던 장소인 목도(木島)가 대마도가 확실하고, 『일본서기』에서는 대마도의 ‘사우미(組海)’의 ‘미나토(水門:湊)’라고 상세히 그 장소를 밝히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순국비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비는 대마도의 향토사가 ‘나가도메 히사에’씨와 우리나라 황수영 교수의 노력으로 1988년에 세운 것이다.

대마도의 영봉(靈峰) ‘미다케(御岳)’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인 대한해협으로 뱀처럼 흐르는 ‘사호천(佐護川)’의 유역에는 ‘미야마(深山)’, ‘에고(惠古)’, ‘이구찌(井口)’, ‘도모야(友谷)’, 미나토(湊)‘로 이어지는 마을들이 있는데, 이 지역을 통칭하여 ’사호‘라고 한다. 이  곳은 대마도에서는 그 예가 없을 만큼 사호천 덕택으로 벼농사를 일찍부터 많이 지었으며, 우리 조상들의 유적이 특히 많이 발굴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마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도 사호지역에 있는데, 평야라 해봤자 우리나라 농촌 마을의 마을 앞에 있는 텃밭 정도로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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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상은 신라 파사왕의 5대 손으로 눌지왕 시대의 충신이다. 그의 아들은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 박문량(朴文良)이다. 백결이란 "현순백결(懸鯤百結, 가난하여 입은 옷이 갈기갈기 찢어짐)"에서 나왔다고 한다.

  실성왕 원년 신라는 왜국과 강화를 하였는데, 왜왕은 전왕인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실성왕은 일찍이 형님인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을 풀려고 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왜국으로 보냈다. 또한 그는 고구려에서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보내 버렸다.

  그 후 눌지왕이 즉위했다. 눌지왕은 박제상을 불러 고구려에 가있는 동생을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박제상은 즉시 고구려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의 허락을 받고 복호와 함께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러자 눌지왕이 또 부탁했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 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박제상은 이번에도 기꺼이 응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고 어리석으나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사오니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도 어진 임금이어서 신의 말이 통했으나 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꾀로써 그들을 속여 왕자를 돌아오도록 하겠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신이 왜국으로 가면 곧 신이 나라를 배반하고 간 것처럼 말을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아내도 보지 않고 떠났다. 그는 율포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사실을 알고 급히 포구에 나가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오시오"

  박제상이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 마오."

  박제상은 왜국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배반하고 온 것처럼 말했다. 왜왕은 처음엔 박제상을 의심하였으나 먼저 왜국으로 들어온 백제 사람이,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왜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수비를 강화했다. 이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수비병을 사로잡아 죽이니 왜왕은 백제 사람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를 가뒀다는 소문도 들려 왜왕은 박제상이 신라를 배반하고 온 것이라 믿었다.

  왜왕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습격하려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군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여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렀다. 이 섬을 일본서기에서 산도(山島)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對馬島이다. 이때 왜장들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모의했다.

  "신라를 멸망시킨 뒤에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몽땅 우리나라로 데려오자."  박제상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했다. 왜인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박제상은 미사흔에게 신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사흔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박제상은 두 사람이 함께 탈출하면 실패할 염려가 있다고 하며 미사흔을 재촉했다. 미사흔은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이별을 하고 귀국하였다.

   박제상은 다음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그러자 왜인들이 늦게 일어난 이유를 물었다. 박제상은 어제 뱃놀이를 너무해서 피곤해서였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왜인들이 미사흔의 탈출을 알았다. 그들은 박제상을 포박하여 미사흔의 배를 추적했다. 그러나 안개가 짙어서 놓치고 말았다. 미사흔을 놓친 왜인들은 박제상을 왜왕에게 보냈다. 왜왕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회유하려 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 수 없다"고 하여 왜왕을 분노케 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니며 굴복시키려했으나, 그는 "나는 계림의 신하다" 하며 굴복하지 않았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일본의 『유방원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눌지왕은 박제상이 참혹한 고통 속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은혜를 갚게 했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경주와 울산의 경계선이 되는 고개)에 올라 일본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되어 날아가 은을암(국수봉에 자리 잡고 있는 절)에 숨었다고 전한다. 그 후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사당자리에 치산서원을 세워 박제상을 모시고 있다.
 
 

 

 

 <출처;empas.com/sonsan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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