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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항 이야기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고 나를 깜짝 놀래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매료된다.그 깜짝 놀란 이야기들을 모아서 널리 알리고자 이 글을 쓴다
나는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항 이야기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찾았다.(난 이렇게 간명하고 선명한 출발이 참 좋다. 소무뚜가 아니라 소모뚜라서 다 바꿨어.)
1995년 2월말.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소모뚜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날은 그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는 날이었다. 공항은 집에서 택시로 40분정도 거리였다. 그는 엄마가 해준 콩 볶음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정확히 말하면 볶음밥이라기보다는 빼뽁이란 콩을 삶아서 밥이랑 양파랑 비벼먹는 요리였다. 그날 이후 그 요리를 두 번 다시 먹어보진 못했기 때문에 빼뽁의 냄새는 언제나 코끝에 감도는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부모와 동생 둘,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에에투와 함께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버마 양곤 국제공항이었다. 처음엔 난생 처음 공항에 왔기 때문에 여기저기 구경을 했다. 그렇지만 비행시간이 가까워오자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정말로 고향을 떠나는구나! 이제 몇 년 있어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한 3년쯤 걸릴까?’ 탑승할 때가 되자 엄마가 그를 안아주고 양 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울기 시작했다.
“내 큰 아들, 건강하고 무엇보다 네가 가장 소중해. 너보다 소중한 건 없어. 이별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지. 살아 있으면서 하는 이별, 죽어서 하는 이별. 살아 있으면서 헤어지는 건 견딜 수 있어. 하지만 죽어서 이별하는 건 견딜 수가 없어.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돌아와 다오! 이렇게 건강하고 이렇게 믿음직한 모습으로.”
소모뚜는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 돌아올께요”라고 약속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울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다섯 명 소모뚜는 혼자, 5대 1이니까 우리가 울면 안 돼.’ 이렇게 생각하면서 참고 있다는 걸 소모뚜는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아버지가 말했다.
“앞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을텐 데 인내심을 갖고 살아라. 고통스런 것, 힘든 노동 다 참아내라. 하지만 단 하나 올바르지 못한 건 참지 말아라.”
소모뚜는 아버지께도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 손을 흔들고 비행기에 올라탔다.(이 문단에 특이한 건 이별 장면을 아주 담담하게 기술하면서도 그 담담함으로 인해 슬픔이 정확하게 전달된다는 거야.)
내가 그를 만났을 땐 이런 이별 후 1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아직 양곤 국제 공항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보세요! 큰 아들이 이렇게 약속을 지켰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전에 그에게 들어야 할 길고 긴 이야기가 있다.
소모뚜의 외할아버지는 대만 사람이었다. 버마에서 성당 짓는 일을 했다. ‘어찌 보면 우리 외할아버지도 이주 노동자였어’ 라고 소모뚜는 곧잘 생각했다. 그는 성공했고 버마 여자를 만나 정착해서 자손을 열한명이나 뒀다. 소모뚜의 엄마는 그중에 장녀였다. 외할아버지는 이층집을 크게 짓고 자식들을 길렀다. 그가 일을 마치고 퇴근할 때 양손에는 늘 과일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는 과일을 잔뜩 사와서는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어른들은 배가 고프면 찾아 나설 수 있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돌봐줘야 한다,라고 외할아버지는 말하곤 했었다고 들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 버마에는 135개정도 민족이 있었습니다. 미얀마족, 카렌족, 샨족, 인도 사람, 중국 사람, 그런데 정권이 부당하게 바뀔 때 마다 정치인들은 민족 감정을 이용했습니다. 버마와 카렌족이 싸우기도 했고 버마와 인도 사람, 버마와 중국 사람이 싸우기도 했습니다. 어느해 버마 -중국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우리 외할아버지를 데려다가 버마옷을 입히고 버마식 화장을 해서 숨겨주기도 했었죠. 1962년 무렵 군부 정권은 외국인 자산은 국가 자산이라고 몰수하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그때 외할아버지도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엄마가 고등학생 때 일입니다. 엄마는 공부를 잘했습니다. 늘 일등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시험 보는 날 외할아버지가 위독해졌습니다. 엄마는 시험 시간에 제대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우리가 아버지가 아파서 오지 못하는 친구를 기다려 주자라고 제안했습니다. 시험 시간을 연기하며 모두들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그날 시험장에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너무나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동생은 열 명이나 되는데 집안은 몰락했으니까요. 우리 엄마는 그 때 일생일대의 도박을 합니다. 도망가 버린거죠. 물론 혼자서는 아닙니다. 내 아빠와 함께였죠.
우리 아빠는 겨우 중학교만 마친 양곤과는 강하나만 사이에 둔 뚠떼이란 시골 마을 출신인 공무원이었습니다. 우리 아빠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버마가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조직을 만들어 저항했던 농민 운동의 선봉장이었습니다. 우리 엄마 이모 중 한명은 말을 달리며 영국군의 칼을 손으로 잡았을 정도의 여걸이었어요. 나중엔 영국군에 잡혀서 처형당했습니다. 어쨌든 다시 아버지 이야길 하자면 버마의 공무원은 한국의 공무원과는 좀 다르지요. 우리 아버지는 공장에서 기계 돌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엄마가 학교 현장 실습 나갔다가 알게 되어서 눈이 맞은 거죠. 둘이서 몰래 영화도 보면서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렇게 어려울 때 도망을 갔으니 나중에 생활에 지친 엄마와 아빠가 돌아왔을 때 이모들은 우리 부모를 아주 아주 싫어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서울에도 떡 사려! 인절미 사려! 이렇게 외치는 상인들이 있지요. 우리 아빠도 그런 일을 했습니다. 내 인생 최초의 기억은 내가 네 살 때인데 밤 열시나 열한시쯤 아버지가 코코넛 가루를 넣은 빵을 찌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등 뒤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빠는 밤인데도 자지 못하고 내일 아침 팔 빵을 준비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그때 벌써 했었습니다.<–아, 난 이 장면이 너무나 좋다. 엄마는 아주 열정적이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집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하곤 온갖 장사를 해서 결국 집을 마련합니다.
엄마가 동생을 임신해서 배가 볼록한데도 새벽같이 일 나갔던 것도 기억합니다. 엄마는 나중엔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작은 학원을 열어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도 한국 오기 직전까지도 거기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행히 공무원으로 다시 취직했기 때문에 내 성장기에 우리는 중상류층 정도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을 생각하면 언제나 엄마의 웃음이 먼저 생각납니다. 이런 풍경입니다. 우리 엄마는 만화책을 보면서 아주 큰 목소리로 웃습니다. 그리곤 우리를 불러서 “이거 읽어 봐. 웃기지 않니?” 하고 묻습니다.<–이 장면도 좋다!
아버지는 불교 책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정원을 가꾸는 걸 좋아했습니다. 꽃과 꽃 사이에 의자를 갖다놓고 조용히 책 읽는 것이 그의 낙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가족 대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촛불을 켜놓고 돌아가면서 그날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1988년이 되었습니다. 민주 항쟁이 있던 해죠. 저는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13살이었죠. 나는 학교 선배들과 시위에 나가기로 약속하고 가족 대화 시간에 부모님께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가족이 다 나가자!” 그런데 그 시위는 한국처럼 촛불 켜고 걷는 평화 시위가 아니라 군인들이 정말 총을 쏘는 시위였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동생 둘을 데리고 나가는데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투쟁 하지 않으면 우린 평생 이렇게 살게 된다. 이렇게 세계 최빈국의 국민으로 살아야한다. 그렇지만 투쟁하면 민주화가 될지 모른다. 남들이 투쟁해서 민주화가 되면 우리도 자연히 덕을 볼 것이다. 남들이 해놓은 걸 얻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부끄럽게 살지 말자.”
그래서 우리는 동생과 아빠와 손잡고 시위를 하러 나갔습니다. 난 그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들고 일어난 것 같았습니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온통 사람천지였습니다. 초등학생, 주부, 심지어 개도 있었습니다. 용감한 건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맨 앞에서 총을 든 경찰과 대치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전단지를 뿌리고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돌아다녔습니다. ‘버마식 사회주의를 거부한다. 민주화를 원한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88년 8월 8일의 민주 시위 이후 수많은 학생과 스님이 체포되었다. 그 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이 82%의 국민지지를 받았지만 군부는 정권을 이양하지 않았고 수치는 가택연금 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는 정치 상향 때문에 해고된다.
“전 공부를 아주 잘했어요. 의대를 갈 실력이 되었는데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공대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우린 다시 아주 가난해졌습니다. 어머니가 마련한 집도 엄마 친구에게 넘어갔습니다. 친구가 엄마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 집에 그냥 살도록 해줬지만 사실 남의 집이 되었죠. 나는 일자리를 좀 알아봤지만 돈을 벌 데가 없었어요. 집에선 너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지만 마음은 괴로웠어요. 당시 버마엔 이미 외국으로 돈 벌러 나가는 사람이 많았고 누구는 집을 샀네 뭐 그런 이야기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밥을 먹으려고 밥통을 열었는데 밥을 못 먹겠는 거예요. 저는 밥을 아주 맛있게 많이 먹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밥 먹는 내 입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 밥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부모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이대로는 못 살겠다. 내 동생들 공부도 내가 시키고 부모님 고생도 면해드리자. 그래 내가 돈 벌러 나가자. 내가 나가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대학을 마치고 엔지니어가 되길 너무나 원했기 때문입니다. 잠시만 눈 감으면 적어도 내 소원은 이룰 수가 있었던 겁니다. 나는 하지만 부모의 고통은 몰라라하고 내 소원만 이루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내 손에 쥐고 있던 걸 놓는 경험, 이 포기와 선택. 이런 상황은 그 뒤로 내 인생에 세 번 반복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포기입니다.”
소모뚜는 양곤 국제 공항에서 방콕에 내려 5일 체류하고 다른 버마 사람 둘과 함께 한국에 들어온다. 그런데 왜 하필 그는 서울을 택했을까? 그는 방학 때마다 절에 가서 두 달씩 동자승 생활을 하곤 했었다. 그 절에는 묵언 수행을 하던 한국 스님이 한 분 있었다. 처음 본 한국 사람이었다. 묵언 수행중이었기 때문에 소모뚜는 쪽지를 써서 스님에게 말을 걸었었다. “I AM 소모뚜. WHO ARE YOU?” 그는 절에서 무료로 영어를 배워서 영어를 할 줄 알았었다. 스님도 쪽지로 답했다. 소모뚜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야채 요리를 했다. 스님은 나중에 한국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주소를 적어주고 떠났다. 서울에 올 때 그는 그 주소를 움켜쥐고 왔다. 서울에 도착한 첫 날 그를 가장 사로잡았던 것은 거리의 커피 자판기였다.
“자판기에서 어떻게 커피가 나오지? 이건 영화 같잖아. 누가 안에서 타주나? 이렇게 웃었죠.난 미리 와있던 친구가 다니던 영등포의 공장에서 하루 밤 자고 다음날 당산역으로 가서 2호선을 타고 스님을 찾아갑니다. 아직 쌀쌀한 3월의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데려다주겠다던 그 친구 녀석이 이 지하철을 타고 끝까지 가라! 그러면서 내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계속 마지막 정거장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마지막 정거장이 나오질 않는 겁니다. 2호선이 순환선 아닙니까? 돌고 또 돌고 저는 견디다 못해 한 아주머니에게 주소를 적은 쪽지를 보여줬습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내리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나가서 버스로 갈아타란 말 같았습니다. 저는 지하철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상으로 나가는 구멍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요? 도대체 어디로 나가야 하는건지? 어쨌든 나와서 보니 이번엔 사거리입니다. 거리는 왜 그렇게 복잡한지? 어느 쪽에서 버스를 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죠.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에잇 부모를 위해서 온 나에게 나쁜 일이 있을쏘냐?’ 동전을 던져서 내가 갈 방향을 정했는데 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가서 종이를 보여줬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녀가 버스 타면 나도 타고 그녀가 지하철 갈아타면 나도 갈아타고 (그런데 그녀는 그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임승차를 하더군요. 저도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따라서 무임승차했죠) 그녀가 걸으면 나도 걷고 그러다가 그녀가 어떤 방문을 확 열었는데 세상에 그곳이 스님의 방이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바로 스님의 코앞까지 데려다 준겁니다. 그렇게 가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문을 벌컥 열자 스님은 눈이 왕방울 만해져서 “소모뚜 네가 웬일이냐?” 그랬죠. 그리고는 우리를 데리고 롯데백화점 옆 식당에서 저녁을 사줬습니다. 감자탕이었는데 나는 세상에 깻잎을 처음 먹어봤습니다. 깻잎 냄새에 그만 머리가 어질어질 했고 사람들이 국물에 밥 볶아먹는 걸 보니 더 어질어질했습니다.<—하하하 너무 추웠는데 버스 기사들이 하얀 목장갑 끼고 있던 게 생각이 나서 나도 얼른 그걸 사서 끼고 돌아다녔죠.
그런데 그때 그녀의 얼굴은 아무래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찾아보고 싶은 사람, 첫 친구입니다. 그렇게 스님 곁에서 이틀을 자고 나니 스님이 절 불러서 너는 이제 김포의 박스 공장으로 가라!라고 했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살지 말고 물과 우유처럼 살라고 했죠. 나에게 20만원을 줬는데 난 그 즉시 그 돈을 집으로 보냈습니다. 왜냐? 난 이제 일할 테니까요.”(해석을 넣지 않으면서도 요약 자체가 해석인 너의 능력이 놀랍다. 아주 속도감 있게 읽혀. 그러면서도 어떤 상황인지 세밀하게 드러나고 거기다가 웃기기까지 해.)
소모뚜는 김포의 박스 공장에서 8년간 일을 했다. 그가 일했던 공장은 친척들이 모여서 하는 작은 곳이었고 외국인은 소모뚜 한명 뿐이었다. 공장 앞에는 논과 밭밖에 없었다. 그가 한국 생활 16년 동안 일한 곳은 모두 세 군데인데 외국인 노동자 중에선 이직율이 굉장히 낮은 편이다. 그가 버마에서 나올 무렵 한국에 대한 소문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다. 사람들이 무례하다. 왜냐하면 버마에선 손이나 발로 물건을 가리키는 것. 얼굴 닦는 수건으로 몸을 닦는 것. 걸을 때 아무데나 밟는 것 다 기절초풍할 노릇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야 ,자 이렇게 반말로 불러대는 걸 어떻게 참아가며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을까?
“내가 직장을 자주 옮기지 않은 것은 고집이 세서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약속했습니다. 인내하겠다고요. 저는 결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일등만 했고 집에서도 큰 아들로 왕 대접을 받았습니다. 왕 대접받던 사람이 무시당하니 모멸감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제가 너무나 원했던 대학을 포기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만약 뭔가 포기해야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일이 힘들어서나 기분 나빠서는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이 힘들 때마다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봐, 이 것도 지나가잖아.’ ‘봐 해냈잖아. 못할 줄 알았는데.’ 나는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무척 강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껴뒀습니다. 왜냐하면 다른데 써야만 하니까요. 이를테면 야! 망치 가져와. 그랬는데 나는 내가 망치를 몰라서 삽을 들고 가는 일이 정말 싫었습니다. 나는 서점에 갔습니다.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샀습니다. 영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한 대역식으로 한국어를 공부했습니다.
하루에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씩 공장 일 끝나자마자 혼자 공장의 내 방에서 문 닫아걸고 공부했습니다. 배 아파도 공부, 꿈 꿀 때도 공부, 화장실 갈 때도 공부 공부. 매 순간 공부만 했습니다. 식당에 갈 때는 식당 앞에서 물 주세요. 밥 주세요를 미리 연습하고 외우고 들어갔습니다. 당시 김건모, 신승훈, 박진영, 솔리드 등의 노래가 유행이었습니다. 나는 그 가수들의 노래를 완전히 외웠습니다. 버마 노래는 시 같은데 한국 노래는 말과 같기 때문에 노래 가사를 외는 게 한국어를 배우는데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버마에서 노래하듯이 말하고 다니면 미친 놈 소리를 들을텐데,라고 생각하면서 노래를 외우고 말을 했지요.”
그때 그의 월급은 75만원이었는데 그는 그중 64만원을 집으로 송금했다. 버마에선 석달 정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다.
“하루는 일요일에 사장이 혼자 나와서 일하는 거예요. 난 사장 혼자 일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랑 같이 일 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그 뒤로 사장이 매주 공장에 나와 일을 하는 거예요. 거들라고 하면서요. 제가 처음에 돕고 싶어서 스스로 했을 땐 돈을 주면 오히려 기분이 나빴을 겁니다. 난 내 맘에서 우러나서 도운 건데 왜 제가 돈을 받습니까? 그런데 매주 일을 시킬 거면 수당을 따로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앞두고는 주문이 몰려 들어옵니다. 그 때는 꼬박 24시간도 일을 합니다.
저는 야근 수당이란 걸 알게 되죠. 그래서 야근 수당을 달라고 했습니다. 권리에 대한 생각이 처음 생긴 거죠. 그런데 주위에 점점 소문이 났습니다. ‘한국말 잘 하는 소모뚜가 있다.’ 병원 갈 때, 월급 못 받을 때, 의사소통이 안 될 때 사방에서 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일이 끝나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신경숙의 소설 제목처럼 ‘어디선가 날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인거죠. 그래서 난 내가 당하지 않은 일을 눈으로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안타깝다, 너 참 운도 나쁘다! 똥 밟았다 생각하고 말아라! 하고 친구들을 위로하고 앉아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대신해서 말하기 시작했어요.
“왜 월급 안주세요?”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저는 이번엔 노동법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노동법이나 인권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도착한지 일 년 넘은 96년이 되자 나도 모르게 활동가가 되어 있었어요. 저도 박스 공장에서 한번 도망 친 일이 있긴 있었습니다. 너무 일을 많이 시키니까요. 너무 힘들어서 한국 사람들은 왔다가 금세 가버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곤 근처에 있는 액자공장으로 갔습니다. 사장 이름은 김 종 X 이었는데 절 아주 맘에 들어 하더니 이제부터 동생 삼겠다고 한국 이름도 지어줬습니다. 자기 이름하고 끝자만 다르게 김종민이라고요.
그래서 절 동생 동생 부르기도 하고 종민아 종민아 하고 부르기도 했죠. 분위기는 참 다정하죠? 그런데 말만 동생인겁니다. 월급날이 되면 사장은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서 한 장 한 장 셉니다. 그리곤 아 ! 돈이 모자라네. 야, 우선 이거만 받아둬라. 이렇게 말하고는 그냥 가버립니다. 말만 동생이지 동생인 저를 나중엔 악용하더군요. 그때 공장엔 필리핀 사람들이 둘 있었고 저만 버마 사람이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 월급은 7, 80만원. 저는 새로 왔는데도 90만원을 주는 겁니다. 저는 그 불평등이 창피해서 부끄러웠는데 하루는 저를 불러서 “야, 필리핀 사람 다 자르고 우리 버마 사람들 쓰자. 친구들 데리고 오라!” 하는 것입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제게 친절했습니다. 음식을 만들어도 꼭 내게 나눠주곤 했습니다. 나는 양심에 찔려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고 다시 박스 공장으로 돌아갔죠. 그 뒤에 나는 소주임으로 승진했습니다. 소모뚜 주임이 된거죠. 나는 열심히 일했고 사장은 곧잘 “너 그만둘 때는 내가 큰 거 하나 선물하겠다. 조금만 참고 열심히만 일해다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드디어 ‘자리 잡은’ 겁니다. 나는 그런 밤에 기타를 딩딩 거리며 고향을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기타가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버마 락에 푹 빠져 있었다. 서핑 유에스 에이 같은 곡에 가사만 바꿔 부르는 노래가 인기였는데 방송 검열이 심했기 때문에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선 들을 수가 없었다. 카세트 테이프를 사서 듣거나 아니면 그런 음악을 틀어주는 찻집에 가서 들어야했다. 그 찻집들에서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고 악보를 그려가며 혼자서 기타를 익혔었다.
“그 무렵 이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한번은 부천 외국인 근로자 센터에서 성탄절 파티를 할 건데 기타 칠 줄 아는 이주민을 구한다고 해서 제가 갔지요. 그 때 쿵따리 샤바라같은 걸 연주하며 새벽 두시까지 진짜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 밤에 우리는 모두 깨달았죠. 우리는 일만하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도 노래할 줄 안다. 우리도 웃을 줄 안다. 우리도 놀 줄 안다. 그래서 신나게 외쳤죠. 우리 밴드 만들자!”<–인간임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도 노래할 줄 안다. 우리도 놀 줄 안다.라는 장면은 뭉클하다. 취향이 여가나 사치가 아니라 인간 선언이 되네. 그만큼 이주노동자들은 ‘생존자’였던 셈이겠지. 문득 생존자에서 노래부르는 장면이 떠오르네.
난 이 장면에서 잠시 호흡을 멈추고 검은 피부 속에서 더 빛나는 하얀 이빨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이 성탄절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모뚜와 친구들은 밴드 이름을 유레카 버마 밴드로 정했다. 유레카! 유레카! 그들은 뭘 발견했을까? 유레카를 외쳤던 아르키메데스는 움직이지 않는 한 점만 주어진다면 그 점을 받침삼아 긴 막대기를 지렛대로 이용해 지구를 들려 올리겠다고 했다. 아르키메데스에게는 서 있을 한 지점과 긴 막대기만이 필요했었다.
한나 아렌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르키메데스는 세계를 옮기기 위해 지구 밖의 한 점을 원했던 것이다. 소모뚜에게 그 성탄절 축제의 밤에 아르키메데스의 점 같은 어떤 점, 확고 부동한 기준점이 생긴 것일까? 소모뚜의 아르키메데스 점을 더 따라가보자. 그는 아직까지는 공항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