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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부르주아 공화국(2)
2. 총재정부의 동요
1795년 10월 27일 양원제 입법부와 5인 총재에게 위임된 행정부가 출범하였다. 새 입법부의 의석 3분의 2를 이어받은 옛 국민공회 의원은 대부분 시해파이고 다년간 혁명을 위해 싸워온 투사들이었다. 5인 총재는 바라스, 뢰벨(Jean-Francois Reubell), 라 레블리에르(Louise-Marie de La Revelliere), 르 투르뇌르(Le Tourneur), 카르노(Lazare Nicolas Marguerite Carnot)인데, 뢰벨 외에는 모두 시해파이고 바라스 외에는 모두 부르주아 출신으로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혁명에 성실하였다. 그러나 바라스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교활하고 정치적 모략과 재정적 부정에 능하고 괴상쩍은 반혁명분자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서슴지 않았다. 총재정부는 공안위원회의 중앙집권을 계승하여 외교, 군사, 치안, 지방행정을 통괄했으나 재정과 사법에는 간섭하지 못하였다. 새 헌법은 재정과 사법을 행정부에서도 입법부에서도 독립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견재와 균형의 원리에 의하여 권력의 집중과 독재를 막으려는 적극적인 의도의 표현이었다.
해마다 입법부 의원의 3분의 1과 총재 한 사람씩을 개선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1797년 봄까지는 개선을 하지 않기로 하여, 총재정부는 앞으로 18개월 사이에 정치적 안정을 기하면서 지난 6년간의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와 파괴와 참담을 정리하여 정사응로 복귀할 차비를 차렸다. 총재정부는 활동을 시작하면서 정부 방침으로서 정치적 안정의 회복, 왕당파에 대한 적극적 투쟁, 애국심의 고양, 일체의 파쟁과 당파심과 복수심의 박멸 및 총화 일치의 고양을 선언하였다. 총재정부의 과업은 혁명의 격파도 포기도 아니고 수습이었다. 그것은 혼란을 멈추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온건한 공화 중도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총재정부가 직면한 현실은 과업을 순조롭게 실현시킬 것 같지 않았다. 총재정부가 출범한 날을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이 보나파르트의 대포에 의해 간신히 진압된 지 불과 3주일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거기에다 총재정부가 국민공회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재정적 파산과 대외 전쟁이라는 무거운 짐이었다.
왕당파는 방데미에르 반란에서 철저히 진압되었으나 다시 지방에서 반란과 선동을 일삼았다. 서부의 방데 지방과 브르타뉴 지방, 남부의 랑도그 지방 및 프로방스 지방에서 영국이 공급해주는 무기와 위조지폐로 반란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이 지방의 반란들은 오슈 장군에 의해 철저히 진압되었다. 여기서 왕당파의 전략은 무력에 의한 정권 탈취를 포기하고 선거에 의한 합법적 탈권 방법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왕당파의 반란군 두목 피슈그뤼(Charles Pichegru)가 다음 선거에 출마하여 500인회 의장에 취임하게 된다.
어쨌든 왕당파의 선동과 반란은 일단 수그러졌으나 총재정부의 가장 큰 난제는 재정과 경제문제였다. 총재정부가 정권을 인수했을 때 국고는 문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아시냐는 실질 가치가 날마다 떨어지다가 1796년 3월 드디어 통화개혁에 따라 폐지되었다. 아시냐는 액면가의 3,33퍼센트로 새 지폐인 토지어음(mandats territoriaux)으로 교환되었다. 토지어음은 약 10억 5,000만 리브르로 평가되는 국유재산을 담보로 발행되었는데, 이것 역시 급속히 아시냐와 똑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다. 아무도 토지어음을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1797년 2월 정부는 별 수 없이 토지어음의 강제 유통을 폐지하였다.
통화 위기는 물가의 폭등, 빈부의 격차와 산업의 침체, 실업의 증대 및 무서운 빈곤을 가져왔다. 총재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는 사회 불만과 불안을 낳았다. 이 불만을 이용하여 자코뱅 잔당이 팡테옹 클럽이라는 과격파 조직을 만들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팡테옹 클럽에는 공화 3년 헌법을 비난하고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을 후회하고 1793년 헌법의 부활을 주장하는 좌익의 모든 세력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주목을 끌고 또 총재정부가 가장 무서워한 그룹은 그라쿠스 바뵈프를 중심으로 하는 과격한 평등주의자들이었다. 바뵈프는 일찌기 1795년 11월에 기관지인 <인민 논단(Le Tribun du peuple)>에서 ‘프랑스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제하에, 이렇게 서술한 바 있다.
그것은 특권층과 민중, 부자와 빈자 사이의 전쟁이다……민주주의란 넉넉히 소유한 자들이 넉넉지 못한 자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의무이다…..거기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관리 제도를 세워 사유제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재능을 자기 직업에서 발휘하게 하고, 거기서 나온 생산물을 공동으로 보관하게 하고, 분배를 공동관리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산악파의 경제정책이 근로대중의 이익에 맞게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하여, 테르미도르파와 총재정부의 부루주아적 허위성을 깨닫고 폭력혁명에 투신하였다. 그의 행동은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이룩하는 부르주아 혁명 과정에서의 정치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사회의식의 싹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산조직이 아직 개인적인 단계에 있었던 산업자본주의 초기에 바뵈프의 관심이 주로 생산보다 분배에 기울여져 있었다면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가 그의 새로운 조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폭력에 의한 소수자 독재를 주장했다고 하여, 흔히 그를 현대 공산주의의 사상적 비조로 떠받들고 있다. 파뵈프의 ‘평등주의자의 음모(Conspiration des eaaux))’는 엣 산악파의 군대와 빈민 계층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총재정부는 그의 공산주의적 선전에 처음에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차츰 불안을 느껴 1796년 2월 팡테옹 클럽을 폐쇄하고 5월에는 바뵈프 등의 주모자들을 체포하였다. 9월에는 군대 반란 혐의자 33명을 사형하고, 이듬해 1797년 2월에는 바뵈프 일당을 재판에 붙여 5월에 사형과 유형에 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탄압 정책으로 총재정부는 좌익의 지지를 잃고 그 반동으로 왕당파에 활동의 기회를 주었다. 망명 귀족들이 떼를 지어 귀국하고 왕당파가 공공연히 각종 결사를 조직하여 1797년 봄 선거에 대비하였다. 영국의 두툼한 돈뭉치로 움직이는 비밀 지하조직들이 왕당파 후보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총재정부는 왕당파의 움직임을 과히 위험시하지 않았다. 왕당파가 폭력에 의한 반란 대신에 선거에 의한 탈권 정책으로 전략을 전환한 사실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법부 의원 3분의 1을 개선하는 선거가 1797년 4월에 치러졌다. 총재정부가 들어선 지 18개월 만에 처음 있는 선거였다. 선거는 규칙대로 평화적으로 실시되었으나, 옛 국민공회 의원으로 재선된 자는 13명뿐이고 대부분 군주주의가가 당선되었다. 이들 중에는 입헌군주론자가 많기는 했으나 철저한 정통주의자(Legitimiste)도 있었다. 서부 지방의 왕당파 반란의 두목 피슈그뤼가 500인회 의장에 선출되고, 르 투르뇌르 대신에 새로 뽑는 총재로서는 저명한 왕당파인 주베르(Barthelemy Catherine Joubert)가 뽑혔다. 이 이상 더 명백한 의회의 반동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의회는 7월에 선서 거부 성직자 단속령을 취소하였다.
이래도 총재정부가 왕당파의 위험에 태연할 수 있었을까? 뢰벨과 라 레블리에르는 위험을 깨닫고 기회주의적인 바라스를 설득하여 왕당파를 숙청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방데미에르 반란 진압에서 배운 군대의 힘을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산악파에게서 배운 민중 봉기를 이용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적인 총재정부가 민중 봉기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 본질상 모순된 것이었다. 그들은 민중의 봉기를 늘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부는 이제 중요한 정치적 요소로 대두하고 있었고, 더구나 방데미에르 반란에서 보여주었듯이 믿음직하고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반혁명 반란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것도 군대이고 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혁명 이념을 외국으로 퍼뜨린 것도 군대였다. 더구나 내외에서 전승을 기록할 때마다 개선장군들의 명성이 널리 국민에게 알려져서 국민적 영웅으로 숭앙되는 경향이 커 감에 따라 정치가들은 장군들의 요구와 의사를 점점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장군들에게 자신과 자부심을 높여주고, 드디어는 정부의 지시를 가볍게 보는 풍조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군인들이 오히려 정부를 지시하려는 태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군인이 정치에 개입할 위험성이 커짐에 따라 정부는 하는 수 없이 개선 장군들의 정치적 지지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총재정부의 세 사람은, 왕당파의 숙청을 이탈리아 방면 사령과 ㄴ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논의하였다. 나폴레옹은 방데미에르 반란 진압에서 군사적 역량과 공화적 태도를 파리 시민에게 과시하여 일약 명성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1796년 3월 이탈리아 및 알프스 방면 사령관에 임명된 이래 불과 3개월 사이에 북부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전부 정복하고 그 해 가을까지 교황령을 비롯한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1797년에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빈 근처로 진격하여 4월 18일 총재정부의 승인도 없이 제멋대로 오스트리아와 레오벤(Leoben) 가조약을 맺은 후, 밀라노 교외의 몬테벨로에 왕궁 같은 사령부를 차려놓고 군왕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총재정부 3인조의 요청에 응하여, 심복 부하인 오주로(Pierre Augereau) 장군을 파리 방위 사단인 제 17사단장으로 파견하였다. 의회의 왕당파는 수도 방위 사령관에 임명된 오주로 장군과 총재정부 3인조의 쿠데타 음모를 눈치채고 3인조를 고발하려 하였다. 이때 3인조가 기선을 잡고 3월 3일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지난 4월에 새 총재에 선출된 주베르와 3인조에 협력하지 않은 나머지 총재 카르노 그리고 500인회 의장 피슈그뤼를 포함한 13명의 의원을 체포했으나, 피슈그뤼와 카르노는 도망에 성공하였다. 지난 4월에 당선된 의원 중 왕당파 198명이 제명되고 그중 53명이 유형되었다. 유형자 중에는 일곱 명이 유배지에서 죽었다. 이 정변을 프뤽티도르(Fructidor 18일(1797년 9월 4일) 쿠데타라고 부른다. 추방된 두 총재의 자리에는 두에(Marlin de Douai)와 뇌프샤토(Francois de Neufchateau)가 임명되었다. 두 사람은 충실한 혁명가들이었다. 강화된 제2차 총재정부는 망명 귀족과 선서 거부 성직자의 탄압을 다시 강화하고 언론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망명 귀족 160명을 처형하고 선서 거부 성직자 258명을 유형에 처하였다. 총재정부는 왕당파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앞으로 오랫동안 왕당파의 움직임은 사라질 것이다. 총재정부는 공화국을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오로지 군부의 힘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들은 혁명적 독재를 재건했으나 그 권력은 군부의 지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제2차 총재정부가 과연 야심적인 장군들을 제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왕당파도 아니고 평등주의적 민주주의도 아닌 중도적 부르주아 공화국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 선거 결과는 자코뱅파가 다수를 얻었다. 총재정부는 새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채 선거 조사령을 제정하여 새로 선출된 의원 106명을 ‘과격파’라는 명목을 붙여 제거하였다. 이 불법적인 조치를 플로레알(Floreal 22일, 1798년 5월 11일) 쿠데타라고 하는데 이 쿠데타로써 총재정부는 간신히 그 중도성을 지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의회의 좌경을 막을 수는 있었으나 진지한 공화파의 지지를 잃었다 플로레알 쿠데타에 의하여 새로 구성된 의회는 해마다 한 사람씩 개선하는 총재에 뇌프샤토의 후임으로 트레야르(Jean Baptiste Treilhard)를 선출하였다. 이 공화 6년의 총재정부는 플로레알 쿠데타로써 확보한 정치적 안정을 이용하여 재정의 균형을 꾀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교육의 향상과 산업의 발전에 진력하여 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프뤽티도르 쿠데타와 플로레알 쿠데타에 각각 피해를 입은 왕당파와 자코뱅은 총재정부에 대한 무장을 풀지 않고 총재정부의 진지한 노력에 결코 만족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799년 봄, 공화 7년 제르미날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는 총재정부의 반대파에 유리하였다. 특히 지난해 플로레알 쿠데타로 제거되었던 자코뱅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 새 의회는 5월에 새 총재에 뢰벨의 후임으로 시에예스를 뽑고, 6월 1일 의회의 무기한 개원을 선언한 후, 작년에 총재에 선출된 트레야르의 선출을 위헌적이라고 하여 그 무효를 선언하고 새로 고이에(Louis Jerome Gohier)를 선출하였다. 동시에 의회는 라 레블리에르와 두에를 작년의 플로레알 쿠데타의 장본인들이라고 고발하여 해임을 결의하고, 물랭(J. F. A. Moulin)과 뒤코스(Roger Ducos)를 후임으로 선출하였다. 행정부에 의한 의회의 이 비상 조처를 공화 7년의 프레리알 30일, 1799년 6월 18일) 쿠데타라고 한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지난번의 플로레알 쿠데타에 의한 의회의 복수로서 쿠데타라기보다는 의회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새 총재 정부는 바라스 이외의 네 명이 모두 새 의회에 의하여 선출되었으니 의회의 다수당이 행정부를 구성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레리알 쿠데타는 말하자면 의회주의적 성격의 쿠데타였다. 그러나 공화 3년 헌법은 의회주의를 무시했으므로 위헌적이었다. 따라서 프레리알 쿠데타는, 공화 3년 헌법은 불완전한 것이라는 이유로 개정을 요구한 입장에서는 정당했을지라도, 입헌주의의 입장에서는 불법이었다. 이 쿠데타의 성격은 매우 미묘했다. 따라서 사태는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다시 한 번 더 명확한 공화주의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그리고 공화 3년 헌법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의 수명은 앞으로 다섯 달이 못 되어서 끝이 나고 만다. 그리고 공화국은 나폴레옹이라는 군사적 영웅의 독재에 의하여 말살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어디 있을까? 공화 3년 헌법과 총재정부의 제한적 성격에 있었다. 총재정부 시대에 쿠데타가 잇달아 일어난 원인도 바로 그 제한적 성격에 있었다. 안으로는 정치적 사회적 혁명의 와중에 있고 밖으로는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에서 공화 3년 헌법과 같은 중도적 공화주의 헌법이 과연 순조롭게 실시될 것인가는 당초부터 어려운 숙제였다. 그 헌법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를 수립하여 지배를 강화한 것으로서 상퀼로트에 기반을 둔 1789년 헌법의 민주주의 정신을 짓밟고 거꾸로 1789년 혁명의 부르주아적 전통에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1789년의 혁명 이념은 공화주의가 아니라 입헌군주주의였다. 그런데 공화 3년에는 군주가 목이 잘려 없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부득이 군주 없는 입헌군주주의 헌법으로 돌아간 것이 바로 공화 3년 헌법이었다. 공화 3년 헌법은 근본적으로 자가당착의 모순된 헌법이었다. 왕당파와 자코뱅파가 선거 때마다 진출하여 그 헌법을 위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엇다. 동시에 헌법을 지키기 위하여 쿠데타가 연발한 이유도 기본적으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총재정부의 사회적 기반은 부르주아지와 함께 국유재산의 구입으로 토지 소유자가 된 농민이었는데, 이 농민층은 자기들의 새 소유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는 앙시앵레짐의 부활을 극도로 두려워하였다. 요컨대 혁명으로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할 때 농민은 앙시앵레짐을 타도한 부르주아지와 이익의 일치를 발견한 것이다. 농민층이 총재정부의 온건한 중도적 공화주의를 지지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총재정부가 바뵈프의 ‘평등주의자의 음모’의 위협을 받자 1796년 4월 “왕정의 재건이나 1793년 헌법의 재건을 선동하거나….농지법의 이름 밑에 사유재산의 약탈과 분배를 선동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린 것은 이들 총재정부의 본질에 완전히 적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