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Beatles ***
| 멤버 : George Harrison, John Lennon, Paul McCartney, Ringo Starr 데뷔 : 1960년 비틀스는 바로 피와 땀으로 세계정복의 열매와 천재라는 칭송을 획득했다. 그들의 성공은 천재성 아닌 가혹한 고행의 결과물이다. 천재성도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것이다. 결코 하늘이 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존 레논과 폴이 만난 게 1957년이고 존이 'Hey little girl'을 쓴 게 1958년이며 가장 멋진 밴드명인 비틀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도 1960년이다. 그들은 1964년 세계를 휘몰아치기 전 최소 4-5년 밑바닥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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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It Be
Paul McCartney
유방암으로 1956년 10월 31일 4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폴 메카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폴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겨 폴은 그때부터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고 방황을
했으며,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후 폴은 존을 만나 비틀즈 일원이 되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애플사의 재정난등 계속해서 악재가 발생했다.
누구보다 비틀즈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던 폴에게 이런 상황은 커다란 절망감을 주었다.
'Let It Be'는 이처럼 폴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지쳐있던 시기에 만든 곡으로 이 곡을 만든
동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요즘 진행되는 상황을생각해 보았는데 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어요. 그렇게 잠이 들다가 꿈속에 어머니가 나타나셨는데 정말로 기뻤어요.
열 네살 때 돌아가셔서 오랫동안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꿈속이나마
만나서 너무나 기뻤죠. 어머니는 내게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 주셨어요.
정말 내가 힘든시기에 어머니는 나를 찾아와 주셨어요. "
곡 전체에 흐르는 종교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노랫말에 등장하는 "Mother mary" 란 인물이
성모 마리아를 지칭하는 경우로 알려져
비틀즈가 대중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밴드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밥 딜런이 대중 음악에 의식(意識)을 불어넣었다면,
비틀즈는 대중 음악에 예술성을 달아주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로
시작된 새로운 청년 문화가 단순한 십대들의 놀이 문화 이상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비틀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스스로 모든 곡을 작곡,
연주하고 편곡한다는 개념도 이들로 인해 생겨났다. 물론 비틀즈는
대중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지금도 그렇고). 그들의 이름은
역대 록/팝 명반 선정에 한번도 빠진 적이 없고, 그들의 앨범은
음반관계자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상품이다.
비틀즈의 역사는 1950년대 중반 영국 리버풀의 한 밴드에서 시작된다.
당시 존 레논(John Lennon)이 고등학교 재학 때 결성한 밴드인
쿼리멘(The Quarrymen)이 비틀즈의 모태이다. 여기서 1957년
레논과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가 처음 만났고, 얼마 후에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밴드에 들어왔다. 밴드 이름이
'비틀즈'로 정해진 것은 1960년이고, 그해 이들은 독일 함부르크에
건너가 연주를 했다.
당시 밴드의 베이스는 스튜어트 셧클리프(Stuart Sutcliffe)가,
드럼은 피트 베스트(Pete Best)가 각각 맡고 있었다. 함부르크
시절을 비롯하여 초기 비틀즈의 활동은 영화 [백비트]에 잘 나타나 있다.
그해 말 리버풀에 돌아온 비틀즈는 캐번 클럽을 중심으로 공연을
가져 열광적인 팬들을 낳았고, 그것은 머시비트 사운드(Merseybeat sound)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지 해리슨
1961년 비틀즈는 다시 함부르크에 가 이들의 첫 레코딩을 남겼다.
하지만 이는 백업 밴드로서의 녹음이었고, 1962년 EMI의 산하 레이블인
파플로폰(Parlophone)과 계약하면서 공식 레코드를 발표하게 되었다.
1962년은 밴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해인데, 전해에 만난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과 더불어,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trin)를
만났으며, 밴드의 드러머가 링고 스타(Ringo Starr)로 교체되어 비로소
완전한 진용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해 9월 비틀즈는
첫 싱글인 'Love Me Do'/'P.S. I Love You'을 발표했고,
'Please Please Me'는 이듬해 초 영국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세 번째 싱글 'From Me to You'와 첫 앨범 [Please Please Me]이
이어 발표되었다.
비틀즈의 인기는 앨범 [The Beatles]와 싱글 'She Loves You',
'I Want to Hold Your Hand'가 잇달아 큰 성공을 거두면서 크게 치솟았다.
그들의 성공은 당시 영국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싱글 판매고는
백만 장을 가볍게 넘었다.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비틀즈는
1964년 미국 시장에 상륙했다. 'I Want to Hold Your Hand'가 가뿐하게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했고, 연이어 싱글들이 차트를 휩쓸면서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리고 '에드설리반 쇼'의 출연과
영화 [A Hard Day's Night]는 비틀매니아라는 사회적 현상을 낳았다.
한편 이들의 성공은 많은 미국 뮤지션들을 자극하였고, 영국 뮤지션들의
미국 시장 진출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당시 이는 브리티시
인베이젼(British Invasion)이라는 말로 통했다).
링고스타
1965년은 음악적으로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한 해였고, 많은 이들은
이를 비틀즈 중기의 시작이라 말한다. 앨범 [Help]로 시작된 비틀즈 중기는
'Ticket To Ride'에서 보듯 미국 포크 록의 영향이 두드러지며, 'Yesterday'는
현악기를 사용한 섬세한 연주와 세련된 가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해 말 발표된 앨범 [Rubber Soul]은 이제 비틀즈가 틴에이지를 위한
밴드에서 예술적 열망을 실현시키는 밴드로 성장했음을 잘 보여주었다.
여기서 곡조는 더욱 세련되고, 가사는 좀더 개인적인 감정을 담았으며,
연주와 편곡은 더욱 실험적으로 변모했다. 특히 디스토션과 멀티트랙킹의
실험 및 시타르 같은 악기의 도입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966년 여름에 발표된 [Revolver]는 이를 더욱 확장시켰다.
현악기를 이용한 아름다운 발라드 'Eleanor Rigby'와 인도 음악에 영향을 받은
실험적인 트랙 'Tomorrow Never Knows'는 앨범의 상이한
스펙트럼을 대표하는 곡들이다.
1966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비틀즈는 공연 중단을 선언한다.
그리고 스튜디오에 들어가 새로운 음악적 실험에 몰두했다. 1967년 초
'Penny Lane'과 'Strawberry Fields Forever' 싱글이 나왔고,
그해 여름 문제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세상에 나왔다.
이 앨범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일한 주제로 묶인 최초의 컨셉트 앨범으로 평가받는데,
당시 히피로 대표되던 반문화의 영향이 창조적으로 반영된 사이키델릭의 결정판이었다.
특히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와 'A Day In The Life'가 펼치는
환각적인 소리의 세계는 충격이었다.
폴 메카트니
하지만 1967년이 비틀즈에게 영광의 해인 것만은 아니었다. 매니저였던
엡스타인은 그해 8월 마약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고, 세 번째 영화
[Magical Mystery Tour]는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했다. 1968년 초
비틀즈는 마하리시를 만나러 인도로 떠났고, 그해 말 두장짜리 앨범
[The White Album]이 나왔다. 사이키델릭 록에서 다시 기타 록으로
돌아간 이 앨범은 [Sgt. Pepper's]와 달리 극도로 절충주의적인
성향(경쾌한 팝에서 서프 뮤직, 포크, 블루스, 하드 록, 보드빌, 여기에 아방가르드까지)을
보여준다. 이 앨범은 발표될 당시에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멤버들이 각자 따로 작업했다는 점에서 엇갈리는 평을 받았지만,
지금은 비틀즈의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 평가된다.
1969년 초에는 싱글 'Get Back'과 'Don't Let Me Down'이 나왔고,
사실상 마지막 앨범인 [Abbey Road]가 이어졌다. 이 앨범 역시
상당 부분은 멤버들 각자 녹음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 앨범 가운데
가장 통일성 있게 만들어졌다. 조지 해리슨은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에서 놀라운 역량을 펼쳤고, 폴 매카트니는
앨범의 뒷면을 연작 형식으로 꾸몄다. 하지만 밴드는 이제 마지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비즈니스적인 이해관계와 멤버들의 음악적 성향은 점차 내부적인 갈등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큐멘타리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녹음된
[Let It Be]는 [Abbey Road]보다 전에 녹음되었지만 공식적으로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이었다. 비틀즈는 1970년 4월 폴 매카트니의
밴드 탈퇴 선언과 더불어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앨범 [Let It Be]는
그해 5월 발표되었다.
존 레논
밴드가 해체되고 난 뒤 멤버들 각자는 당연하게도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조지 해리슨은 매카트니와 레논에 가려있던 음악적 역량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고, 존 레논은 음악 활동과 더불어 정치적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한편 폴 매카트니는 팝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싱어 송라이터가 되었다. 70년대 꾸준히 밴드 재결성의 소문은 있었지만
1980년 12월 뉴욕에서 존 레논이 광적인 팬의 총에 맞고 사망하는 사고로
이 소문은 영원히 소문으로만 남게 되었다.
존레논과 그의아내(오노요꼬:일본)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틀즈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1994년에는 초기
비틀즈의 BBC 녹음이 [Live At The BBC]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고,
1995년에는 그들에 관한 다큐멘타리 필름이 만들어졌다. 비틀즈의
미발표 트랙들을 모은 앤솔로지 앨범이 1995년과 1996년에 세 장의
세트로 나왔고, 여기에 수록된 'Free As A Bird'는 전세계적으로 깜짝 히트를 했다.
2000년에는 영국과 미국 차트 정상을 차지한 비틀즈 곡들만 모은 앨범
[The Beatles 1]이 발매되었다. 한편 2000년 11월 미국의 음악 잡지
'롤링 스톤'과 MTV 필진들은 역대 가장 훌륭한 팝송 100곡을 선정했는데
비틀즈의 'Yesterday'를 리스트 맨 위에 올려놓았다. 미국 음반 산업 협회(RIAA)의
기록에 따르면 2000년 11월 현재, 비틀즈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1억 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고를 기록한 뮤지션으로 남아있다
첫댓글 오늘도 좋은노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좋은 음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