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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형 김현승, 잊을 수 없는 시인
이은봉
이 글의 제목으로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잊을 수 없는 시인」이라고 써본다. 처음에는 뒷부분을 ‘잊혀질 수 없는 시인’이라고 썼다가 ‘잊을 수 없는 시인’이라고 바꾸어 쓴다. 잊을 수 없는 시인? 그렇다. 내게는 대학 때의 은사가 되는 분이기도 하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하던 분, 평소에는 얼음처럼 차갑다가도 계기가 되면 불처럼 타오르던 분, 언제나 땅을 쳐다보고 걷던 분,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분, 식사도 늘 혼자 하던 분, 낙엽이 지는 가을의 교정을 터벅터벅 걷던 분, 버버리코트가 잘도 어울리던 분……. 이것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분의 이미지이다.
차를 좋아해 자신의 호(號)를 차형, 한자로 다형(茶兄)이라고 지은 분, 이 자신의 호 「다형(茶兄)」을 시로 쓰기도 한 분, 그리하여 이 시에서 그분은 자신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던 분…….
빈들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
마른 잎과 같은
兄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를
두고 두고
나만이 호올로 마신다.
1974년 다형 김현승 시인이 근무하던 숭전대학교 학보사에서는 그의 호를 따 ‘다형문학상’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물론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이었다. 제1회 다형문학상은 박만춘 선배가 받았고, 제2회 다형문학상은 내가 받았다. 이 일이 없었으면 나는 시인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 일은 내게 시를 잘 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만춘 선배는 김현승 시인의 호(號)인 ‘다형’의 ‘형’ 자(字)를 돌림자로 삼아 매형(梅兄)이라는 호를 지어 내게 부르라고 하고는 했다. 매형? 누나가 있어야 매형이라고 부르지? 그래도 매형이라고 불러! 그럼 나는 호를 이형(梨兄)이라고 할까. 매형, 이제부터 나를 이형이라고 불러요! 이처럼 짓궂게 농담을 하던 박만춘 선배도 이제는 저승의 사람이 된 지 오래이다.
정직하지 않다고 서정주 시인을 싫어하던 분, 감상적 모더니스트라고 박인환 시인을 비웃던 분, 시대정신에 투철하다고 김수영 시인을 높게 평가하던 분, 민족의 시원에 닿아 있다고 신동엽 시인을 좋아하던 분……. 그랬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김현승 시인은 늘 김수영, 신동엽 시인과 함께 평가되었다. 한때는 김수영, 신동엽과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었던 시인이 다형 김현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되어 있나? 대부분 사람들이 지금은 다형 김현승 시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젊은 세대들일수록 이는 더욱 심하다. 그의 시가 교과서에서 빠졌기 때문일까. 나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는 명편의 시들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다. 「창」, 「플라타너스」, 「가을의 기도」 , 「참나무가 탈 때」, 「눈물, 「고독의 끝」, 「무등다」, 「절대신앙」, 「아버지의 마음」 등 이들 명편의 시를 읽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의 시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백석, 김수영, 신동엽과는 달리 한국시단은 왜 그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 걸까.
젊어서는 아침과 새벽의 이미지를 노래했던 시인, 나이가 들어서는 창과 하늘의 이미지를 노래했던 시인, 말년에는 고독을 매개로 인간의 실존적 깊이를 노래했던 시인……. 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의 고향인 광주의 예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곳의 후배 문인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그가 우리 시단에 끼친 공로는 말할 수 없이 크다. 살아 있을 당시에는 그의 열정과 정의감에 감복하지 않는 시인이 별로 많지 않았다. 한국현대시사에서 그는 드물게 형이상학적 깊이를 보여주었던 시인, 고독의 상상력을 통해 드높은 정신경지를 드러냈던 시인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다형 김현승 시인이 잊혀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추구했던 인간의 드높은 정신경지, 곧 형이상학적 정신경지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서인가. 그가 추구했던 청교도적 휴머니즘의 높고 그윽했던 세계가 지금의 오늘의 삶과 맞지 않아서인가.
그런데 그와 그의 시가 잊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가. 흔해빠진 문학관 하나 없으니 잊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흔해빠진 문학상 하나 없으니 잊혀지고 있는 것은 진실일 수도 있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지금 그와 그의 시를 기억하는 젊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적잖은 박사논문이 나왔지만 오늘의 문단에서 그의 시가 활기 있게 논의되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그와 그의 시가 활기 있게 논의되고 있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미 그와 그의 시가 시의성(時宜性)을 잃었기 때문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현실, 즉 자본주의적 근대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정말 그런가. 정말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반드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와 그의 시를 선양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 사람들이라! 대개 큰 시인, 큰 문학인의 선양사업은 큰 시인, 큰 문학인의 고향에서 하기 마련이다. 고향의 지자체나, 제자들이나, 가족들이 나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쓸모가 있을 때 앞 세대의 문인들, 예술가들은 후대의 사람들게 선양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김현승 시인과 그의 시는 후대의 고향 사람들이 보기에 쓸모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후대의 고향 사람들이라니? 그럼 다형 김현승 시인의 고향은 어디인가. 광주인가, 평양인가, 제주인가. 흔히 고향은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한 곳을 가리킨다. 고향이 한 사람이 태어난 곳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유년의 삶이 묻혀 있는 곳, 어린 시절의 추억과 꿈이 묻혀 있는 곳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다형 김현승 시인의 고향은 광주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승 시인을 가리켜 광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없지 않다.
물론 다형 김현승 시인이 처음 세상에 태어난 곳은 평양이다. 그는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아버지 김창국이 목사수업을 받던, 신학공부를 하던 평양에서 1913년 태어났다. 그런 이후 그는 곧바로 아버지의 첫 목회지인 제주도로 이주해 여섯 살까지 살았다.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19년 아버지 김창국 목사가 전남 광주의 양림교회로 전근을 오게 되면서 그는 광주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고향은 광주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고향과 관련해 일찍이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산줄기에 올라 바라보면
언제나 꽃처럼 피어 있던, 광주는 나의 고향
길들은 가로수 사이사이 유월의 넥타이를 풀고
낯익은 다방과 서점과 이발소와
잔잔한 시냇물과 포플러의 푸른 그늘들은
충장로와 금남로에서 낯선 이웃들을 서로이 손잡게 하여 주던……
―「추억」 부분
이 시에 따르면 그가 자신의 고향을 광주라고 받아들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 시에서 그는 아예 “광주는 나의 고향”이라고 못 박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 사람들 중에는 그의 고향이 광주가 아니라고, 평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이들은 그의 태생지가 평양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광주 사람들이 없지 않으니 광주 사람들이 그와 그의 시를 선양하려고 하겠는가.
평양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향을 평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 한 번도 아버지가 태어난 익산이나 여섯 살까지 산 제주를 고향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언제나 광주가, 무등산이 고향으로 자리해 있어 그는 거듭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눈을 들어
저 무등을 바라보라
동지를 지나 춘분을 지상에 그리며
빛을 여는
1년의 새 아침
―「저 빛을 가슴에 안고」 부분
이밖에도 그의 시 중에는 무등산을 노래한 시가 많다. 무등산을 빼놓고는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그이다. 가슴 속 깊이 무등산이 고향으로 자리해 있지 않다면 어찌 그가 이렇게 자주 무등산을 노래했겠는가. 그러한 점에서 보더라도 그는 무등산과 광주를 자신의 고향으로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의 시비가 무등산에 서 있는 것도 그가 무등산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중요한 근거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향이 광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니! 김현승 시인 자신은 늘 자신의 고향이 광주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이다.
물론 이제는 그의 고향 광주에서도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그와 그의 시를 선양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다. 4년 전 쯤부터 손광은, 문병란, 진헌성, 박형철 등 광주의 원로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다형김현승시인기념사업회의’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선 ‘다형김현승시인기념사업회의’는 김현승 시를 연구한 박사논문집, 김현승 전집간행 등을 간행하는 성과를 보인 바 있다. 그와 더불어 ‘다형김현승시인기념사업회의’는 벌써 4년째 시낭송회를 겸한 학술발표회를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나로서는 ‘다형김현승시인기념사업회의’가 이에 그치지 않고 하루 빨리 문학상도 만들고, 문학관도 만들어 그와 그의 시가 보여주었던 높고도 깊은 정신차원을 널리 선양할 수 있기 바란다. 다형 김현승이야말로 광주의 시인, 무등산의 시인이 아닌가.
광주, 그리고 무등산……. 무등산과 관련해 특별히 기억할만한 그의 시로는 「무등다(無等茶)」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까마귀 울음에
산들 여의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十日月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무등다(無等茶)」 전문
삶에는 넓이와 폭에 못지않은 높이와 깊이가 있기 마련이다. 술을 마시며 흥청거리는 것도 중요한 삶이고, 차를 마시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젖는” 것도 중요한 삶이다. 하지만 무엇이 높고도 깊은 삶인가. 다형 김현승이 이 두 삶 가운데 어떤 삶을 택했는가는 자명하다. 그에게 나날의 “가을은/술보다/차 끓이기 좋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외롭지만 그윽한 삶, 곧 기품 있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았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일상의 나날이 만드는 고독은 매우 크고 버거웠으리라. 더구나 자신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고독은 아주 깊었으리라. 이때의 고독은 당연히 고통이거니와, 그것이 아무리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견디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다형 김현승은 당대의 정치적 현실에도 결코 둔감하지 않았던 시인이다. 필요할 때는 언제나 사회참여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것이 그이다. 사일구 혁명 때는 물론 박정희 군사독재 때에도 시를 통해 은근히 비판의 화살을 쏘아댔던 것이 그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다형 김현승 시인과 그의 시는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 그렇다. 그는 1959년의 3·15 부정선거, 그리고 1961년 4·19 혁명 이래 때로는 과감하게 사회참여의 자세를 보여주어 온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1960년대 말 이후의 대부분의 참여 시인, 나아가 민족·민중의 시인들이 그와 연루된 채 작품 활동을 해왔다는 점이다. 우선은 광주지역과 관련해 제자군이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만 하더라도 그렇다. 문병란, 손광은, 박홍원, 윤삼하, 박봉우, 주명영, 정현웅, 강태열, 이성부, 문순태, 조태일, 양성우, 김준태 등이야말로 현실문제에 적극적인 발언을 해왔던 시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다형 김현승 시인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를 풍미했던 진보적 참여 시인의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시를 밑거름을 하여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의 민족·민중시 운동, 곧 리얼리즘 시운동이 싹텄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시인이 우리 시단에서 잊혀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의 삶과 시에 대한 연구는 물론 선양사업도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빈다.(《시평》 2012년 겨울호)
첫댓글 교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