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동생과 섬집 아기
김윤선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가면, 섬집아기의 노래가 들려오면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뭉클 해 진다.
어린시절 눈을 뜨나 감으나 동생을 업고 멀리 장사나간 엄마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남의 집 품앗이 모를 심을 때, 엄마 몰래 학교를 가면 학교까지 와서 동생을 업혀 주었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동생을 업고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 가면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내렸다.
어른들이 모심기 하는 주변을 돌면 친구들 공부하는 모습만 머리에 떠 올랐다.
나는 너무 화가나서 등에서 잠자는 동생을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 동생은 오래동안 놀라고 아파서 울었다.
나는 행여 어머니가 들을까 대 밭 숲속으로 들어가서 동생과 함께 울었다.
동생이 다섯 살 무렵 집 앞 웅덩이에 빠졌다. 저녁밥을 하고 있을 때 집 앞에서 아이들 우는 소리가 나더니 사내아이가 쫓아와 주야가 물에 빠졌다고 했다. 청청 벽력같은 소리에 달려가니 웅덩이에 빠진 동생은 물위에 떠 있었다. 그때 마침 휴가 와서 잠을 자던 큰 오빠가 뛰어나와 다 죽은 동생을 건져서 다리를 쳐들고 몸에 물을 뺐다. 동생은 입과 온 몸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숨을 몰아쉬며 똥까지 싸며 다 죽어 있었다. 오빠와 나는 울면서 동생의 다리를 치들고 흔들며 불러 보아도 아무런 숨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눕혀놓고 약 십 분 동안 온 몸을 흔들어 대니 몰아쉬는 숨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다리를 잡고 거꾸로 물을 빼고 눕혀서 배와 가슴을 호흡 하니 맥박이 조금씩 뛰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혼수상태에 있는 동생을 빨리 집으로 옮겨 따뜻한 방에 눕혀 기적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다. “불쌍한 저의 동생을 살려 주세요.” “주야 죽으면 안 돼!” 싸늘한 몸을 만지며 곁에서 “주야 눈 떠 봐” 좌불 안석 앉아있었다. 약 두 시간 지나니 부스스 눈을 조금 뜨는 동생을 보며 “주야 덥석 안으며 왜 물어 빠졌어?” 힘없는 동생은 눈을 감은 채 간신히 “언니야 연이 연이가 밀었다.” 겨우 들릴 말락 말을 하는 동생에게, “옆집에 사는 연이가 그래 알았어! 이제 살아났으니 됐다.” 동생을 안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죽어라는 팔자는 아닌가 보다 동생이 살아났으니 감사의 눈물이 솟구쳤다.
좀 모자라는 동생은 어머니가 유산을 시키기 위해 무슨 약을 먹었는지? 새벽이면 배 가죽을 웅켜 잡고 피멍이 들도록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있는 자식도 못 키우는데 또 무슨 원수가 져서 생겼나?” 배 가죽이 살이 떨어져 나갈 만큼 아프도록 죽이려도 죽지 않고 태어난 동생을 어머니는 늘 내 죄라고 하시며 죄의식을 느꼈다. 네 살까지 말도 잘 못하고 걸음도 걷지 못하는 동생은 열 살 까지 회충 배를 앓았다. 어머니가 오빠도 볼겸 잡화 물건도 할겸 부산에 가시고 나면 밤새도록 동생을 업고 같이 울면서 밤을 지세기도 했다. 학교는 밥 먹듯이 결석을 하며 결석한 다음날 학교를 가면 음악도 배우고 시험도 쳤다고 하면 나 혼자 모르니 화가 나서 목젖이 아파왔다. 결석 반 출석 반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늘 어머니와 동생 생각만 하면 섬집 아기를 부르던 생각이 난다.
오랜 세월이 흘러 우리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소녀 가장이 되어 한집에서 약 5년을 살았다. 시골에서 어머니와 여동생 둘과 오빠한명 같이 살면서 동생을 목욕과 머리 감는 것 옷을 입는 것까지 모든 것이 나의 혼신이었다. 나이가 들어 비슷한 사람을 만나 시집을 보냈는데 병이 들어 수 없는 죽음속에 사경을 헤매며 60세 까지 살았다. 합천에서 동생과 닮은 딸 둘 키워 시집보내고 남편과 같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중병이 들어 먼 곳으로 가버렸다. 모든 것을 딸처럼 동생처럼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간 자식처럼 보호하며 살 때 농사지어 쌀을 보내고 고추 참기름을 짜서 언니 먹어 라고 은혜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랜 병마는 동생의 한많은 세월을 마감하고 먼곳으로 간지 6년이 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어디서 섬집 아기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가슴 깊은 곳에서 무엇이 울컥 올라오는 듯 온 몸에서 전율이 눈물되어 흘러 내린다.
첫댓글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네요.
업어 키운 동생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랬는데
결국 돌아가셨군요.
고통 없는 세상에서 잘 살기를 빌어 봅니다.
선생님도 그만 아파하시고요.
국장님 항상 고마워요.
문신처럼 새겨진 상처는 죽는날까지
없어지지 않아요.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네요
마음 아픈 이야기 입니다.
문신처럼 새겨진 흔적도 세월만 한 약은 없다고 합니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도 비라는 세월 앞에는 그 흔적도 엷어진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그분도 잘 알고 계시리라 느껴집니다.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