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讀後記】
원로 역사학자의 ‘추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것들’
- 이양자 교수의 산문집 《해국 그대는》을 받고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나이 들어가면서 고운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양자 교수(역사학자, 동의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가 책의 서문에서 밝힌 인상적인 문장이다.
▲ 부산에서 이양자 원로교수가 곱게 서명하여 보내준 신간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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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을 훌쩍 넘긴 원로 역사학자가 자신의 신간 저서 첫머리에서 왜 그런 ‘자화상’을 한 문장으로 그려냈을까?
“먹먹하고 아린 가슴을 부여안고서 살아온 이야기, 그리운 이야기, 감사한 이야기, 추억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싶다.”
자서(自序)에 그려놓은 저자의 진솔한 모습에서 응축된 사연을 읽는다.
이양자 교수는 블로그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톡을 통해서 거의 매일같이 친숙하게 뵙는 원로학자다.
2023년 수필집 《모차르트를 사과하다》에 이어 두 번째 산문집을 받았다.
이번 책은 누리 소통망을 통해서 보여주지 않았던 내밀한 사연도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인간적으로 친밀감을 주는 소소한 일상의 에피소드도 만날 수 있다.
한 여성의 인생사(史)는 간단하지 않다. 더구나 85 생애를 한 권의 산문집에 풀어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독자는 어떤 대목에 주목해야 하는가.
짧은 글에서 보여주는 생애 단면을 통해 평소 쌓아온 지식인의 인품과 추구해 온 가치를 파악한다.
저자는 “세상이 그렇게 편안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나라 안팎이 그렇고, 내 주위가 그렇고, 자신이 그렇다”라고 말한다.
노학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간답게 이쁘게 살다 가겠다”라고 다짐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답게 이쁘게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어찌 내면의 꽃밭을 가꾸어야 하는가. 『오늘도 즐거운 하루』 제목의 글에 답이 나와 있다.
학원 갔다 오는 손자 같은 학생들에게는 “얘들아 배고프지?” 하면서 어묵을 사주고, 집에 돌아오다가 경비원 아저씨에겐 “수고하신다”라고 인사하면서 요구르트를 건넨다.
이런 일을 일주일에 두어 번씩 한다. 경비원 아저씨에게는 월 2회 일요일 아침 9시 전체 회의 시간에 두유 한 상자를 가져다 나눠드린다.
노학자는 말한다.
“비싼 것도 아니고 별것 아니지만 인사하면서 하나씩 나눠드리면 좋아하신다. 그러면서 많은 대화를 한다”
지극히 순수하게 느껴지는 이웃 할머니 같은 순박한 인정의 한 단면이다.
사랑과 인정을 베푸는 일은 이렇듯 따뜻하고 순수해야 한다. 과장이나 가식이 끼어들지 못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다른 의도가 전혀 없다.
남에게 베풀면 내가 행복하다. 삭막하고 거친 세상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온갖 세상 풍파 다 겪은 노학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둡고 슬픈 일도 많다. 하지만 조용히 혼자 촛불을 밝히고 합장 기원하면 자비로운 부처님이 보이고, 사랑을 베푸는 하느님의 축복과 은혜로움이 쌓인다.
살다 보면 누구나 뜻하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노학자가 뜻하지 않은 일로 경찰서에 불려갔다. 80 평생 살아온 원로 교육자로서 처음 겪는 일이다.
담당 경찰관의 겸손과 친절에 대해 놀라워한다. 젊은 경찰의 탁월한 지성(知性)에 감탄한다. 불미스러운 일로 조사받으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손주 또래의 젊은 경찰관의 숨겨진 가족사까지 듣게 된다.
그만큼 공적인 대화가 사적인 사연 나눔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노학자의 교육적 인품에 기인한 것이 아닌지 독자는 짐작한다.
이날 노교수가 만난 경찰관은 단순히 친절 베풂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반듯한 공직관을 가진 모범 경찰관이었다.
한 달쯤 지나 “이 문제는 아무 일 없이 잘 해결됐다”라는 편지를 경찰관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노학자는 친절한 경찰관에 대해 인간적인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지만, 공직자로서 청렴이 몸에 밴 경찰관은 원로 시인의 순수한 마음이 담긴 책 선물마저 ‘대가성’으로 보고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원로 교수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렇게 따뜻하다.
책을 읽고 우선 급한 마음에 인상 깊은 몇 대목을 소개하다 보니, 정작 책 제목에 대한 언급이 늦었다.
《해국 그대는…》은 암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담은 ‘사랑의 시(詩)’다.
내가 사랑하는 가을꽃 해국 그대는 어이 바닷가에만 피는가.
그 청초하고 애절한 모습 파도에게 보여주려고 그대는 푸른 파도를 사랑했나봐 파도가 가버린 뒤 그걸 알았겠지
그래서 못 잊어 늘 바닷가에만 주저앉았나 보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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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9월 초순, 국향(菊香)의 계절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해국(海菊)’은 한 노학자의 그리운 배우자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란한 세상일수록 ‘그리운 사람’은 해국처럼 다가온다. 해국의 잎은 아침나절에 꼿꼿하고 한낮에 생기를 잃다가 해가 지면 활기를 되찾는다고 한다.
▲ 이양자 교수의 신간 산문집 표지 <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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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국은 다른 식물들과는 달리 날씨가 추워지면서 점차 빛을 발한다고 한다. 가을에 피는 옅은 보라색 꽃도 예쁘지만 서리가 내려앉은 잎의 모습도 더욱 아름답다.
이양자 원로교수가 그리워하는 분도 그럴 것이다. 푸른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그를 그리워하는 작가는 울지 않는다.
작가는 “먹먹하고 아린 가슴을 부여안고서 살아온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슬픔을 한 차원 승화시키면 ‘곱게 익어 가는 삶’이 된다.
그리하여 『오늘도 즐거운 하루』를 만들어 간다. 저만큼 보랏빛 해국이 아름다운 원로 시인의 모습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다. ♧
2025. 9. 4.
대전에서 윤승원 소감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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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양자 교수님 카톡 답장
카톡 답장2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댓글
◆ 낙암 정구복(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5.09.05. 04:58
이양자 교수님은 참다운 지성인이십니다.
이웃에 따뜻한 인정을 베푸심은 꾸밈없는 인간의 향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에 사랑을 베푸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윤 선생님과 두 분의 만남은 한국문학계의 값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윤 선생님의 글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희망을 가집니다.
감사합니다.
▲ 답글 / 윤승원
홀로 외롭게 사시지만 외롭지 않게 시와 수필을 쓰면서
삶의 꽃밭을 아름답게 가꾸고 계십니다.
책을 낸다는 것은 공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연로하신 어른으로서는 더구나 쉽지 않은 일이지요.
낙암 교수님께서 저의 졸고 소감을 따뜻하게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