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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영국의 스튜어트(Stuart)왕조(1) - 제임스1세와 왕권신수설
임광자 추천 0 조회 201 08.05.09 08: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uart)  (1) - 제임스1세와 왕권신수설

 

가. 제임스1세(James I / 1566 ~ 1625)

 

(1) 앵글로의 땅 잉글랜드

 

영국이란 이름의 잉글랜드우리들의 생활 용어에서 흔히 점잖은 사람을 가르쳐 영국신사(英國紳士)라고 부른다.

 

검은 실크헤드와 정장(正裝)의 옷 차림, 멋으로 들고 다니는 스틱, 날씨와 관계없이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여유, 품위 있는 메너, 온화한 미소 등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진 영국신사란 매우 교양적이고 예의 바른 남자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Gentry 혹은 Gentleman을 신사라고 번역한 것은 신(紳)의 의미가 옛 중국에서 예장(禮裝) 때 옷 치장을 하기 위해, 매는 큰띠를 의미하고, 이런 큰 띠를 맬 수 있는 사람은 학덕이 높고 예절바른 인사였다는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어느 국어 사전에는 신사란 "교양 있는남자"로 표기되어 있다. 용어가 무엇이든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과 이들 젠트리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자.

 

영국에서 젠트리는 귀족(Nobility) 보다는 아래에, 요먼리(Yeomanry : 자작농) 보다는 위에 있었던 영국 특유의 중간 신분계층이었다.

 

이들은 중세 말기 정치적 변동 기에 많은 토지를 구입해서 신흥 지주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치안판사 등을 맡아 지방의 자치행정에 관여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독자적인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여 귀족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여기에 토지를 가진 의사, 법률가, 지식인 등이 포함되어 범위가 더욱 넓어 졌는데, 중요한 것은 이들의 다수가 영국의회(하원)에 진출, 엘리자베드1세 치하 때는 젠트리 출신이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어서 국왕도 중요 현안이 있을 때 마다 이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젠트리의 모든 행위가 얼마나 예절 바르고 학덕을 겸비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당시 영국의 관습이나 법과 전통을 정확히 모르는 입장에서 이해 하기란 매우 어렵다. 무적함대를 격파시킨 드레이크나 호킨스가 스페인에서는 해적으로 취급되었지만 영국에서는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엘리자베드 여왕도 이들을 젠트리 보다 한 단계 높은 기사(騎士)로 서임했다.

 

당시의 유럽 각국은 교전 중인 적국 상선을 나포할수 있는 권한을 민간에게도 주고 있었는데, 이러한 권한을 가진 민간 소유의 무장선박을 사나포선(privateer / 私拿捕船)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이 나포한 것은 적국 상선(商船)뿐만 아니라 전쟁과 아무 관계없는 외국 상선도 그들에게는 사냥(?)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이 외국 상선으로부터 화물과 돈을 약탈하면, 사전의 계약에 따라 국왕과 몫을 나누었다. 해적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사나포선의 대표적인 인물이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시킨 드레이크나 호킨스 등으로서, 이들은 칼리브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해적행위를 하기도 하고,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수출(?)하기도 하였다. 이런 다른 모습도 영국 신사들은 가지고 있었다.

 

또 하나 영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명칭에서 오는 혼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 영국의 정식 국가 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영국 의사당과 런던의 명물 2층 버스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말하는 영국이란 브리튼 섬에 있는 England 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그리고 북 아일랜드 등이 합쳐 있다는 것이고,

 

이들 간에는 종족, 언어, 전통, 관습, 종교 등에 차이가 있고, 이런 이질 집단이 하나의 국가 단위로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질적인 집단들이 잉글랜드에 정복되기 전 까지는각자 독립국가를 형성하고 있다가, 서서히 잉글랜드에 병합되었는데, 대체적인 그 과정은 장미전쟁(1455 ~ 85) 중에 웨일스의 대부분이, 1603년 제임스1세가 영국 왕이 되면서 스코틀랜드가, 그리고 1801년 합동 법에 따라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와 합쳐짐으로써 연합왕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 후 1948년 아일랜드가 분리 독립하여 아일랜드 공화국이 되었고, 아일랜드 섬 중에서도 종교와 주민 분포가 아일랜드와는 다른 벨파스트 인근의 북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떨어져 연합왕국(영국)에 남게 되었다.

 

앵글로(Anglo)의 땅(land)이란 의미를 가진 England에 앵글로 인들이 들어 간 것은 게르만족의 이동과 때를 같이 하며, 그 후 9세기 초,샤늘마뉴 대제(칼 대제)의 작센 정복으로 작센(색슨)인들이 대거 잉글랜도로 건너가 앵글로-색슨 인의 땅이 되었다.

 

그러다가 1066년 노르만디 공 윌리엄의 정복으로 노르만왕조의 성립과 함께 유럽의 봉건제도 등 유럽문화가 런던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이 때 까지 잉글랜드는 브리튼섬의 동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잉글랜드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 英吉利國이며 이를 줄여서 영국이라 부르게 되었고 우리들은 이 시기의 영국도 브리튼 섬 전체를 지배한 나라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잘 못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영국이라고 부르는 잉글랜드는 중세이래 근세까지 브리튼 섬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가 점차 세력을 넓혀 전 브리튼 섬을 통합하고, 아일랜드까지 병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제국주의 시대(1870 ~ 1914)에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경영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까지발전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별도로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영국령 북 아일랜드에서는 아일랜드 전체의 통일을 주장하는 아일랜드공화국 군(IRA)에 의한 폭탄 테러 뉴스가 가끔 씩 외신의 머리기사로 등장하고 있고, 이들간의 민족(국가)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일랜드로서는 국토가 분단되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잉글랜드(영국)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2) 스튜어트 왕조의 시작과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

 

17세기 초 앵글로의 땅, 즉 잉글랜드에서는 엘리자베스1세 여왕이 1603년 3월에 병사하자 평생을 처녀 왕으로 살았던 그에게 후사가 있을리 없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고모(姑母)가 되는 마거릿(Margaret Tudor1489 ~ 1541 / 헨리 7세의 딸)의 증손에 해당하는(친·외가를 구분 없이 따져서)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튜더왕조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시 영국 왕이 되면서 제임스 1세가 되었다(1603)

 

이렇게 해서 잉글랜드는 헨리 7세를 개조(開祖)로 하는 튜더왕조는 단절되고 스튜어트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수와 성문화 되어 있지 않는 선례(판례)의 법을 줄기차게 내 세우는 의회와의 충돌로 스튜어트왕조의 영국 지배는 순탄하지 못했고,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치러야 했다. 결국 제임스1세는 암살 당했고, 그 후손들도 처형, 혹은 추방되는 등 많은 수난을 껶여야 했다.

 

엘리자베드 여왕이 죽은 후, 잉글랜드의 국왕 부재를 틈타 스페인은 또 다른 구실을 붙여 침략한다는 설이 분분한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에든버러를 떠나 런던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할 때 까지만 해도 귀족, 젠트리, 서민 등 모든 잉글랜드 주민들은 그를 구세주를 마지하듯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가 즉위 후 처음 내린 첫 명령이 현행범으로 잡은 소매치기 한 명을 재판 없이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국왕의 처사에 영국 인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제임스 1세가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라는 것을 세삼 깨닫게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영국의 법을 몰랐고, 더구나 스코틀랜드에서는 유례조차 없는 의회(議會)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왕권신수설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영국국교회(성공회) 이외의 어떤 종파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는 한, 양자 간의 대결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제임스 1세가 주장하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은그 자신이 썼다는 "자유로운 군주국의 참된 법"(The true Lowes of freeMonarchies 1598)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자유로운 군주국이란 국왕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권한에 의해 만사를 그의 뜻대로 처리해 나가는,....군주에게 자유로운 나라를 의미하고 왕은 어떤 신하의 조언 없이도 자유 자재로 법률이나 칙령을 제정할 수 있다....."

 

1609년에 소집된 의회에서 그가 행한 연설 중에는"...왕은 신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 이유는 왕은 이 지상에서 신의 권력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왕은 모든 신민을 다스리고 신 이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왕권을 침해(侵害) 해서는 안된다. 왕의 절대적 대권은 법률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논의 한다는것은 무신론적(無神論的) 불경(不敬)이며, 용서 받을 수 없다....선량한 그리스트교도는 신의 말 속에 계시(啓示)된 신의 의지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지 않듯이 왕의 의지나 행동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면 안된다....."

 

(3) 영국의 전통 코먼 로(Common Low)

 

타워 브리지가 뒤로 보이는 악명 떨친 런던 탑이런 제임스 1세의 처신에 대해서 영국 국민들이 고분고분하게 따르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반론을 제기할 이론적 근거도 마련되어 있었다.

 

보통법으로 번역(飜譯)되고 있는 코먼 로(common law)가 그것으로서, 국왕이 신민(臣民) 아래 있지는 않으나, 신과 법 밑에 있어야 한다는것이 영국 국민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면 영국 인들이 생각하는 법(코먼 로)은 어떤것인가? 코먼 로가 보통법이라고 번역되지만 관습법에 가깝다. 영국 고래(古來)의 관습을 기초로 하고, 그 후 이에 대립해서 생긴 에퀴티(equity : 衡平法)와 재판의 판례(判例) 등을 기초로 이 시대에 정리하고 집대성 한 것이다.

 

코먼 로의 제 1인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은 에드워드 코크 경(Coke sir Edward / 1552 ~ 1634, 卿)이다. 그는 엘리자베드 치하에서 검찰총장등 요직을 지내면서, 여왕 음해 사건을 사전에 적발하고 민첩하게 처리하는 등 왕권옹호에 앞장 섰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제임스 1세가 영국 왕이 되고는 태도를 돌변, 국왕의 일방적인 전제에 재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의 생각은 "국왕은 뛰어난 천분을 타고 났지만, 영국의 법률에는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민의 생명과 재산에 관한 문제의 결정은 무엇 보다도 법률의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오랜 연구와 경험이 필요하다"....는 등의 법률 전문가로서의 그의 의견은 제임스 1세와는 생각이 딴 판이었다.

 

이런 그를 제임스 1세가 그냥 둘리는 없다. 그래서그는 무신론적 불경죄로 좌천 되었다가 1616년에는 법관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러나 1620년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하고, 다시 국왕에 대한 저항 세력의 중심 인물이되어 국정 전반에 걸쳐 의회의 개입을 싫어하는 국왕에게 "의회의 자유, 선거권, 특권, 입법권, 외교심의권 등은 영국 신민의 오랜 된 기본 권리이며, 유산이다"라고하는 항의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그를 런던 탑에감금하였다(9개월간)

 

그렇다고 의회가 양보할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1621년에소집된 의회에서는 국왕의 심복이며 최 측근으로서, 검찰총장, 상원 의장, 장관 등을 겸하고 있었던 F 베이컨(Francis Bacon / 1561 ~ 1626)을 의회가 수뢰죄(受賂罪)로 고발, 4만 파운드의 벌금과, 일정 기간 런던 탑에 감금, 공직 취임 영구 불가, 의회 의원이 될 수 없고, 궁중 출입도 금지한다는 등의 판결을 선고 받게 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베이컨을 런던 탑에서 1주일 만에 석방시키고, 벌금도 면제해 주었다. 우리들에게는 귀납적 경험론을 주장한 철학자로 더 알려진 베이컨은, 제임스 1세의 배려로 런던 탑에서 풀려 난 이 후 정계에서 은퇴, 학자로서 연구와 저작으로 여생을 마쳤지만, 이런 국왕의 처분에 의회가 반발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재임 중 의회는 고작 네 번 소집되었으나, 의회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곧 해산해 버렸고, 여기에 독일의 30년 전쟁에서 그의 사위이며 신교도인 팔츠백의 구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을 의식해서 우물쭈물 하자 국왕에 대한 영국민의 인기가 급전직하 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암살 당하고 말았다(1625.3. 25) 이렇게 해서 국왕과 의회의 힘 겨루기 제 1라운드는 국왕의 암살로 막을 내렸다.

 

다음 이야기 - 영국의 권리청원과 청교도 혁명 -



Fading Like A Flower(Every Time You Leave) / Rok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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