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고 떠돌고… 아픈 과거 간직한 신라 종
운천동 출토 종 당좌 흡사 통일신라 9세기 중엽 조성 1379년이전 일본 이동 추정 해풍으로 부식돼 손상 심각
이 종은 시마네현(島根縣) 오오하라군(大原郡) 오오타케산(大竹山)의 높은 정상부에 위치한 코묘우지(光明寺) 종루에 걸려 있던 종으로서 바다에 인접한 산 정상부에 위치 한 때문인지 몰라도 해풍에 의한 부식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이 종에 대해서는 대정년간(大正年間, 19 12~1925) 초기에 스즈키 큐유지(鈴木久治) 가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시 대정8년(1919)년에 역사학자인 타카다쥬로 (高田十廊)가 <고고학잡지(考古學雜誌)>에 이 범종의 금석문을 소개한 내용이 보인다. 따라서 꽤 일찍부터 이 종이 존재가 알려져 왔으나 보존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면서 원명 이 없었던 관계로 이후에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종의 외형은 기타의 통일신라종과 비교해 볼 때 구경에 비해 종신이 상대적으로 길어 다른 통일신라종과 달리 세장(細長)한 느낌을 준다. 생동감 없이 왜소해진 용두는 얼굴 을 천판 위에 붙이고 있으나 윗입술이 앞으로 들려져 있고 작은 뿔과 불거진 눈, 부푼 듯 크게 강조된 귀는 그다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지 못하였다.
용의 목 부분 역시 섬약하며 두 발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손상되어 전혀 남아있지 않 다. 상단 부분이 손상된 세장한 음통에는 아래 단부터 입상(立狀)의 연판문대와 접속부 에는 화문이 연결된 사격자문(斜格字文)을 두었고 상단으로 앙,복련의 연화문을 높게 부 조하였다. 천판(天板)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바로 상대와 연결되었다.
상대(上帶)에는 상, 하단에 융기선을 돌리고 그 사이로는 1조의 당초문만을 간략하게 시문하였다. 특히 상대 아래 붙은 방형의 연곽대(蓮廓帶)에는 서로 다른 문양으로 장식 한 점이 주목된다. 즉 연곽의 양측 종대(縱帶) 부분에는 갑옷을 입은 신장상(神將像)과 그 아래로 무릎을 꿇고 합장한 모습의 동자상(童子像)을 반원형 테두리 안에 배치한 반 면에 하단의 횡대(橫帶)에는 당초문만을 간략하게 시문한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한 연곽대 내에서 주악상이나 천인상을 표현한 것은 상원사 종 양식에서 볼 수 있지만 그보다 훨씬 도식화되었고 앞서 소개한 운천동 종의 연곽대에 표현된 보주와 당 초문과도 차이를 보인다. 아울러 연곽의 내부에는 9개씩의 연뢰(蓮)가 표현되었으나 성 덕대왕신종, 운쥬지(雲樹寺)종과 마찬가지로 연판 위로 돌출되지 않은 화문좌(花文座) 의 형태를 따랐다.
그리고 하대(下帶)의 문양은 상대와 달리 두 종류의 반원권 문양을 반복 시문하였는 데, 그 하나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을 중첩 시문한 반면 다른 하나는 천인상을 중심 문 양으로 한 점이 다르다. 이는 연곽대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서로 다른 지문판(地文板) 을 반복 시문한 것으로서 문양을 시문하는데 있어 장식성보다 편리함을 추구한 시대적 인 변화라 생각된다.
종신의 하부에 치우쳐 앞, 뒤 두개 배치된 당좌는 삼중원(三重圓)으로 구성되어 내구 에는 1+6개의 연과와 그 바깥에 15엽의 연판문을, 그리고 가장 바깥쪽으로 복잡한 형태 의 당초문이 낮은 부조로 시문되었다. 특히 이 당좌의 구성과 세부의 형태가 앞서 소개 한 운천동 출토 통일신라종의 당좌와 거의 흡사하여 동일 문양판을 반복 사용하였거나 최소 같은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독특한 당좌의 유사성으로 인하 여 이 종 역시 통일신라 9세기의 제작임을 입증케 해 준다.
당좌와 엇갈리는 직각 방향의 종신 면에는 천의를 날리며 구름 위에 앉아 악기를 연주 하는 모습의 주악천인상이 각각 1구씩 부조되었다. 그 중 1구는 비파(琵琶)를 연주하는 모습이며 반대쪽 상은 배 앞에 놓인 요고(腰鼓)를 양손으로 치는 모습이다. 다른 장식 문양에 비해 이 주악천인상 부분은 세부의 디테일이 잘 살아있어 나름 생동감이 느껴 진다.
특히 비파를 타는 주악상의 경우 국립청주박물관 소장의 운천동 출토 통일신라종의 주악상과 크기나 형태면에서 매우 유사하며 당좌의 표현 역시 거의 동일한 점에서 이 두 범종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다만 운천동 출토 종은 다른 쪽 비천 상이 종적(縱笛)을 부는 모습인 점에 비하여 이 종은 요고를 연주하고 있는 점에서 변화 를 보인다. 이러한 요고는 8세기 후반의 운쥬지종부터 등장해 833년명의 죠구진자(尙宮 神社) 소장 연지사 종에서 사용된 주악기로서 코묘우지종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 으나 횡적 대신에 비파를 연주하는 새로운 구성이 등장한 점은 이 종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코묘우지 종이 운천동 출토 종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의 작품이 아닌가 짐 작된다. 따라서 코묘우지 종은 종신의 세장한 형태와 용두의 섬약함을 비롯하여 도식화 된 세부의 문양 표현을 통해 연지사 종(833) 보다는 조금 뒤늦은 9세기 중엽에서 약간 후 반 쪽에 가까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종신에는 제작 당시의 원명은 남아있지 않으나 한쪽 여백 면에 이 종이 일본으로 건너 온 다음의 추각명(追刻銘)이 전, 후 3차례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각각 1379년, 1408년, 1492년에 해당되는 연호가 확인된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1397년에 해당되는 명 문은 8행 63자로서 그해 5월5일 불일산 죠우키젠잉(佛日山 增輝禪院)에 시납된 내용이며 3행 46자로 이루어진 두 번째 추각명은 1408년 11월29일 죠우키젠잉(增輝禪院)의 인근 에 소재한 복전산 호우토쿠젠지(福田山 報德禪寺)로 팔려간 사실을, 다시 1492년의 11월 에는 지금의 소장처인 대죽산(大竹山) 코묘우지(光明寺)로 이관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 종이 원래 통일신라 어느 절에 걸려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1379년 이전에 일본의 시마네현으로 건너오게 되어 죠우키젠잉(增輝禪院)에 처음 시납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슨 이유인지 3번이나 소장처를 옮겨가게 된 것과 특히 두 번째 절에는 이 범종이 팔려 간 사실을 볼 수 있어 당시에 우리나라 범종이 돈으로 거래된 가 슴 아픈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종이다. 비록 소장처나 정확한 제작시기 등의 명문은 남아있지 않지만 운천동 출토 종과 거의 동일한 문양을 지니고 있어 운천동 종이 통일신 라 9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것을 규명해 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 준 매우 귀중한 작품이 되고 있다.
▶ 여음(餘音)
필자가 이 종을 조사할 당시까지 종은 경내 높은 곳에 만든 종각에 걸려 소금기 많은 해풍을 고스란히 받아가며 그때까지 타종되고 있었다. 종을 조사한 직후 주지 스님에게 이 종의 보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을 알리고 하루빨리 실내로 넣어주기를 요청한 바 있는데, 그 후 다행히 이 종은 떼어져 별도로 보관하게 되고 새로운 복제 종을 국내의 성종사에서 희사 받아 타종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로서 이처럼 일본에 건너가 있는 한국 범종에 대한 반환의 요구에 앞서 정확한 현상과 보존 상태를 파악하고 적절한 자문과 보존 처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는 것도 우리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에 선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불교신문3303호/2017년6월7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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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
쇠는 소금기에 젤 약한데 그래도 지금까지도 타종을 하였다니
대단합니다.
필자에 의해 내려져서 잘 보관을 하고 있다니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