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은 고려 무신 정권에 의해 상대적으로 위축된 문신들이 현실에 대한 우의적인 풍자의 방법으로 사물(事物)의 일대기(一代記)를 허구적으로 의인화(擬人化)하되, 자신들의 지적 능력을 중국 고사들에 비유하여 읊어낸 서사 구조물이다. 가전이란 특정 인물의 행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쓴 정통적인 전(傳)이 아닌, 글자 그대로 가짜 전 또는 흉내낸 전이라는 의미이다. 정통적인 전이라 하면, 세상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어떤 위인의 행적을 찬양하고자 그의 일대기를 적은 것으로, 요즈음의 위인전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비해 가전은 전의 형식은 그대로 빌려오되, 사람 대신에 사물을 등장시켜 좀더 허구적으로 꾸미고, 찬양 대신에 풍자에 무게 중심을 둔다.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걸쳐 살았던 설총(薛總)의 <화왕계(花王戒)>, 조선시대 임제(林悌)의 <화사(花史)> 등의 작품들이 간헐적으로 지어지기는 했지만, 가전이 본격적으로 창작되고 문학사적으로도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무신란 이후인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이다. 가전은 사물에 대한 구체적이고 의식적인 관심이 가전 창작의 기본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관심은 고려 후기에 등장하여 마침내 조선왕조 창건의 주역이 되는 신흥사대부들의 의식 또는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관념적인 사고에 젖어 있던 구귀족 문인들과 여러 면에서 구별되는 신흥사대부들은 원래 지방향리 출신으로서 실무적인 역량에다 문인으로서의 소양까지 갖춘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실무적인 기능과 문학적 수련을 겸비한 신흥사대부들에게 현실의 구체적인 사물을 의인화해서 표현하는 가전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데 적합한 갈래였다.
신흥사대부들이 사물을 의인화하는 가전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사물과 사람이 별개의 존재일 수 없다고 인식한 결과였다. 사물은 그 자체로 제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요긴한 일을 하고 있으며, 사람은 사물과 관련을 맺으며 살아갈 따름이지, 마음먹은 대로 살아갈 수도 또 살아가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사고에서 가전이라는 이중의 표현양식이 개척될 수 있었다. 이중의 표현양식이라고 한 것은, 가전이 겉으로는 사물을 등장시키지만 속으로는 그것을 통해 사람의 일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특정 사물에 빗대어 어떤 의견이나 교훈을 은연중에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가전은 일종의 우의적 표현인 셈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우의적 표현양식인 가전이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는 것은, 당시 세상사의 곡절을 전통적인 문학양식만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없었거나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설총은 화왕계를 지어서 당시의 기존 정치구도를 풍자·비판하고 유학의 정치사상에 입각해 새로운 정치구도를 정립하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꽃을 의인화하여 세상사를 넌지시 빗대는 방식을 개척한 이 작품은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화왕계>에서 그 전통이 마련된 이후, 가전이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에 들어서이다. 그리고 그 선두주자는 고려 무신 집정기의 문인 임춘이었다. 임춘은 무신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구귀족 출신이었다. 무신란이 성공함으로써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그 결과 문신귀족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되기 시작하였다. 임춘은 급격한 몰락을 겪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술이나 즐기면서 풍류를 찾을 여유가 없었고, 현실을 더욱 추악하게 만드는 돈의 위력을 우습게 여기기에는 현실적으로 너무나도 가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임춘이 대응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방안은 문인으로서의 글쓰기였다. 그래서 술과 돈을 문제삼되 중국의 고사와 전거들을 늘어놓아 자신의 글솜씨와 능력을 자랑하면서 위로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세상사의 모순을 풍자하기는 해야겠는데, 그것을 직접적으로 문제삼아 드러내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으므로, 우의적인 표현방식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가전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임춘은 이렇게 가전을 창작함으로써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풍자하고자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어떠한 현실에 처해 있는지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처지나 입장을 확인하고 주장할 수 있었다.
임춘의 공방전은 돈을 의인화하여 비뚤어진 세상사를 풍자한 작품이다. 공방이란 엽전을 묘사한 말로써, 엽전의 둥근 모양에서 공을, 엽전에 뚫려 있는 구멍의 모난 모양에서 방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공방이란 인물은 글자 그대로 겉으로는 둥글지만 속이 모난 사람이다. 엽전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했으면서 또한 그런 성격을 지닌 사람을 엽전에다 비유해 비판하였던 것이다. 공방이 벼슬자리를 얻게 되자 권세를 잡아 뇌물을 거두어들였으며, 농사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장사치의 이익만 앞세워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친 것이 그의 두드러진 행적이다. 그렇게 하다가 벼슬자리에서 쫓겨났으면서도 뉘우치는 빛이라곤 없었으며, 도리어 자기가 나라의 재정을 풍족하게 한 공적을 내세우니 한심하다는 말로 그 다음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자손마저 세상에서 욕을 먹거나 죄를 짓고 처형되었다는 것이 마지막 사연이다.
임춘은 작품의 끝에서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이익을 좇는 자를 어찌 충신이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난세를 만나 참담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비판적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즉 무신란 이후 돈이 벼슬아치들에게 집중되어 자기처럼 깨끗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 세태를 한심하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무신란을 기회로 삼아 벼슬길에 올라 나라를 망치는 무리들에 대한 강한 불만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임춘은 무신란 이후 몰락을 겪고 구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자, 그 동안 구귀족 문신의 일원으로서 익숙했던 화려한 공상이나 관념적인 사고의 틀을 깨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사물들과 자신 사이의 일상적인 관계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그것에 대응해 임춘이 선택한 길은 바로 가전을 창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지위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의식마저 철저하지 못하였으므로 그의 불만과 비판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의 가전작품에서 풍자의 칼날이 날카롭지 못하고 왠지 현실의 정면을 슬쩍 비켜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문학, 특히 고려 후기에 집중적으로 산출되는 가전문학의 발전을 가능케 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구토지설(龜兎之說)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동물 우화가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하게 존재해왔다. 가전이란 양식도 사람을 직접 등장시켜 말하지 않고 세상사를 풍자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보면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런데 가전은 인간사의 곡절을 동물 대신 사물에 등장시켜 풍자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가전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주제의 풍자성, 소재의 의인화, 수사의 함축성, 표현의 해학성이다. 물론 계세징인(戒世懲人)의 목적이 뚜렷한 창작물이므로 설화의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가전은 창의(創意)가 가미된 허구적인 창조 문학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가전의 근원은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같은 전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우의적인 수단이 동원되어 완적(阮籍)의 <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이 저작되었고, 당대(唐代)에는 백거이의 <취음선생전>이 저작되어 이규보의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을 산출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본격적인 가전들이 우리 나라로 전래되기는 고려 초기를 약간 지나면서부터라고 추측된다. 기록상 완전한 가전의 효시는 고려 시대 임춘(의종∼명종대)의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이다. 이어 이규보(1168∼1241)의 <국선생전(麴先生傳)>과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석혜심(1299년경)의 <죽존자전(竹尊者傳)>과 <빙도자전(氷道子傳)>, 이곡(1298∼1351)의 <죽부인전(竹夫人傳)>, 이첨(1345∼1405)의 <저생전(楮生傳)>, 석식영암(1340년경)의 <정시자전(丁侍者傳)> 등의 가전 작품이 나왔다. 이런 작품은 선초의 식물 및 심성의 의인류, 더 나아가서는 영·정조 시대에 많이 나온 동물우화소설로 맥을 이어갔다.
가전은 당·송의 가전과 마찬가지로 구류(龜類)를 의인화한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을 제외하면 모두 무정지물(無情之物)에 성정(性情)을 가탁한 의인법을 쓰고 있음이 공통적이다. 분량도 당·송 가전과 마찬가지로 임춘의 <공방전(孔方傳)>(약 1,000자)를 제외하면 모두 700자 전후에서 900자 정도의 것으로 송대에 나온 가전과 유사하다.
이들 작품의 형식도 사전체(史傳體)를 답습했고, 작품의 구조도 당·송의 가전과 마찬가지로 도입부, 전개부, 논평부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다만 전개부를 양분하면 기, 승, 전, 결의 한시의 4단 구조와 합치된다. 도입부는 장황한 신분 가계의 기술 부분이고, 전개부는 주인공의 행적을 허구화한 것이며, 논평부는 작자의 주관이 개입되거나 공과(功過)를 논하는 총평의 부분이다. 그런데 석식영암의 <정시자전(丁侍者傳)>만은 작품 말미의 논평부가 없음이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또한 <저생전(楮生傳)>의 '태사공왈(太史公曰)'과 <죽부인전(竹夫人傳)>의 '사씨왈(史氏曰)'을 제외하면 모두 '사신왈(史臣曰)'로써 시작하여 작자의 주관을 첨부하고 있음이 공통적이다.
이처럼 가전은 객관적 사물에의 관심과 사기의 형식 및 풍부한 고사 등과 결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사물에의 관심을 통한 우의적인 날카로운 비유는 철학적으로 체계화되어 세계관적 기초를 더욱 튼튼했고, 한편으로는 당·송의 많은 가전에 힘입어 문장표현과 수사에서도 고사 원용의 허구화를 통해 높은 문학적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흔히 무신란 이후의 고려 후기를 문학사의 암흑기라고들 한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의 연관에 근거를 두고 사람의 일생을 통해 사물의 속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사물에 빗대어 사람의 운명, 사상의 정립을 문제삼기도 하는 이중의 표현을 개척한 가전양식이 있었다. 가전이야말로 잘못된 세상, 그래서 자기 표현이 제약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것을 은근하고도 날카롭게 풍자하면서, 나아가 사람이 사는 바른 길을 찾자는 생각까지 은연중에 나타낼 수 있는 적절한 방식이었다.
이들 작품은 작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실용적 목적이 아닌 창작이라는 순수한 목적으로 썼으나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의인과 고사의 장막을 헤치고 사물을 확인하여 거기에 담겨진 의미를 발견해 내야 하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가전의 장르는 설화의 발전, 소설문학을 전개시키는 과도기적 문예장르, 의인 문학, 교술문학장르 등 다양하게 언급되었다. 명칭도 '가전체', '의인체', '의인 전기체 작품' 등으로 일컬어져 온 실정이지만, 가전이 갖는 전기적(傳奇的)인 속성에 맞추어 가전기(假傳記)의 약칭인 가전이라 한다. 따라서 가전과 소설의 차이점만 크게 부각되었다. 여기서 잠깐 뒤를 돌아보면서 '아닐 수도 있는데..."라는 물음표를 던지면 가전문학과 소설의 경계가 희미해질 것이다. 모두가 작자의 창의성을 살리면서 계세징인(戒世懲人)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대부분 무정지물에 인간의 성정을 입힌 의인법을 쓰고 있어 최근에는 소설로 보자는 시각이 대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