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와해되는 군당 조직
나야, 레포 일이야 하고 쏘다니는 통에 농사일에는 별반 하는 일 없이 가을걷이는 끝났지만, 이제 막 김장 뒤끝이라 무 구덕을 파서 무를 묻어서 그 위에 겨울 빗물이 구덕에 들지 않도록 커다란 고깔처럼 구덕 위에 씌우기도 하고, 집이야 기와집이라서 초가지붕 덮을 일은 없지만 헛간이나 정침 뒤꼍과 대문에 붙어있는 정랑(변소)과 잿간은 이엉을 엮어 지붕을 씌워주어야 했다. 이런 일은 덕실 아재가 주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곁에 앉아서 거들기도 하고 짚으로 이엉 엮는 일을 배우기도 했다. 처음은 잘 되지 않아 엮은 것이 조금만 힘을 주면 풀어져서 못 쓰게 되고 만다. 하지만 ‘모든 일이 어머니 뱃속에서 배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덕실 아재의 말대로 한나절 비비적대다가 끝내 이엉을 단단하게 엮을 수 있게 되었다. 12월 중순부터는 연말까지는 낮에는 이처럼 덕실 아재 따라 주로 집안일을 하고 밤에는 초당의 내 방에서 호롱불 밑에서 책 보는 재미에 파묻힐 수 있었다. 1949년 정초에 들어서자, 지도원 동지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아지더니 어느 날 저녁에 초당의 나의 방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심각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덕출이 둥무, 조직운동에서 한번 잘못 들면 그 후과는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이번에야 뼈에 새겨지도록 보게 되었소. 작년(1948년) 「미•소공위」 협의대상문제로 회원 수에 비례해서 협의대상의 수를 정한다는 바람에 우익진영이 유령회원을 만든다고 남로당도 덩달아서 당원 수 배가, 5배가, 10배가 운동이라면서 마구 입당시킨 결과가 이제는 조직 자체를 와해시켜서 수많은 당원들이 체포되고 이탈되고 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소. 이런 현상은 당 조직 자체에서도 큰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민의 믿음 속에서 살아야할 당이 인민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오히려 원망의 대상으로까지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를 수습할 방도를 찾아내기가 좀 채로 나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민들은 그때, 이제 입당만 하면 그 숫자로써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된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이제 그것 때문에 집에도 못 있고 도망만 다녀야 한다는 원망이 하늘에까지 닿을 지경입니다. 이를 어째야 합니까.” 주승도 지도원 동지는 이런 말을 하고선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고 있었다. 주승도 동지는 계속해서, 많은 당원들이 자수를 하고 탈당성명서를 내고 해서 당이 완전히 분해될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조직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없고 다만 기다려 달라고만 하니 ...... 이제는 기다려 달라는 말도 못하고 개별당원이 하는 대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서 상부의 지도방침이 내려온 것은 1월 중순경이었다. 그 지도 방침이라는 것이 ‘당원을 정리하여 정예화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개별당원의 의식수준에 따라 조직을 정리하라는 것이다. 도대체 받아들일 때는 무의식 대중을 무슨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였으며, 이제 와서 그들을 살인적 탄압의 와중에서 무의식 대중이라 하여 정리하라니, 이는 내다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그리고 당원을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무의식대중이라고 낙인찍는단 말인가. 당에 입당한 자는, 즉 당원은 당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당의 규약에 따라 간부를 선출하기도 하고 간부로 선출되기도 하는 것인데, 누가 누구를 무의식대중이라고 낙인한단 말인가. 이러한 이의가 나오게 되자, 군당은 급히 각급 조직에 지도원을 파견하여 ‘당 조직 정예화를 위한 지도라고 하지만, 실제 지도원은 각급 핵심 중에서 지명했고, 그 내용은 적의 탄압국면을 맞이하여 당 조직을 옹호•유지하기 위한 전략이고 전술적 실천이라고 합리화 했다. 그 지도란 조직에서는 면당의 핵심조직에게만 선을 유지하고 모든 조직의 선은 별명이 있을 때까지는 단절하라는 것이다. 손발을 다 잘라버리고 몸뚱이만 남기라는 것과 같다. 손발이 없는 생명체가 어찌 그 생명을 보존한단 말인가. 지도원 동지는 일단 이 지도방침을 산하 면당 조직에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연락사업을 기획하고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9년 신년에 들자, 이 탐탁찮은 연락사업을 맡아 군당연락선을 따라 두어 번 레포 활동을 했다. 이 레포 활동으로 각 면당에서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공통으로 많은 당원들이 탈당을 하는데, 그 탈당은 당 조직에 탈당원서를 내는 것이 아니라 경찰서 또는 경찰지서에 탈당성명서를 내고 그 탈당의지를 담보하기 위하여 신문광고를 내는데, 당과는 일체 단절된 상황에서 경찰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은 더욱 확고한 담보로서 동지 밀고를 장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밀고로 많은 당원이 체포되고 이들 대부분은 또한 탈당을 선언하고 개중에는 경찰에 동지체포에 적극으로 나서는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당원을 정리하여 정예화 한다.’라는 지도방침은 동지를 적의 수중으로 그대로 밀어 넣는 꼴이 되고, 지지대중의 기반은 말라버리게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남조선로동당」의 밀양 조직은 이때에 이미 그 지지대중의 뿌리는 뽑혀버리고 만 셈이다. 그 후 밀양의 산악지대, 운문산, 가지산, 천황산, 사자평에서 신불산 일대에 빨치산 전투가 몇 번 쯤 있었고 더러 남로당의 존재도 들리기는 했지만 이는 밀양에다 대중적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 빨치산도 아니었고 그런 남로당도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레포 활동 중에 뜻밖에도 하남면당의 파서막 ‘연락트’에서 나의 삼종숙인 개음 아재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1949년 2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이른바 ‘당 조직 정예화를 위해 지도한다.’라고 하는 사업의 레포 업무로 밀양읍내 버스정류소에서 아침 8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그때는 긴늪 공굴 다리의 검문소에서 검문이 까다로워 아침 일찍이 죽남 단장천에 놓인 띠다리를 건넜다. 살내 앞 여울의 돌다리를 건너 활성리로 해서 경부선 철로 뚝 밑 굴을 지나 동문 문안으로 들어가 읍내 장터로 들었다. 바로 8시 좀 넘어 버스정류소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사고 8시 반에 출발하는 수산행 버스를 탔다. 9시 쯤에 파스막 다리에 내려 좀 걸어 정미소로 갔다. 뒤꼍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늘 보던 총각에게 동산어른을 찾았다. 동산어른은 곧 나오셨다. 동산 어른이 방에서 좌정하기를 기다렸다가 곧 절을 하고 인사를 했다. 동산 어른은, “아직 식전인가 본데.” “예, 요즘은 긴늪 다리에 검문이 심해서 선불로 해서 동문안으로 읍에 들어와 자동차를 타고 왔습니다.” “욕 봤네.” 라고 하면서 설렁줄을 당겨 아이를 불렀다. 소녀 아이가 나오자, “손님 오셨다. 아침상 가지고 오너라.” 라고 분부하셨다. 이윽고 상이 나왔고 나는 아침 식사를 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그쪽 형편을 말했다. 역시 이탈자가 많고 개중에는 변절해서 동지를 밀고하는 놈이 생겨 문제가 많다고 했다. 하나가 붙잡히면 그와 상종했던 사람은 무조건 도망친다는 것이다. “경찰과 서청 놈들은 도망간 사람의 집에 가서 형제를 데리고 가서 패고, 못 잡은 화풀이를 한다네. 좀 똑똑한 놈 치고 좌익 아닌 놈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면에 똑똑한 놈은 하나도 없다네, 이래저래 도망치고 없으니.... 도망 다니다가 못 견디어 자수하는 놈도 많고, 여간 낭패가 아닐세. 자수하는 놈은 제 아는 것은 다 불고 나오는 것 같네.” 사정을 들으니 우리가 듣고 아는 그대로다. 나는 그래서 군당의 방침이라면서 면당 조직을 정예화 하라는 방침을 이야기했더니, 동산 어른은 말씀하셨다. “그게 어디 정예화란 말인가. 안 잡히고, 당 생활을 하고 있어야 정예화고 뭐고 있지. 당 생활을 떠나서 무슨 정예화가 있단 말이고, 이 사람아!” 하시곤 나를 보고 화를 벌컥 내신다. 워낙 지당한 말씀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조직의 상부에서 틀고 앉아, 하는 소리가 겨우 그것인가. 말하자면 귀찮은 놈은 떼버리란 거 아닌가! 그딴 소린 귀에 안 들어오고..... 정말이지 이를 어쩌면 좋은가.” 하고 나에게 다그친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겨우 한 말씀했다. “조직에서 무슨 방도를 내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각자 개인적으로 역량을 발휘해서 이 난국을 이겨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소견으로 난국에 처해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별해서 많은 동무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적어도 적도록 처신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에서 선배나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게우면 게운 만큼 냄새만 더 피운다고, 그래서 또 더 많이 게운다고 하던데요. 상부 조직에서 정예화라는 따위의 추상적인 말보다 오히려 놈들과 대처할 방도를 학습하는 것이 낳겠네요. 그러면 서로 격려도 되겠고요.” 그리고 나는 정예화라는 의미도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에 당원이 정예화 된다는 데에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런데 단순히 조직을 줄이는 의미로서의 정예화란 데는 아무 의미를 느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동산 어른은 생각난 듯이 말씀을 꺼내셨다. “자네를 꼭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이 있는데, 오늘 바로 넘어 갈라고 하는가? 늦게 가도 될 것 같으면 만나고 가지.” 나는 좀 생각을 했다. 누굴까. 동산 어른은 하남면당이 관장하는 4개 면의 연락원이다. 동산어른이 그 부탁을 들어주시려고 하신다면, 바로 하남면당의 당책일 것이다. 그러면 혹 개음 아재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종남산 넘어 당동에서 헤어진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보고 싶다. “동산 어른, 짐작은 갑니다. 월선금지의 원칙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러면 지금 연락을 보내겠네. 여기서 그 사람과 셋이 저녁밥을 함께 하도록 합세.” 동산 어른은 밖으로 나가셨다. 아마 누구를 심부름으로 보낼 작정이었다. 점 있다가 들어오시는데, 요 이불과 베개까지 끼워서 젊은이에게 들려서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아침에 일찍 출발해 나섰고 저녁엔 밤길을 가야 할 테니 좀 쉬시라고 이부자리를 가지고 왔네. 몸 좀 눕혀 쉬시게나. 그 사람이 오시려면 한참이나 될 테니.” 라고 하시곤 나가셨다. 나는 이불을 펴고 누어 이일저일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 잠결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재구야, 재구야. 이 사람, 날세. 내가 왔네.” 나는 눈을 떴다. 아는 얼굴이다. 누굴까? 아이고, 개음 아재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아재요. 그 사이 안녕하신교!” “오냐, 내다. 아재다. 오랜만이구나.” 얼굴이 좀 여윈 듯 한데, 눈초리는 예리했다. 그리고 나는 일어서서, “아재, 오랜만입니다. 절 받으이소.” “오야, 앉구마. 그래 절하자.” 라고 하시며 좌정하셨다. 내가 큰 정을 올리자, 아재는 정좌하여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답례를 하셨다. “할아버지는 뵈었느냐?” 라고 아재는 물으셨다. 나는 대답했다. “못 뵌 지 오래됐습니다. 이북에서 돌아오셨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곁에서 동산 어른이 아재를 보고 마씀을 곁들였다. “우정(于正) 선생님이 이처럼 몸도 마음도 훌륭히 장성한 손자를 두셨습니다.” “우정 선생은 우리큰집 아재이고 우리집안에서도 지도자이십니다.” 개음 아재는 틈을 넣어 대답하셨다. 동산 어른과 개음 아재 그리고 나는 일대 탄압국면을 맞이한 당이 제 자리를 못 집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이에 대해 세 사람이 하나로 모인 견해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당의 방침이 조직원칙에서 벗어났다. 당원 배가•이배가•5배가•10배가운동은 조직원칙에 크게 벗어나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내도록 했다. 둘째는, 당이 하부 당원에 대한 비판은 있으나, 상부는 자기비판이 없다. 그 결과 과오는 늘 되풀이된다. 셋째는, 당의 민주집중제에서 하부는 상부에 복종한다는 있지만, 상부는 하부에 하방한다는 것이 없다. 그리고 과오는 단 한번으로 족하고, 잘하는 일은 만 번이라도 부족이다. 우리들은 이른 저녁밥을 먹고 헤어졌다. 아재는 나를 끌어안고 말씀했다. “우리는 혁명을 꼭 성취시켜, 자주•통일•민주주의의 나라를 이루어내자.” 라는 말로 맹세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우리 셋은 이 이별이 그 숫한 영별 중의 하나로 되고 말았다. 아재는 이름이 안경환(安景煥) 1916년생. 나와 헤어진 후 2주후에 1949년 2월 20일에 하남면 동산리 마을에 있는 하남면당의 아지트가 경찰과 극우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교전하면서 집 뒷담을 넘어 후퇴하던 중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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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비밀 스럽고 로매틱한 시간 같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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