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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의 물 수소수 원문보기 글쓴이: 삶에본질
이 글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어느 딸의 이야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명의 자식을 눈 앞에 두고도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한 전직 간호사의 일생 중 마지막 한 달 반에 관한 글이다.
11월 15일 밤, 서울 신촌에 있는 종합병원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아끼는 후배 기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후배는 1녀 2남 중 막내다.
소중한 가족의 느닷 없는 죽음은 유족들을 망연으로 빠트린다.
준비 안 된 엄마의 죽음 앞에서 슬픔에 겨울 여력 조차 없어 보이는 후배의 누나 장** 씨를 만났다.
모친을 병간호하는 동안 많이 쇠약해졌을까.
장** 씨는 체중이 채 40kg이 안 될 듯 했다.
엄마(박영자, 66세)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3남매가 한 순간도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난 한달 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지난 내레이션 형식으로 글을 쓴다.
고 박영자 씨가 처음 병실에 입원하고 1주인 후인 10월 13일 모습.
얼굴은 부었지만 주치의는 “신장이 호전되었다”고 말했고 이날 밤 첫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마치 공포영화와 같은 일이 우리 가족에게 벌어졌다.
영화 ‘미스트’(The Mist)처럼 안개가 걷히면 모든 일이 현실이 아니었던 듯 엄마가 살아서 바로 옆에 있다면…
안개 속에 갇힌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괴물(바이러스)로부터 공격받아 생명을 잃지만 안개가 사라지자 건강한 현실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영화보다 더 참혹한 현실은 우리 남매의 것이다.
엄마가 한국 굴지의 병원인 신촌 S병원 응급실로 간 것은 지난 10월 5일.
그날 따라 엄마가 혈압이 평소보다 올랐다는 연락이 왔다.
엄마는 젊은 시절 전문간호사였다.
경북여고와 경북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종합병원 수술실 수간호사로도 근무했었다.
결혼하고 우리 3남매를 낳으며 그토록 좋아하던 간호사복을 벗어야 했지만 엄마는 나이팅게일 정신을 생활 속에서 늘 실천했다.
맨 앞줄 가운데가 엄마다.
엄마는 이웃과 주변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돕는 게 습관이었던 것처럼 가족의 건강도 손수 챙기셨다.
그날, 엄마는 직접 혈압을 체크하고는 딸인 내게 수치가 좀 높아졌다고 전화를 했다.
연세도 있고 혹시나 걱정하는 마음에 서둘러 큰 병원으로 가시라 말했던 게 이런 참담한 끝을 볼 줄이야.
그날 차라리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주말이라 혹 모르니 응급실로 들어가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지금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들어갔던 S병원 응급실.
어느 응급실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주말이면 의사는 급한 수술이 아니면 현장에 배치되지 않는다.
인턴과 간호사들이 이것 저것 검사를 하고는 주말을 넘겼다.
응급실에서 담당의사가 정해졌다.
응급실에서는 주치의 선택권이 없다.
내분비과의 이** 교수가 배정되었다.
병원에 입원한지 3일 째.
다시 한 주일을 새로이 시작하는 월요일이건만 의료진이 내린 진단은 청천벽력 같았다.
엄마의 병이 다발성골수종같다는 것이다.
신장의 칼슘지수가 높아지자 신체의 모든 수치가 함께 상승했다고 한다.
10월 8일 혈액내과 병동으로…
의료진의 결정에 따라 엄마는 내분비과에서 혈액내과 병동으로 옮겼다.
혈액내과에서는 김** 조교수가 배정되었다.
주위에 알아보니 이 대학병원 혈액내과 의사들 중에서 후임이라고 한다.
혈액내과는 24병동을 쓴다.
이 병동은 S병원 전체에서 가장 낡은 건물로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동인 바로 그 제*원과 이름이 같은데 역사 속 그 건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제*원은 이제 공포의 병동일 뿐이다.
그 이유는 엄마의 죽음이 말해준다.
10월 13일. 첫 주치의 면담 “이제 시작이야”
혈액내과로 옮긴 후 주치의인 김** 교수실에 처음으로 들러 가족 면담을 했다.
이는 환자의 상태와 향후 진료 계획 등을 상담받는 것으로 어느 병원의 어느 의료진이나 당연히 하는 과정이다.
10월 11일경 김** 교수는 골수 검사 자료로 엄마의 병을 암으로 확진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발성골수종은 진행성암으로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에게 많이 발생하는 병입니다.
완치암이 아니지만 치료만 잘하면 4~6년 생존이 가능합니다”라고.
그만하면 축복인 줄 알았더니…
처음 ‘암’ 진단을 받고는 절망했던 우리 가족은 ‘그만하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김 교수 역시 환자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며 긍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녀는 다발성골수종은 통증이 늑골, 갈비뼈로 나타난다며,
병이 진행하지 않도록 6주 주기로 화학요법 치료를 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보다 앞서 남편(사위)도 엄마의 병명을 알고나서는 정신 없이 그 병에 관한 자료를 뒤져 나를 위로했다.
치료만 잘하면 오래 사실 수 있다는 것이다.
워낙 남편은 장모를 친엄마처럼 따랐기에 자식들보다 엄마를 더 챙겼다.
남편은 분자생물학을 전공했다.
직접 연관된 직종인 의료계통 특허직에 종사하기에 일반인보다 의학 자료를 더 꼼꼼히 찾아냈다.
자료에 따르면 엄마의 병에는 탈리도마이드가 잘 듣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강한 신약을 추천하다
어떤 약으로 화학요법을 할 지 결정하는 가족면담 자리에서 김 교수는 처음부터 벨케이드를 추천했다.
벨케이드는 한국 얀센이 개발한 신약이다.
비급여에서 지난 해부터 급여 항목으로 바뀐 약이다.
우리 가족은 “탈리도마이드가 치료 효과가 좋고 긍정적인 임상 결과가 많다는 자료를 읽었다”는 의견을 전달했으나 김 교수는 환자 가족의 말을 귀에 담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벨케이드가 치료 반응이 빠르다”며 강한 추천 의사를 피력했다.
김 교수의 말은 당연히 치료 효과가 좋다는 말로 들렸다.
그날 김 교수는 벨케이드 함암 치료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으로 단 3가지를 설명했다.
1. 골절, 2. 곰팡이균에 의한 폐렴, 3. 장염.
딸인 나는 암 치료를 하며 섭식을 걱정하면 어떡하나 싶어 “고기나 김치는 먹을 수 있는 지” 세세하게 물어 보았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드실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벨케이드’ 항암 치료 시작
안심이었다. 10월 13일부터 엄마는 벨케이드 화학요법을 받기 시작했다.
벨케이드는 혈관으로 주사약을 투입한다.
10월 20일.
엄마가 설사를 시작했다.
레지던트에게 물어보니 장염증세 같다고 한다.
번갈아 가며 엄마를 돌보던 우리 3남매는 김** 교수가 벨케이드의 부작용으로 설명한 장염 증세가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주치의 김** 교수와 담당 레지던트는 벨케이드를 3차로 투여하는 이날, 외래 세미나로 병원을 비웠다.
중환자실에 옮긴 직후인 11월 1일 오후 3시의 엄마 모습.
21일. 엄마의 설사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진다.
엄마는 배에 가스가 차고 더부룩하다고 말했다.
구토 증세까지 나타났다.
23일. 다시 벨케이드 치료를 받았다.
컨디션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엄마가 몸이 안 좋다”며 “꼭 오늘 암 치료를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악몽의 시작
그뒤부터 악몽이 시작됐다.
4번 째 벨케이드 치료를 받은 후 엄마의 배는 더 이상 엄마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배에 에일리언이라도 들어간 것 처럼, 복부에 가스가 차면서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참을 수 없는 고통도 함께 왔다.
고통에 의료진을 부른 우리는 더 기막힌 대답을 들어야 했다.
“복수가 찼다. 장의 꽈리가 꼬인 것 같다. 신장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레지던트의 대답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분명히 혈액암인데 신장을 포기해야 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이해를 하고 않고를 떠나 황망함이 정신을 빼앗아 가는 것 같았다.
엄마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엄마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또래보다 주름이 적고 늘 밝은 얼굴이던 엄마를 할머니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 엄마는 병원에 온지 불과 20일 사이에 갑자기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와 엄마. 중환자 병실에서 격리병실로 이송한 모습이다.
27~28일. 엄마의 배는 이미 만삭이 되어 버렸다.
부종도 심해져 눈이 얼굴 피부에 파묻혔다.
오한에 고열… 애타게 의사를 찾았지만 28일 오후 7시 경 레지던트만 나타나 생리식염수와 이뇨제만을 처방했다.
암 환자의 가족들은 알 것이다.
만에 하나 생길 불의의 사고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아야 한다는 심정을 말이다.
엄마는 그냥 암 증세를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불가해한 이상증상이었으므로 의료진에게(의료진으로서는 상당히 귀찮았을) 여러가지 질문을 했던 것이다.
29일. 엄마의 배는 무섭도록 단단하고 부풀었다.
젊어 그렇게 꽃처럼 예뻤던 백의의 천사 엄마, 언제나 스마일 엄마가 괴물처럼 변해버렸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엄마는 자신이 설사를 하는 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딸인 내가 기저귀를 갈아 채우는 동안에도 설사는 내 손등 위로 줄줄 떨어졌다.
복수가 차고 배는 만삭에, 등에는 벌써 욕창이 생기고 진물이 흘렀다.
주치의는 또 자리를 비웠다.
남편이 담당 레지던트인 안** 씨에게 “혹시 신장만 나쁜 것이 아니고 폐 부종과 장기 부전 증세가 아니냐”고 질문했으나 무시됐다.
이에 앞서 남편은 엄마의 증세가 심각하자 내과 전문의인 친구에게 모든 상황과 의료기록 등 자세한 정황을 설명했다.
그 결과 남편의 친구는 “빨리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다. 다발성 장기 부전의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조언을 해주었던 것이다.
30일. 엄마는 아침부터 복수가 가득 찬 배로 고통에 신음했다.
간호사데스크에 수 차례 알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엄마의 고통은 응급상황이었음에도 의료진은 6시간을 넘게 지체해 오후 3시에야 병실로 온 것이다.
이날 주치의는 외래진료가 없던 날이었다.
이 일을 항의하자 31일, 레지던트는 주치의가 돌보아야 할 40명의 환자가 있다며 엄마한테만 신경쓸 수 없다는 대답을 했다.
31일이 되었다.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날이다.
이 날은 혈액 내과 레지던트가 신장을 투석하려면 대퇴부 대동맥을 통해 카테터를 삽입해야한다며 수술동의서를 들고 왔다. 어느 병원에서나 수술 전에 가족으로부터 받는, 환자가 죽더라도 의료진은 책임이 없다는 그 수술동의서다.
엄마가 혹 죽을 지도 모르는데 딸인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동생과 남편을 불렀다.
엄마의 증세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해지고 난 다음부터 신경이 예민해진 우리 가족은 의료진에게 불만을 많이 표출했다. 이날도 수술동의서 때문에 수술이 지연되자 의료진과 트러블이 있었다.
20여 분간 입씨름을 하는 동안 남편이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실로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사실로 내려갔던 남편이 의료진끼리 영어로 하는 대화를 듣고는 모든 전말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를 이 지경에 빠트린 것은 바로 슈퍼박테리아였다.
전염가능한 격리병실과 중환자실이 한 공간에
11월 1일. 엄마는 마침내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마침내’라는 단어를 이렇게 써야 하다니…
하지만 의료진과 실랑이를 했었어도 옮길 수 없었던 중환자실로 결국 옮겨왔다.
중환자실은 일반병실과 다른 점이 별로 없다.
환자를 접견하는 가족이나 간호사도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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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된 혈액암 환자가 입원한 중환자실에는 0살 짜리 아기도 같은 병실 안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
슈퍼박테리아는 포자 형태로 떠돌며 호흡기로 감염이 된다고 들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엄마의 문제만으로도 우리는 너무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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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의료진은 엄마가 신장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투석받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 레지던트는 ’24시간 투석’을 권했다.
그는 “2시간 투석과 24시간 투석법이 있다”면서 “어느 쪽이든 양날의 칼”이라고 우리를 설득했다.
환자 가족에게 이런 말은 너무 아프다.
그러나 24시간 투석을 하기로 결정한 뒤 남편이 의사친구에게 문의해 들은 말은 달랐다.
그에 따르면 24시간 투석은 세균에 완전 노출된다는 것이다.
S병원 의료진은 24시간 투석시 세균감염의 위험성을 가족에게 고지하지 않았다.
11월 4일.
1일 접견 당시 30일 긴급상황에 반나절 넘게 의사가 지체한 사실에 대해 항의하자 “할 말이 없다”던 주치의는 4일에는 “30일 오후 3시전에 자기가 왔어도 경과는 똑같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주치의의 이 말은 내 귀에는 “포기한 환자”라는 말로 들렸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살려보고자 오로지 의사의 손길과 입만 바라보고 있는 환자가족에게 일말의 기대조차 꺾어놓는 발언이었다.
11월 7일. 격리 병실로 옮기다.
사태가 위급하다는 판단을 의료진이 그때서야 한 것 같았다.
엄마는 격리병실로 옮겨졌다.
말이 격리병실이지 중환자실과 같은 공간 안에 있다.
중환자실의 창문 양쪽 가장자리 벽과 창문 반대편의 데스크가 있는 한쪽 벽, 일인용 침상이 있는 작은 방들이 격리실이다.
중환자실 침상 15개 중 1, 2, 10, 11, 12, 13, 14, 15번 침상이 격리실이었다.
격리병실에 들어갈 때는 방호복과 마스크, 비닐 장갑을 착용하고는 나올 때 침상 옆에 비치한 박스에 집어넣고는 퇴실했다.
중환자실에 입실할 때는 손을 씻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구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는다든지 반도체공장 같은 데서 하는 전신소독 과정은 없었다.
엄마가 있던 병실은 0세부터 6세의 여아들과 40대~70대 환자가 섞여 있었다.
엄마는 9번 침상에 있다가 13번 격리실로 갔다.
쉽게 설명해서 격리병실을 제외하고는 큰 강당에 놓인 침상이 나란히 놓인 그런 공간이다.
게다가 격리병실은 2중문도 아니고 미닫이 문이었다.
일반인이 보더라도 중환자실 전체가 슈퍼박테리아에 노출된 환경이었던 것.
엄마의 중환자실에 있던 상자. 환자를 접견한 사람들이 착용했던 옷과 장갑 등을 박스에 놓고 퇴실한다.
슈퍼박테리아 세균이 실내 공기로 떠도는 병동에서 쓴 옷가지를 단지 이런 함에 놓고 나올 뿐이다.
11월 8일. 욕창에서 슈퍼박테리아가…
엄마의 피부가 “반코마이신 항생제(슈퍼 항생제)가 듣지 않는 균에 오염되었다”고 한다.
등과 엉덩이 욕창에서 그 균(반코마이신 내성장 구균)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죽음의 행로
중환자실로 옮겼던 11월 1일 저녁 7시 레지던트가 우리 가족을 접견실로 불렀던 일이 떠오른다.
병실 바로 옆에 있는 공간이 가족접견실이다.
우리 가족이 그 방에 들어간 우리를 맞은 것은 책상 위에 놓인 한 대의 휴대전화.
레지던트가 당시 했던 첫 말은 “지금부터 하는 대화 내용을 녹취하겠습니다”였다.
엄마의 상태에 관한 말을 하리라고 예상했던 우리 가족은 순간 그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레지던트는 이어 ”김** 교수가 외부에 있어서 휴대전화로 여러 사항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화에서 흘러나온 김 교수의 말은 마치 준비해 둔 원고를 읽는 듯 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서 부터 전 과정을 의료진이 적확하게 진료하고 시술했다는 의료 기록, 바로 그것을 전화로 들려주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 맞은 편에는 레지던트가, 머리 위에는 CCTV가 그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흡사 앞으로 사고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환자가족에게 대처하는 의료진의 기술적인 방편이랄까,
그런 기미가 역력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바로 옆 방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슈퍼 박테리아는 지금 이 접견실에도 떠돌아 다니고 있을 텐데 말이다.
11월 4일. 엄마는 의식도 놓아 버렸다.
그 배를 하고서 호흡이 가능하도록 기도에 관이 투입됐다.
기도를 삽관하는 문제를 놓고 우리 가족은 또 의료진과 부딪혔다.
단지 남편이 속이 너무 상해 벽을 3번 쳤을 뿐인데 의료진이 안전요원까지 불렀다.
엄마의 온 몸에는 보라색 혈전 자국이 가득하다.
11월 5일. 전 병동에 침구대책이 발령되다.
침구 대책이란 보호자에게 침구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지침이다.
추측컨대 24병동에 입원한 환자(엄마)의 슈퍼 박테리아 감염이 (이제야) 확인이 되었으므로 예방 차원에서 보호자의 침구를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 같다.
S병원이 11월 5일 전체 병동에 고지한 안내문
엄마는 이미 엄마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엄마다.
엄마의 얼굴을, 배를 날마다 쓰다듬었다.
엄마를 S병원으로 몰고 온 우리를 원망하며…
그리고 엄마는 딱 11일을 세상에 더 머물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우리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더 알게 되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비밀들
엄마에게 처방한 벨케이드로 일본에서 2005년 한 해에만도 사망한 환자가 15명이었다는 사실을 김** 교수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
엄마의 병상일지에는 날마다 “별 차도 없음”이라는 말 밖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는 것.
대신 “환자의 사위가 벽을 3번, 주먹으로 쳤다, 오후 5시 47분” 등 우리 가족의 항의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기록됐다는 사실.
날마다 의무적으로 기록하게끔 되어있는 차트 중 일부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설사 검사를 하지 않은 10월 25일 설사 검사를 한 것으로 의사지시 사항에 기록된 점.
28일 안** 레지던트의 교대일지가 누락된 점,
29일 차트에 30일 투약한 약재가 기록된 점,
30일 차트에도 31일 투약할 약 이름과 31일 날짜가 기록된 점 등이 이를 입증한다.
병원의 중요한 기록물인 환자의 차트가 두 번 이상의 실수가 반복된다는 것은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엄마에게서는 무려 3 종류의 슈퍼박테리아가 검출되었다는 사실이다.
1. 필히 장 괴사나 장 천공을 일으키는 CD균(클로 스트리듐 디피실리).
2. 고 박주아 씨를 사망에 이르게 한 VRE균(반코마이신 내성 장구균).
박주아 씨 또한 별 심각하지 않은 병으로 같은 병원에 입원해 이 세균으로 사망했다.
이 균때문에 엄마의 욕창과 피부 괴사가 발생했다.
3. 폐렴을 일으키는 카바페넘 항생제 내성 폐렴균.
10월 20일, 아니 그 이전 공포의 24병동에 입원했을 때부터 어쩌면 엄마는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됐을 수 있다.
어느 병이나 그렇겠지만 슈퍼박테리아는 면역력이 약한 사람을 공격한다.
병원에 입원하고서 불과 한 달 반 만에 무려 3가지나 되는 슈퍼박테리아가 엄마를 잠식한 것이다.
11얼 14일. 엄마의 심장 박동이 정지했다.
갑자기 의료진들이 심폐소생술을 하겠다며 전기충격기를 들고 온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김** 교수는 가족을 면담한 첫날 벨케이드 요법을 시술받은 환자는 골절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망가질대로 망가진 엄마의 가슴뼈를 압박해서 심장 박동을 되살린다니? 쇼로만 느껴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엄마가 눈을 감은 순간…
이대로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 자세한 설명이라도 들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병원비는 6백만 원 정도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병원의 모든 의료 기록과 동영상 등 증거자료를 모두 준비했었다.
하지만 엄마의 몸을 죽어서까지 칼을 대고 싶지 않아 부검을 않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소송 등 법적 절차도 포기하기로.
막내동생이 엄마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인 영정사진.
막내 아들이 사진기자였지만 엄마의 영정사진을 만들지 못했다.
엄마가 그렇게 가 버릴 줄 몰랐기 때문이다.
계란으로 바위깨기
남편과 남동생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니 그보다도 대한민국에서 의료사고 소송이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걸 너무 잘 알기에 포기한 것이다.
의료전문 변호사에게 문의했던 결과는 이렇다.
“소송을 해서 승소해봐야 겨우 2천~3천 만원 받을 의료사고면 안 하는 게 낫다.
그 액수에서 수임료를 떼어서 받자고 복잡하고 전문적인 의료자료를 뒤지고 대형 로펌을 낀 병원을 상대할 변호사는 한국에 없다”는 것.
또 의료사고를 담당해본 경험이 있는 경찰관에게 물어본 결과는 이렇다.
“부검을 해서 국과수로 보내요. 국과수는 그걸로 의견서를 작성해 경찰로 다시 보냅니다. 그러면 그걸 최종적으로 법적인 판단을 누가 하는지 아십니까? 의사협회에서 해요. 의사협회가 누굽니까? 다 의사들입니다”.
한국에서 의료소송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추측하는 엄마의 사인은 슈퍼박테리아이건만 의료진은 내린 엄마의 사인을 ‘폐렴’이다.
소송을 않기로 결정한 우리 가족은 원무과에서 병원비 정산을 미룬 채 장례 절차를 시작했다.
병원비를 지급하면 엄마의 사인을 폐렴으로 규정한 병원 진단을 받아들이는 게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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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내면 장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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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무과에서 돈을 안 내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한다.
그것도 고압적으로 거의 반 말 투로. 이것이 그 병원에서 억울하게(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정황이 충분한) 세상을 떠난 환자의 유족에게 할 일인지 묻고 싶다.
염을 하던 장의사에게 마지막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내가 엄마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자 “손을 대지 말라”고 제지를 하는 게 아닌가.
“병원에서 이 환자는 ***(잘 못 알아 들었다)라고 경고통지가 왔다. 절대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죽어 염 하는 순간까지 사람이 아니라 세균덩어리로 취급 당한 우리 엄마.
엄마는 웃는 얼굴로 병원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후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엄마, 그 병원에 보내서 미안해.
막내동생이 다니던 중학교에 일일교사로 ‘보건 건강 사춘기 성교육’ 등을 수업 중인 젊은 시절의 엄마
막내는 염을 마친 엄마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엄마, 간호사로 이 세상에 정말 좋은 선물을 하고 가는거야.
엄마로 인해 다른 아픈 환자들이 조금 더 깨끗한 환경에서 치료받게 되었어.”
이 말을 할 때 슬펐으나 막내가 대견해보였다.
승윤이는 12년 차 기자다.
엄마의 죽음으로 승윤이는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할 일을 정했다고 했다.
국회에 엄마 이름의 법을 만들 것이라고…
한편 고 박영자 씨의 사위 이** 씨는 특히 억울한 이유를 따로 설명했다.
장모가 처음 설사 증세를 보였을 때 설사를 검체로 균 검사와 PCR 검사를 했더라면 24시간 안에 슈퍼박테리아로 말미암은 병인지 식별이 가능했을 터인데 S병원에서는 종래 해오던 대로 가래, 소변, 혈액 만을 검체로 한 세균배양법을 고수해 진단과 대처가 늦었다는 것이다.
슈퍼박테리아용 항생제를 적절한 시기에 투여했다면 박영자 씨가 사망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유가족들은 처음 부종과 복수가 악화됐던 10월 25일경이라도 치료를 했더라면 죽지는 않았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고 박영자 씨가 설사와 복부 팽창 등 슈퍼박테리아 감염 증세가 완연했을 때, S병원에서는 슈퍼항생제가 아니라 곰팡이균을 억제하는 항진균제를 투여했다. 그리고 생리적 식염수와 이뇨제 만을 투여하고 환자가 슈퍼박테리아와 싸우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고인은 한 마디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슈퍼항생제가 아니라 항진균제를 투여한 것, 그래서 환자가 끝내 쓰러진 게 과연 적절한 처방이었는지를 세상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첫댓글 정말 장난이 아니네용
모르겠지만 남 일 같지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