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들으시죠......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글을 생각중에 있습니다... 다음은 아무래도 가벼운 터치의 글이 필요하겠지요...
이미 무슨 글을 옮길지는 생각을 했는데 문제는 사진입니다.....사진도 있는데 장치를 거쳐서 등재를 해야 하기 때문 무척 신경쓰이고 귀찮습니다.
13. 북릉 공원에서
자고로 백성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다. 전쟁이나 반란은 배불러 심심해서 생긴 게 아니다. 배 고프고 억울하고 자사니까 배가 아파서 쳐들어 오고 곡괭이 들고 더 이상 못살겠다 갈아치자를 외친 것이다. 그 시대 이것이 충족되었다면 간도 깊숙이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 백성이 편안하게 산 세월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렇게 길지 않았다. 요즘은 그에 비하자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두둑한 배와 등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민본위주의 삶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민주생활이다. 욕구를 채우면 보다 더 큰 욕심이 생기는 게 누구든 당연지사다. 그로 과유불급이란 말이 요즘에서야 제대로 제 말 뜻을 찾았다싶다. 모자라고 부족해서 쩔쩔매던 때 극히 일부가 그럴지는 몰라도 이 말은 얼토당토 하지 않다,
내가 제일 궁금해 했던 것은 그들의 천안문사태에 대한 관점이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들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등소평이다. 문화혁명으로부터 탈출해 기아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그들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바로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겠냐는 것이다. 내가 아직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말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개할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통제 속에 경제자유면 그만이라는 논리다. 우리 여섯 명도 라면을 먹을 때까지는 그 정도 논리로 흡족하고 만끽한 셈이다. 하지만 이미 자율과 자유를 아는 처지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방종에 허세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시기와 때를 노린다. 이제는 그 분야 도가 튼 분들이다. 그때부터 술을 들이켰다. 고단한 몸이라는게 핑게다. 고단하면 자야할 것인데 수고한 대가를 술로 찾겠다는 것이다. 나름 손해본 것 같은 심신에 보상을 해주겠다는 심산도 깔려 있다.
그야말로 큰 욕구충족이었다. 나는 몸이 안 좋아 술을 끊은 상태인데 영감님들은 오늘의 긴 여정에 스스로 탄복을 했는지 자화자찬을 해가며 술술 술을 불렀다. 인사불성 바로 그 밑 경지까지 그러니까 酒仙 바로 발끝까지 도달해 겨우 끝이 났다. 내일은 늦게 일어나도 되고 심양 시내를 돈다는 전제가 술 발에 큰 보탬이 된 모양이다. 나는 내일 일정을 꼽아 보았다. 비장 김이사는 마눌님의 특명을 받잡고 꼭 보이차를 사가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절대정명으로 사수해야 하는 그만의 사는 방식이다.
우린 또 이곳의 명물인 잣을 사러 견과류 시장도 들려야 한다. 그렇다면 동북아 최대의 시장이라는 오애시장(五爱市场 우아이쓰창)을 따로 찾을 명분이 없다. 시장만 돌다가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른 새벽 오애시장을 혼자서 다녀오기로 했다.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제공한다니 일찍 일어난다면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오애시장은 새벽 5시에 문 열고 오후 3시에 닫는다고 했다.
그런데 새벽녘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거처하는 민박집은 아파트를 개조한 숙박집이다. 큰 방에 침대가 3개 놓여 있고 작은 독방이 있으며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 말고도 두 명이 자는 화장실 딸린 방이 하나 또 있다. 나는 화장실 딸린 방에 천하의 한량 비장 김이사와 동숙을 했다. 그는 침대,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다. 나는 먼저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때 아닌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술 취한 김이사가 잠결에 탁자 위에 놓인 물그릇을 손으로 쳐서 그만 내 얼굴에 와락 쏟아진 것이다.
얼마나 술을 드셨으면 그런 지도 모르고 헛소리까지 해대며 잠에 취해 있다. 졸지에 당한 나지만 화는커녕 오히려 나는 감탄했다. 바로 그 시각이 내가 일어나야 할 새벽 4시 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파트 키를 들고 작은 가방을 챙겨 살그머니 민박집을 빠져나왔다. 그곳은 나가든 들어오든 키가 없으면 엘리베이터도 탈 수 없고 1층에 따로 있는 현관문을 열 수도 없다. 날은 이미 환하고 택시는 많았다. 만약을 몰라 나는 오애시장과 서탑 도문로라는 한자어를 따로 큼지막하게 써 달래서 휴대하고 있다. 급하면 글자를 들이밀 속셈이었다.
아파트 정문 앞에 택시기사가 마치 나를 기다리듯 서 있다. 나는 한자를 보여주고 오에쓰찬 중국 발음도 덧붙였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재밌다. '밍주삥관(명주민박집) 오케이~' 하더니만 한국? 하며 말을 건다. 중국어를 전혀 못해도 알아들을 행위이다. 호감을 보이는 것이다. 한국하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중국 하더니 역시 똑같은 시늉을 한다. 그러더니 일본을 지칭하며 엄지손을 거꾸로 내린다. 금세 둘 사이가 和氣靄靄 해 졌다. 그러자 그는 TV는 삼성 것이고 냉장고는 LG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더니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재빨리 쓸 것을 찾아서 내게 들이민다.
가만 보니 자신의 휴대폰 번호다. 그러더니 공항 80원을 외친다. 그의 호의는 다분히 자기 영업 확장에 있었다. 나는 당연 이용할 것처럼 받아서 챙겨놓았다. 그는 도착지에 거의 오자 다시금 전화를 가리키며 '밍주삥관 공항' 이라고 재확인시킨다. 기분 좋게 접근해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그의 능숙한 기법.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중국 스타일이 아닌가. 새벽녘 정신이 번쩍 든다. 허튼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자신에 충실한 중국인들이다. 그로부터 얻은 data, 공항까지 80원이라는 단서는 다음 날 나의 추진 사업에 꽤 유용했다.
오애시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건물 한 동이 우리나라 남대문시장만한데 그 한 곳에서는 옷만 취급하고 다른 동에서는 신발만 취급한다. 나는 옷에 질리고 신발 냄새에 질려 이내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 게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5층까지 깔려 있는데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는 없다. 우리 일상에 쓰는 일상품들이 이제는 대개 중국산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우리뿐이 아니다. 일본 TV에서 일상품 비교를 했더니 중국산이 85%였고 고작 15%가 일본산이었다. 아마 우리는 더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학용품을 취급하는 곳에서 본 물건들은 거의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물건들이었다.
예전 중국에서 우산을 하나 샀는데 돌아올 때쯤 망가졌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35원 달라고 하는 접는 우산을 30원 주고 하나 샀다. 필요도 했지만 나름 품질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등산용품 가게에 들러 작은 스테인리스 술잔 넷이 들어간 컵 세트를 샀다. 우리나라에서는 만원이 넘는데 20원밖에 안한다. 이 역시도 중국제를 들여와 이문을 챙긴다 싶다. 그리고 붉은 색 봉투에 福이라 쓴 봉투를 한 첩 샀다. 새해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줄 때 써먹을 요량이다.
그럭저럭 둘러보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나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 중산대로에서 쓰던 물건 사고팔고 하는 바자 모임이 길게 펼쳐진 것을 보았다. 상해에서도 공자사당에서 일요일 날 중고 책을 사고팔고 하던데 유사한 풍경이다. 우리도 이제는 있는 물건을 아껴 쓰고 나누는 것을 일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 번 쓰고 그냥 버리던지 아니면 어느 것은 아끼고 아끼다 한 번도 안 쓰고 때 지났다고 팽개치고 마는 경우도 많다.
(오! 예 할 정도로 입이 딱 벌어진다. 너무 커서..이런 건물이 몇 채)
민박집에 들어오자 이미 다들 식탁에 몰려 있다. 적절하게 새벽 쇼핑을 한 셈이다. 김치찌개로 해장을 했다. 아마 호텔이었으면 빵 조각에 난감했을 테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여기 오자고 선동한 사람이 나니 책임이 있다. 5시 이전 문을 닫는 곳부터 챙겨보아야 한다. 먼저 북릉공원을 들르고, 그 다음 랴오닝성 박물관에 가고, 그곳에서 가까운 보이차 가게에 들르기로 했다. 아줌마가 가르쳐 준대로 231번 버스를 타자고 길을 나섰다. 나는 조선족 시장골목에 들려 잣하고 송이버섯을 살펴보았다. 굳이 사갈 필요가 없을 듯 했다. 나는 인절미와 송편을 샀다. 어제 안중근의사 제사 때 가져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한민족만이 즐기는 제 맛이 아닌가. 여기에 때때옷만 입는다면 고릿적에도 그러하였듯 영락없는 우리의 고유 풍속이다.
그런데 가도 가도 231번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역관은 당황하고 있다. 길 가는 이에게 물었다. 가다가 꺾어지라는 데 없다. 또 물었다. 딴에는 친절한 양 큰소리로 설명하는 데 표정이 무섭기 까지 하다. 그러고는 가는 우리가 제대로 가는지 시종 쳐다보고 있다. 감정 표현이 우리와는 차이가 난다 싶기도 하고 사람 나름 어디서든 한 성격은 존재 한다 싶기도 하다. 누구는 걸어서 가라는 투다. 어느새 등줄기에 땀이 흠뻑 젖었다. 그때였다. 북릉공원 4 킬로라고 적힌 안내판을 김이사가 발견했다. 민박집에서 8 킬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벌써 4 킬로를 걸어온 것인가. 결국 231번은 못 찾고 대신 281번인가 버스에 올랐다. 나이든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역관 말로는 97세라 한다. 원체 사람이 많으니 그렇겠지만 의외로 나이든 사람들이 이곳에 많다. 내릴 때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맞은 편에 앉은 할아버지가 흐뭇해한다. 그 분 역시 82세. 유교가 폐단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도리와 역할도 잘 적시해 놓았다.
아직 이곳은 젊은 친구들이 어르신을 보면 일어서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양보를 한다. 어릴 적 당연 그런 것이라고 살았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자는 척 하든지 봐도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무표정하다. 거기에 핑계 삼을 좋은 물건이 나타났다. 휴대폰에 열중이라는데 뭐라 할까. 나는 휴대폰을 볼 때 편리한 만큼 세상도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사물에 대해 이치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스마트 폰이 알아서 잘 챙겨주니 그럴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문맹률은 세계 최저라고 하지만 문장력은 형편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기하고 있다. 세상은 이해하고 생각하고 묘안을 짜내며 협상하고 타협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려면 정작 말의 맵시가 중요하고 그에 걸맞은 사고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기중심의 획일적인 의식만 가득한 아이들이 내심 걱정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요즘 들어오는 내 직장의 젊은이들도 그런 안타까운 점이 꽤 많다. 공부만 했지 자기 손해는 기를 쓰고 안 보려 하며 인간적인 면모는 현저히 어설프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인문학이 쇠퇴하면 자연 문화수준도 뒤처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북릉 동문에서 하차했다. 북릉 역시 일흔이 넘으신 분들은 입장료가 무료다. 공원엔 나이든 분들이 꽤 많았다. 그들의 공원은 우리와는 이용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우린 아베크족들의 데이트 코스나 소주를 들고 찾는 곳이지만 그들은 운동도 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그야말로 다양한 취미생활이다. 공원 입장료는 6원이지만 안에 들어가 청 태종의 능을 보려면 30원인가를 더 내야 한다. 우리는 안 들어가고 무료입장이 되는 도박사님만 대표로 그곳에 들어가셨다.
(우리는 대표로 70세 이상인 분만 들여보냈다. 공짜니까.)
이곳은 청태종, 그러니까 병자호란의 주역인 홍타이지 무덤이 있는 곳이다. 전략 전술로 명나라를 물리친 그다. 그가 죽자 순치제와 강희제가 이 무덤을 꾸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자금성에서 본 건축구조가 옮겨 온 듯, 그제 본 심양고궁의 팔각정이나 대성전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워낙 사냥을 좋아한 만주족답게 그들은 조선인을 끌고 올 때 사냥감 다루듯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이조시대 중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인물이 둘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광해군이고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소현세자다. 광해군이 노론들에게 시달림 안 받고 득세를 했다면 우리와 청나라 관계가 극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 자금성에 있을 때 천주 교리를 이해한 사람이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태세가 된 사람이었다.
나는 일국의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들을 보고 생각한다. 세상은 때를 잘 만나야 하고 한 시대는 바로 지도자 역량에 달려 있다. 조선은 백성들을 위해 해준 게 거의 없었다. 유성룡이 부국강병과 고른 인재등용을 외치며 임진왜란을 버텨냈는데, 이후 신분차별은 더욱 거세졌으며 급기야 추노가 생겨나고 정통성을 말하는 족보 순종주의는 더욱 활개를 쳤다. 청나라는 그 무렵 한족과 만주족의 차등을 없애려 안간힘을 쓰고 저 멀리 라마교를 장려하며 티베트까지 끌어들여 그야말로 거센 오랑캐를 얌전하게 만들고 태평세월을 구가 했었다. 우리는 늠름하게 생긴 홍타이지 동상을 뒤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을 타고 이제 유람을 시작 할 차례다. 그런데 거기서 실수가 또 발생한다.
(북릉에 홍타이지 동상, 우리로선 철천지 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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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구요동기를 보면 심양, 요동 격전지를 돌며 청나라와 명나라가 혈전을 벌이는 상황과 누루하치와 홍타이지의 용맹함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홍타이지지만 그의 용맹성은 알아주어야 한다. 그 대목을 옮겨 본다.
<명(明) 천계(天啓) 원년(1621) 3월에, 청인(淸人)이 이미 심양을 빼앗고 또 군사를 옮기어 요양으로 향하였다. 이때 경략(經略) 원응태(袁應泰)가 세 길로 군사를 내어서 무순(撫順)을 회복하려던 차에, 청인이 이미 심양을 점령하고 요양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태자하(太子河) 물을 끌어다 해자에 채우고 군사를 성 위로 올라가 빙 둘러서서 지키게 하였다.
청인이 심양을 함락시킨 지 닷새 만에 요양성 밑에 이르렀다. 누루하치[奴兒哈赤]란 자는 이른바 청 태조(淸太祖)다. 그가 스스로 좌익(左翼)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이르니, 명(明)의 총병(摠兵) 이회신(李懷信) 등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5리 되는 곳에 나와서 진을 쳤다. 이때 누루하치가 좌익(左翼) 군대에 속한 사기(四旗 만주군 편성 단위)로 왼편을 공격했다. 청 태종(淸太宗)이란 자는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한(汗)이라고 부르니, 그의 이름은 홍타이지(홍타시[洪台時])우리나라의 병정록(丙丁錄) 중에 너저분하게 실려 있는 ‘紅打時, 또는 紅他詩’는 모두 발음이 비슷한 대로 적은 것이다. 마치 영알대[英阿兒臺]를 용골대(龍骨大)로, 마부타이[馬伏塔]를 마부대(馬夫大)로 쓴 것이 모두 이와 같다. 하였다. 그가 날랜 군사를 이끌고 싸우기를 청했으나 누루하치가 허락하지 않다가, 홍타시는 굳이 가서 홍기(紅旗) 두 개를 세워 두고 성 옆에다 매복시켜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누루하치가 정황기(正黃旗)ㆍ양황기(鑲黃旗)를 보내어 홍타시를 도와서 명(明)의 군영(軍營) 왼편을 치게 하였다. 또 사기(四旗) 군사가 뒤이어 이르니 명병(明兵)이 크게 어지러운지라, 홍타시가 승리를 얻어서 60리를 추격하여 안산(鞍山)에 이르렀다. 이 싸움에 명병이 요양의 서문으로 나와, 앞서 청인이 성 곁에 세워 두었던 두 홍기(紅旗)를 뽑으니, 복병이 일어나서 이를 맞아들여 쳤다. 명병이 다시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느라고 저희들끼리 짓밟혔다. 총병 하세현(賀世賢)과 부장(副將) 척금(戚金)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누루하치가 패륵(貝勒 만주군의 벼슬 이름)의 왼편 사기 군사를 거느려서 성 서쪽의 수문(水門)을 파 호수의 물을 빼고, 또 오른편 사기 군사로 하여금 성 동쪽의 진수구(進水口)를 막게 하고, 자기는 우익(右翼) 군대를 성 밑에 늘어놓고는 흙을 넣고 돌을 날라서 물길을 막았다.
명병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동문(東門)을 나와서 청병과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버티었다. 청병이 바야흐로 다리를 빼앗으려 할 즈음, 마침 수구(水口)가 막히어서 물이 거의 마를 지경이므로, 사기의 선봉이 해자를 건너 고함을 치면서 동문 밖으로 엄습하자, 명병도 이에 맞서 역전했으나, 청병 홍갑(紅甲) 2백 명과 백기(白旗) 1천 명이 내닫는 바람에 죽은 명병이 해자에 가득하였다. 청병이 무정문(武靖門) 다리를 빼앗고 양쪽으로 나누어 지키는 명병을 치니, 명병이 성 위에서 끊임없이 화포(火砲)를 터뜨리었다. 청병도 이에 용감히 맞서 서성(西城) 한 쪽을 빼앗고 민중들을 베니, 성 안이 요란하였다. 이날 밤 성 안에 있는 명병이 횃불을 들고 싸울 때, 우유요(牛維曜) 등은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 명병이 다시 방패를 세우고 힘써 싸웠으나, 청 사기의 군사가 역시 성을 타고 올랐다. 경략 원응태는 성 북쪽 진원루(鎭遠樓)에 올라서 싸움을 독촉(督促)하다가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누(樓)에 불을 놓아서 타죽고, 분수도(分守道) 하정괴(何廷魁)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우물에 빠져 죽고, 감군도(監軍道) 최유수(崔儒秀)는 목매어 죽고, 총병(摠兵) 주만량(朱萬良), 부장 양중선(梁仲善)과 참장(叅將) 왕치(王豸)ㆍ방승훈(房承勳)과 유격(遊擊) 이상의(李尙義)ㆍ장승무(張繩武)와 도사(都司) 서국전(徐國全)ㆍ왕종성(王宗盛)과 수비(守備) 이정간(李廷幹) 등은 모두 전사하였다.어사(御史) 장전(張銓)은 청병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으므로, 누루하치가 죽음을 내려 순국(殉國)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홍타이지가 장전을 아껴서 살리려고 여러 번 타일렀으나 마침내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목매어 죽이고 장사를 치러 주었다.>
(홍타이지 무덤/ 도박사님만 들어가서 보았다.)
13.서탑 조선족 시장에서
1. 조선족 시장에서
나는 어디를 가든 꼭 시장을 둘러본다. 시장에는 보고 듣는 것 말고도 후각, 미각, 촉각이 더하여져 오감 육감이 제대로 발동을 하여 삶의 생김이나 일상을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조선족 시장, 과연 이곳은 어떠할까. 말투가 달라지고 사는 모습은 달라도 입맛이란 게 우리도 미처 모를 DNA가 전적으로 작용하여 여간해서는 전통을 잃지 않는다는 게 내 지론이다. 고향의 흙 냄새는 인간의 본능으로서 먹고사는 삶의 본연을 말하는 것이다. 고유성으로 지구촌이 하나로 뭉쳐지지만 여전히 동네마다 특성은 여전한 것이 다 그 연유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특출 난 전통이라는 것도 무뎌지고 융화되어 또 다른 양상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조선족 시장이다.
큰 길을 돌아 들어가는 시장, 조선족 개장 집 수상명월 반점이라는 가게를 돌아서자 쭉 펼쳐진 좌판들과 상점들이다. 우리를 말하면 무엇이 맨 먼저일까. 고추 말린 푸대 자루가 우선 눈에 들어 왔다. 가게 집에 부친 글귀 '고추 현장 가공' 고추를 빻는다는 방앗간인데 말이 이채롭다. 그 옆에 '잠장,고추장 팝니다.'란 말은 또 어떠한가. 잠장! 묻지는 않았지만 나는 으레 된장의 다른 표현이거니 했다. 그리고 늘어진 갖은 작물과 반찬들. 장뇌삼, 오미자, 송이버섯. 메주,북한산 북어포, 순대 ,깻잎. 깻잎은 지구상에서 우리민족만이 유일하게 먹는 음식이라는 것을 나는 얼마 전에 알았었다. 소 힘줄을 따로 팔고 있었으며 개고기를 토막 내어 고구려 고분에 나오는 모습처럼 쇠고리로 해서 허공중에 걸쳐 놓았다.
깍두기가 보이고 인절미하고 송편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인절미를 샀다. 콩을 빻아서 고명으로 쓸 생각을 한 것은 그만큼 콩장류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우리만이 고집하는 떡이 또 아닌가.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명태포라고 한자로 써 놓고 그 옆에 한글로 ‘짝태’라고 적었고 랄백채(辣白菜)라 적어 놓고 김치라고 한글로 적어 놓았다. 김치에 대해 주석을 달자면 우리의 농림수산부가 김치를 중국어 ‘신기 辛奇(신치)’로 이름 지었지만 잘 지은 이름이 아니다. 아마 ‘맵고도 신기한’ 음식이라는 취지겠지만 현대중국어에서 ‘辛’은 ‘맵다’는 뜻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맵다’를 ‘랄辣(라là)’라고 하며 김치를 랄백채(辣白菜)라 한다. ‘辛’은 고생하다, 수고하다의 뜻이니 이는 우리만의 작명법이 되고 만 셈이다.
설사 ‘辛’의 ‘맵다’는 뜻이 잘 전달된다고 해도 김치의 이름으로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지역은 서남쪽의 사천, 운남, 귀주, 호남 등 몇 개 성의 사람들인데 대부분 극빈지역이다. 비싼 한국 김치를 사먹을, 돈 많은 동남연해 지역의 사람은 매운 음식을 아주 싫어하고 기타 지역도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沉菜 침채(천차이)’라는 이름이 더 실감이 날 것이다.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침채가 김치의 어원이고 조선시대 문헌에서 김치를 침채라고 하였다. 침채의 고대발음은 딤치이다. 지금 평안도 방언에서 ‘김치 담그다’를 ‘딤장’이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상도, 함경도에서 짐장이라 하는 것이 바로 침장의 한자어음이다.
아무튼 이 조선족 시장은 우리 전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널려진 약초나 버섯까지 더하니 마치 내가 지리산 밑 동네 산청에 온 듯도 싶어지고 정선 아우라지에 온 듯도 싶어진다. 세상이 달라도 같은 종족의 맛은 천년이 지나도 어쩔 수 없다는 나의 지론이 들어맞아 뿌듯함마저 생긴다. 중국 시장 통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없는 것들이 꽉 들어찬 조선인의 입맛 향연, 자고로 이 만주 땅은 고구려이래 불고기와 콩장류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민박 아줌마가' 이 동네는 두부가 맛나기로 유명해요.' 라고 한 말이 예사말이 아니다. 양념한 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마늘을 다져 비릿함을 가시게 하고 간장을 넣어 육즙에 달착지근한 맛을 더한 우리의 불고기.
불고기는 우리 대표음식이다. 불고기는 고기를 양념하여 숯불에 직화(直火)구이를 하는 것인데, 오늘날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 직화구이의 기원이 바로 고구려의 맥적(貊炙) 혹은 맥구(貊灸)이다. (쇠)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식문화는 원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 추운지방이니 고기를 걸어두었다가 불을 지피고 칼로 먹을 만큼 오려서 바로 구워 먹는 그런 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기에 양념을 하여 저며 두었다가 직화구이로 요리하여 먹는 음식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맥족(貊族)이라고 하며 이들이 바로 고구려인들이다. 옛 중국 진(秦)나라 때 쓰여진 〈수신기(搜神記)〉라는 책에 “맥적은 하찮은 다른 민족의 먹거리이거늘 태시 이래 중국인이 이것을 숭상하여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내놓으니 이는 외국의 침략을 받을 징조이다”라고 적고 있다.
바로 예맥족인 고구려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 수신기의 기록을 보면 중국인들은 외국의 음식이 상에 오르는 것을 외세 침략으로 볼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맥적이 중국인에게 있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고급 요리로 인기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도 불고기 기원을 알아서인지 단양이나 어디를 가면 맥적이라고 쓴 간판을 내걸기도 하고 고구려 맥적 구이라고 아예 간판을 내건 집도 있다. 맥적은 장에 그 비법이 있는데 고구려인들은 콩장유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 맥적이 통일신라 이후 목축의 쇠퇴와 고려시대 숭불정책으로 곤욕을 치루었는데 맛의 진수로서 금기를 뚫고 고려 후기에 ‘설야멱적(雪夜覓炙)’으로 어렵게 부활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고려 후기 원나라 지배기에 육식을 하는 몽고인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민간에 잠적해 있던 ‘맥적’이 새롭게 재등장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설야멱적’의 기원을 몽고에서 찾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고구려의 맥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들은 중국에서는 훠궈, 우리는 징기스칸 샤브샤브라 말하는 음식을 만든 사람들이다. 무릇 식문화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종교적 이유 등으로 인하여 쇠퇴하고 변형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절되기는 어렵다.‘설야멱적’은 맥적이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에 민간에서 잠적해 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이며, ‘맥(貊)’의 음을 따서 멱(覓)으로 표현된 것이다. 한 번 맛을 들이면 결코 맛을 저버릴 수 없는 게 사람의 속성이다. 개성 지방에서 유행한 설야멱적은 고기를 굽다가 냉수에 담구고, 또 다시 굽고 하기를 반복한다고 〈해동죽지(海東竹枝)〉라는 기록에 나온다. 여기서 고기를 굽다가 물에 담가 다시 구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쇠고기는 일소를 도살하여 그 고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질기고 기름이 적었다.
육질이 질기고 기름이 적기 때문에 그 맛을 돋우기 위해 양념을 하면서 고기를 연하게 숙성시키는 조리법이 발달하였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반찬의 기본은 된장에 있었기 때문에 고기양념과 숙성을 할 때에도 장류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장류의 강한 맛을 헹구어내기 위해 한 번 구웠다가 물에 담갔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다른 것으로 양념을 하여 구워 먹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콩장류에 능통한 고구려인들, 그렇다면 된장이 먼저 나왔을까 아니면 청국장이 먼저 등장 했을까. 뜻밖에 그들은 청국장을 무척 좋아했다. 고구려는 콩의 원산지이며, 옛 중국 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고구려가 선장양(善醬釀)이라 하여 발효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시(청국장의 원조)’의 냄새를 고려취(高麗臭)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나라의 〈박물지(博物志)〉에서 ‘시’는 외국 음식이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의 원산지가 바로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에서는 어떻게 하여 청국장의 원조인 ‘시’가 만들어졌을까?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정복사업을 활발히 폈던 나라이다. 그리고 경제의 상당부분을 정복전쟁을 통해서 조달하였고, 그 결과 부경이라는 창고가 발달하였다. 고구려 병사들은 정복전쟁에서 이곳저곳을 많이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보급부대가 없이 비상식을 병사들이 직접 지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삶은 콩을 말안장 밑에 깔고 타고 다니면 사람과 말의 체온을 받아 발효하게 되는데 이것을 비상식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요리할 필요도 없으며 완전식품일 뿐 아니라 고단백질이라 적은 양만 먹어도 많은 힘을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상할 염려도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휴대식품으로서 최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전국장(戰國醬)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에서도 ‘책성지시(柵城之豉)’라고 하여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군량으로서 ‘시’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시’ 혹은 전국장이 청국장으로 변하였을까? 한국의 전통에 정통한 이규태 씨는 『한국인의 밥상문화』에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오랑캐 병사, 곧 청국 병사들의 주된 군량이었던 데서 청국장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청나라 병사들의 휴대식품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고구려 식 구들장이 있으면 당연 청국장은 뒤따라가지 않을까. 따뜻한 방 한가운데 모셔두는 것이 콩의 발효제, 바로 청국장이다. 간장과 된장에 대해서는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간장과 된장에 대해서는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이 아는 일에 대해서는 기록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 적지 않아서 그 증거를 도시 찾을 수가 없다. 삼국시대 초기에 고구려의 ‘장’에 대한 기술이 있을 뿐 그 이후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장 담그기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이미 삼국시대에 장 담그기가 일상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각 가정에서 행해지는 장 담그기 기술은 문자로 표현하여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장 담그기는 각 가문 여인네들의 기본적인 일이었고,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오랜 시간에 걸쳐 체험을 통해 전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문자나 말로써가 아니라 눈대중과 손대중 그리고 감각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자로서 나타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삼국시대에 어떻게 된장이 완성되었을까? 이 역시도 상상 속에서 추론할 수밖에는 없고 굳이 알아 볼 필요가 없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아무튼 그 어느 누구도 고기구이에 대해서는 고구려인을 따라갈 수 없었음이다. 당연 지천에 넘치는 게 동물이니 껍질은 벗겨 모피로 쓰고 남는 육류는 풍성했다. 콩장류가 풍성한 마당 간장에 재여 굽다 말리고를 반복한다면 그 담백한 맛은 또 오죽했을까.
특히 멧돼지 맥적은 알아주었다하니 그게 바로 지금에 돼지갈비 구이가 아닌가. 숯은 또 어떠한가. 구들장을 데우고도 남는 땔감이니 당연 숯불구이도 나올 법 하다. 신라는 숯이 모자라 나중에 애를 먹었다지만 고구려는 그런 염려는 없었다. 고구려 맥적 집은 다시 그 시기를 만나 온 동네가 요즘은 고기구이집이다. 거기에 삼겹살이라는 새로운 부위가 탄생되어 날로 번창하는 맥적구이집이다. 우리가 우리 원천을 모르고 단지 달착 지근 하니 서양인들이 좋아하나보다 하면 큰 어리석음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김치는 언제부터일까. 한약에 감초가 빠질 수 없듯이 밥상에도 김치는 빠질 수 없다. 김치도 처음 탄생할 때는 발명이었다.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김치의 발명은 엄청난 기쁨이었을 것이다. 김치의 기원이라 할 절임배추 발명은 3천여 년 전에 이루어졌다.
문헌상으로 보면 2600~3000년 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서적인 시경에 나오는 ‘저’라는 글자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저’는 채소 절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중국 사람들은 이를 두고 김치의 기원이 자기들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문헌이 앞섰다고 해서 우리의 채소절임이 중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르긴 해도 농경정착 시대쯤 채소류의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절임배추를 너와 나 가릴 것 없이 하였을 뿐 김치라고 말하지 못한 어둑한 그 시대였을 것으로 나는 추정한다. 아무튼 중국문헌인 〈후주서〉에 「백제와 신라 때 오곡과채나 주례가 중국과 같다.」 라고 한 기록을 볼 때 삼국시대에 이미 절임배추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김치는 중국과 제조방식도 아주 다르다. 그들은 소금이나 술 찌개미를 넣고 한 번 익히는 단계를 거치지만 우리는 소금이나 장류를 넣고 생채로 복합적인 양념을 추가해 발효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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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그들은 이 절임배추를 제사 때만 활용하였지만 우리는 일상화하여 늘 가까이 했다. 그러니 중국이 김치의 원조 하는 말은 부끄러운 이야기다. 이 절임배추가 우리의 김치로서 발전한 이유는 농경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있던 선조들이 채소를 즐겨 먹었던 것과 수산물의 염장 및 발효기술이 뛰어나 양념으로서 폭넓게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은 수산물의 사용을 엄두도 못 냈다. 상고시대 김치 류를 총칭하는 우리 고유의 옛말은 ‘지’였으며, 앞서 말 하였지만 한자어로 ‘침채’라 표기하였다. 여기서 ‘지’와 ‘침채’는 모두 김치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삼국유사에도 김치와 젓갈무리인 ‘저해’가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도 ‘저’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지, 염지, 지염, 침채, 침저, 침지, 엄채, 함채 등으로 표기되다가 김치로 변한 것이다.
김치는 우리 고유의 전통 음식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손꼽힌다. 이는 뛰어난 발효 기술을 지녔던 우리 조상들이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담가 왔고, 이를 활용하여 다른 음식으로도 적절하게 개발하여 계승했기 때문이다. 실제 제대로 된 우리나라 김치의 출현은 삼국시대로 13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문왕이 683년에 왕비를 맞이하면서 내린 폐백품목 가운데 간장,된장,젓갈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이때 이미 발효식품이 널리 퍼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김치류는 무를 주원료로 한 동치미, 짠지,장아찌 등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김치는 1600년대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러나 고춧가루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800년대였고, 이때부터 김치는 빨간색을 띠게 되었다.
그러니까 고추가 들어오기 전 까지는 ‘맵다.’라는 표현은 허구에 가까웠을 것이다. 불과 수백 년 만에 이를 토착화해서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된 것이다. 대단한 우리의 선조들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통렬한 추위만 볼떼기를 아리는 줄 알았는데 혀끝을 찌를 듯 입안에 알알한 느낌이 드는 바에 어찌할까하는 방도는 어쩌면 선조들로서는 자명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열치열이라고 입안이 얼얼한 판에 바깥 추위는 별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릿한 생선을 얼큰하게 우려내는 것으로도 따로 길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을 게다. 제 아무리 강한 장수라 하여도 쪼그만 고추 하나에 눈물이 찔끔 나는 판국이니 까짓 비릿함은 대적조차 아니 된다. 매운맛의 진수란 것이 고맙지만 나는 그 매운 미각으로서 얻은 감정의 것들이 꽤 소중하다 여긴다. 사람을 맛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우린 아주 자연스럽다.
그렇게 녹록히 녹아드는 것은 실체가 제대로 존재하였기에 각양의 감정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맵다고 피하고 방치하였지만 우리는 맛을 가꾸어 제 맛이 들도록 했다. 이는 또 여타 다른 많은 것들에게도 자극을 주고 많은 감정을 유발시켰으며 그로 우리는 다른 민족에 비해 상당히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하며 섬세한 구석을 또 자연스럽게 지니게도 되었다. 매운 맛은 순순히 그렇게 알차게 입성했다. 우리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은 단순한 말의 논리가 아니다. 덩치 큰 사람들을 상대하러 외국을 나설 때 우리는 으레 다 ‘작은 고추가 맵다.’란 말을 한 번 쯤은 되 내이게 된다. 그 표현은 작지만 우습게 볼 것이 아닌 당차고 해볼 만한 의미로서 늘 우리를 든든하게 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만의 정서와 색채로써 독특한 양식을 구축하며 세계로 향한다.
어쩌면 우리가 이토록 굳건한 것은 독창력과 이를 지켜내려는 그 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 옛날 고구려 같이 우리는 분명 우리만을 고집하는 뚝심이 있으며 지혜가 있다. 이곳 심양도 여느 우리 동네같이 김치와 맥적구이를 벗 삼아 동네방네는 시끌벅적하다. 이는 수천 년 내려온 습성에 예맥족의 먹거리 문화가 여전히 성행하고 있음이다.
2. 백두산
그런데 이곳 시장 간판에 백두산 도라지 장뇌삼이니 하며 산나물은 백두산을 모두 부쳐 놓았다. 산청에서 약초가 모두 지리산에서 캐왔다는 것를 말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면 이곳은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자리한 곳이 아닌가. 비록 백두산을 백두산이라 부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우리의 백두산이 아닌가. 우리처럼 산과 친밀한 민족이 있을까.
산악국가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은 유달리 산을 좋아한다. 설악산, 지리산처럼 큰 산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북한산, 관악산을 오르면서 삶의 긴장을 풀고. 이도 여의치 않으면 동네 뒷산이라도 넘는다. 한국갤럽이 2010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 달에 한번 이상 산에 간다는 등산인구가 1800만 명이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다. 흙이 좋고 물이 풍부해 수많은 동식물과 사람을 살게 만드는 우리의 산, 켜켜이 쌓여온 정신문화 역시 산 이름에 깃들어 있다. 일예로 문수산, 길상산, 오대산, 청량산, 사자산은 명칭이나 공간으로 보면 서로 다르지만, 모두 불교의 문수보살과 관련되어 이름을 얻은 산이다. 문수의 본디 말인 문수사리에서 사리란 길상을 뜻하고, 문수가 사는 곳이 청량산(오대산)이며 문수가 사자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대승보살인 문수는 어느 사찰에서나 대웅전 석가모니불 왼편에 있다.
산 이름이나 산에 얽힌 전설, 설화를 알면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종교와 사상, 풍습과 정서를 알 수 있다. 인간사와 인간관계가 산에 그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산에 대해서 우리만큼 해박한 사람들도 없다.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약초를 파는 산촌 할머니들. 우리에게 산은 일상이다. 우리에게 산은 저 멀리 하늘에 닿을 듯 솟아있는 신성불가침의 영역만도, 진귀한 동식물이 있어 자연생태 그대로 보존해야 할 구역만도 아니었다. 산과 살을 섞고 정 붙이며 더불어 살아왔던 생활문화의 터전이었다. 사람은 산을 닮고 산은 사람을 닮은, 어머니와 자식과의 관계 같은 상존의 관계이다. 동네마다 자리하는 진산의 존재가 일상과 더불어 살붙이로 살아왔듯 한 민족을 말하는 국보 같은 산이 있다. 우리는 바로 백두산이다.
후지산은 누가 뭐래도 일본의 상징 1호다. 소학교에서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지금까지 부르는 노래로 ‘후지산’(ふじの山)이 있는데, “후지와 닛뽄 이찌노 야마(富士は日本一の山·후지는 일본의 으뜸산)~” 하면서 목청을 높인다. 일본 사람들에게 후지산은 신성한 영산으로 예부터 영감과 예술의 원천이었다. 작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켜 국가적인 자존심도 세웠다. 후지산 사랑도 각별나다. 새해 첫날 밤에 후지산 꿈을 꾸면 최고의 길몽으로 친다. 후지산은 교토, 이세 신궁과 함께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가야 할 3곳 중의 하나다. 신칸센을 타고 지나갈 때도 후지산이 보이면 “기레이!”를 연발하면서 사진 찍기 바쁘다. 그럼 중국의 나라산은 무슨 산일까? 한국의 백두산, 일본의 후지산과는 조금 다른 역사적 텍스트가 있다.
전통적으로는 태산이 있었다. 태산은 1930년대 이후 한동안 국산으로 불렸다. 시대 상황에서 발로된 민족의식의 반영이다. 태산은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유산 제1호이기도 하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해서 엄청 높은 산 같지만 사실 1545m로 태백산보다 낮다. 그렇지만 태산에 대한 중국인들의 자존심은 대단하다. 모든 황제들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정통성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공자도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은 것을 알았다”고 했다. 태산에 가보면 물밀듯이 올라오는 중국인들의 인산인해를 실감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곤륜산도 중국의 대표 산이다. 전통적으로 여기에서 천하의 산줄기가 뻗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중국은 여러 민족이 번갈아 왕조가 된 나라답게 헷갈린다. 청나라 만주족의 국산은 장백산이었다. 백두산(장백산)은 한때 조선과 청에서 같은 국산이 되었다. 청과 조선의 국산 정치학에 이런 일이 있었다.
1709년 11월24일, 청나라 강희황제와 신하들이 행궁인 창춘원에서 국정을 의논하고 있었다. 강희황제는 신하들에게 태산 산줄기의 맥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물었다. 신하들은 “산시성과 허난성에서 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상식대로 답했다. 그러자 강희황제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그렇지 않다. 태산의 맥은 장백산에서 온다.”면서 그 사실을 온 나라에 선포했다. 강희황제가 선언한 ‘태산 맥의 장백산 조종설(祖宗說)’은 일종의 상징물 전쟁으로 문화 정치적 면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역사적으로 태산은 한족의 정신적 중심이자 정치적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민족인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장악하면서 태산이 가진 한족의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성은 마땅히 만주족의 정통성에 연결되어 계승, 수용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청의 장백산은 만주족에게 민족의 발상지로서 신성한 지위를 지녔다. <만주실록>을 보면 “만주족은 원래 장백산의 동북쪽 포고리산 아래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청나라가 중국 전역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쟁취해 중원을 무대로 정치력을 확장하면서 장백산에 대한 숭배와 제의의 격은 더욱 높아졌다. 그렇지만 중원으로 정치력을 확장한 청나라 왕조에게 태산의 존재와 상징성은 그들의 장백산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대두되었다. 그 관계는 자칫하면 장백산과 태산의 상징물 경합이라는 문화전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장백산 신앙과 태산 신앙은 문화적 이질성과 역사적 단절성이라는 이념 문제도 갖고 있었다. 이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는 정치적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강희제가 선포한 “태산의 맥이 장백산에서 온다”는 절묘한 담론이었다. 두 산을 종주 관계로 계통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청나라 조정은 왕권의 상징적 정통성과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산이 갖는 상징성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활용된 흥미로운 역사적 사례라고 하겠다.
그 무렵 조선 후기의 한반도에도 태산의 장백산 조종설과 비교될 수 있는 국토 산줄기의 ‘백두산 조종설’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대두되었다. 산줄기를 기존의 중국 중심인 곤륜산이 아니라 한반도 중심의 백두산으로 설정한 것이 골자이다. 조선 중기까지 중화적인 지리 인식과 풍수설의 영향으로 한반도 산줄기의 근원을 멀리 중국 곤륜산에서 찾았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 사이에서 비로소 백두산 조종설이 대두된 것이다. 정약용은 “팔도의 모든 산이 다 백두산에서 일어났으니 이 산은 우리 산악의 조종”이라면서 그 줄기를 ‘백산대간(白山大幹)’이라고 했다. 당시에 왜 이런 사회적 담론이 생기게 되었을까. 백두산은 15세기 이후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비로소 국토의 머리라는 상징성이 부각된 산이다.
정치적인 영역성이 국산의 위상으로 반영된 것이다.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백두산이 표현되지 않았다가 16세기 중엽의 지도에 백두산을 국토의 조종산으로 표시하고 백두대간이 뚜렷해진다. 특히 1712년 청나라가 백두산 남쪽에 정계비를 세움으로써 백두산의 정치적, 영토적 의의가 더욱 중시되었다. 때를 같이해 지식인들의 국토 산하에 대한 자긍심이 커졌고 자주적 국토 인식으로 말미암아 영토의 종주로서 백두산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대 배경에서 신경준은 백두산을 나라 12명산의 하나로 지정했고, 정약용은 한발 더 나아가 “백두산은 동북아시아 여러 산들의 조종”이라고까지 언급하며 의미와 가치를 적극 부여했던 것이다. 두 나라에 접경해 영토 문제를 야기했던 백두산(장백산)은 결국 1962년 조중변계조약 체결에 따라 북쪽 45.5%는 중국 영토의 장백산이 되었고 남쪽 54.5%는 북한 영토의 백두산이 되었다.
아무튼 일본인들에게 후지산은 근대적인 산 정치학의 산물로서 신앙, 상징, 미학적으로 의미가 한정되어 있으며 중국의 국산은 여러 산으로 나뉘어 있다. 태산은 황제의 산, 곤륜산은 산줄기의 발원지, 장백산은 청조의 조상 산이다. 모두 현재 중국인에게는 국산으로서의 의미가 퇴색했다. 그러나 우리의 백두산은 조선시대부터 줄기차게 국산의 정체성이 문화 전통으로 이어왔고 상징, 지형, 민족, 의식이 뭉뚱그려져 복합적인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애)국가 가사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국가는 각 나라의 지향성을 드러내는 상징 이미지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의 국가에는 모두 백두산이 등장한다. 우리는 “동해물과 백두산이…삼천리 화려 강산”이라고 부르고, 북한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은….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 하며 1, 2절을 모두 산으로 시작한다. 남북한 둘 다 강산(산천) 지향성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과 중국은 다르다. 일본 국가는 천왕시대가 만세로 이어지라는 내용이다. 천왕 지향성이다. 같은 천왕제인 영국 국가도 비슷하다. “신이시여 우리의 자애로우신 여왕을 지켜 주소서!”(God save our gracious Queen)로 시작한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구미 어느 나라에도 한반도처럼 산이 국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를 비교하더라도 한국은 산 지향성 및 국산 정체성이 가장 강한 나라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우리의 백두산을 남의 땅 중국의 장백산에서만 바라볼 수 있을 뿐, 내 땅에 내 발로 설 수 없다는 분단의 먹먹한 현실이 가슴을 치게 한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게 있다. 고구려는 바로 백두산 밑에 자리를 잡았다. 최인호의 ‘왕도의 길’이란 글에서 보면 고구려 무덤은 북두칠성과 연관이 깊으며 한 결 같이 같은 방향 백두산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청나라 만주족들도 백두산을 영산으로 모시고 백두산 주변지역을 신성시하며 봉금까지 했을 정도다.
광개토대왕 비가 온전한 것은 청나라 무렵 봉금을 하여 보존된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앞머리는 삭발하고 목에는 108염주를 걸었다. 108염주 동서남북에는 불상을 모신다. 염주알은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채취한 진주로 만든다. 만주족의 고향인 백두산의 후예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황제의 모자에는 관세음보살이 이마 위에는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듯이 금불을 모시고 있다. 모자 상륜에는 가장 큰 압록강 진주로 오층탑을 모셨다. 태조인 누르하치가 세 여진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웠고. 명나라를 정벌하고 중원에 진출하면서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민족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만주란, 문수보살의 뜻으로 인도 말 만주수리를 줄인 말이다. 여진족들은 문수보살처럼 지혜롭고 용맹하다는 뜻이다. 청나라 만주족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를 많이 닮아 있다. 나는 그들이 고구려인으로 우리와 같은 민족성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자부심은 있지만 정작 산으로 등재된 세계유산은 아직 없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남한산성’도, 세계자연유산으로서 ‘제주도의 화산섬과 용암동굴’도 산이 지닌 역사적·자연적 가치에 중점을 둔 유산들이다. 중국만 하더라도 현재 10개의 세계유산이 산 이름으로 등재됐다. 산 자체의 가치도 포함된 것이다. 태산을 비롯하여 황산, 무당산, 여산, 아미산, 무이산, 청성산, 삼청산, 오대산, 천산 등이 그렇다. 일본만 해도 3개의 산지 유산이 있다. ‘시라카미산치(白山山地)’, ‘기이산지의 영지와 참배길’과 함께 작년에는 ‘후지산, 성스러운 장소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산 혹은 산맥 이름으로 등재된 세계유산은 전 세계적으로도 30개가 넘는다. ‘캐나디언 로키 산맥 공원(1984)’같이 주로 자연생태적 가치로 평가된 자연유산이 많고, 에스파냐의 ‘트라문타나산맥의 문화경관(2011)’처럼 자연과 문화가 복합된 문화경관 유산도 있다. 그리스의 ‘아토스 산(1988)’처럼 종교적·정신적 장소성이 평가된 성산(聖山) 혹은 영산(靈山) 유산도 몇몇 있다. 백두산이 역사의 산, 문화의 산으로서 세계적 브랜드를 얻고 널리 알려지면 우리의 조종으로서도 그렇지만 산악관광과 등산문화의 형태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문화역사관광이나 인문적 유산(遊山)이라는 지평을 대외적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정체성이 뚜렷한 산악문화를 외국 사람들은 보고 싶을 것이다. 서구에 없는 산신만 해도 그렇다. 사람이 사는 곳엔 언제나 산이 있었다. 한국의 산에는 역사문화 콘텐츠가 널려 있다. 우리의 영산으로서 백두산은 더 말해 뭣할까. 동해 물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는 길이길이 보존해야 할 막중한 책무를 갖고도 있는 셈이다. 한글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도 못 찍게 하고 구호도 못 지르게 하고 방해가 심하지만 그들이 뭐라 하던지 우리는 백두산을 줄기차게 찾는다.
이는 마음속에 두고 간직한 숭엄한 우리의 산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루아침에 가진 습속이 아니다. 저 멀리 고조선 고구려 때부터 이어온 우리의 고유의 DNA가 발동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 땅 덩어리에 놓여 있다하지만 어쩌면 이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내가 책상머리에 앉아 다녀온 백두산을 그리고 생각한다면 실체는 책상머리지만 내 의식과 정신은 백두산이듯 늘 마음에 품고 간직한다면 이는 늘 영원한 우리의 영산 백두산이 아니겠는가 싶어지는 것이다.
15.
태평스런 그들을 보며
이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머릿속에 남는다. 그런 이 세상이라는 것들은 보고 느끼는 족족 모두 과거의 것들이다. 바로 오늘 이 순간만이 현재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알자면 내력을 알아야 하고 내력이란 곧 살아온 삶의 숨결이고 이것이 곧 역사다. 아무리 작고 적은 보잘 것 없는 사물이라해도 족보는 있다. 왜 생긴 걸까. 존재의 이유다. 하물며 인간사에 등장하는 과거는 무어라 할텐가. 이를 도외시하고 사방 팔방 돌아다녀봐야 그때 갖는 즉흥적인 즐거움 외에 남고 선사할 것이 별로 없다.
우리는 싫든 좋든 알든 모르든 역사속에 사는거다. 얼마전 스페인을 큰 돈 들여다녀온 친구가 며칠은 돌아다니는 즐거움에 좋았는데 거의 매일 성당만 다니니까 지겹기만하더란 말을 했다. 서구문화는 많은 부분이 종교로 채색되었으니 이를 인식하고 가는게 훨씬 더 유용한 여행이었을 것이다. 단지 즐기러간다면 신혼부부들이 즐겨가는 환상의 섬을 찾는게 훨씬 알찬 여행이다. 우리와 이웃한 중국, 붙어 산 관계로 그들과는 싫든 좋든 늘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여행을 안가도 알고 대처하는게 뭐든 나으니 알아두어야 뱃속 편하다.
이말을 꺼내는 것은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글을 덮는 경향이 농후한 것 같아서다. 그래도 여전히 고리타분하게 알아서 뭐하냐 하는 측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나도 10년까지만 해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중국 이것만이라도 알아 두자 하는 차원에서 이글을 준비했다. 뭐 시대구분하고 따지는 어려운 글 아니다. 주사 한 방 맞듯 흐름으로 아! 그렇구나 하는 딱 그정도의 찔끔함이 있을 뿐이다.
보이차를 먹어야만 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디가나 보온 병 하나씩 지참하고 다닌다. 공항에서도 눈에 띄는게 뜨거운 물 쏟아지는 수도꼭지다. 차문화가 일찍이 발달했다고 할 것이지만 지방질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기름진 음식을 사랑한다. 그에는 당연 그런 자원이 풍족하기 때문이다. 익히 들어 본 차마고도 , 티벳인들도 양고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니 먹을 게 옥수수 알갱이하고 그것밖에는 없다. 그러기에 그들은 차가 지방질 분해 해독제였다. 중국인들이 그렇게 지방질을 즐기면서도 풍에 잘 안걸리는 이유는 바로 차의 효능에 있다.
당시 조선은 정녕 그렇지 못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은 오뉴월 보릿고개를 넘기가 힘들어 소나무 송홧가루 날릴 때 껍질을 파 먹다보니 변비가 생겨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멋 모르고 차를 마셨다가는 지방질이 없어서 뼈가죽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 자기 풍토에 맞게 알아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차마고도처럼 넘나들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 넓은 땅덩어리에 차와 고기 수급이 어떻게 원할했던 것인가. 이게 바로 중국을 아는 키 포인트다.
보이차를 먹어야만 하는 사람들, 지방질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이다. 중국을 여러 번 다녀봤지만 그들은 모두 기름진 음식을 사랑한다. 그에는 당연 그런 자원이 풍족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정녕 그렇지 못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은 오뉴월 보릿고개를 넘기가 힘들어 소나무 송홧가루 날릴 때 껍질을 파 먹다보니 변비가 생겨 그러한 것이다. 중국은 중화라 하는 표현을 즐기고 무척 좋아라한다. 어차피 넓은 땅 다수민족이 같이 어울려 살기위해서는 이 표어를 좋은 의미로 자국 적으로 통솔하여 해석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들이 진시황제를 좋아하는 것은 최초의 중국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며 한 무제를 나무라지 않는 것은 그는 흉노를 멸하였기 때문이다. 만주족인 건륭제를 칭찬하는 것은 티베트를 포석하여 지금의 중국이 된 기초를 다져 놓았기 때문이다.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딱 두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한자 동일 문화권이 형성 된 덕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질적으로 먹는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문자인 갑골문자는 허난성 은허에서 발견됐다. 이 문자는 한 나라의 문화 상징이자 중화민족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한자가 중화의 상징으로서 가교역할을 하도록 헌신한 사람은 중국 후한시대의 허신(許愼)이란 사람이다. 그는 허난성 뤄허 사람으로 그러고 보면 허난성과 한자는 깊은 관련이 있다. 진시황이 무력과 전쟁으로 중국을 통일했다면 허신은 책 한 권으로 중국의 문자를 통일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책이 바로 1천 9백 년 전 나온 ‘설문해자’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 설문해자는 중국 최초로 문자학이론을 제기하면서 한자에 관해 집대성한 책이다. 설문해자가 없었으면 중국인이 진나라의 문자, 갑골문자, 종정문자등 중국문자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이 허신을 보고 공자의 공헌과 같다고 평가해서 백세의 선생(百世之師)라고 칭찬 했다. 청나라 때는 허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허난성 뤄허에 ‘허남각사’를 건축한 뒤 매년 춘추제사를 진행했다. 한자는 그렇다 치고 먹는데 그것도 기름진 음식이 어디고 풍성한 것은 바로 수나라 수문제와 수양제 덕분이다. 수 양제는 백성을 괴롭힌 지독한 군주로 정평이 난 사람인데 아이러니하게 그 덕분에 중국이 나름 적어도 천년 이상 먹거리 문화에서는 지장이 없었으며 이를 이어받은 당나라는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유가 되고 본거지가 되는 곳을 일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바로 소주란 곳이다. 열하일기에서 ‘소흑산’이란 곳에 들르자 모두들 군침을 삼킨다. 바로 그곳은 소 , 양 등등 방목을 한 육류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만주 전역에 과일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저 아래 남부와 다를 바 없이 넘쳐나고 있다. 이는 최근에 일이 아니다. 나는 이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의 풍족한 먹거리,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이 참에 몇 자 옮긴다.
작년 10월 중순, 상해 시가지를 둘러본 후 다음날 나는 소주로 향했다. 상해는 몇 개의 역이 있다. 항주는 상해 남역으로 가고 소주는 상해역으로 가면 되는데 일반열차다. 요즘은 홍차오역에서 가는 고속열차가 돈은 더 나오지만 편리하다. 약 한 시간 걸려서 우리는 소주에 도착했다. 소주는 인구 650만이 넘는 거대한 도시다. 우리나라 부산을 닮았다고 할까. 아열대성 기후가 진을 친 이곳은 강남답게 후텁지근한 날씨다. 주변에 좌우장이나 통리 등 수변으로 형성된 일명 강남수향마을이 있다. 소주의 '소(蘇)'자는 파자(破字)를 하면 '++ '+'魚'+'禾'가 된다. 따뜻한 기온과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지를 갖춘 덕으로 초목이 무성하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며 벼농사가 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벌교에서는 주먹자랑, 여주에서는 돈 자랑 ‘순천에서는 인물자랑하지 말라’는 말처럼 중국 항주에서는 인물 자랑 말고 소주에서는 돈 자랑 하지 말라 하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중국 4대 미인 중 한명인 '서희'가 살았던 곳, 항주에는 서희만큼이나 아름다운 호수 서호가 있다. 서호는 맑을때 보면 좋고, 흐린날 보면 더 좋고, 비오는 날 보면 최고 좋다는 말이 있다. 아열대성 기후답게 날이 촉촉한 경우가 많아 그리 애칭을 달아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비 오는 날 민물튀김하고 45도짜리 독한 빼갈을 뱃전에 앉아 들이키며 이국땅에서 맛보는 서호의 정취는 그야말로 최고의 환상이다. 오가는 길 가로변에 즐비한 집들, 기후답게 일층은 창고나 주방으로 쓰고 침대는 필수이고 이층 삼층을 이용하는 그 지역의 그들이고 보면 사람 살기 좋다는 것은 단지 말 뿐이고 뜻은 딴 데 있지 싶다. 소주(蘇州)가 유명해진 것은 풍부한 생산력 때문이다. 바로 부를 말한다. 소주는 큰 운하의 시발점이다. 생산된 많은 산물이 운하를 타고 중국 전역으로 흘러 나간 게 1천 5백년이 넘었으니 소주 사람들은 수십 번 세상 바뀐 것 상관없이 늘 돈방석에 앉아 살았을 것이다. 이 경이로운 토목사업을 그 시대 벌일 생각을 했다니...배포가 대단하다 싶기도 한데 ,경제력은 단기적으로는 국가를 부강하게 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나라를 망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왜 몰랐을까.
무적함대 스페인은 콜롬버스의 신대륙으로 돈 방석에 앉았지만 인플레로 나라를 망쳤다. 국가의 흥망을 정치지도자의 정치력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전통적인 해법과 달리 경제와 사회의 규모에 따라 유효하게 관리하는 통제시스템의 유무에 따라 흥망이 좌우된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한(漢)나라가 멸망한 이후 중국은 삼국시대(三國時代)와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를 거쳐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는 370년간의 장기적인 분열의 시대를 거친다.
삼국지연의에는 이러한 중국사의 흐름을 이렇게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하대세(天下大勢)는 분구필합(分久必合)하고 합구필분(合久必分)이라" 그 간결하면서도 절묘한 표현이라니. 돌이켜보면 그런 시기는 혼란기(混亂期)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거대한 국가가 건설되기 위한 조정기(調整期)이기도 하다. 북방민족이 대거 남하하여 북중국에 들어와 중국인과 동화되기 시작하였고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중화인(中華人)은 남방으로 밀려 내려가 새로운 곳을 개척하면서 중국의 공간적 개념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이러한 분열의 시대를 통합하는 기틀을 마련한 것은 중화인이 아니라 북방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의 척발씨(拓跋氏)가 세운 북위(北魏)세력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나라를 세우고 빠른 속도로 중국인과 동화(同化)되어 갔다. 동화정책의 제1번은 성(姓)을 바꾸는 것이었다. 척발씨는 원씨(元氏)로 바꾸었고 모용씨(慕容氏)나 위지씨(尉遲氏)도 단음절의 한족 성씨로 바꾸었다. 신라의 진흥왕도 이무렵 모용씨에서 비로소 김씨 성으로 바꾸었다는 설도 이무렵 등장하는 말이다. 이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활력을 잃어 버린 중국인을 대신하여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중심 역할을 맡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소주에 와서 느낀 점은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광활한 대지를 흐르는 수천 수만 갈래의 물줄기이다. 아무리 비옥한 토지라고 하여도 북방은 고작 일모작(一毛作)일 뿐이다. 다모작이 가능한 남방이 지닌 매력을 가만히 북쪽 사람들이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남북조시대 말엽, 북주(북위의 전승국)는 북중국을 통일하고 양자강 이남에서 웅거한 남조(南朝)의 송(宋)나라를 공격하는데 그 전투지역이 바로 이곳 소주이다. 이 엄청난 농업생산력이 결국은 지금에 우리의 농업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좌절감도 든다. 어디서 중국산이 쏟아져 들어오나 했더니 산동반도와 이곳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래저래 이곳 소주는 지금도 우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중국의 남북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북방이 개방적이고 유동성이 높았으며 소규모의 자작농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졌던 것에 비하여 남방은 대대로 세습적인 권력을 이어 온 거대한 가문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은 통일을 위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농민들에게는 토지를 준다는 것만큼 매력적인 정치적 구호는 없을 것이다. 북조는 남조를 공략하면서 이러한 약점을 파고들었다.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남북전쟁과 그대로 닮았다. 미국에서도 북군이 승리한 대로 북조도 드디어 성공하여 수나라가 생긴다. 아무튼 그 성공의 여파는 머지않아서 고구려로 밀려왔다.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벌인 원인을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지나치게 늘어난 부(富)를 지방 호주 대신으로 소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부(富)가 늘어나면 수나라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였던 자작농이 무너지고 고질적인 토지겸병이 되살아난다. 어떻게 하든 각종 소비지향적인 정책을 펼치는 것만이 국가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대책이 된다. 그렇게 보면 수양제(隋煬帝)도 엉터리 군주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당시 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서 약관 20세에 남조의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강남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의 월남인 임읍(林邑)을 격파하고 돌궐은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접수한다. 그러한 그였으니 고구려도 쉽게 이기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몰락하였던 원인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심리적인 요인도 크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승승장구하기만 하여 실패를 모르던 그가 한번의 실패로 너무 쉽게 좌절한 것이다. 그리고 너무 자신을 믿은 나머지 적절한 관리시스템에 소홀하였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전략적 운용을 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풍부한 경제력을 믿고 방만한 군사력 운용을 하였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동원된 인원은 1,133,800명, 보급을 맡은 인원은 그 배를 넘었다고 하니 오늘날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총동원된 것과 같다. 웃기는 상황은 고구려의 성을 공격할 때 하도 군사가 많아서 배치할 자리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양제는 이후에도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이 운하를 통하여 양곡을 운반하던 양현감(楊玄感)이 운하의 중간지점인 하남성(河南省) 준현(濬縣) 부근인 여양(黎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도 고구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몰락을 거듭한 양제는 마침내 서기 618년 심복들에게 살해된다. 영욕의 끝이 어딜까 싶었던 황제가 한 순간에 비명횡사를 하다니 그것도 심복에게, 인간은 앞 일을 모른다고 인간의 숙명은 또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문득 영욕의 빛으로 백성에게 진 빚으로 이룩한 이 물길을 따라 북경까지 여행을 하고 싶어진다. 그러자 누군가가 "한달 걸리는데요?"라고 말을 한다. 대단한 수로 길이다.
운하건설은 몹시 어려운 공사였다. 중국대륙에는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당강의 5대 강이 흐르고 있다. 운하 건설은 이들 강의 지류를 연결하고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강바닥을 파내는 것이다. 먼저 황하와 회수를 이어 황하와 백하, 끝으로 양자강과 전당강을 연결하여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데, 운하의 폭은 60m, 길이는 2천km에 달했다. 운하 곁에는 길을 닦고 가로수로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뿐 아니라 장안에서 강도에 이르는 사이사이에 40여 개의 궁전을 짓고, 황제가 탈 용선과 유람선 수만 척을 만들어 띄웠다.
그에 바쳐진 백성들의 피땀과 생명은 수도 없었다. 황하와 회하를 잇는 통제거 공사에 동원된 사람만 백여만 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공사에 동원된 총인원수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듯하다. 기록에 따르면, 낙양 동쪽과 북쪽 수백km 도로변에서는 매월 인부교대가 이루어졌는데 공사에서 희생된 시체가 '도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운하 양언덕에도 도처에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농가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지고 남편 잃은 여인들과 고아들의 가련하고 처참한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남정네들은 무서운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랐다고 한다. 만리타향에서 버려진 시체로 뒹구느니 평생 불구로 살지라도 노역을 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福手福足'(복수복족)이란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대운하가 완성된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6년 만인 611년이다. 양제는 낙양을 떠나 강도까지 순행 길에 올랐다. 용선을 타고 운하를 따라 내려가니 배 젓는 사람만 8만 명이요, 꼬리를 문 배의 행렬이 무려 2백 리에 달했다. 말 탄 기병이 운하 양옆의 길을 따라 호위행진하고, 형형색색의 깃발과 병사들의 갑주가 눈부신 태양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났다.지나는 5백 리 이내의 고을에 음식을 헌상토록 하여,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음식이 너무 많아 종자와 후궁들이 실컷 먹고 떠날 때는 모두 땅에 묻고 갔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그렇게 많은 희생이 뒤따랐던 수로 길로 중국은 훗날 큰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역사는 이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수나라를 쓰러뜨리고 세운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멀리 서양과도 교역하는 등 번성했다. 우리말에도 ‘당(唐)~’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낱말은 거의 중국 수입품을 뜻하는 말이었고, 그건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 제품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서린 말이 되었다. 그런데 당나라의 번성은 과연 무엇에 의해 가능했을까? 물론 뛰어난 황제와 신하의 조화가 빚어낸 정관의 치적(貞觀之治) 등 뛰어난 정치 역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은 바로 수나라가 만든 운하 때문이었다.
운하는 단순히 물류 인프라로만 쓰인 게 아니라 전 제국에 대한 황제의 직할 통치와 직접 징세 및 조운(漕運)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통일과 번영이 가능했다. 실제로 수나라 때 만든 이 대운하는 중국 통치 범위의 기본 틀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중국의 직할 통치의 원형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륙 전체의 경제가 균형 있게 성장하고 교통이 수월해짐으로써 직접 관리를 파견할 수 있는 범위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연속성이다. 하나의 왕조가 끝나고 다음 왕조로 넘어갈 때 단절이 아니라 개혁의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시선도 필요하다. 하나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게 보이질 않는다. 시대정신은 그런 통찰력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 정권의 4대강 토목사업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 생태계가 파괴되었다고 다시 복원시켜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 판국이다. 자칫하면 후세에 큰 짐을 떠안길 수도 있다. 역사의식이란 말이 새삼 실감난다. 어쨌거나 그런 규모의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수양제를 고구려는 가뿐히 물리 쳤으니 그럼 고구려는 또 어떤 나라였단 말인가. 수문제가 역사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뽑혔다는데 그럼 그들을 물리친 영양왕 그리고 을지문덕은 서열 몇 위안에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나로선 수나라와의 전쟁은 불가사의한 일이라 말 할 수밖에는 없다.
19. 훈허강을 건너며
어제 술을 엄청 퍼 마셨는데 제 때 일어날 수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우리 몸은 에너지 보존법칙이 적용되고 관성의 법칙도 적용된다. 늘 마시던 술인 만큼 중국이라고 달리 에너지가 덜 소비되지도 않으며 평소만큼 필요로 한다. 거기에 기분이 UP되면 술이 술을 부르는 관성력도 적용되고 만다. 그러고도 아침에는 술에 지친 배를 쓰다듬으며 늘 그러하듯 출근길을 나서는 우리다. 몸은 늘 하던 대로 하려는 관성이 작용한다. 모두 6시에 일어나 씻고 닦고 아침 식사를 기다린다. 아줌마는 우리의 술 행태를 잘 아는지 북어 국을 끓였다. 과반을 먹고들 트림을 하더니만 한 결 같이 아주머니 덕에 말짱해졌다고들 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런대로 생생해 보였다.
오늘은 7시 출발이다. 이곳에 오기 전 큰 밑그림을 그릴 때 나는 민박집 예약을 하면서 여러 갈래로 검토를 했었다. 제일 먼저 물어 본 것이 백암성에 대한 것이었다. 태자하를 배수진으로 치고 성을 쌓았다는 백암성은 고구려 성의 특징을 원형 그대로 제일 잘 보여준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주소까지 챙겨 가 볼 생각을 했는데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렌트를 하지 않고서는 시골까지 가기도 곤란하고 간다고 해도 역사에 빠진 나 말고는 긴 시간을 이곳에 허비한다는 게 무리라는 생각을 했다. 과감히 포기를 하고 생각해낸 것이 연암 박지원의 요동이다. 백탑과 광우사과 관제묘를 연암은 비교적 상세히 묘사를 했으며 연암은 요동이 초행길이라 이미 본 다른 일행과 나뉘어 따로 챙겨본 그의 말대로 구요동 땅이다.
물론 요동 북쪽에 태자하가 있으니 그 근방 어딘가에 백암성이 있을 것인데 아쉽기는 하다. 그리고 간 김에 볼 것이 많은 안산도 이 참에 가보자 하였다. 이 역시 문제는 교통편이다. 어떻게 다녀와야 하나. 자가 렌트를 한다면. 중국을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운전을 한다면 1시간도 안되어 재미없어 나가떨어지던지 좌충우돌로 병원행이고 우리가 중국에서 운전을 한다면 15분 만에 퍼질 것이라고 했다. 신호도 무시하고 눈치껏 요리조리 다니는 기묘함은 가히 예술이다. 그렇다면 지리상문제도 해결하고 운전사 딸린 렌트가 적절하다. 결국 돈 문제가 남는다. 아줌마에게 봉고차 렌트를 문의했었다. 아줌마는 알아보더니 1천원을 달라고 한다고 전해주었다.
천원이면 중국에서는 꽤 비싼 값이다. 나는 변기사라는 조선족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 천원 아래로는 안 되겠다고 완강하다. 나는 마음은 급했지만 마음과는 정 반대로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겠노라고 했다. 그러면 생각한 것을 다 못 볼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 볼 생각은 없고 어차피 놀고 쉬자고 가는 길 되는 대로 보다 말겠노라고 응수를 했다. 그런 고로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나는 이후에도 날씨하며 고속열차 예매등 그곳 사정을 묻느라고 아줌마하고 몇 차례 전화를 했지만 봉고차 빌리는 건에 대해서는 일부러 무심한 척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줌마가 어찌 된 거냐고 하였지만 그냥 알아서 천천히 다니던지 아니면 요동만 보고 오겠노라고 했다. 심양에 가는 날은 다가오고 그쯤 변기사라는 분이 아줌마에게 물어 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대비해 800원이면 몰라도 라는 말을 후렴조로 아줌마에게 전화 할 때 은근슬쩍 껴 넣어 얼버무리곤 했다. 떠나기 일주일 전 역시 생각대로 응답이 왔다. 당초 3박4일로 가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일정이 빡빡할 것 같아 우리는 하루를 더 연장 했으며 그사이 일행도 한 명이 바뀌었다. 당초 석박사라는 분이 가기로 하고 돈도 냈는데 정부상대 예산과제 발표회가 메르스 때문 연기되어 하필 돌아오는 날로 확정되어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랴부랴 핀치히터로 교체된 분이 천하태평 김 이사님이다. 나와 그 그리고 도박사님은 늘 산행을 같이 했었다. 하루를 연장하는 바람에 민박집 요금도 달라졌다. 하루 방 세 개 값이 450원인데 100원을 깎아 1700원에 하기로 했다. 아줌마가 말끝에 '봉고차 800원에 해준답니다.' 라고 했다.
우리는 아파트 입구에 모였다. 이미 봉고차는 와 있었는데 변기사는 연결고리고 중국인 장씨라는 분이 우리를 이끌고 간다고 했다. 이틀 전 오애시장 가는 길에 만난 택시기사가 공항까지 80원이라고 한 것을 상기해 공항을 물어보니 150원에 가주겠노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일 우리가 견과류를 사고 그리고 공항에 갈 예정이니 50원을 더 줄 터이니 들려서 공항에 가자고 했다. 장기사는 선뜻 응해주었다. 도합 2백 원에 내일은 견과류 시장에 들러 공항으로 가고 오늘은 800원에 잠시 오애시장을 들러 내가 미리 봐둔 기념품을 하나 사고 곧 바로 요동을 가기로 했다. 장기사는 안산을 갔다가 오는 길에 요동을 들르자고 했지만 광우사가 늦으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요동 다음 안산을 가는 것으로 해두었다. 오늘은 일이 순순히 잘 풀리는 것만 같다.
우리는 차에 올랐다. 오르기 전 만약을 몰라 조선족 시장에 잠시 들러 간식으로 인절미를 사고 물을 사고 맥주도 두병 정도 샀다. 회계로 부터 돈을 10원 받아 샀는데 나중 돈이 모자라 내 돈 20원을 쓰고 나중 달라고 했다. 이 돈을 상세히 적는 데는 꾀죄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 나중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아침 길 오애시장은 막히지 않았다. 일행들이 쫓아 나오면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것 같아 차안에 계시라 하고 나와 김이사만 번개처럼 물건을 사러 다녀왔다. 등산용품 집의 휴대용 술잔. 드디어 차는 교외로 빠져 나간다. 그들은 요양이라고 하지만 나는 요동이라고 부른다. 그 말이 친한 것은 바로 고구려 요동 땅으로 조선시대에도 우리는 그렇게 불렀으며 중국도 인정하는 고구려 땅이기 때문이다.
심양은 연암 때는 성경이라 불러 그의 글에서도 심양에서 벌어진 일은 성경잡지라고 했는데 그 동네에 흔한 은행이름이 성경은행이고 오애 시장 주변에는 우리가 또 익숙한 봉천대로라는 게 있다. 봉천하면 나는 으레 독립군이 떠오른다. 차는 어느새 다리를 건너고 있다. 심양을 가로지른 강을 건너는 것이다. 차가 잘 달린다. 중국이 만든 상하이차인데 거의 반값으로 승부를 건 차다.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우리 차가 많았는데 그래도 동포라고 챙겨주는 것이 고맙다. 하지만 그런 심정으로 승부를 거는 것은 무리다. 이곳에 오기 전 현대차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차가 안 팔린다. 본국에서도 외제 차 판매율 대비 떨어지는 판매량이다. 2010년 그때는 좋았다. 기억들 하는지 모르겠는데 치킨게임에서 우리는 승리했고 그 바람에 세계 5대 메이커 안에 들어갔었다.
당시 일본열도는 침울했다. 일본의 대표적 일본항공사(JAL)가 적자운영으로 인해 법정관리로 들어갔으며 일본경제 성적표는 마이너스 5.4%로 뒷걸음 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1위의 자동차 대표회사인 도요타가 가속페달 결함문제로 전 세계시장에서 1천만대의 리콜이 벌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7-80년대 일본경제의 호황을 불러일으킨 소니와 도요타, 신일본제철회사, 미쯔비시중공업 등 굴지의 세계적 기업들이 하나씩 정상에서 밀려났다. 소니가 삼성전자에게 밀렸다. 삼성전자는 매출1천170억 달러로 미국의 휴렛패커드(1천146억 달러)와 독일의 지멘스(1천98억 달러)를 제치고 세계1위로 등극했다. 도요타의 아키오 사장은 NHK방송에 나와 일파만파로 번지는 리콜사태에 대해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게 해 매우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일취월장한 도요타자동차가 부속품 하나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국시장에서 도요타에게 빼앗긴 수요를 되찾기 위해 미국언론들이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수요자들에게 미국차를 사라고 야단들이었다. 미국 리먼 은행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GM자동차 회사는 노조들의 자기 몫 찾기 때문에 파산한 사태였다. 쌍용차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추락하기 시작하면 날개가 없다고 떠든 때가 5년전 일인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가 자꾸 블랙홀에 빠져들고 있고 일본차는 엔저를 기반으로 상승기류를 타고 있다. 엔저 현상을 미국은 모른 체 돕고 있으며 급기야 아베의 일제만행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 덕으로 미국은 얼마 전 양쪽이 만나 30조의 신무기를 팔았다.
2015년 다시 자동차 치킨게임이 시작됐다. 현대는 중국 충칭에 새 공장을 짓고 서부지역을 공략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중국 자동차 시장 2천5백 만 대 공급 과잉인데 뚝심의 정몽구 회장은 한판 붙어보자며 다시 한 번 승부수를 던졌다. 공장이 본격 가동되는 2018년이면 현대차와 기아차의 중국 생산량은 지금보다 38% 이상 늘어난다고 한다. 하지만 우려도 크다.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이 너도 나도 공장 증설에 나서면서 중국 내 자동차 생산능력은 이미 5000만대로 수요의 2배나 된다. 여기에 반값 가격을 무기로, 중국 토종 업체들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적이 가면, 나도 간다" 정몽구 회장의 이른바 '적진아진' 승부수가 '치킨게임'으로 흘러가는 중국 시장에서 어떤 결과를 낼지 세계 자동차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정말 추락하기 시작하면 날개가 없다. 지금은 우리 기업들이 생동감을 잃고 추락하고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도 자칫하면 10년 이내에 구멍가게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성 발언도 나온다. 극단적 이기주의에 물든 노동자나 기업가들은 결국 자기 목을 스스로 죄고 말기 때문에 화해협력하고 상생의 윈(win) 윈 전략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봐도 최근 벤츠와 BMW, 아우디 등 외국차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외제차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과거처럼 맹목적인 애국심으로 국산차를 탈 이유가 없다”고 항변한다. 우리 세대만해도 ‘국산품애용’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특히 자동차에 관한 한 외제차를 구입해 타는 것이 흡사 나쁜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돼 돈이 있어도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외제차를 구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현대차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우리 국민들의 이런 애국심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같은 국민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더 이상 외제 차 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무개념이라고 할 수도 없고 자연적인 사회이반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국민들의 이 같은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아마도 현대자동차의 잦은 노사분규가 한 몫 했을 것이고 혹여 현대자동차의 직원들과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우리 사회를 생각하지 않는데 따른 여파로 우리가 현대자동차를 사 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의식도 더불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노사는 이견 없이 세계일류기업이 되자는 각오로 품질향상에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그 길만이 국민과 국가에 공헌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수없이 누비는 차들을 보며 우리의 몫을 생각해 보았다. 무한경쟁에 사는 우리로서는 늘 희비의 쌍곡선을 그리며 살아가는 듯도 싶다. 아무튼 이번 치킨게임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엔저와 유로화 약세로 해외 판매에서 고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 시장에서조차 수입 차 공세에 밀려 판매부진에 시달리니 말이다. 그런 생각에 무심코 강을 바라보는 데 맞은 편 큰 건물에 달아 놓은 강 이름 문구가 이상하다싶다. 분명 포강이라 했다. 내가 역사적으로 아는 강 이름과는 다르다. 연암은 그 시대 차가 없으며 다리가 성성하지 않았기에 넘어서는 강 때문 매번 곤욕을 치루었다. 여름철 장마비가 겹쳐 통원보라는 곳에서는 본의 아니게 6일간 여관방 신세도 져야 했다. 심양에 오를 때 연암은 이 강을 건너가며 무슨 말을 했었던가.
20. 요동에 이르러
심양(瀋陽)은 요동(遼東)의 중심부다. 서쪽에는 요하(遼河), 남쪽에는 태자하(太子河)가 흐르고, 혼하(渾河)는 심양을 가로지른다. 세 강의 이름은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랴오허, 타이쯔허, 훈허라고 부른다. 참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땅 이름, 강 이름을 모두 중국 발음으로만 표기하니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북방의 지명은 사어(死語)로 변해 간다. 심양, 요하, 태자하, 혼하…. 이런 이름은 한국사 시험에나 한 번씩 써먹는 ‘시험용어’로 변해버렸다.
혼하는 아리강(阿利江), 헌우락수라고도 했다. ‘아리’는 한자어가 아니다. 북방 민족의 말을 가차(假借)한 것이다. 한강의 다른 이름이 아리수다. 이름이 똑같다.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화두인 패수(浿水)는 대동강이 아닌 혼하라고 하기도 한다. 이 강은 태자하와 만나 서쪽으로 흐르고, 다시 요하를 만나 발해만으로 흘러든다. 거미줄처럼 얽힌 큰 강을 낀 그 땅은 얼마나 비옥할까. 그곳이 바로 우리의 역사 무대였던 요동이다. 지금은 아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성경잡지(盛京雜識)에서 이렇게 썼다. “심양은 원래 우리나라 땅이다.” “요동 벌판이 잠잠해지면 천하의 풍진(風塵)이 가라앉고, 요동 벌판이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군마가 움직인다.”
당 태종 이세민,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부를 정도로 빼어난 인물이다.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해 도망치다 발착수(渤錯水)에 이르서 진창의 뻘을 만났다고 한다. 1만명의 군사가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고 설인귀 등에 업혀 겨우 사지를 벗어났다. 그곳이 심양에 가깝다. 압록강 북편 혁도아랍성에서 일어난 누루하치, 그의 아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심양을 근거로 만주팔기를 이끌고 명나라를 공격했다. 명과 일전인 ‘송행의 싸움’(松杏之戰)이 벌어진 곳이 심양과 멀지 않다.
심양은 지금 선양이라고 부른다. 남·북한의 총영사관이 있으며, 동북3성을 담당하는 중국군 선양군구가 그곳에 있다.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1년11개월 만에 그곳에 갔다. 지린성을 둘러보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간 지 9일 만이다. 북방 행차는 왜 그렇게 잦을까. 북한에 화해 메시지를 보내는 뜻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요동 벌판이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군마가 움직인다”는 것을 그도 알기 때문은 아닐까.
심양에 강을 건너며 강 이름을 '포'로 읽은 것은 浦자와 ‘흐리다.’란 의미의 浑(혼) 자를 혼돈 한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그 동네가 배가 정박하는 포구라서 그리 부쳐준 이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강 이름은 유명한 '혼하'라 불리는 강이다. 중국 사람들은 훈이라 발음을 한다. 혼하는 푸순과 심양을 지나 요양시를 끼고 흐르는 태자하와 합류하여 하류에서 대요하가 된다. 대요하는 요동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태자하의 발원지는 남으로 본계현 양호구 초모정자산이고 북으로 평정산향 홍안구로, 이 두 갈래가 합쳐 요양시를 거쳐 흐른다. 총 길이는 464㎞에 이른다. 백암성은 바로 이 태자하를 굽어보는 요지인 등탑현 서대요향 관둔촌에 있다. 백암성에서 본 태자하와 요동벌, 그 속에 담긴 역사는 아직도 묘연하기만 하다. 정설은 그만두고 나는 요즘 재야측에서 주장하는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에 대한 자료를 근거로 하는 이야기로 그들 주장은 심양이 고구려 수도였고 (평양은 남평양에 해당) 살수가 바로 혼하이고 패수는 혼하의 지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료에서 요동성은 지금의 창려로 (하북성의 동해안 동쪽을 말한다고 보고 있다.)그곳은 단군 조선시대에는 왕검성이었다는 것이다. 요동은 이름이 요동이 아니라 요서 동쪽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북경에 아주 가까이 요동성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태원(현 중국의 산서성)까지 진격했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데 참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태원은 지금도 지명이름이 태원이다. 난 정말 혼돈하고 있다.
또 하나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인 요사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 문서의 ‘동경도’편에서는 요양은 원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여기서 조선은 고조선을 말한다. 우리 교과서에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요사에서는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 놓은 것이다. 한사군은 만주에 있었으며 요양은 고구려 수도 평양이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거란은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속국으로 살다가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그런 만큼 그들의 지리지는 정확하다고 할 수 밖에는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재미난 자료를 보았다. 평양에서 발견된 요동성총 벽화를 근거로 위치 고증을 하기위해 요동의 위성사진과 지도를 참조했는데 그럴듯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유물도 뒷받침을 한다. 20세기 전반에 요동시 중심부와 그 부분에서 전국시대~한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고 요양시 주변에서 전국시대 화폐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요양시 구성구(舊城區) 북부에서 고구려 시기의 유물이 상당히 발견되었다고 하며, 1992년에는 심양시 중심로를 개설하다가 세과사소학교(稅課司小學校) 동쪽에서 고구려 시기의 석실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사군과 고구려가 겹치는 게 그럴 듯 하고 수상하다. 아무튼 심양이나 요동은 우리에게 예사롭지 않다. 나는 그 동네 땅속에는 고구려 유물이 가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암은 심양에 들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심양은 옛 우리 땅이다. 몇 리를 더 가니 멀리서 불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양에 가까워진 것이다. 대개 성이 멀리 있을 때는 탑이 짧게, 가까워지면 길게 보이는 법이다. 혼하는 아리강(阿利江) 혹은 소료수(小遼水)라고도 하는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사하(沙河)와 합쳐져 심양성의 동남부를 휘돌고 나가 태자하(太子河)를 만나고, 서쪽으로 흘러 요하(遼河)와 합쳐져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혼하를 건너 몇 리쯤 가니 높지 않은 토성이 있다. 토성 밖에는 옻칠한 것처럼 새까만 소 수백 마리가 있다. 이랑이 백 개쯤 되는 큰 연못에는 한창 연꽃이 피어 있고, 거위와 오리가 수없이 헤엄치고 있다. 못가에 양떼가 물을 마시다가 사람들을 보고 머리를 쫑긋 세운다.(열하일기 성경잡지 7월 10일)>
지금도 양고기가 흔하더니 연암도 양떼를 심양에서 보았던 모양이다. 며칠 전 내몽고 지역(네이멍이라고 부른다.)에 비가 안 오고 열기가 더해져 메뚜기가 기성을 부리고 있으며 그 바람에 그 지역의 목축산업에 크나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느낌이 닿는 이야기다. 이곳 목초지는 대단한 땅덩어리인데 펄벅의 대지 소설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러하다면 속수무책일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혼하는 심양 도심의 남쪽을 흐르고 있으며 북쪽은 고층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연암 박지원이 혼하를 건너기 전에 보았던 불탑은 심양성 남쪽의 남탑(南塔, 광자사 탑)이었을 텐데, 오늘날은 혼하에 이르러 심양 시가지 쪽을 바라보면 고층건물에 가려 어림도 없다. 요양과 심양의 거리는 약 80㎞이다. 그 중간에 십리하란 곳이 있는데 사신일행들이 심양에 들어가기 전에 묵은 곳이다. 연암은 이 길에서 처음으로 한족 여자를 보았다고 기록해 놓았는데, 인물은 만주족 여자보다 못하다고 평했다.
심양에 거의 다 와서 비로소 한족여인을 처음 봤다는 나는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그때만 해도 북방이라 할 이곳까지 쉽사리 한족이 밀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아서다. 지금도 소수민족의 티를 안내기 위해 많은 중국 사람들은 스스로를 한족이라 부른다. 중국의 한 네티즌이 쓴 글을 보면 그들의 현주소를 알만하다. “대학 동창 하나가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를 백족(白族) 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분증에는 ‘한족’(漢族)이라고 적혀 있다. 또 다른 회사 동료는 성이 왕씨다. 몽골족인데 호적지와 출생지가 다 (한족 문명의 중심지인) 하남성 남양으로 돼 있다. 산서성과 내몽골자치주를 여행할 때 운전을 맡은 기사는 산서성의 한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할아버지가 몽골족이라고 털어놓았다.”
층층이 더 높이 더 길게 쌓으려는 만리장성인데 더 깊숙이 무너지고 있는 인간 만리장성이란 생각이 든다.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이 있으며 동북공정이 있다. 연암이 심양에서 장사하는 청년들과 교우를 할 때 그들은 삼국시대 누구의 후손이라고 까지 털어 놓은 사람들이다. 뿌리를 소상히 알고 있으며 이는 유교적 관습 때문 그럴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역사를 주름잡던 그 많은 북방민족과 소수민족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연암은 아마 한족여인을 금방 알아보았을 것이다. 한족여인들은 특이해서 금방 표시가 난다. 그녀들은 전족(발을 꽁꽁 묶어 작게 기형으로 만드는 풍습)이라는 것을 했다. 청나라가 들어서 강희제가 법으로까지 금했음에도 머리는 빡빡 깎았는데도 여성의 전통전족 악습은 굽히지 않았다. 이는 한족여인이라는 신분의 우월감이 작용한 것이다.
결국은 청대가 몰락하고 새로운 서양문물과 함께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넘어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여권이 향상되고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지면서 이러한 전족의 풍습 역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에도 길을 가다 보면 간혹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들 중에 어린 아이의 손바닥처럼 작은 발을 가진 사람을 간혹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연암의 시대 심양에 다 와서 겨우 한족 여인을 보았다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다 동이족들 후손들로 곽 채워진 만주땅이 아니었겠나 싶어진다.
삼사를 비롯한 사행단의 본진은 아미를 거쳐 태자하(太子河)를 건너 신요양의 영수사(迎水寺)에 마련된 숙소로 간다. 반면 연암 박지원 일행 17명은 본진에서 따로 나와 구요동으로 들어가 백탑, 광우사, 관제묘를 둘러보고 태자하를 건너 영수사로 간다. 7월 9일에는 삼도파(三道巴), 난니보(爛泥堡), 연대하(煙臺河)를 지나 십리하(十里河)에서 숙박하고 그 다음날인 7월 10일 백탑보(白塔堡)를 거쳐 심양에 입성한다. 십리하 백탑보는 오늘날에도 같은 지명을 사용한다 하니 아마 지금 가는 길 어디쯤 일 것이다. 백탑보는 고구려인들이 말 달리던 곳이요, 원나라 때 고려인들과 더불어 청나라 시절 조선인들이 붙잡혀 끌려가던 아쉬운 길이기도 하다.
물줄기 하나를 또 건넜다. 십리하 아니면 태자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동에 가까이 온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별도로 태자하에 얽힌 전설을 기록으로 남겼다. <태자하는 요양의 북쪽에 있다. 변방 밖 영길주(永吉州)에서 발원하여 변문 안으로 들어와 혼하와 요하에 합쳐져 삼차하(三汊河)가 된다. 전설에 의하면, 연나라 태자 단(旦)이 자객 형가를 시켜 진 시황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진시황이 보낸 군사에 쫓겨 이 강까지 도망왔다가 목이 잘려 진시황에게 바쳐졌는데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태자하라고 불렀다고 한다.(열하일기 산천기략)>
드디어 요양역이 눈앞에 보인다. 구글 지도에서 미리 찾아봤는데 역 근처에 광우사와 백탑이 있었다. 요동을 연암은 이렇게 말했다.
<요동의 옛 성은 한(漢)나라 시대에는 양평현과 요양현 중간에 있었다. 진(秦)나라 때는 요동이라 불렀다. 뒤에 위만조선에 속했다가 한나라 말에 공손도(公孫度)에게 점령되었으며, 수나라, 당나라 때는 고구려에 속했다.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 속했고, 이어 거란은 남경(南京), 금나라는 동경(東京)이라 불렀다. 원나라 때는 행성(行省)을 두었고 명나라 때는 정료위(定遼衛)를 두었다. 지금 청나라에서는 20리쯤 떨어진 곳으로 성을 옮겨 이를 신요양(新遼陽)이라 부르고, 옛 성을 허물고 이를 과거의 요동이라는 뜻으로 구요동(舊遼東)이라고 부른다. 구요동의 성은 둘레가 20 리인데, 명나라의 유명한 장수 웅정필(熊廷弼)이 쌓았다고 한다. 뒷날 웅정필이 떠나자 요동성은 청나라에 함락되었다. 청나라에서는 이 성을 허물어 버리려 했는데, 군사들이 열흘 동안 허물었으나 다 허물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요동성의 흔적을 보며, 당시 웅정필을 탄핵한 장면을 되살려 보니 그의 인간됨을 상상할 수 있다.명사(明史)에 따르면 웅정필이 위험에 처한 광영성(廣寧城)을 구하지 아니하자, 삼사(三司) 왕기(王紀) 추원표(鄒元標) 주응추(周應秋)는, ‘웅정필의 재주와 기백은 대단합니다. 왕년에 요동을 지키니 요동이 건재했고, 요동을 떠나자 요동이 멸망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괴팍한 성질은 꺾을 수 없습니다. 장군 양호(楊鎬)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한 번 더 도망했고, 원응태와 비교한다면 한번의 죽음으로는 부족할 정도입니다. 청나라 군대에 패한 죄를 물어서 왕화정(王化貞)은 사형시키고 웅정필은 관대하게 용서하신다면 형평에 어긋난 처사입니다’라고 탄핵하였다.슬프다. 명나라 말기에는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이 거꾸로 되고, 공과 죄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웅정필과 원숭환(袁崇焕)같은 명장의 죽음을 보면 명나라는 자기 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어찌 후대의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열하일기 구요동기)>
요동벌을 보며 그는 또 이렇게 말했었다.
<고개를 돌려 멀리 요동성 밖을 바라보니, 푸른 숲이 망망하고 새벽 갈까마귀 떼가 들판에 날아 흩어진다. 아침밥 짓는 연기가 하늘에 펼쳐지고, 태양이 떠오르며 자욱한 안개를 붉게 물들인다. 사방을 둘러봐도 씻은 듯 아득하고 넓어서 한 점 걸리거나 막힌 데가 없다.아! 여기가 바로 영웅들이 수없이 싸웠던 전쟁터로구나. 천자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천하가 편안한가 위태로운가는 항상 요동벌판에 달려 있었다. 요동벌판이 편안하면 나라가 평온했고, 시끄러우면 천하에 전쟁이 일어나 북소리, 징소리가 번갈아 울렸음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천 리가 툭 터진 이 광야를 지키자니 힘을 모으기 어렵고, 버리자니 오랑캐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대문도 마당도 없는 경계이다. 이것 때문에 요동벌판은 늘 전쟁을 치르는 땅이 되고 말았으며, 온 힘을 기울여서라도 지켜야만 천하가 안정되는 까닭이다.지금 천하가 백 년간 전쟁이 없는 것이 어찌 덕과 교화와 정치가 이전보다 뛰어났기 때문이겠는가. 심양은 바로 청나라가 처음 일어난 곳이고, 동으로는 영고탑에 접해 있고 북으로는 열하(熱河)를 제어하고 남으로 조선을 어루만지면서 서쪽 중원으로 진격해 들어가니, 중국은 감히 꼼짝하지 못했다. 근본을 튼튼하게 하는 방법은 역대 어느 왕조와도 비교할 바가 아니다. 요동에 들어온 이래로 뽕나무 삼나무가 우거지고,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마을이 이어져 백 년간 무사했으니, 이제 청나라 황실에겐 한 가지 괴로운 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열하일기 도강록 7월 10일)>
연암 말대로 고구려 때도 그러했다. 요동을 차지하는 자는 세상을 얻는 것이고 언제고 승리를 구가했다. 연암 박지원 일행이 구요동에 들어갈 당시에도 요동성은 허물어졌었지만, 오늘날에는 신요양의 동경성 역시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신요양의 영수사 역시 노인요양원이 들어서 흔적도 없어졌고 마을 이름만 영수사촌(迎水寺村)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우리는 역 바로 지나 우뚝 선 탑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늘진 버드나무에 차를 세웠다. 연암 시절에도 가로수는 버드나무였는데 물론 그 시대 버드나무는 아니겠지만 시원한 바람을 한 모금 마신 버드나무는 하늘하늘 우리를 반긴다. 연암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백탑을 그래서 나 또한 그렇게 보고 싶었던 백탑을 오늘에서야 본다. 나는 곧 바로 백탑으로 향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 형가(荊軻)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은 어린 시절 조(趙)나라에서 자랐는데, 그곳에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의 공자 정(政)과 친하게 되었다. 공자 정은 후에 시황제가 된다. 황제가 된 정은 어린 시절의 태자 단을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였다. 이에 화가난 단은 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구했다.
당시 위(衛)나라에 형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뜻이 크고 곧은 절개를 가진 사람이었다. 여러 나라를 유람하다가 연나라에 와서 축(筑) 연주의 달인인 고점리(高漸離)와 사귀고, 전광(田光)과도 사귀었다. 태자 단이 전광을 불러 나라 일을 상의하면서 시황제에 대한 복수심과 암살계획을 은근히 말하자 전광이 형가를 소개했다. 전광은 형가에게 태자 단의 뜻을 전하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는 목을 찔러 자결했다.
형가는 고심 끝에 진시황의 암살을 승낙하고 태자 단에게 진나라에서 망명한 번어기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 남쪽 국경지방의 지도를 요청한다. 고민하는 태자 단을 대신하여 번어기 장군을 직접 찾아간 형가는 '복수를 위해서는 진왕을 만나야 하고, 진왕을 만나려면 그가 갖고 싶어하는 물건을 가지고 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알아들은 번어기는 복수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마침내 형가는 진나라를 향한다. 태자 단을 비롯한 신하들이 모두 흰색 상복을 입고 전송했는데 역수에 이르러 여정의 안전을 비는 제사를 올리고 송별연을 베풀었다. 이때 고점리가 축을 연주하고 형가가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편 예리한 보검을 옷 속에 감추고 진시황을 알현할 기회를 잡은 형가는 한손으로 진시황의 옷소매를 잡고 칼로 찌르지만 피하는 바람에 옷소매만 자르고 말았다. 암살시도가 실패하자 진노한 시황제는 대군을 동원해 연나라를 공격했고 열달만에 연나라 수도가 함락된다. 이때 태자 단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그 장소가 바로 태자하라고 전해 온다.(사기 형가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