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산다는 것'
창신유치원 전금희
‘김 예쁜’
새 담임선생님은 칠판 한 가운데에 커다랗게 이름을 적으시며, ‘이 이름은 저의 엄마 아빠가 나를 낳고 보니 아기가 너무 예뻐서 이름을 이렇게 지어주셨노라’ 하셨다. 교실 여기저기서 믿지 못하겠다는 듯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나보다.
“어? 내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보네? 있으면 손들어봐.”
슬그머니 손을 든 내 딸아이와 또 한명의 반 친구를 본 선생님은
“너희 둘은 오늘 남아서 교실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깨끗이 해놓고 집에 가라”하셨다.
그리하여 딸아이와 또 한명의 친구는 새 학기 첫날부터 담임선생님께 찍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날이 어둑해지도록 청소를 하고 왔어야만 했다.
“선생님이 이상해. 게다가 입도 툭 튀어나왔고, 이에는 교정인가 뭔가 한다고 무슨 철사 같은 걸 걸었는데 번쩍번쩍 하는 게 예쁘기는커녕 이상하기만 했다고...”
딸아이의 억울한 하소연에 나는 속이 상했지만 하늘같은 선생님을 책망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안 예쁘다고 손을 들면 어떻게 해? 사람이 눈치가 좀 있어야지.”
“엄마가 절대로 거짓말 같은 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엉엉...”
급기야 나는 아이의 속상한 감정을 끝까지 들어주지 못한 채 내 감정을 뱉어냈다가 아이를 울리고야 말았다.
이미 십여 년 전 딸아이의 얘기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른으로선 부끄러운 일이다. 아이의 담임선생님도 그리고 나도 아이들의 솔직한 표현에 오히려 너그러이 박수를 쳐 주었더라면, 두 아이들의 자존감도 높이고 나머지 아이들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더 배울 수 있었을 텐데... 새삼 부모나 교사의 역할이 중요함을 느낀다. 민주주의 교육에서는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상하 관계’나 ‘갑을 관계’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종종 이렇게 곤란한 문제를 일으킨다. ‘갑’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 권위를 행사하려 하고, ‘을’은 행여 불이익을 당할까 ‘참 자아’를 숨기고 ‘거짓 자아’를 앞세우니 말이다.
‘정직하게 살기’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선 어디서나 일어나는 현상이었던지 16C말 셰익스피어의 표현에 의하면,
‘오, 기괴한 이 세상! 조심들 하시오. 이 세상 사람들아, 조심들 할지어다. 솔직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안전한 것이 못된다.’라며 정직하게 사는 것에 대한 우려와 함께 ‘정직이 가장 부유한 유산’이라는 말로 정직하게 사는 것에 대해 갈등한 흔적이 보인다. 이는 정직하게 사는 삶이 비겁한 이득을 취할 것이냐, 양심적인 손해를 볼 것이냐를 놓고 적잖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사람들 각자의 몫이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정직하게 살기를 주저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어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고 내 삶에 가치관을 더 이상 낮추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거짓된 양심으로 잠못드는 밤을 이루며 내 행복을 갉아먹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을 보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느낀 이면의 진실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유가족들의 진실을 믿어준다는 것’이었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함께 공감할 줄 알고, 불의에 맞서 정의를 부르짖으며 변화를 모색할 줄도 안다. 실로 그들은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따라서 비록 정직하게 사는 것이 우선 당장의 나의 부나 안전과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이 내 마음을 편케 하고 사람들의 뇌리에 ‘신뢰 있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어진다면 그것도 나름 성공하는 삶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난 세상 앞에 당당하게 나서보련다.
첫댓글 글 감사합니다~ 글 보기 편하도록 아래 답글로 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