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두 에세이
천배의 바람, 노마드적 사유
임 미 리
내 안에 천배의 바람이 숨을 쉬고 있다. 그 바람이 움직이자고 하면 따라나서고 멈추자고 하면 따라 멈추고 이런 습성에 젖어 산 지 오래되었다. 바람의 끝은 어디인가 궁금하기도 하여 바람의 근원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서는 어느 골짜기에서 바람의 근원인 노마드를 만나 내 몸의 본성을 용서하기로 했다. 노마드Nomad는 유목민·유랑자를 뜻하는 라틴어 Nomas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 노마디즘은 기존 가치에서 벗어나 삶의 방식에서 구애됨이 없이 부단한 자기 부정과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류는 선천적으로 유목민의 피를 물려받고 태어났다. 오랜 기간 방랑 생활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이 힘과 자유를 얻었다. 인간은 신체적·정신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방랑으로부터 생겨났으며, 그 노마디즘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형성하였다. 사전적 의미를 정의하자면‘고정된 거주지 없이 음식, 물, 가축들이 목초 등을 찾아서 계절을 따라 장소를 옮기는 조직의 구성원’을 말한다. 유목민은 일정한 거처를 정하지 않고 물과 풀밭을 찾아 옮겨 다니면서 목축을 하는 유목생활을 한다.
내 안의 바람은 유목민의 피를 물려받아 다른 세계를 갈구하고, 다른사유를 하고,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 방황하는 것은 아닌가? 궁금해질때가 있다. 하지만 노마드를 찾아 살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한 상황에 머무를 때가 많다.
노마드의 뜻을 찾아 책장을 넘기며 새로운 것들을 만나게 되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마드의 세계를‘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철학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라니, 눈을 뜨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노마드의 세계로 진입하는 입구라는생각을 하게 된다.
군둘라 엘리슈는 노마드를 미래는 노마드처럼 움직이는 직장인으로변해 갈 것이라고 했다. 유목민은 생존하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지부나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정착할 수 없는현시대를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크 아탈리는 노마드를 특정한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삶을 탐구하고 창조해온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디지털 시대 현대인의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디지털 사회에서의 노마드의 의미는 노트북이나 전화 등 시공간을 넘나드는
21세기형 신인류를 디지털 노마드라고 한다. 우리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디지털 노마드 시대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마드의 뜻을 좇다 보니 내가 쫓기는 꿈을 꾸게 된다. 가끔은 여기가 어딘가? 내가 딛고 선 자리에 대해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조용히 아무도 몰래 뒤돌아보면 부끄러운 날들이 장미꽃처럼 붉어지고 가시처럼 나를 찌르고 있음을 느낀다. 질주의 끝은 죽음뿐이지만, 그 자리에서 멈추면 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제 속도를 유지하면서 산다는 것은 고행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찾아 나서는 곳이 조용한 절이다.
고행의 연속선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늘 의문은 꼬리를 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소한 일상을 견디는 일뿐이다. 오늘은조용한 법당을 찾아 천배를 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을 한다. 싱그러운봄날, 싱그러운 기운을 받아 용기를 낸다. 운산암 법당문의 문고리를 잡
아당기고 안으로 들어선다. 부처님 전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며 부끄러운 두 손을 모은다.
한쪽에 쌓아놓은 목련 빛 긴 방석 하나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법당에 펼치고 그 위에 목화솜처럼 하얀 방석보를 펼친다. 여느 절집에서나 볼수 있는 잿빛 방석이 아니다. 보기만 해도 향기가 날 것 같은 목련 빛을 가진 방석이다. 천배를 하기로 결심을 했지만 천배는 버거움의 숫자다. 백팔 배를 아홉 번 하고도 스물여덟 번을 더 해야 한다. 의욕만 앞선다고 될 일도 아니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백팔 배만 하자고, 아니 할 수 있을 만큼만 하자고 뒷걸음질을 친다.
법당의 부처님을 바라보며 오늘은 꼭 천배를 하리라는 바람을 다시 세운다. 길고 지루할 것을 알지만 무상무념을 꿈꾸며 절을 시작한다. 이 바람이 부질없는 욕심인 줄 알지만, 그 부질없음에 오늘을 살고 있고 또 내일을 살아가야 한다. 절을 하는 횟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몸은 고단하고 무릎은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낸다. 내 무릎은 겨울을 견뎌낸 법당 마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닮아 있다.
절을 하는 동안 무상무념은 오로지 꿈일 뿐, 온갖 망상들이 나를 지배하고, 자꾸만 흔들리는 내 몸은 천배의 바람일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강물을 이루고 이제 그만 나를 내려놓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세포들의 반기에 그만 내려놓을까? 생각했는데 마음이 약해지는 내 눈으로 들어오는 한자어. 절을 하면 할수록 커지는 방석보 위에 쓰여 있는‘誰與座’가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건넨다. 모른 척하니 글씨가 깜빡인다.
나를 재촉하는 수여좌誰與座, 누구와 함께 자리를 하느냐고 묻는다. 자리를 바꾸어보라고 채근한다. 너무 멀리 왔고 이제는 바꿀 수 없음을 알기에 다그치는 그 소리는 그냥 소리일 뿐, 무거워진 몸이 버겁다고 삐거덕거린다. 천배의 바람, 노마드에 휘청거릴 때면 모든 것을 털고 일어나라고 誰與座는 회초리를 들기도 한다. 절을 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선명해지기도 하고 흐릿해지기도 하는 한자어를 그만 놓아버리고 가벼워지려는 순간 삐거덕거리는 내 몸은 천배의 바람 앞에 숨을 죽인다. 내일이면 제자리로 돌아올 바람이지만 또한 버릴 수 없는 바람이다.
내 바람의 근원을 어느 것 하나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미묘하고복잡한 노마드였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갈망,현실세계를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마음인 그 노마드적 사유가 오늘의 나에게 글을 쓰게 하는 원천이 아닌가 싶다. 그 끝은 어디인가? 아직은 알 수 없기에 오늘도 천배의 바람, 노마드적 사유를 붙들고 새로운 가치를 찾아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