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은 정말 ‘장군의 아들’인가
‘장군의 아들’이 넘나드는
끝없는 거짓말의 경계선
김두한은 정말 ‘장군의 아들’인가
김성환
‘장군의 아들’ 김두한을 주인공으로 한 인기드라마 「야인시대」는 요즘 해방 정국에서의 좌우 대립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시기는 오늘날의 분단을 잉태한 중대한 갈림길이었고 그래서 학자들도 이 시기를 다루는 데는 여간 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야인시대」는 그러한 엄중한 시대를 한낱 깡패들의 패싸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 구도는 우리가 지난 1960∼1970년대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반공교육’의 틀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념에 마비돼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좌익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얼굴을 한 우익 .
문제는 그 우익의 한가운데 서 있는 김두한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한 뒷골목 깡패가 아니라 청산리 전투의 항일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기에 남다른 각광을 받고 있다. 만약 그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에게 오늘날만큼의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으며 드라마 「야인시대」도 영화 「장군의 아들」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김두한이라는 인물 자체가 한 시대 정치판을 풍미한 낭만적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과연 그는 진짜 ‘장군의 아들’이었을까.
실소를 금치 못할 거짓말들
그가 실제로는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얘기는 진작부터 제기돼 왔다. 지금도 ‘의송 김두한’ 홈페이지와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사이트는 물론 드라마를 제작한 방송국 사이트 게시판에 그가 왜 장군의 아들이 아닌지 조목조목 지적하는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여기에 영화 「장군의 아들」 1편 시나리오에 관계한 것으로 알려진 도올 김용옥은 그의 저서 『도올세설』에서
“내가 김두한에 관해 출간된 도서를 다 훑어보고 난 후에 내린 하드 팩트(hard fact)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한편 요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역사학자 한홍구는 그의 저서 『대한민국사』에서 이 문제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두한이 정말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중략) 그러나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확증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러면서 그는 김좌진 장군의 부인 등 유족들이 그를 아들로 인정했고, 안동 김씨 가문에서도 그를 일가로 받아들여준 사실을 지적해 두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한홍구 역시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라는 확증을 제시하지는 못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은 몇 다리 걸치면서 ‘사실’로 둔갑하기도 한다.
뒤에서 쓸 터이지만, 결론적으로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이 맞다. 그럼에도 의혹이 끊이지 않는 데는 그 누구보다도 김두한 자신의 책임이 크다. 그는 1963년에 출간한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라는 회고록에서, 그리고 1969년의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에서 자신의 출생과 어린 시절과 이후 활동에 관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일관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김옥균과 같은 안동 김씨이기는 하나 1889년에 태어났고 당시 김옥균은 조선 제1의 역적으로 일본에 있었으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또 김좌진이 서울에 머물던 1910년대에 백정들의 결사체인 형평사 초대회장을 지냈다고 하는데(나중에 그를 길러준 설렁탕집 ‘인사옥’의 주인인 원 노인이 백정 출신으로 이때 김좌진과 인연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김좌진의 활동기록 어디에도 형평사 운동을 했다는 흔적은 없으며, 형평사는 1923년 백정 출신 자산가 이학찬이 진주에서 처음으로 결성했다.
이때는 이미 김좌진이 만주에서 청산리 전투(1920년)를 치르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시기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해방 뒤 북의 김일성이 “8·15 후 50일 만에 나에게 북 노동당원증과 함께 순금 단추가 번쩍이며 금 모리스가 눈부신 육군 소장 제복을 보내왔다”며 당시 거리에 “김두한이 남반부 인민군 사령관에 취임하게 되었다”는 벽보가 나붙었다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넘어 폭소가 터진다.
생모는 박계숙 아닌 김계월이란 기생
그의 회고록과 육성증언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가득 찬 지경이니 그의 출생배경에 대해 의문이 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먼저 김두한 자신이 말하는 출생배경을 들어보자.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청년이 되면서 서울로 올라와 안창호 등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다 1916년 즈음에는 노백린 등과 광복단이라는 비밀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김두한의 얘기는 그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속무협소설에나 나올 법한 드라마틱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얼마간의 과장은 섞였을지라도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조사해 본 바로는 여기엔 단 하나의 사실도 없는, 완벽한 거짓말이다.
김두한의 생모는 박계숙이라는 양반집 딸이 아니라 김계월이라는 기생이었다. 1930년 1월,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이 암살당하자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국내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고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집중했다. 그 가운데 김두한과 관련된 최초의 보도는 다음과 같았다.
“그의 가족은 지금 전부 그의 근거지 이든 길림성 모처에 잇다는데 그의 칠십 로모와 그의 안해며 그의 아우되는 김동진씨를 합하야 세 식구가 잇다 하며 시외 모처에 씨의 서자 한 사람이 잇슬 이라는데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여기서 그의 아내는 그가 만주에서 결혼한 나혜국이고 칠십 노모는 장모였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 시외 모처에 있다는 김좌진의 서자가 바로 김두한이지만 『동아일보』는 그 이름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가 바로 이 김두한의 거처가 시외 모처가 아니라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내 취재를 해서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그의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사진까지 실려 있어 신빙성에서 나무랄 것이 없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김좌진) 가장 사랑하던 애첩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이 현재 홍성에 잇느니 혹은 경성 시외에 잇느니 하야 그 확실한 소재처를 아지 못할 안이라 애첩 김계월이가 원산 방면에서 료리업을 한다고 보도되엇거니와 그는 모다 오보이엇스며 허설이엇고 정작 김좌진의 아들 두한이 잇는 곳은 아버지가 잇는 바 바람 거친 그곳과는 정반대로 고요한 조선의 도읍 개성에 잇다. 그는 목하 개성 서본뎡(西本町) 이백 오십 사 번지에서 자긔의 조모와 가치 쓸슬한 그날그날을 소일하고 잇다.”『조선일보』 1930년 3월 17일자)
그가 3월 12일 김두한의 집을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아직 도라오지 안코 어둠컴컴한 방에 두한의 외조모만 병으로 누어 잇섯슬 ”이었다고 한다. 그가 취재한 바에 따라 김두한의 출생과정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 홀연 만주로 떠나버리고 김계월은 서울에 홀로 남게 되었다.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떠나는 아버지를 붙들고 어머니께서 태아가 있음을 고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두옥이라 부르라 하시면서 홀연히 집을 떠나셨다고 후일 어머니가 말해주셨다”고 하는데 이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김두한의 영웅심리
그러면 김두한은 왜 이런 자신의 출생과정을 숨기고 무협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꾸며댔던 것일까.
그는 먼저 펴낸 회고록에서는 이후의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자신이 일곱 살 때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말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육성증언에서는 “여덟 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최문우 기자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열두 살로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그는 왜 이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여기에는 김두한이 감추고 싶은 가족의 내력이 있었을 것이다.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김두한이 자신이 여섯 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그래서 사실이다. 다만 어슴푸레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었고 그래서 그가 말하는 연도가 죄다 실제와 틀리게 된 것일 터이다.
그러나 노모의 건강이 악화돼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대략 1926년 즈음이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고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했다.
그러나 이도 오래 버틸 일은 아니었고 결국 친지들이 없는 개성으로 가서 기생을 하기로 작정하고 개성으로 온 것이다. 아마도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김계월은 다른 기생 두 명을 데리고 요리업을 하기 위해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김계월은 함흥에 있다가 다시 더 북쪽의 흥원으로 갔고 아마도 이후 소식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은 서울에 살 때 잠시 교동보통학교를 다닌 적이 있을 뿐 개성으로 옮긴 이후엔 학교를 가지 못했고 그나마 어머니와의 연락이 끊긴 뒤로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집을 나와 서울로 와서 청계천 장차구다리 밑에서 거지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두한이 개성 출신의 천애고아라는 얘기는 이렇게 해서 나왔다.
김두한은 이런 자신의 불우한 가족사를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항일투사였듯이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항일투사의 대열에 올리기 위해 일제의 탄압을 받은 것처럼 말을 지어냈다. 이렇게 김두한의 거짓말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에서 어두운 부분은 삭제하고 자신을 영웅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의 회고록과 육성증언은 바로 그런 거짓말들로 가득 차 있다.
진짜 깡패 드라마를 보고 싶다
현재 「야인시대」는 해방 정국에서 김두한의 우익활동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도 숱한 그의 거짓말들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무엇보다도 김두한이 아버지가 공산당원의 총탄에 스러졌다는 사실 때문에 반공으로 돌아서게 됐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김좌진은 사망 당시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 경향으로 기운 활동가였으며 김두한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조모에 따르면 그는 개성에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면 “청국에 있는데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사회주의자이다. 나도 열 네 살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가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한다. 러시아혁명의 여파가 밀려오던 당시 사회주의는 민족해방에 우호적인 사상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버지가 공산당에 의해 죽게 된 사실을 해방이 된 뒤 극우단체인 백의사 인물들이 일제 기밀문서를 통해 캐낸 사실을 전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고 하나 이미 김좌진 장군이 죽었을 때 그 사실은 신문을 통해 다 보도되었다. 오히려 그는 해방 직후 잠시 좌익에 몸담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엔 진보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가 해방 정국에서 벌인 우익활동은 아버지와는 관계가 없고 그저 주먹 세계의 시류에 따랐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문제는 모든 정황이 이러한 데도 드라마 「야인시대」는 그 기본 줄기를 김두한의 거짓말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주먹세계를 다루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마피아를 다룬 외국영화 「대부」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명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야인시대」도 초반부에서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감상했다. 그런데 깡패를 그저 깡패로 다루지 않기 시작하면서 재미도 반감됐다. 깡패에게도 인간적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고, 뭇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구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깡패가 아니라 케케묵은 좌우대립 이데올로기를 그에 덧씌워 정치적으로 미화하려면 차라리 드라마 제목을 「야인시대」가 아닌「반공시대」로 바꾸는 것이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