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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내 아들을 죽였는가
증언자 : 김완봉(남)/ 송영도(모)
생년월일 : 1966. 7. 24(당시 나이 14세)
직 업 : 중학생 (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유족회 2대 회장을 맡은 송영도 씨가 1980년 당시 무등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아들 김완봉을 잃고 살아온 얘기를 증언했다.
기구한 운명
나는 원래 평안남도 태생이다. 6·25가 발발하기 두 해 전에 부모와 함께 남하하여 생활하다가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일찍 결혼해 딸 둘을 낳고 살았는데, 내 나이 26살 때 혼자 되고 말았다. 남편이 남겨주고 간 재산도 없어서 채소장사부터 시작해 안 해 본 것 없이 어렵게 살았다. 재혼하면 더 나을 것 같아 29살 때 재혼을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와 재혼한 남자가 본처와 자식이 버젓이 있는 사람이었다.
재혼하고 난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았으나 쉽게 관계를 청산할 수 없어 5·18 때 죽은 완봉이와 막내딸 문희를 낳을 때까지 살았다. 그렇지만 재혼한 남자에게서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결국 그 남자와도 이혼하고 이이들 넷을 혼자 키우며 근근이 살아오다 5·18을 맞았다. 남편 복이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착하고 영리하기만 했던 자식을 먼저 죽이고 살아가자니 기가 막히고 서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완봉이는 어려서부터 차분하고 사려깊은 아이였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라면서도 그런 내색 한번 안 하는 자식을 보면 항시 안쓰러웠다.
시위대와 군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1980년 5월 20일 화요일인데도 완봉이가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다. 나는 데모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장사해서 먹고사는 데 바빠 밖의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완봉이가 투정하듯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들이 학교에 와 다 데리고 갔는디, 엄마는 왜 안 왔는가?"
"그래 어떻게 왔니?"
"오는 애기들 틈새에 끼어서 왔어."
그런데 완봉이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엄마! 어제 먹었던 것이 체했나 봐. 낮에 학교에서 토하고 난리났어. 점심도 못 먹었어."
하며 도시락을 내밀었다.
"그래 누워 있어라."
완봉이는 그날 저녁까지도 쫄쫄 굶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날 저녁 구시청 옆에서 나무를 모아놓고 불을 지피는 시위대가 있었다. 나는 완봉이와 함께 구경삼아 나갔다가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무서워서 집으로 들어와버렸다. 완봉이를 집에 데려다놓고 저녁 10시쯤 이웃집 아주머니와 함께, "우리는 나이먹었는디 어쩔랍디요." 하며 밖으로 나갔다. 집이 황금동에 있었기 때문에 충장로와는 가까웠다. 걸어서 황금동 골목을 가고 있는데, 한 남자가 등에 사람을 업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등에 업힌 사람은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왜 그러요?"
"계엄군 칼에 찔려서 병원에 가요."
"우리는 무서워서 더 이상 못 가것소!"
정신없이 뛰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5월 21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절에 가려고 했다. 아침에 완봉이에게 밥 먹어라 했지만 먹질 않아서 죽을 쑤어주니 먹었다.
"아무 곳도 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잠깐 어디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구시청 사거리에 갔을 때였다. 메가폰을 잡은 한 남자가 헌금통을 들고 돈을 걷고 다녔다.
"시민 여러분! 지금 학생들이 배가 고프고 청년들도 모두 배고프니..."
나는 당시 무척 가난했지만 돈 1천 원을 꺼내서 주고 돌아서는데 돈을 걷던 사람이 불렀다.
"애! 아주머니, 이 돈 좀 세어주씨오."
그래서 세어보니 10만 원하고 잔돈이 얼마 있었다.
"아주머니 안 바쁘면 이 돈으로 가게에 가서 빵, 치약, 우유, 담배 등을 사서 도청 앞에 있는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좀 가져다 줄라요?"
나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10만 원어치 물건을 샀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았다. 혼자서 들고 갈 수가 없어서 난처해 하고 있는데 주위에 있는 술집 아가씨들이 와서 물었다.
"아줌마! 우리가 도와줘도 돼요?"
"그래! 도청 앞으로 가서 나눠 주소."
그 아가씨들은 물건을 들고 도청 앞으로 달려갔다. 아가씨들에게 짐을 나눠 보내 놓고, 나는 제일 나중에 생계란 다섯 판을 머리에 이고 광주우체국 앞으로 돌아서 도청으로 갔다. 군인들은 YMCA 앞에 앉아 있었고, 시민들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앉아 있었다. 계란을 이고 가서 먹으라고 주니 시위대 중 한 사람이 말했다 .
"아주머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져다줘서 먹었으니까, 저 군인들 좀 가져다주시오. 군인들도 배가 고플 것인디, 먹는가 안 먹는가 한번 가져다줘보시오."
'혹시 날 죽이지는 않을까' 해서 겁이 났지만 그대로 조심스럽게 군인들에게 다가갔다.
"이거! 먹을라요?"
슬그머니 계란을 내미니 서로 먹으려고 야단이었다.
해작 바지에 파란색 상의
계란 다섯 판을 군인들에게 주고 나서 그냥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완봉이가 없었다. 그때가 오후 1시쯤이었다. 겁이 더럭 나서 옆집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아들 어디 갔소?"
"금방 여기 집 앞에 앉아 있었는디, 도청 앞에 갔는가 모르것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서 도청으로 갔다. 다시 도청 앞에 도착했을 때에 시민과 군인들이 다 없어지고 난리법석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골목에 있는 사람들이 극구 말렸다.
"아줌마! 가지 마시오!"
분위기가 삼엄해서 도청으로 못 가고 다시 구시청 쪽으로 갔다.
"우리 아들 못 봤소?"
하고 울고 오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워매! 도청에 난리났소. 남학생 둘이 총에 맞고 쓰러진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왔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죽은 아이들이 뭘 입었습디까?"
"한 아이가 밑에는 해작 쓰봉에다, 우에는 퍼렁 거 입었습디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앞에 까망 줄 쳐졌습디까?"
"그것까지는 못 봤소."
틀림없이 완봉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곳으로 가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이 누구든지 눈에 띄기만 하면 공수부대가 모두 쏴죽인다고 말렸던 것이다.
21일 오후 4시경 혼자서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서 옆집에 사는 젊은 각시와 함께 완봉이를 찾으러 나섰다.
적십자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못 들어가게 했다. 적십자병원을 나와서 전남대병원 시체실로 갔다.
"머리 빡빡 깎은 중학생 없소?"
하고 물어보았지만 없다고 했다.
응급실에 가보니 피비린내가 말할 수 없이 났다. 부상자들이 밀려와 복도고 뭐고 발디딜 틈이 없었다. 피를 질질 흘린 채 미처 돌보지 못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뒤척이며 완봉이를 찾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그곳에서 나와 적십자병원으로 다시 갔다. 아무래도 꼭 거기에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적십자병원에서는 시체를 운반하는 트럭들이 왔다갔다했다. 시민들이 시체를 트럭에 싣고 와서 병원으로 옮기고 나면 트럭 짐칸에 피가 흥건히 고여서 씻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트럭에 싣고 온 시체를 내리고 나면 바께쓰로 물을 부어 피를 청소하고 다시 나가 또 시체를 싣고 왔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수위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당신들이 수선을 떠니까 부상자들이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죽어간단 말이오."
수위는 몽둥이를 들고 못 들어가게 했다. 하도 서러워서 적십자병원 앞에 있는 나무를 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 기독교병원에 가보려고 했으나 어느새 밤 8시로 앞당겨진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적십자 병원
다음날 새벽 4시 30분경에 한집에 사는 청년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 청년은 말했다.
"화순으로 나갔다가 못 오는 애들도 있대요. 오고 싶어도 차가 없어서 못 들어 오는 애들도 있을 겁니다."
제발 거기에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새벽 5시쯤 적십자병원 간호원이 부상자 명단을 주었다. 그 명단에는 완봉이가 없었다.
"우리 아이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으니 살아서 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는 증명할 것이 하나도 없다. 여기 시체들이 많이 들어왔냐?" 고 물으니 많이 들어왔다며 시체실을 가르쳐주었다. 함께 간 청년과 시체실로 갔다. 나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자네가 한번 들어가서 있는가 찾아 보소!"
"그럼 여기 계시시오!"
청년은 혼자서 들어갔다. 들어가더니 한참 있어도 나오지 않았다.
'빨리 나오지 왜 안 나와. 설마 죽기야 했을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는데 한참 후에 그 청년이 고개를 내밀고, "아짐! 아짐!" 하고 불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뭣 하러 나를 부르는가?" 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뭣 하러 나를 오라고 하는가. 빨리 나와. 어서 가게."
"아짐! 이리 와보시오."
그 청년은 또다시 나를 불렀다. 그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재촉했다.
"빨리 가보시오. 무슨 일이 있는 갑소. 그래도 본인이 가서 확인을 해야지 남이 어떻게 안다요? 어서 가보시오."
용기를 내어 가려고 했으나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엉금엉금 기어서 문 앞에 가니 시체가 바닥에서부터 나무선반 위까지 온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완봉이의 해작 바지와 발바닥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쓰러진 나를 사람들이 집으로 데려다놨다.
"내 아들을 치료받게 해서 살려 내야 허는디." 하는 말밖에 안 나왔다.
22일 오후 4시경 적십자병원 근처에 사는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적십자병원에서 시체를 다 꺼내서 후문으로 내다놨는데 다른 것은 다 태극기가 덮어져 있는데 완봉이만 태극기가 안 덮어졌소. 빨리 태극기 하나 얻어서 덮어주시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적십자병원 후문까지 기다시피 하여 쫓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 태극기 하나 주시오. 우리 아들이 죽었는디 태극기가 없소."
적십자병원에 다시 가서야 처음으로 관 뚜껑을 열어보니 이마가 하나도 없고 거죽만 덜렁덜렁했다. 새벽에 보았던 시체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18구였다. 완봉이가 제일 먼저 들어갔는지 안쪽에 있었다. 밖으로 운반할 때는 거꾸로 18번째로 나왔다. 차례차례 태극기를 덮다가 나중에는 태극기가 없어서 덮지 못했던 것 같다. 관이 작아서 몸을 오그려 두고 있었다.
도청에서 상무관으로
저녁 7시쯤에 도지사라는 사람이 사망자가 어느 정도 되는가 알아보기 위해 도청으로 온다고 했다. 그 때문에 도청으로 운반하려고 시체들을 내놓았다고 했다.
시체를 2 구나 3구씩을 운반하여 18구를 모두 도청 분수대로 옮겼다. 병원에서 운반해 온 시체들을 분수대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아두었다. 그러나 도지사는 8시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결국 도지사는 그날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일을 돕는 청년들이, "시체를 이렇게 놔두어서는 안 되것소! 안으로 들여다놓읍시다." 하고 말하여 도청 안으로 시체를 옮겼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23일 새벽 4시 30분 옷이라도 갈아입혀주려고 옷을 찾았다. 생활이 어려워서 겨울에도 내복 한벌 못 사입히고 트레이닝 바지만 입히곤 했다. 남들은 친척들이 사다주며 일도 봐주는데 이북이 고향인 나는 그럴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그때 정신이 없어서 옷을 사다 입힐 생각은 못 했다. 마땅히 갈아입힐 만한 옷이 없어서 속옷과 양말에 교복 하복 바지에 상의는 겨울 동복을 가져갔다.
완봉이가 1학년 때 맞춘 것이라서 살아 있었을 때도 작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4월달에 받은 금배지가 달린 동복 상의를 들고 새벽에 집을 나섰다. 도청으로 가니 시민군들로부터 총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내 아들 옷 갈아입히게 문 좀 열어주씨요."
그러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도청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을 닫고 안쪽에서 무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총들이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왜! 못 들어가게 하요?"
"아줌마처럼 자식 죽고 정신이 없는 사람들을 들여놨다가 우리가 수류탄이고 뭐고 다 거두워들여놨는데, 만약에 이런 것들을 잘못 손대면 어쩔 것이오. 조금만 기다리시오."'
오후 1시가 되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오후 2시쯤 되자 도청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떼를 썼다.
"이놈의 새끼들, 차라리 날 죽여부러라."
그러나 그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정문을 타고 올라가면서, "내가 총을 쌓아둔 곳에 떨어져 죽어불란다."
"가만히 있으시오. 안에 가서 타협 좀 하고 올 테니까" 하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아줌마만 들어오시오."
"옷 입힐 사람이 줄줄이 있는데 어찌 나만 들어갈 것이요?" 그렇게 내가 들아가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입힐 것이오?"
"저기 저 복도 아무 데나 놓고 입히시오!"
관을 들고 가서 시체를 바닥에 뉘여놓고 보니 관에 피가 반쯤 고여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집안 남자들이 와서 일을 모두 해주었는데, 나는 친척도 없고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나와 회사 다니던 둘째 딸 옥선, 막내딸 문희, 이웃집 새댁과 내 친구, 이렇게 몰려갔었으나 일을 해본 경험도 없었고, 몸이 떨려서 나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애야! 어서 수건으로 닦고 빨리 해라!"
애들에게만 말로 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갈아 입히고 다 관을 들고 나가는데, 우리는 옷도 못 입히고 있었다. 거기서 일 보는 청년이 하도 딱했던지, "아주머니, 저리 비키시오. 내가 도와줄께요!"
"학생 고맙소!"
"난 학생 아니예요."
"아무튼 고맙소."
청년이 시체를 뒤척이는 것을 보니 오른쪽 귀 뒤에 담배 구멍만한 총구멍이 하나 있었다. 아무래도 총알이 이마를 뚫고 나왔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마가 거죽만 남아 있었던가 보다. 바지는 겨우 입혔으나 상의는 입힐 수가 없었다. 그러잖아아도 작았는데 죽어서 뻣뻣하니 잘 입혀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팔은 뜯어 버리고 위에만 걸쳐두었다. 간신히 옷을 갈아입히고 밖으로 내다놓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왔다.
24일 새벽 5시경 다시 도청으로 갔다. 시체를 상무관으로 옮겨놓았는데 완봉이가 6번이었다. 관 뚜껑에 '무등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라고 쓴 것이 없어져버리고 '18세'라고만 씌어져 있었다. 완봉이는 중학생이었지만 무척 키가 컸기 때문에 실제보다 더 나이를 먹게 보았던가 보다.
24일부터 26일까지 계속 상무관을 다니면서 관을 지켰는데 하루하루 다르게 관 뚜껑이 열려지고 있었다. 손을 넣어보면 처음에는 15센티미터 정도 들어가다가 다음날은 10센티미터, 오후에는 5센티미터 정도로 시체의 상태가 변하면서 차차 관 뚜껑이 위로 열려졌다. 다른 생각은 전혀 못 하고 못을 잘못 박아서 그런다고 관을 짠 사람들을 속으로 나무라기만 했다. 관 뚜껑이 열릴 때마다 돌멩이를 집어다가 관 뚜껑에 못을 박곤 했다. 시체가 부패되어 가면서 부풀어올랐던 것인데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27일 새벽 탱크 소리가 들리고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에게 나오지 말라는 방송도 했다. 날이 밝도록 총소리가 들려왔다.
오전 10시쯤 도청으로 가보려고 했으나 통행을 금지시켜 갈 수가 없었다. 그 날 도청 앞으로 가본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군인들이 널찍한 비닐봉지를 들고도 청 안으로 들어가 시체를 아무렇게나 넣어서 들고 나오더라고 했다. 그때 시체 검안을 하여 총상이었는지 타박상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유족회 2대 회장을 맡았으나
5월 29일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시체를 망월동으로 옮기니까 서방 삼거리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서방 삼거리로 가니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서 시청차 2대가 운행을 하고 있었다. 그 차를 타고 망월동으로 가니 도청에서 쓰레기차로 운반해 온 관들을 확인된 순서대로 묻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한군데로 쌓아두었다. 관 속에서도 10여 일 썩은 것을 더운 여름날 야산에 버려두니 얼마나 부패가 되었겠는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신원확인이 안 된 사람들을 찾기 좋게 하려고 그랬다고 했다. 유리관에 시계나 바지 등이 넣어져 있었다.
망월동 묘지 아래에 물구덩이가 있었는데 처음엔 그곳에다 묻으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유족 몇몇 사람이 안 된다고 하여 현재 묘역으로 정한 것이라 했다. 우리 완봉이는 상무관에서는 6번이었으나 망월동 묘지번호는 33번이었다. 우리가 완봉이의 관을 찾아서 묶어진 끈을 풀어 헤치니 관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위아래 부분만 남고 양옆이 '뚝!' 터져버린 것이다. 관이 열리니 바닥에 시체만 덜렁 나왔다. 소매를 뜯어서 걸치기만 한 어깨를 보니 얼마나 부패했는지 팔뚝 하나가 건장한 남자의 허벅지만 했다. 관이 부서지고 난 후 시체만 들어내어 묻었다. 큰사위더러 아래쪽에 가서 잡으라고 하고 땅속으로 넣는데, 큰사위가 잡은 머리 부분에서 눈알이 '풍!' 빠지더라고 했다.
1980년 5월 자식을 묻고 난 후 유족회 모임이 있는 것도 몰랐다. 어떻게 투쟁해 나가야 할지는 전혀 생각도 못 해보고 입에 풀칠하고 살 생각뿐이었다. 몸은 화병이 들어 고생만 했다.
그런데 1981년쯤인가 우연히 성당에서 피정을 다녀오는 유족들과 만나 약간의 의식을 배웠다. 그들과 대화를 하고 모임에 나가게 되어 전후사정을 듣고 보니 그 전까지 살아온 것이, 자식 죽여놓고 멍청하게 살아왔던 게 후회스러웠다. 피정에 갔던 사람들이 박찬봉 회장에 대한 불신을 얘기하고 사회적으로 덜 탄압받는 여자들로 임원진을 바꿔보자고 결의했다. 우리는 전계량 씨가 근무하는 계림 신용협동조합으로 찾아가서 대화를 한 후 다음 월례회 때 그 의견을 결정짓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해서 다음 모임 때 부족한 몸이지만 (내가)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회장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명색이 회장이라지만 당장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시청에서 알선해 주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1982년 10월 광주공원에 있는 동물원의 매표일이었다. 나는 원래 성질이 괄괄하여 남의 밑에서 일한다는 것이 더러웠지만 참고 참아가며 일을 했다. 3년 동안 일을 했지만 월급이라야 기껏 10여만 원 받았다. 그것으로는 도저히 생활할 수가 없어 1985년 사표를 냈다.
내가 직장에 나가면서부터는 전계량 씨가 유족회 회장을 맡게 되어 지금까지 하고 있다.
학살자들과 몸으로 싸우며
전두환이가 광주에 온다고만 하면 경찰들은 3일 전이나 일주일 전부터 집 주위를 지키기 시작했다. 1983년쯤 전두환이가 온다고 해서 광천동 공단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족회원인 김길자, 박순례, 구선악, 정동순 씨와 함께 우리집에 모여서 플래카드를 썼다. 플래카드는 마땅한 천이 없어 이불 홑청을 뜯어서 매직으로 썼다.
"내 자식 내놔라."
하고 쓴 다음 몰래 빠져나가 공단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3시 5분 전이었다. 맨 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왔다. 그때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다섯 명이 도로로 나갔다. 도로에는 동에서 3천 원에서 5천 원씩을 받고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군중 속에서 이름은 생각이 안 나지만 부상자동지회의 한 청년이 나오더니 오토바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검은 차 3대가 보이고 전두환이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차가 쏜살같이 달려오다가 바로 우리 앞에서 '끼익!' 하며 멈췄다. 그 순간에 기다리고 있던 유족 회원들은
"네 이놈 살인마야! 너가 여기가 어디라고 손 흔들고 오냐! 내 자식 내놔라." 하며 악을 쓰고 있는데 경찰들이 달려와 우리 일행을 서부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서부경찰서에는 전두환이 경호 때문에 모든 경찰들이 출동해 버린 상태여서 경찰 5, 6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붙잡혀 있는데, 부상자동지회 청년 십여 명이 와서는, "엄마들, 여기서 뭐 하요? 엄마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 있소? 갑시다!" "그래! 가자!" 하며 나오는데, 그때 경찰들이 못 나가게 했다. 그러자 부상자동지회 청년들이 자기네들이 싸울 테니 빨리 도망가라고 하여 냅다 도망쳐서 집으로 왔다. 다른 사람들은 집으로 가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딸 하나 있는 것이 걱정돼서 집으로 안 갈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 있자니 분통이 나서 통장에게 붸아갔다 .
"어째 다른 사람들은 전두환이 온다고 돈까지 주면서 나한테는 말도 안 했소? 당신이 앞으로 세금을 받아가려고 그런 것이요, 안 받아가려고 그런 것이요? 다른 사람들처럼 돈도 안 주고 차도 안 태워다줬지만 나는 전두환이 만나고 온 사람이여!"
한바탕 퍼붓고 돌아오니 길에서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잡혀 하루동안 서부경찰서 신세를 져야 했다.
1987년에는 노태우가 광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실내체육관으로 온다고 하여 매직을 사서 종이에 '내 자식을 돌려달라'고 써가지고 실내체육관 앞에서 기다렸다. 노태우 차가 도착하자마자 준비해간 계란을 마구 던졌다. 그놈이 계란 세례를 받는 모습이 통쾌했다.
나와 고 방광범의 어머니와 함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노태우의 경호원이 달려오더니 나와 유족들을 붙잡았고, 어린이 대공원 쪽에 있는 기동대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저녁이 되자 서부경찰서 식당으로 다시 옮겨졌다. 10명의 유족들과 7시간 정도 연금되어 있었다.
1987년 6월 16일 태평극장 앞에서 유족들과 시위를 하다가 전경들에게 구타를 당한 적도 있다. 얼굴을 얼마나 맞았던지 코뼈가 부러지고 눈을 심하게 맞았다. 주위 사람들이 "음매! 저 아줌마 죽것네" 하며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적십자병원이란 것을 알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픈 것은 둘째치더라도 내 아들 시체를 찾아온 곳에 나까지 와야?" 하는 생각에 서러웠다.
올해 7월 11일에도 서울에서 고위관리가 광주에 온다고 해서 형사들이 이틀 동안 집 주위를 지켰다. 1980년 당시는 아무것도 몰랐고 내 자식 잃은 슬픔만 컸다. 하지만 온 국민이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며 목숨을 버리는 것을 보면서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었다. 8년이 지난 지금에도 꼭 하나 알고 싶은 게 있다면, '왜? 아무런 죄도 없고 시위도 안 한 사람들까지 죽이라고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가' 하는 것이다.
1982년 이후로 민주화를 외치다 죽은 사람들이라면 모두 망월동 묘역으로 오는데, 내 생각에는 망월동은 5·18 희생자들의 묘역이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까지 묻힐 곳은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일반 시체들이 들어올 장소도 없을 뿐 아니라 5·18 묘역으로 성역화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진상규명이 우선이어야 하며, 진상규명이 이뤄진 후에 어려운 유족들의 보상문제가 따라야 할 것이다.
이번 대림산업 근로자 사건만 해도 그렇다. 어째서 그런 문제들은 척척 해결해 나가면서 그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른 광주문제는 빨리 해결을 짓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조사.정리 서삼미)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