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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제목을 읽고 당장 알레르기식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혹 있을 지 모르겠다. 그들이 이런 반감을 가지는 것은 일단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왜냐하면 지금이 어떤시대라고 정통 운운하는가고 반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학 사상사적으로 볼 때 지금은 정통신학의 시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신학 사상사적으로는 16세기와 17세기를 정통시대로 잡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전통이 16세기와 17세기 유럽에서 여러 신앙고백서들을 통해서 유지되고 그것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구 프린스턴(Old Princeton)학파를 거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고 또 그것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한국에서도 전개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 정통신학 운운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통신학에 대한 거부 반응은 또한 한국의 정통신학이 온갖 문제들로 중병을 앓아온 한국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가 하는 반문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서라면 더욱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런 문제, 즉 한국신학과 한국교회의 풍토 안에서 정통신학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다루려는 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통신학
한국의 정통신학이 한국신학에 미친 영향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의 정통신학을 규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정통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고 박형룡 박사는 정통신학을 청교도적 개혁주의신학으로 규정했다. 그는 정통신학은 칼빈적 개혁주의에 청교도 사상이 가미되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고백된 신학으로 보았다(박형룡,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 43권 3집, p.11). 정통신학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청교도를 거쳐 칼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학이다. 그러나 그 뿌리를 더 캐어보면 결국 바울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의 정통신앙에까지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칼빈의 신학적 교리들은 어거스틴 교리의 부흥이요, 어거스틴의 교리는 사도 바울의 교리의 부흥이기 때문이다(박형룡, 칼빈신학의 기본원리 , 신학지남 29권 1 집, p.20).
정통신학의 뿌리를 이렇게 사도적 정통신앙에서 찾는다면 결국 정통신학은 성경적 정통신앙에 근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뿌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요,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경에 뿌리를 박은 정통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런 질문은 이상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신학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특징은 곧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한국이 받아들인 정통신학의 특징이 무엇인가고 물어 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 다.
박형룡 박사는 그것을 성경의 절대 권위를 믿는 신앙, 하나님의 주권과 유효적 소명에대한 확신, 안식일 성수와 경건 생활,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외치는 신학, 전천년설 등 다섯 가지로 잡았다.(상계서, 43권, 3집, p.11).
정통신학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 위에서는 대표적 정통신학자의 입을 통한 정통신학의 정의를 살펴보았거니와 정통 신학 바깥에서 정통 신학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특히 한국 신학 전체의 유형 분석을 시도한 학자의 말을 들어 보면 정통신학의 정체(identity)가 보다 분명히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류동식 교수는 한국신학의 광맥:한국신학 사상사 서설에서 한국신학의 세가지 유형을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으로 분류했다.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은 성육신을 삶의 역사적 실현의 모델로 보고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예언자적으로 참여하는 신학으로 윤치호와 김재준에 의해 정초되었으며, 오늘날 기독교 장로회의 신학 전통을 이루고 있다. 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은 한국의 전통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조화를 모색하는 토착화 신학 운동으로 최병헌과 정경옥에 의해 정초되었으며 오늘날 감리교의 신학 전통을 이루고 있다.
이와 반면에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정통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성서의 절대 권위를 강조하는 신학으로 길선주와 박형룡에 의해 정초되었으며 오늘날 예수교 장로회의 공식적인 신학 전통을 이루고 있다(서울:전망사, 1982, pp.28 32).
한국의 세가지 신학 유형을 염두에 두고 정통신학을 규정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정통신학이란 진보적이나 자유적인 사고방식에 대조되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회참여나 문화참여보다는 사도적 정통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사회 현실이나 문화 현실보다는 영혼의 상태에 초점을 두는 신학을 말한다. 즉, 우리보다는 나에, 사회적 적실성(societal relevance) 이나 문화적 적실성(cultural relevance)보다는 영적인 적실성 (spiritual relevance)에, 사회 변혁이나 토착화보다는 복음화에 역점을 두고, 사회 운동이나 문화 운동보다는 사경회나 부흥회를 활성화와 위기극복의 방법으로 사용하며, 박형룡 박사의 조직신학과 박윤선 박사의 주경신학으로 대변된 개혁주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 정통신학의 공과(功過)
위에서 한국의 정통신학을 규정해 보았다. 그러면 이 정통신학이 한국신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사실 영향이 라고 할 경우 무슨 영향을 어떻게 미쳤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정통신학이 위에서 언급된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과 자유주의적문화신학에 이러 저러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때 그 편에서 그런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할는지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신학 풍토 속에서의 정통신학의 공과 과를 언급함으로써 공은 한국신학 전체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미친 좋은 영향으로 보고 과는 좋지 않은 영향으로 보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1) 정통신학의 공(功)
첫째, 정통신학의 공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점을 들 수 있다. 신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선교를 하든, 사업을 하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한 것은 정통신학의 큰공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고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신 우주의 왕으로 보는, 하나님 경외 의식은 역시 정통신학이 조성한 분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산다는 경외 심을 출발점으로 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의식은 아무래도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운행자이시며 심판자이신 왕 중 왕 을 강조한 정통신학의 공헌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정통신학의 공은 성경의 절대 권위의 확립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데서 자연적으로 도출 되는 원리이다. 정통신학의 성경관은 축자영감과 성경 무오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정통신학은 이러한 성경관을 지키기 위해 무척 애를 써왔다. 예컨대, 1934년 제 23회 장로회 총회에서는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 저작권 부인 문제와 김춘배 목사의 여권 운동적 발언(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고 한) 문제가 제기되어 총회가 이들을 정죄하였다. 1935년에는 류형기 목사 편역 단권 성경주석이 제소되어 이를 읽지 못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해방 직후 1947년에는 김재준 교수의 고등비평이 단죄되었고 1966년에는 요나서 문제로 김기수목사(K. Crimm)목사가 한국을 떠나야 했으며 1967년도 미국 연합 장로 교회의 신앙고백이 여지없이 비판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비판 작업은 얼른 보면 지나친 편견과 옹고집의 소산으로 볼 가능성도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절대 권위가 무너지고 나면 신학과 신앙의 절대 기준이 없어지는 것이므로 정통신학은 현대 과학과 자율 이성의 기준에 의한 성경 비평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의 절대 권위를 사수하려는 이러한 충정 때문에 상대주의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오늘의 신학 현실에 그나마도 신학의 절대 준거로서의 성경을 값진 유산으로 남겨준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그대로 넘겨준 것이다.
셋째, 정통신학의 공은 성경이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을 살려준 점이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의 의를 값없이 전가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와 오직 믿음 (sola fide)의 원리에 그대로 보존된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한사코 부인하는 민중신학과 익명의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문화적 다원론이 먹혀 들고 있는 한국의 신학적 풍토에서는 아픈 가슴으로 지켜야 할 유산인데 정통신학은 이것을 한국신학계에 남겨준 것이다.
넷째, 정통신학의 공은 복음의 핵심뿐 아니라 이 핵심과 관련된 주요 교리들을 전해준 점이다. 박형룡 박사의 방대한 조직신학 작품은 비록 그것이 저자 자신이 고백한 대로 개혁주의 학자들의 화원에서 꽃들을 꺽어 만든 꽃다발이라 할지라도 한국신학계에 선사한 아름다운 선물임에는 틀림없다. 서론에서 종말론에 이르는 총 7권의 조직신학은 그 방대한 분량에 있어서 한국의 어떤 조직신학자도 이룩하지 못한 대작이다. 필자가 이런 말을 하면 정통신학의 자화자찬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통신학 바깥의 학자가 한 말을 인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같다. 류동식 교수는 박형룡 박사의 교의 신학 2권까지만 간행된 싯점에서 현재 한국 신학계는 저작의 분량에 있어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고 평했다(상게서, p.192). 박형룡 박사의 공헌은 그의 저작의 방대한 분량에서만 평가될 것이 아니다. 그의 교의 신학 전집의 내용과 1935년에 이미 발간된 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과 1961년에 발행된 기독교 변증학 의 내용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다섯째, 정통신학의 공은 조직신학 체계 뿐 아니라 주경신학의 기초와 성경 전권 주석을 한국교회에 선사한 점이다. 전기한 바와 같이 한국 정통신학의 양대 거성 중의 일인인 고 박윤선 박사는 축자영감과 성경무오 및 생명의 책으로 요약될 수 있는 성경관을 가지고 문법적, 역사적, 성령적 성경해석 원리를 채택하여 성경 전권을 칼빈주의 적으로 주해하였다. 그가 화란과 미국의 개혁신학자들을 빈번히 인용하면서 무릎으로 쓴 영감있는 주석들은 한국교회에 성경주석의 토대를 든든히 놓은 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권을 주해하다 보니 다소 피상적으로 주해한 흠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기초 작업이란 맥락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박윤선 박사의 성경 주석은 정통신학이 한국신학에 제공한 주경신학의 노른자 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현재 미국 정통신학의 기수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개교 50주년 (1979)을 맞이하여 박윤선 박사에게 명예신학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도 입증된다.
여섯째, 정통신학의 공은 포괄적인 조직신학과 성경 전권 주석으로써 목회의 내용적 틀을 제공한 점이다. 목회자 가 목회 일선에서 던져야 할 메시지를 준 것이다.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과 박윤선 박사의 성경주석이 없다고 가정해 보라.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목회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온갖 잡다한 복음 아닌 복음으로 홍역 을 치루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목회를 위해 신실한 정통주의 조직신학자와 주경신학자를 주신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일곱째, 정통신학의 공은 개인 윤리의 확립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삶의 지침은 정통신학의 공헌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로서의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에서 얻은 힘으로 말씀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려는 의지를 심어 준 것이 정통신학인 것이다. 일제시대에 풀무불 같은 핍박을 이겨내게 한 것은 정통신학의 개인 윤리 확립의 열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개인의 인격이 사탄 지배하의 사망의 영역에서 그리스도 지배하의 생명의 영역으로 이전되어야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가능하고 그로 인한 능력 공급도 가능하며 그런 능력으로 살아갈 때에 사회에 진정한 의미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처럼 구조악을 사탄으로 보고 귀신 추방을 혁명을 통한 구조악 제거로까지 보는 상황 속에서는 구조의 본질적 변화를 위해서는 개인의 인 격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정통신학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여덟째, 정통신학의 공은 청교도적 초기 선교사들이 정신을 이어받아 복음화에 주력한 점이다. 1907년의 심령 부흥 운동과 만주, 산동성, 시베리아, 일본 등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복음화의 열정은 비록 장로교 안에 속한 자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고 해도 주로 정통신앙을 가진 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라는 기치 아래 복음화가 등한시 내지 무시되는 현실 속에서 영혼 구원의 뜨거운 열정이 정통신학의 영향으로 전개된 것은 하나님께 감사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정통신학의 과(過)
위에서 정통신학이 한국신학에 미친 좋은 영향을 정통신학이 세운 공의 차원에서 다루었거니와 여기서는 정통신 학이 한국신학에 미친 좋지 못한 영향을 정통신학이 범한 혹은 범할 가능성이 있는 과의 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먼저 밝혀 둘 것은 정통신학의 과는 정통신학의 공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이러니칼한 것이다. 정통신학이 공을 세우면서도 바로 그 공헌의 면에서 과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를 강조한 나머지 다른 하나를 놓쳤기 때문이다.
첫째, 정통신학의 과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바로 그 공헌점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충분히 밝히지 못했다 는 점이다. 정통신학이 하나님의 내재성을 말하지 않은 것은아니지만, 사회 현실과 문화 현실 속에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살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성병으로 신체가 썩어가는 창녀가 분만하는 것을 보고, 아, 썩는 시체에서 새 생명이 탄생한다, 하나님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당신의 자궁 속에 있다. 하나님은 밑바닥에 있다. 오 나의 어머니라고 중얼거리며 그녀의 발에 입맞춘 탈옥한 백정 장일담 식의 내재적인 하나님은 초월성이 없는 내재성의 하나님으로서 진정한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정통신학은 내재적인 하나님을 잘 밝히지 못함으로 이렇게 참 하나님을 왜곡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 면에서 과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성경의 절대 권위를 주장한 바로 그 공헌점에서, 축자영감과 성경 무오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마치 기독교가 아닌 것처럼 단죄하는 과를 범할 수 있다. 물론 정통 교단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성경관을 문제시 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성경관이 조금 다른 교단의 학자들과도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며 배울 것은 배우겠다는 열린 자세가 아쉬운 것이다. 또한 역사적. 비평적방법의 파괴적인 비평은 기필코 막아야 하지만 성경을 밝히기 위한 적극적 학문 연구는 권장해야 하는데 정통신학의 양대 거성의 입장에서 조금만 전진하면 단죄하려는 태도는 정통신학 이 자칫 범하기 쉬운 과가 아닐까 한다.
셋재, 복음의 핵심(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한 바로 그 공헌점에서 복음이 사회 현실 및 문화 현실을 변혁시킬 수 있는 누룩인 것을 체계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과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조직신학의 체계를 세운 바로 그 공헌점에서, 조직신학의 방법과 구조에 있어서 서구신학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것을 밝히고 성경의 내용을 한국적 이해를 틀로 표현하지 못한 과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만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서구인과 한국인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인의 특성이 있으며 이 특성이 서구인이 깨닫지 못한 성경 진리를 깨닫는 면과 서구인과 다른 틀 속에서 이해하는 면에서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조직신학의 내용을 구수한 숭늉 냄새 나는 한국적 그릇에 담아 제시할 수 있었으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조직신학이 우리네 삶의 혈관 속으로 깊이 스며들 수 있었을텐데.
다섯째, 주경신학의 기초를 놓았다는 바로 그 공헌점에서 성경의 깊은 맛을 더 밝히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성경 해석을 문법적. 역사적. 성령적 해석법의 차원에서만 다루지말고 더 나아가 성경의 지평과 현대의 지평을 융합시키는 데까지 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서 지평의 융합이란 물론 성경으로 현대를 변혁하는 의미의 성경 중심적 융합을 말한다.
여섯째, 목회의 기본틀을 제공한 바로 그 공헌점에서 목회의 청중 분석적 차원을 밝히지 못한 과를 범했다고 볼 수 있다. 양떼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를 분석하는 아픔 없이 목회를 하다 보니 생각있는 자들은 삶과 유리 된 목회자들의 메시지에 환멸을 느끼고 정통신학의 울타리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일곱째, 개인 윤리를 확립한 바로 그 공헌점에서 더불어 사는 인생의 차원을 등한시한 과를 범했다. 정통신학자로서 유능한 사회윤리 학자가 적은 것이 정통신학이 신학과 신앙의 정통 내용마저도 공격받는 오늘의 현실을 초래 했다고 보면 지나친 말일까 정통신앙을 가지고도 사회의 구조를 성경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 것은 정통신학의 큰 헛점이다. 정통신학은 마땅히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위한 사회윤리 신학이 있어야 한다.
여덟째, 복음화를 강조한 바로 그 공헌점에서 앞서 말한 사회 변혁을 등한시하는 과를 범했다.
위와 같은 정통신학의 과를 지적하는 필자 자신을 세계 교회사 측면에서 볼 때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정통신학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통신학의 두 거장이 소천한 이 마당에 정통신학의 맥을 짚어 보면서 선배들은 그만해도 굉장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다 위의 과는 앞으로 정통신학의 후진들이 고쳐 나가야 할 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정통신학의 과제
위에서 정통신학이 한국신학에 미친 영향을 공과 과의 차원에서 살펴 보았다. 이제 정통신학이 오늘의 한국신학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앞서 제시한 내용에 암시되어 있다. 앞서 제시한 정통신학의 공과 과를 요약해 보면 정통신학은 신학의 핵심을 바로 잡아 주었다는 면에서 공을 세웠으나 핵심을 강조하다 보니 영향의 폭이 좁아지고 핵심을 수호하려다 보니 경직성과 배타성의 과를 범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통신학은 항상 죽은 정통 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정통이 사통(死統)이 된 경우가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대개 그런 길을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통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면 정통은 항상 정행 (正行)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바로 믿는다고 하면서 바로 살지 않으면 야고보가 지적한 대로 송장 신앙으로 전락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정통 속에 안주하면서 파행 을 정통으로 상쇄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따라서 정통신학은 전통 생활에로의 뼈아픈 실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현실과 문화 현실에로 관심을 확대해서 삶의 전 영역을 그리스도의 주권 밑에 굴복시키는 삶의 신학 을 수립해야한다. 이렇게 해야 정통이 삶과 연결되고 그 결과 정통이 사통 (死統)이 아니라 생통(生統)이 되고 사행(死行)이 아니라 생행(生行)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통신학의 활성화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입술로만 중요하다고 고백될 뿐 실제적으로 체험되지 못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정통)을 생명있게 역사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 충만을 통해 생명적을 깨달은 영통 (靈統)과 성령 충만을 통해 생명적으로 실천하는 영행 (靈行)이 없으면 정통신학이 아무리 폭을 넓혀도 죽은 정통 으로 가는 길을 막을 재간이 없다.
칼빈주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삶의 전영역에서 외적 말씀을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활력화하는 방식으로 항상 개혁되는 신학이 될 때 정통신학은 은하수 신학이 아니라 삶의 뿌리 박은 생명의 신학으로 한국신학계의 나침반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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