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교회를 만나다 보면 한 가지 정리되는 생각이 교회도 결국 '가정‘이란 것이다. 구성원과 규모가 다를 뿐이지 교회가 지향해야할 모델은 하나님이 맨 처음 세우신 공동체인 '가정'에 있다. 이와 함께 가정의 건강성을 좌우하는 열쇠가 가장에게 있듯이 교회의 건강성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목회자의 목회철학, 영적 세계관이다. 실로암교회는 이런 목회자의 바른 마인드가 큰 영향을 끼쳐 구성원들이 진정한 가족같이 단단해진 곳이다. '내가 맡은 양은 끝까지 돌보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자, 성도들이 그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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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은평구에 있었던 결핵환자들을 위한 보건소 격인 구료원 모습 (실로암교회 제공) |
결핵환자촌에 십자가 세우고 시작된 역사 서울 은평구 갈현로에 위치한 실로암교회는 특별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보다 더 특별한 것은 담임 목사가 처음 설립 목적을 가슴으로 받아들여 반평생을 떠나지 않고 지켜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지역에 있는 서대문시립병원은 결핵환자 전문병원이다. 과거에는 환자들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고 병상이 비기를 기다렸기에 자연스럽게 폐결핵환자촌을 형성했다. 실로암교회는 이런 가운데 1961년 故 윤성렬 목사가 임시기도처를 마련해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시작됐다.
지금 담임인 강승진 목사는 신학대학교 4학년 때인 1973년부터 1979년까지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결핵같이 전염성이 강한 질환이 우글거리는 곳에 가려는 목회자가 많지 않아, 신학생인 그에게까지 도움의 손길이 뻗어진 것이다. 사역자 공백을 메우려는 마음으로 잠시 가 있으려했다가 몇년간 주저 앉은 것이다. 그러다가 서른 즈음 당시 300여명 규모의 영등포제일교회로 청빙되어 갔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는 빚처럼 미안한 감정이 쌓여 편치 않았다고.
강승진 목사는 "나는 나이 서른 살에 이렇게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소위 성공적인 사람이 됐는데 슬프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결핵환자촌의 가슴 아픈 자들과 함께 눈물 흘리며 '가족'같이 지내겠다고 약속 한 것이 기도할 때면 어김없이 떠올랐다. 그래서 언젠가는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다시 돌아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유학에 올랐다.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뒤셀도르프한인교회에서 목회했다. 그 후 1987년 귀국해 병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러 갔다.
당시 이미 그 교회에는 목회자가 있는 상황. 강 목사는 실로암교회를 담임하던 김의영 목사를 대현교회로, 대현교회를 담임하던 윤종만 목사를 자신이 목회했던 독일 뒤셀도르프한인교회로 부임하도록 길을 터주고 실로암교회로 끝내 돌아왔다.
이렇듯 물론 중간에 공백은 있었지만, 강승진 목사는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약 42년간 실로암교회의 과거와 오늘을 아버지처럼 지켜낸 인물이다.
반평생을 목회자로서 어려운 이웃을 교회성장보다 더 귀하게 여긴 덕에 실로암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대표적인 교회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그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명문 사학인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들어간 인물. 스승들로부터 일찍이 '예비 교수감'으로 낙점 받을 만큼 실력도 있었다. 그러나 선망의 대상인 교육 엘리트코스를 밟는 대신 그냥 목회자로 남는 길을 선택했다.
강 목사는 “목사로 반평생 산 것에 대해 후회가 없다. 너무 행복하다. 나에게 맞는 최고의 일이며, 천직”이라고 강조했다.
의학 발달로 특수 목회에서 일반목회 전환...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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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교회 강승진 목사ⓒ뉴스미션 |
의학 기술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폐질환 환자들이 감소한 가운데, 이제 실로암교회 또한 선교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하지만 거대한 청사진도, 그렇다고 드라마틱한 변화도 꿈꾸지 않기로 했다.
처음 십자가를 올리며 다졌던 목적과 부르심을 상기하며 지역사회에 심겨진 교회로서 꾸준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각오만 새로이 했다.
강 목사는 “실로암교회와 내가 환자 중심의 목회를 해왔기 때문에 성장의 한계는 분명 있다. 폐결핵 성도들 중에는 자녀가 없는 분도 계시고 있더라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이곳 결핵환자촌에 살았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한다. 때문에 부모세대를 이어 자녀세대가 교회를 이끌어주는 일반적인 교회 환경과는 다른 사회학적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지금 우리 교회는 과거 결핵환자로 복음을 받아들인 오래된 성도와 재개발로 유입돼 들어온 일반인 성도가 서로 부딪히는 지점에 있는 건 사실”이라며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왔다가 이곳이 예전에 결핵환자들을 보살폈고 또 그들이 성도로 지내고 있는 곳임을 알고는 고개를 돌리고 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개인적 어려움을 딛고 가족으로 하나가 되기로 작정하고 적응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그는 “그때는 진짜 가족이 되는 거다. 내가 할 일은 그런 선상에서 최대한 융합 되도록 삶으로 보여주고 다독여 주는 일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살아온 역사와 철학만으로도 한국교회 큰 존재성장만 강조하는 한국교회 현실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생각을 전했다. 그는 “아마 모든 교회가 성장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실로암교회도 할 수만 있다면 성장하고 싶다”면서 “하지만 우리처럼 교회와 지역의 특성상 불가능한 부분도 있기에 억지로 맞춰갈 순 없다. 문제는 성장이란 단어에 함몰돼 작지만 전심을 다해 섬기고 있는 교회들의 수고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골목길을 걷다보면 작은 교회들이 2~3개는 기본적으로 있다. 교단도 제 각각이며 성도들은 20~30명 정도 되는 교회가 즐비하다. 그런 교회가 모여 한국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거다. 한국교회가 그 목회자들을 격려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목회자들은 힘듦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부르심 받은 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강 목사는 “우리교회는 기독교 본래의 정신인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일에 최우선적 사역을 해온 전통과 노하우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자연적으로 크리스천 일꾼을 키워내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미 목회자로 성장한 이들이 꽤있고 그들이 실로암교회에서 받은 영감과 감수성으로 좋은 목회를 펼치고 있다”며 비전을 전했다.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감’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멘토 혹은 스승이 있다. 중심을 잃고 곤두박질쳐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 때 고개를 들어 보면 조용한 미소로 손을 내밀어준다. 나보다 앞서간 저분들의 삶을 따라 살다보면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든다. 실로암교회를 만나서 느낀 점이다. 54년 역사 동안 덩치 큰 교회로 성장하지 않았어도, 특별한 사역을 자랑삼아 떠들지 않았더라도 한국교회에 그 존재감이 크다는 것. 뿌리가 깊지 않은 어떤 교회가 바람에 휘청일 때 이런 교회가 조용히 십자가를 높이 들고 손내밀어주면 분명 나아갈 방향을 잡게 될 것이다. 전국 곳곳에 실로암교회와 같이 가장 낮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교회가 더 깊이 뿌리 내릴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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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교회ⓒ뉴스미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