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율리아나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인 아녜스(Agnes)는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리에주(Liege) 교외의 레틴느(Retinnes)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다섯 살 때 고아가 되어 고향 인근 코르닐롱산에 새로 설립된 시설에서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도와 봉헌 생활을 접하고 수녀들의 봉사활동을 거들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던 성녀 율리아나는 13살에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또한 일찍이 성체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이미 10대 때에 여러 차례 기도 중에 성체 환시를 경험했다. 반복되는 환시를 통해 성녀 율리아나는 전례 중에 교회의 생명과도 같은 성체를 공경하고 현양하는 축일이 없음을 일깨워주셨음을 깨닫고 성체 축일 제정을 원했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1225년에 수녀원장으로 선출된 후 성녀 율리아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성체 축일을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자신의 고해 사제에게 환시 사실을 고백했고, 이어 여러 신학자와 주교들과 접촉하며 환시의 진실성을 확인해 갔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오해도 받고 제재를 당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리에주의 주교가 1246년 교구 내에서 처음으로 ‘주님의 성체 성혈 축일’을 제정해서 전례 중에 기념했다. 그런데 리에주의 주교가 그해 말에 선종하면서 성녀 율리아나의 사도직 활동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 규칙을 도입해 엄격한 규율을 되살리려고 했지만, 성직매매로 사제가 된 한 성직자의 모함으로 수녀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성녀 율리아나가 살던 리에주 지역은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뉘어 종교적 · 정치적으로 갈등이 극심했었다. 성녀 율리아나는 일단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 지내면서 모든 상황을 기도로 용서하고 참아냈다. 그 후 지인의 도움으로 나무르(Namur) 지역의 시토회 수도원에 피난처를 마련해 은수자로 살면서 여생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 제정과 보급을 위해 애쓰며 성체 신심을 현양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258년 4월 5일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포세스라빌(Fosses-la-Ville)에서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성녀 율리아나가 선종한 후 1261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누스 4세(Urbanus IV)는 성녀 율리아나와 같은 성체 환시를 체험한 후 당시 몇몇 나라에서 지켜오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을 보편교회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자 했다. 그래서 당대 석학들에게 성무일도와 미사 전례문에서 사용할 성체 찬미가 작성을 맡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월 28일)의 성체 찬미가를 선택해 1264년 보편교회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을 지내도록 선포하였다. 성녀 율리아나는 1869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96년 5월 28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정 750주년을 기념하는 서한에서 그녀에 대해 언급하였고,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 또한 2010년 11월 17일 일반알현에서 성녀 율리아나의 삶과 성체 성혈 축일 제정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해 칭송하였다. 리에주의 성녀 율리아나(St. Juliana of Liege)로도 불리는 그녀의 축일은 4월 6일에 기념하기도 하고, 리에주 교구에서는 8월 7일에 더 성대히 기념하고 있다. 굿뉴스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