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는 말입니다.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믿을 만합니까? 그런데 은행만큼 믿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믿을 만합니까? 우리가 투자한 만큼 나오는지 대답을 해 보세요.
만약 믿을 만하면 소망을 굳게 붙잡자는 겁니다. 이건 체험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 분을 믿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맡은 자가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직스러워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직스러워지면 주님이 복을 주십니다. 저는 제 자신을 간혹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볼 때가 있습니다. 저울에 달아보면 아직 가볍습니다. 특히 믿음입니다.
믿음이 함량 미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함량밖에 얻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주님이 채우실 줄 바라고 믿고 인내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된 것은
감사하고 아직 안 된 것은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 달아보니 쓸 만하다, 믿음직스럽다 이렇게 되도록 진행이 되어야 됩니다.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서로를 통해 깨닫자는 겁니다. 격려라는 말은
경쟁적 다툼이란 건데 서로 도와주기를 경쟁적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즉 누가
날 안 도와주나 이렇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으로 서로 도와주라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과 섬김으로 하라 서로 이 다툼을 벌리라는 겁니다.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하는 이 다툼을 벌려야지
어떻게 하면 저 사람보다 내가 높아지나 이런 다툼은 안 됩니다.
“내 속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이 말씀은 돈만이 아닙니다.
저는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저 사람을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도와주나 어떻게
하면 깨우쳐줄까’ 이런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저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게 싫다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도와주기 위해서는 모이기를 폐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가야 사랑이든지 선행이든지 하지 혼자서 어떻게 사랑을 하는 겁니까?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도 집 안에 틀어 박혀서 무슨 사랑과 선행을 합니까?
사람 만나기 싫어지는 이유는 만나기만 하면 자기 한계가 드러나고 마니까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원수가 있어야 원수를
사랑하는 연습을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별별 사람을 다 집어넣습니다.
율법 하에서는 다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월하의 공동묘지입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사랑이나 선행은 없습니다. 무조건 종노릇을 하면 됩니다.
큰 종, 작은 종이 없습니다. 무조건 다 종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서 우리가 사랑과 선행을 배워서 실행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사랑과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연습시키기
위해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집어넣는 겁니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습관적으로 모이는 스타일이 되어서 모임을 폐하는 사람처럼 되지 말라’
이것은 교회에 모이지 않는 문제가 아니고 교회는 오는데 딴따라입니다.
습관성 기독교신자입니다. 이걸 시계추 신앙이라고도 하죠. '이 사람 믿음 좋아'
하는 평을 받지만 교회를 이십년 다녀도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가는 길을 모릅니다.
신앙의 성장에 있어서 고민스러운 것을 서슴없이 말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빨리 자랍니다. 병은 자랑을 해야 빨리 고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거룩하게 앉아서 ‘식사하고 가시죠’하면 ‘좀 바빠서’ 하며
점잔을 뺍니다. ‘저 사람 참 점잖네’ 하고 그 다음 해에 회계집사 시켜놓으면
얼마 안가 펑크 내고 맙니다. 신앙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검증을 받아야 됩니다.
서로 싸워서 치료를 받아야지 교회는 사찰 같은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월하의 공동묘지 같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교회는 논산 훈련소와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어떤 일에서도 모임을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 사랑과 선행이 연습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자격은
완전한 자로 되었지만 아직도 근력이 약합니다. 남을 들어주고 안아주고
내가 남의 부담을 대신 져 줄 만큼 그렇게 강한 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운동을 통하여 믿음의 근력을 키워야 됩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가까워진 그 날을 바라보며 우리가 더욱 서로 권하라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상대방의 믿음의 잠을 깨워주라는 겁니다. 에덴동산의 진입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투어 그 생명의 길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어쩜 총체적으로 기독교는 보이스 피싱에 걸려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접어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설교자가 오늘 설교에 큰 은혜가 될 줄을
믿습니다 하고 나오면 이건 무조건 보이스피싱입니다. 과연 예배를 은혜를 받기 위해
참여합니까? 아니죠. 그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대 놓고 모독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진리를 따라 하나님을 참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말씀을 순종하여... 아니면 은혜를 받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습관적인 신앙은 이미 자기 필요를 위한 실용주의 신앙이 되고 만 겁니다.
그런 모임은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떡 한 몸 한 영이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길길이 뛰는 모임이 아닙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